(삼상1:9-11) 서원은 악하니 하지 말라.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9-11)
악한 맹세
이런저런 명목으로 오래전에 서원하며 기도했으나 결국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에게 벌을 받지 않을지 두려워하는 신자가 꽤 있습니다. 예컨대 교회의 청소년부 여름 수련회의 마지막 순서로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한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안수 기도해 주는 경우입니다. 당시로선 말씀으로 크게 은혜받았고 청년기의 열정까지 보태져서 서원했으나 사회에 나와 현실 삶에 부대끼면 아무래도 그 서원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신23:21,22) 성경은 서원을 엄격히 지키라고 명하고 있으니까 그런 염려가 들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나실 인의 서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삼손의 결말을 잘 아니까 더 두렵습니다. 삼손은 나중에 실명(失明)이 되고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도 잘려서 블레셋 족속의 잔치에서 우스갯거리 광대로 조롱당하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연회장의 모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게 해서 그가 한 서약을 지키도록 당신께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 때 행한 서원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이 현재 하는 일을 쫄딱 망하게 해서라도 선교사로 가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어떤 것을 걸고서라도 도무지 맹세하지 말고, 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마5:33-37) 주님은 서원 기도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악이 된다고까지 합니다.
주님의 일차적인 뜻은 장래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서원했어도, 자기 미래를 자기 뜻에 따라 미리 확정해 버리면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큰 잘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자가 서원했던 내용보다 훨씬 더 좋고 유익한 길로 인도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에서 열까지 그분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굳이 서원 기도를 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인도에 순응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왕에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경적으로 잘못된 서원을 하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에 빠질 계기부터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에서 서원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된 한나의 경우를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서원
많은 신자가 한나의 서원에서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백한 사항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흔히들 자기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까 하나님도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녀의 기도는 우선 그 순서가 우리의 서원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께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이미 갖고 있던 어떤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바로 그것을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치 자식이 최신형 스마트 폰을 사줄 능력이 있는지 아버지더러 지금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 후에, 아버지가 군말 않고 사주자 곧바로 반품해 버린 꼴입니다. 과연 이것을 서원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나의 경우를 객관적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하나님의 큰 능력을 시험해 보는 잘못이지 않습니까? 그녀가 하나님께 조건부로 약속했다는 차원에서만 서원 기도였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반드시 그분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차원이었습니다. 불임을 고칠 수 있는 분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삼상1:5)라고 불임의 원인부터 그분에게 돌립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 대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특별히 서원은 하나님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을 구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같으나, 신자들의 실상은 의외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컨대 제가 술 담배를 끊고 교회에 충성할 테니까 제 사업을 형통하게 해달라는 식의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은 굳이 서원할 필요 없이 스스로 결단해서 시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거기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매우 나쁜 것을 없애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연관지을 필요가 전혀 없는 신자의 개인적인 일입니다. 술 담배를 끊는 일이 아주 어렵고 장기간 노력이 소요되는 의로운 일이라는 점은 인정해 줄 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서 신자라면 평소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꿔야만 합니다.
사업도 신자가 성실, 정직, 지혜를 최대한 실현하면서 자기 책임하에 번창시켜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16:9)이시므로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라딘의 램프처럼 신자가 원하는 대로 신자의 기업에만 엄청난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습니다. 사업 실패의 원인이 대부분 본인의 잘못이므로 고치는 일도 본인이 행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의 형통이 하나님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술담배를 끊을 테니까 사업 번창하게 해달라는 것은 둘 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꿩 먹고 알 먹겠다는 심보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술 담배와 신앙과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도 없는데 한국교회가 마치 신앙의 아주 중요한 요소인 양 강조하다 보니까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진 셈입니다. 신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기 잘못을 하나님더러 대신 해결해 달라는 것은 서원은커녕 기도도 아닙니다.
