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6:7-10) 살피시는 하나님과 눈물 흘리는 하나님
새롭게 읽은 구약 성경 (11)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16:7-10)
사라에게 돌아가라.
아브라함은 ‘네 후손이 창대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 경수가 이미 끊긴 아내 사라 사이에선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요청대로 애굽에서 얻은 여종 하갈을 첩으로 들였는데, 임신한 하갈이 첩인 주제에 본처인 사라를 멸시했습니다.(4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고 다그쳤습니다.
자기 여종이므로 자기 좋을 대로 하라고 남편이 허락해 주자 사라는 그동안의 모욕을 되갚으려고 학대했고 하갈은 도망쳐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집에서 기르는 군사가 사백 여명이나 될 정도의 거부였기에(창14:14), 하갈이 그에게 아들을 안겨주면 팔자가 완전히 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을 뛰쳐나왔으면 사라의 학대가 조금 과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도망치는 하갈을 여호와의 천사가 샘물 곁에서 만나서 지금 잉태한 아들이 장차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므로 사라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13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중에 아들을 출산한 후에 또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죽게 될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 모자를 구해 주면서 이전의 약속을 다시 다짐해 주었습니다.(창21:14-19)
그래서 간혹 이 모자(母子)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언뜻 하나님이 두 번이나 그녀를 찾아와서 도와주었고 당신의 약속까지 주셨으니 구원받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다른 한 편, 하갈의 성품에 하자가 많았고 이스마엘도 이슬람교도인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기에 구원받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에 관한 의문은 반드시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앞뒤를 잘 살피면 그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계속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관련 성경을 앞뒤로 비교 대조해 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천사가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건넨 첫마디의 뜻이 무엇입니까? 네 사정과 심정이 어떠하든 네가 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너의 인생을 일차적으로 책임져 줄 주인은 사라인데도, 네가 먼저 아주 교만하게 굴었기에 학대받았다는 뜻입니다. 네가 지금 네 신분과 위치가 어떠한지 정확히 모른다고 꾸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돌아가서 진심으로 사라에게, 특별히 그 집안의 주인인 아브라함에게 잘못했다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사라가 너를 계속 학대하면 그것은 사라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사라의 문제는 하나님이 따로 알아서 할 것이지만, 너는 네가 반드시 해야 할 네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를 살피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분은 네가 돌아가 사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라에게로 돌아온 후로 하갈의 태도가 조금은 바뀌었을 것입니다. 남편이자 아이 아버지인 아브라함 보기에 미안해서 이전처럼 사라를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엄마를 닮아서 사라의 아들 이삭을 멸시한 것을 보면, 사실상 그녀에게 아무런 도덕적 영적 변화가 없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갈은 자신의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실존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 인정했을 뿐,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칭한 까닭도 성경이 말해주는데, 천사가 먼저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이 네 고통을 들으셨다”(11절a)는 뜻의 ‘이스마엘’로 지으라고 계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갈도 그래서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11절b)라고 신기해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네 고통을 들었다는 천사의 말을 수긍하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하갈.
하갈과 정반대되는 구약시대의 여인이 있는데 바로 룻입니다. 애굽 여인 하갈이 히브리인 아브라함의 첩이 되었듯이, 모압 여인 룻도 히브리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시아버지가 죽었고 남편도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똑같이 과부 신세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더러 고향에 남아서 재혼해 편안히 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라고 하면서 그 제의를 결연히 거절했습니다.
