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마태복음강해 (209)



http://youtu.be/bWDIYgI2Mz4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전혀 다른 질문의 양식

사두개인들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부활이 없다고 입증하려 들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설명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34절) 그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예수님께 말의 올무를 걸려고 모의했고 한 율법사가 나서서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큰지 물었다.  

이 질문은 이전 질문들과 그 양식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둘 중 하나의 대답 밖에 할 수 없고 어느 쪽 답을 하더라도 옭아맬 구실을 예비했었다. 본문의 질문은 예수님이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을 주었다. 그렇다고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거나, 신학적 토론을 자유롭게 해보자거나, 선택이 어려우니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시험하여 묻되”(35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까닭이 선지자들의 회개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아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래서 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 엄격히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 연구하여 실천했다. 실제로 율법을 총 613개로 집계 정리하여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우선인지 따졌다.    

그러나 중요도를 따지는 것은 세부적 규정들에 해당되지 가장 큰 계명에는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쉐마”(신6:5)로 예수님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절)고 말씀하신 대로다. 이는 모든 유대인들이 최고의 계명으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문자적으로 적용 실행하고 있었다. 작은 종이에 기록하여 조금만 상자 안에 넣어서 앞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면서 무슨 일을 해도 보이게 했다. ‘벤허’ 영화에도 나오지만 대문에 문패처럼 달아놓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만지며 경외심을 표했다. 신명기 28장의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약속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고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기에 그것 외에 대답이 나올 수 없음을 바리새인들도 익히 짐작한 것이다. 정답을 말할 줄 기대했고 또 그대로 정답을 말했는데 어떻게 시험을 하겠다는 것인가?

두 가지 시험

우선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만 들었다면 당장 왜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지 따질 작정이었다. 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나 창기들은 물론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들과도 교제하는 것을 문제 삼으려 했다.

바리새인들에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물은 것이 예수님을 옭아맬 최고의 비책이었다. 유대와 로마 어느 쪽 편을 들 것이냐는 뜻이었다. 만약 유대를 편들면 로마에 고발하고, 로마를 편들면 유대교에서 파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자기들의 흉계가 탄로나 당황해서 대꾸도 못했다. 돌아가서 가만히 따져보니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을 먼저 언급했으니 가이사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둔 것이다. 최대로 양보해도 가이사와 하나님을 어쨌든 동격으로 본 셈이다. 이제 그 일까지 다시 끄집어내어 최고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에 위배된다고 따질 참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다고 하지 않고, 단지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만 대답했어도 말꼬리가 잡히긴 마찬가지였다.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이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약만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관습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먼 것이라고 야단을 쳤다.(마15:3-9) 주님은 산상수훈에서도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러 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한 후에 예물을 바치라고 가르쳤다.(마5:3,24) 즉, 하나님이 사랑이 가장 크다고 말한 예수님의 대답과 이전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반박할 작정이었다.      

예수님은 두 계명이 같다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 사랑이고 확실하게 그 순서를 구분했다. 율법사로선 도무지 하자를 걸 재간이 없었다. 같은 기사를 기록한 마가에 따르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막12:32)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율법사들의 숨은 모략을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이 준비한 올무쯤은 얼마든지 가볍게 빠져나갈 수 있다. 아니 거꾸로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여 야단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그들을 미워해서 창피를 주거나 보복하려는 의사는 없었다. 하나님 당신으로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신 것뿐이다. 지혜에서 너무나 부족하고 생각의 길이 다른 인간은, 율법에 가장 능통한 최고 지성인이라도 그 진리의 말씀 앞에 꼼짝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진의를 알았을까?

문제는 율법사가 예수님의 답변에 항복은 했지만 그 진의까지 알았을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끝까지 완악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그들에겐 사실상 예수님의 진의를 알든 모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를 잘 믿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첫째 둘째로 분명히 우선순위를 구분해놓고는 둘은 같다는 언뜻 모순적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정확한 뜻을 알고 있을까?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는 너무나 지당한 의미로 쉽게 생각하고 치우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일단의 신학자들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니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오역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태생적 본성으로써 오히려 원죄의 출발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자기 몸이 아프면 당장 병원에 가듯이 이웃이 고통을 당하면 그렇게 도우라는 뜻이다. 이웃 사랑의 방식, 태도, 열의를 설명하는 말씀이지 자기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열정, 노력, 수고, 희생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랑이 먼저라고 했으니 분명히 우선순위와 중요도에서 구분했다. 아무리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과 신자의 헌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결국은 바리새인의 입장과 같아지지 않는가라는 의아심을 지울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예컨대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과 형제와 화해하는 일이 동시에 생기면 어느 것부터 해야 할지 신자들은 혼돈스럽다. 이곳 이민 교회 목사들이 최고로 강조하는 것도 교회 중심의 삶이지 않는가? 물론 그 의도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순수한 뜻인 줄은 짐작하겠는데 실제로는 주중에도 교회행사에 거의 매일 묶으려 들고 있지 않는가?