요컨대 신자 자신이 현실적 차원에서 평안해질 목적으로 서원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과장된 예이긴 하지만 지금 너무 궁핍해서 돈이 많이 필요하므로 일억을 주시면 십일조를 넘어서 그 반인 오천만 원을 선교 헌금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자기 필요를 채우는 일이 먼저이고 선교는 그 목적을 이룰 구실일 뿐입니다. 비록 선교에 돈이 필요하긴 해도 절대 돈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 돈을 주시면 이 문제를 해결한 후에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하면 혹시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받자 그대로 하나님께 다시 돌려주었기에 득남(得男)하는 것 자체가 서원 기도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아이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금이야 옥이야 기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전 재산을 물려주고 어떻게든 출세 형통케 해서 안락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젖을 떼자 곧바로 평생을 성전에서 주님만 섬길 종으로 바치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한나 자신의 큰 고통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준행할 의무로서 아무리 의로운 일을 내걸어도 하나님과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상거래 식 계약은 서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좋아할 것을 바쳤다는 핑계로 자기에게 좋고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하면 그 자체로 정욕으로 잘못 구했기에 응답받지도 못합니다.(약4:3) 하나님은 신자가 굳이 서원하지 않아도 당신의 뜻에 따라서 각 신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을 당신께서 때에 맞춰서 당신의 방식대로 주십니다.
선한 뜻의 서원
물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과 열심에 따라서 개인적인 유익이 아니고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뭔가를 바치거나 행하겠다는 서원이라면 해도 됩니다. 또 그 준행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설령 완전히 달성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벌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 이치를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커서 롤스로이스 승용차와 수영장 딸린 집을 사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으나 나중에 지키지 않았다고 야단칠 부모는 없습니다. 아빠는 그런 엄청난 약속은 지킬 수 없다고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빠를 사랑하는 그 순수한 마음만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청소년 수련회 때도 미처 믿음이 영글지 않았고 당시 감정이나 분위기에 취해서 서원했을 수 있기에 나중에 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벌 주실 리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가르쳤습니다. 제단에 드릴 예물에는 당연히 서원한 예물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드리는 것보다는 형제와 화목하고 사랑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신자로서 반드시 행할 바인 이웃 사랑부터 먼저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서원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고 엄격히 명한 구약성경에도 예수님과 동일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하자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집을 짓지 않았다고 이스라엘을 야단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오히려 당신께서 너희를 위하여 집을 지으신다고 꾸짖었습니다.(삼하7;7,11) 그전에 사울 왕에게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라고 같은 맥락의 꾸중을 했습니다. 제사나 숫양의 기름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으로 서원을 이행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보다 하나님의 뜻을 삶에 실현하는 순종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간절히 하고 싶으면, 그냥 자발적으로 행하면 됩니다. 그 전에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주길 간절히 원하는 일이 있으면, 진솔하게 그대로 아뢰시면 됩니다. 신자가 행할 가장 중요한 일은 평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신자의 욕심에는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십니다.
물론 죄로 타락한 세상의 훼방과 신자 본인의 잘못으로 수시로 고난과 문제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획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환난마저도 합력해서 그 계획을 선하게 이루어나가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인식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이 자신의 열심과 믿음을 증명해 보일 테니까 어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조건부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나는 서원하지 않았다.