고대에 과부가 겪을 삶의 어려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컸습니다. 거기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생존 전망마저 불투명한데도 룻은 갈 바를 모르면서 시어미를 따라 이국땅 유대로 함께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자 그 집안의 법도와 규례는 물론 그 신앙까지 온전히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자한 성품과 경건한 삶을 보고 크게 감명받고서 자기도 시어미의 하나님인 여호와만 믿고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갈이 사라의 몸종이었을 때는 고분고분 순종했을 것입니다. 사라도 하갈의 충실한 모습을 보고서 또 여종 중에 외모나 신체 조건이 좋아서 아브라함에게 추천했을 것입니다. 사라 덕분에 자기 신분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고 앞으로 아들을 출산하면 당연히 온갖 대우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교만해져서 자기 미모나 건강을 한껏 뽐내며 사라를 멸시했기에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하갈로선 최소한 남편으로 섬겨야 할 아브라함에게 모든 면에서 맞춰주어야 하고 당연히 그 신앙도 따라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의 화려하고 풍요롭고 음란한 우상 제사와는 달리 돌로 단을 쌓고서 여호와께 겸손히 기도했으며 또 주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의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사라도 하갈이 봐왔던 애굽은 물론 주변 가나안 여인과 다르게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두 주인의 경건한 모습을 보았다면 룻처럼 개종하거나 최소한 그 신앙을 알아보려고 관심은 가졌어야 하는데도 하갈은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하갈은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는 일종의 사생아를 낳게 됩니다. 당시는 그런 자식은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고 두 모자의 살아갈 길도 막막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없는 하갈이지만, 다시 아브라함의 수하에서 대우받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일반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하갈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은 이 땅을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통치 주관하시기 위해서 모든 불신자의 인생도 굽어살피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하는 법이 없으며, 악인은 그분의 엄중함 심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
이스마엘의 구원에 관해선 하나님이 직접 밝혔습니다.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자 사라가 다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함께 쫓아내라고 재촉했습니다.(창21:9.10) 아브라함이 장남을 내쫓으려니 안타까워서 근심하자,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21:12)라고 하면서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만 ‘네 씨’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이라도 그의 아들로 부르지 않겠다고, 즉 당신의 구원 안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고 아브라함을 위로해 준 것입니다. 어린 이스마엘과 젊은 엄마를 내쫓아도 하나님이 보호해서 큰 민족이 되게 해줄 테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한 민족’을 이룬다고 했지 ‘약속의 민족’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육신적 장남에 불과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온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 모자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죽게 된 어린 이스마엘을 구원해 주었으나, 성경은 이어서 하갈이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게 해주었다고 증언합니다.(창21:21) 하갈은 두고 온 고향 땅 애굽의 풍요로웠던 도시적인 삶이 계속 그리웠고 그런 삶을 베풀어준 우상에 대한 믿음도 놓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들 이스마엘만은 애굽 여인과 결혼시켜서 애굽 사람들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목축업을 하며 떠돌이 생활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그런 의도마저 아셨기에 이스마엘이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창21:20)가 될 것이라고 계시해 주었습니다. 무기를 갖추고서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며 때로 강도질을 일삼는 난폭한 베두인 족속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도 자기 멋대로 가나안 여인 둘을 아내로 택했고 에돔 족속의 선조가 되었습니다.(창26:34,35)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버지 이삭에게 에서는 육신적 장남에 불과했고, 야곱이 하나님이 약속한 씨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에서 불러낼 때 그와 그의 후손에 대해 두 가지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것과,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손자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생겼고, 이스마엘도 아랍 족속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었습니다.(창17:20)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살려 준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창대하게 해준다는 첫째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된다는 둘째 약속은 이스마엘에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하갈부터 그 언약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첩이 되라고 권했을 때 너무 늙어서 하갈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라가 여호와와 그분께 받은 축복의 언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텐데도 하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 모자를 두 번이나 먼저 찾아와 고난에서 구해 준 까닭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서자이지만 장남과 그 아들을 낳아준 여인을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었다면, 아무리 아브라함이 거룩한 삶으로 여호와를 증명해도 다른 족속들이 오히려 그와 그가 믿는 여호와를 멸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과는 별개로 아브라함과 당신의 이름 때문에 이 모자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신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에 중도에 실패했음에도, 당연히 징벌하는 이방 신들과는 다르게,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당신께서 신실하게 지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의 구원 안에 들어온 약속의 씨로만 세상 모든 민족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방 탈출 게임