한나의 기도가 하나님과 자신이 각기 이행해야 할 사항을 제시했으므로 그 형식은 서원이었고 성경도 ‘서원하여 이르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내용은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털어놓은 그녀의 일방적인 호소였습니다. 그녀는 통곡하면서 가장 먼저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다른 처인 브닌냐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계속 한나를 괴롭혔으므로 통곡한 것입니다.(6절)
당시에는 자녀를 낳지 못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은 여자로 취급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태지 못하게 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5,6절) 당시 사람들이 한나는 여호와에게 복을 받지 못한 여자라고 인식했었고, 특별히 아들을 낳은 브닌냐는 그런 의미로 한나를 계속 멸시하며 조롱했었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의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브닌냐보다 갑절로 잘해 주었고(5절), 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진정으로 위로해 주었습니다.(8절) 그러나 한나로선 물질이나, 남편의 사랑만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편의 어떤 큰 사랑도 아들 하나 얻는 것보다 훨씬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네 아내들은 서로 아들 많이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로 또 다른 처들을 무시하는 근거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브닌냐에게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나를 더 사랑해 준다고 맞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브닌냐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털어놓고 대신 앙갚음해 달라는 뜻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녀보다 더 많은 아들을 낳아서 보란 듯이 자랑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아들 하나로만 족했습니다. 그녀가 기도한 내용을 (11절) 알기 쉽게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로 당신의 저주를 받은 사악한 여인입니까? 나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이를 주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나에 대한 뜻을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아들을 주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께 구원받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제가 아들을 갖지 못하는 것이 제 잘못이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죄 없고 연약한 여인을 아무 이유 없이 저주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보도록 역사해 주십시오.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아들이 되겠지만, 제가 먼저 억지로 달라고 해서 받은 아들이니까 더더욱 하나님께 곧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므로 이왕이면 그 아들을 주님의 일을 하도록 평생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태생적인 불임은 인간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으므로 사실은 한나가 사람들로부터 평생토록 비난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당시 사람들로선 만사를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또 다들 쉽게 임신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그분의 벌을 받았다고 단순하게 판단한 것입니다. 한나 본인에게도 미심쩍었던 문제인지라 확실한 정답을 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녀로선 아들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재수 없는 여인인데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은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브닌냐가 격동시킬 때마다 굳이 그 일에 격분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나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한 셈입니다. 저주받은 여인으로 하나님 사랑 밖에서 체념하고 나머지 인생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것인가 자기 전부를 걸고서 하나님과 담판한 것입니다. 아들 없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라고 하니까, 아들을 받아서 그 저주가 잘못되었다고 입증하고 싶다는 한 가지 뜻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란 듯이 아들을 잘 키워보겠다고는 전혀 계획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얻고 난 후 하나님께 올려드린 그녀의 찬양 기도를 보십시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2:1)라고 시작합니다. 끝까지(10절) 여호와로 인해 자신의 위치와 신분이 달라져 기쁘다고 그분의 은혜와 권능만 찬미했습니다.
내 입이 내 원수인 브닌냐와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 크게 열렸다고 해서 앙갚음의 말로 되갚아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을 얻음으로써 자신도 주의 구원받은 자로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브닌냐의 음해 중상이 전부 잘못된 것이었음을 하나님이 자기 입을 열 듯이 자기를 대신해서 입증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어린 사무엘을 떼어 내려면 얼마나 가슴이 쓰라리고 슬펐겠습니까? 어떻게 얻은 자식입니까? 얼마나 많은 음해와 비방과 그로 인한 상처와 슬픔을 묵묵히 견뎌 내며 얻은 자식입니까? 그럼에도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그 어린 자식을 제사장 엘리에게 기꺼이 맡겨버렸습니다(2:11) 그녀의 서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분만을 높이는 내용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조건부 서원을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정성, 치성, 열정을 알아달라고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자기 위치와 신분을 다시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억울한 희생자 사무엘
우리 중에 그녀처럼 하나님만을 높이는 서원을, 아니 우리 죄라도 씻는 서원을, 최소한 신자로 거룩하게 살아가면서 받는 세상의 핍박을 이기려고 서원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평소에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용서해 주는 기도라도 합니까?
성경 인물 중에 정말로 서원해야 할 사람이 둘 있는데 베드로와 바울이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바울은 더 나아가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앞으로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거나 신자들을 핍박하지 않고 주님의 일에만 헌신할 테니까,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이전처럼 축복해 달라고 서원 기도를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예수님이 출생 때부터 그 둘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만의 사랑으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신 후에 각자가 당신의 종으로 행할 소명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제 당신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맺어졌으니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굳이 따로 서원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베드로가 스승을 배반한 것이나 바울이 신자를 핍박한 것도 하나님이 미리 다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앞으로 맡게 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 둘에게 먼저 영적으로 철저한 절망과 죽음에 빠트린 것입니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절감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책임자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하고, 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자 율법을 대비해서 복음의 진리를 정립하도록 주님이 이끄신 것입니다.