성경의 하갈과 이스마엘의 성경 기사를 다 읽고도 그들의 구원 여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신자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방 탈출 게임에서 먼저 탈출한 자는 다음에 탈출한 자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탈출한 그 한 가지 방법 말고는 그 방을 절대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안이 시대와 장소와 사람마다 절대로 다를 수 없으며 모든 세대에게 예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예수 안에서 확신하는 신자라면 하갈도 자기와 똑같은 확신을 가졌는지 따져 보면 됩니다. 반대로 그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는 하갈의 구원을 따져 볼 만한 자기만의 명확한 기준 자체가 없으니까 애매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천사가 하갈에게 던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방안이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를 든 방 탈출 게임처럼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자기 상태와 비교해서 구원받은 후의 자기 상태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하갈은 이 질문에 온전한 답변을 할 수 없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그녀에게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현실적인 의미였습니다. 천사는 그녀가 출발한 지점은 사라의 여종이었고 앞으로 가야 할 지점도 거기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평생 여종으로 머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으로 돌아가 사라와의 관계부터 의롭게 정리하라는 것이며, 그래야만 태어날 아들의 미래도 올바르게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그 질문의 더 중요한 뜻은 영적 차원인데, 하갈더러 그 집에서 자신의 영적 실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호와가 살아 있음을 알았고 그분께 두 번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감찰하는 분이라고 인식했다면 단순히 이번 사건뿐 아니라 애굽에서부터 자기를 알고 있었다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 족속 히브리인의 여종이 되어서 먼 이국땅으로 혈혈단신으로 왔으며, 예상치도 않게 그 늙은 주인 남자의 첩이 된 것도 그 하나님은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해야 했습니다. 자기 아들의 후손이 창대해진다고 확정적으로 두 번이나 예언했기에 인생사를 주관 통치하는 신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지금껏 섬겨온 애굽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이라고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절히 기도해서 물어서 그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믿는 여호와가 세상을 주관하는 참 신이라고 깨닫고 자기 전부를 완전히 의탁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갈은 히브리인의 신에게 감찰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분께 진정으로 자기와 아들의 인생을 온전히 의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여러 신 중에 유대인들의 신으로만 여겼고 자기가 주인으로 모시는 신은 여전히 애굽의 우상들이었습니다. 하갈의 인생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출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반대쪽 영역에서 정반대 방향으로만 살았습니다.
여러 종교 중의 하나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하갈 수준에 그치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여러 종교 중에서 자기가 기독교를 선택하여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목사님이 가르치는 대로 성실히 따르면서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구원받았다고 간주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 감당했기에 그분과 그 은혜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당연히 수긍하고 믿습니다.
한마디로 교회 출석하면 곧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로 해야 할 일도 열심히 기도해서 현실 삶의 고난과 문제들을 하나님께 도움받아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아 정서적 침체에 빠지면 성경을 읽으면서 진정시키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평안을 누리려 합니다. 그런 유익을 얻는 데에 혹시라도 방해되지 않게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열심히 봉사합니다. 물론 교회 생활 성실히 행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구약시대 사람에 관한 구원 여부를 자신이 믿은 방식대로 판단하려니 계속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처럼 예수를 믿을 수도 없었고 교회 생활도 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구원받았을지 모릅니다. 천사가 하갈에게 던진 그 질문이 바로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를 종교적으로만 열심히 믿었을 뿐 자기 인생을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 적이 없습니다.
천사의 이 질문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정답을 얻어야 할 인간 실존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숙제입니다. 자기 존재가 정말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출발지는 물질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에 그 구체적인 과정은 모른 채 우연히 진화된 존재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거룩한 피조물일 가능성 둘 뿐입니다. 성인이 된 인간은 반드시 이 둘 중 하나를 명확하게 한 후에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 출발이 물질이라면 인생의 의미, 가치, 목적을 따지는 것부터 불필요한 시간 낭비입니다. 단순히 사회가 규정한 법규를 어기지 않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그런 자가 도착하는 종착지는 물질이 썩어 땅에 묻혀서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죽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았던들 그 인생은 아무 가치는커녕 의미도 없습니다. 단순히 원소들이 융합되었다가 해체된 것입니다.