실은 한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가 성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약 엘가냐에게 아내가 한나 혼자였다면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굳이 이런 아들을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로 하여금 브닌냐에게 계속 시달리게 해서 정말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나보다 여기게 해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하나님이 밀어 넣었습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조차 의미가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 은혜만 절실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나가 제발 나를 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달라고 자기 전부를 걸고 절규하도록 하나님이 이끈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어린 사무엘로선 가만히 앉아서 억울하게 당한 희생자인 셈입니다. 자기 의사는 전혀 묻지 않고 엄마가 자신을 걸고서 태어나기도 전에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녀가 행한 서원을 부모가 판단해서 잘못되었으면 취소할 수 있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부모가 어린 자식을 위해서 서원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임신하지 못한 삼손의 엄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잉태를 약속하며 앞으로 얻을 아들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나실인으로 세우라는 소명을 주었습니다.(삿13:2-5)
틀림없이 한나는 절기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어린 사무엘에게 여호와만 믿고 의지하라고 자신이 체험한 은혜에 근거해 가르쳤을 것입니다. 사무엘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들, 특별히 다윗 왕국을 세우게 할 최초의 선지자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비록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엄마의 서원으로 선지자가 되었으나, 삼손처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나가 서원한 것도 성령님의 간섭을 통해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진정한 서원 기도
진정한 서원 기도가 어떤 것인지 이제 확실하게 밝혀졌습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주고받는 식의 거래는 절대 아닙니다. 단순히 자기 현실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조건부로 주님의 보상을 요구해선 안 됩니다. 자기 전부를 자발적으로 내어 드리는 헌신이되, 서원하는 내용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만 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상 이전에 자기를 거룩하게 고치겠다는 서원은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또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자기 주변에 실현 확장되는 보상이라면 그 또한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세상의 출세 형통만 추구하는 불신자 남편이 아내가 교회 나가는 것마저 구박하며 핍박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아내가 절대 남편과 맞서 싸우지 않고 끝까지 묵묵히 참고서 남편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만 하겠다고 서원해 보십시오. 그리고 남편의 그 완악한 마음을 성령이 역사하여 변화시켜 주셔서 기독교에 대해 마음이 열리고 교회 출석을 허락하게 해달라고, 나아가서 사실은 가장 중요하게는 제발 저 불쌍한 남편을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기도라면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해 주지 않겠습니까? 단 응답받아야 할 시간과 방법과 내용을 신자가 미리 확정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음해와 누명을 당해도 끝까지 대응하지 않을 테니까 하나님이 진실을 밝혀 달라든가, 또는 기본적 인권과 자유는 물론 생존도 보장받지 못한 불쌍한 북한 동포가 해방되는 날까지 매일 십분 씩 기도하겠다는 그런 서원은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나처럼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정말로 도와주고 싶은 너무나 불쌍하고 완악한 이웃들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면 굳이 서원 형태를 취할 필요 없이 평소에 그냥 꾸준히 기도하면 됩니다. 간혹 현재의 문제와 고난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어리석은 내용으로 서원할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연약하고 무지하며 죄의 본성에 묶여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종교적 열정에 취해서 무리한 서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단 서원했으면 그 성취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해서 준행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는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어쩌다 서원을 하고서 최선을 다했지만 지키지 못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형벌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서원했으면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올 보상이나 형벌과 관계없이 신자 자신의 믿음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서원한 내용 중에 혹시라도 잘못된 사항이 있었다면 깨달아서 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비록 연약하고 수시로 죄에 넘어져도 우리의 전체 인생은 베드로, 바울, 한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굳이 조건부 서원할 필요는 전혀 없이 예수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행하고 있는 생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면 됩니다. 신자가 정작 싸워서 이겨야 할 과제는 자기 욕심을 완전히 죽이고 당면한 환난과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일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이 세대와 불쌍한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진정한 의미의 서원 기도도 할 수 있게 됩니다.
(7/28/20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