스스로 물질이라고 자리매김한 불신자의 삶은 그래서 평생토록 자아 충족은커녕 자아도 제대로 발견할 수 없어서 허무하고 갈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자아를 찾으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전에 물질이 자아를 온전히 찾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간혹 이 땅이 끝이 아니고 사후의 심판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출발지는 전혀 모른 채 목적지에 있을 것 같은 심판만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이 테이프를 쳐놓고 기다리는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따져봐도 자신이 아무 목적과 의미와 가치 없이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물질적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은 하나님의 고귀한 피조물이어야만 합니다. 천사가 하갈에게 명한 대로 인간의 유일하고도 진짜 주인인 그분께로 돌아가 그 수하에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선한 것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애당초 하나님과 아름답고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그분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룻처럼 기꺼이 그분을 친부모로 모시고 범사를 그분의 거룩한 인도에 맡기며 그분의 거룩한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문제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나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평소 의롭게 살아가는 자라도 동창회만 가면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출세한 친구들이 으스대는 꼴이 너무 보기 싫어서 속으로 욕하기에 바쁘다가 집에 돌아와 괜히 식구에게 화풀이합니다. 반대로 학생 때 공부 못한다고 설움 받았으나 식사 대금 통 크게 쏘는 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친구끼리 정겹게 회포를 풀려던 동창회가 마칠 때는 치사한 시기심과 사악한 교만 둘 중 하나로 끝나버려서 모두가 똑같이 씁쓸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같은 것들뿐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마15:19) 그것도 젊은이나 늙은이를 구분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그렇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도덕적 실상을 추적해 본 자라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이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는 잘 압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분의 피조물임에도 그분을 전혀 찾지 않고 거역했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자라고 철저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신자 인생의 출발지입니다. 어디서 왔느냐는 천사의 첫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죄들을 스스로 절대 씻지 못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존재 전체가 죄악의 덩어리이자 영적 시체가 되어 있기에 자기가 자기 존재를 의롭게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자에게 먼저 성령으로 간섭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썩어질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출발하면 그 도착지에 대한 해답은 이미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상태였는데도 성령 하나님이 간섭하여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조건과 상태와 의로움과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꾼 구원이라면 주님의 생명처럼 영원한 구원입니다. 만약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면 삼위 하나님이 불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천지가 개벽해도 그럴 리는 없기에 예수 믿는 신자가 도착할 곳은 그분의 영원한 구원인 천국 영생이자 부활 생명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예수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수긍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성실히 따르면 현실 고난을 없애주는 정도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두면 물질로 썩어 없어질 버러지 같은 존재였고, 평생 죄악으로 시커멓게 더럽혀진 그래서 한 번도 깨끗케 될 수 없었던 추악한 영적 시체였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소망 없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성령으로 만나주시고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신자 속에 태초부터 약속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가 가장 적합한 때와 방식으로 참 생명의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사탄의 그 사악하고 컴컴한 방에 갇혀 있었고 그 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십자가 뿐이었던 것입니다.
설레며 맞이할 미래
자기 구원의 출발이 예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자기가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교회 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참된 기쁨과 활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출발했을 때와 변함없이 불완전한 자신의 종교적 행위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나 믿음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입니다.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그 인생이 출발했다면 그 후로는 날마다 조금씩 더 진실하고 의로워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새 생명 안에서 주님과 함께 활기차게 살아가면 됩니다. 신자가 도착할 아름다운 목적지도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연약하여서 때로 죄에 넘어질 수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언제든 예수 십자가로 돌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으며 이전보다 더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때때로 겪는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실현되는 필수적인 과정임을 알기에 인내하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설명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매일 말씀과 기도로 친밀하게 일대일로 교제 동행하는 신자는 자기 인생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개될 인생도 큰 기쁨으로 설레며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갈이 깨달은 대로 하늘에서 감찰만 하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램14:17)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밤낮으로 감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눈물 흘린다고 합니다. 우상 숭배한 죄로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겠지만 당신의 언약 백성이기에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라고 선언합니다. 당신의 자녀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당신이 구원해 주신 당신의 택한 백성이라서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당신께서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늘에서 살펴보시지만 않으시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고난과 죄악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솔직히 우리 신앙을, 아니 인생을 다시 점검해 봅시다. 아브라함과 룻처럼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또 그 아는 바대로 다른 이 앞에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까? 혹시 예수 믿어서 얻는 구원이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에 대한 정답을 얻는 것인 줄도 모르지는 않겠지요?
(9/1/2024)
영화 멋진인생(1946)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