누가복음에 따르면 동일한 문답이 있고 난 다음에 주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길에서 강도 만난 동족의 곤경을 외면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인들로 삶에서 산제사를 드리게끔 즉,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게끔 가르치는 곳이다. 교회에 모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실천하게끔 반드시 흩어지게 해야 한다.  

정말로 둘은 똑같은 계명이다.

예수님의 뜻은 정말 문자 그대로 두 계명은 우선순위나 중요도에서 똑같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나 손바닥과 손등을 구분해서 말하는 차원과도 다르다. 완전히 100% 일치하는 것이다. 단지 동시에 둘을 함께 말할 수 없기에 첫째 둘째 순서를 붙였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한 치의 가감 없이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고 그 반대로 이웃 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사랑하지 않으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요일4:20)라는 말씀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 차원으로 격하시키거나, 인간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차원으로 격상 시키려는 뜻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심이 없이는 이웃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장 저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것은 신자 안에 죄의 본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불신자 가운데 신자보다 이웃 사랑을 훨씬 더 잘 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두 사랑이 같다는 말씀은 이런 신학적 변증마저 뛰어 넘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불신자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사랑과 결코 같을 수 없으며 그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제대로 아는 자만이 이웃에 대한 참 사랑도 가능하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자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오해는 말아야 한다. 불신자의 사랑에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이타적 동기의 사랑도 있다. 그 열성과 희생의 정도가 아주 의롭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런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들의 너무나 큰 불행이라는 것이다.

불신자의 사랑 - 동정(同情)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 단어로 구분해서 설명해보겠다. 불신자는 'Sympathy'의 사랑을 한다. 헬라어에서 온 단어로 접두어 sym은 같다(same)는 뜻이며 감정(feeling)을 뜻하는 pathos와 합성어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동정(同情)이다.

불신자도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보면 불쌍하고 안타깝고 가련해서 도와준다. 그런데 불쌍한 존재는 상대일 뿐이지 자기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자기는 어떤 면에서든 상대보다 우월하게 된다. 상대가 못 갖고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들로, 예컨대 재물과 지성과 권력 등을 나눠주며 돕게 된다.

선행한 후에도 상대만 불쌍하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자연히 성취감과 우월감이 생긴다. 상대는 “쯧쯧”이고 나는 “뿌듯” 내지 “떳떳”이 된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히 자기 자랑이 그 안에 내포된다. 결국 불신자들의 사랑은 상대가 고통 받고 있는 일만 해결해주는 것으로 그친다. 구원관도 행위구원으로 결말지어질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들도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할 때에 분명히 불쌍하게 여기고 예배드리러 올라가면서 구제했다. 오죽하면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마저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었다고 떳떳하게 자랑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그 거지를 도와주었어도 그에 비교해 자신들의 우월한 위치와 신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신자의 사랑 - 공감(共感)

신자는 ‘Empathy'의 사랑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접두어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가진 'Em'(영어로 in)에 앞에서 설명한 pathos의 합성어다. 우리말로는 공감(共感)이다. 상대가 불쌍하고 안타깝고 가련하긴 마찬가지다. 무엇이 다른가? 불쌍한 상대의 마음속에 신자가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히 그 감정에 동화되어 감정이입 상태가 된다. 그래서 상대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함께 불쌍해진다. 나아가 자기가 더 불쌍해지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겠는가? 또 그래서 무엇으로 상대를 돕는가? 내게 여유 있는 시간, 재물, 지혜 등으로는 당연히 섬겨야 한다. 그러나 자기 것만으로 돕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그 사람의 위치에 같게 하거나 더 낮추는 인간적 불쌍함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서야 한다. 그래서 정작 도와주는 자는 신자라는 인간이 아니다. 하늘의 것인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현실적인 도움의 수단들은 그 사람의 감사가 도와준 신자가 아닌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마음 문을 여는 통로가 될 뿐이다. 상대 스스로 자기 존재의 연약함, 가난함, 불쌍함을 절감케 해서 그 심령이 애통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돈만 보태어주는 사랑이 아니다. 도와주는 사람이나 도움 받는 사람 사이에 우월감이나 자랑 하나 없다.

세상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없이는 한 시도 온전한 상태가 되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웃을 섬기는 목적이요 열매가 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성숙하게끔 하는 사랑이다. 또 그래서 한 영혼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만드는 십자가 복음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된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다.  세상의 것, 자기 소유한 것으로 상대를 도울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내게 있는 것, 그러나 이 땅에 속한 자기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으로 도와준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만약 그 때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그도 동전 한두 푼 적선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정의 사랑만 베풀고 성전 예배에 참석하기 바빴을 것이기에 그런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너무나 타당한 것 같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에게 나눠주고 싶었던 것, 나누지 않고선 스스로 못 견딜 만큼 반드시 나눠야 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과 권능이었다. 왜냐 하면 그 자신이 예수님을 몰라 그분과 함께 하지 않았던 시절의 자기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했는지 철두철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도움에는 베드로라는 인간의 자랑과 우월감이라고는 전무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때까지는 이 땅에 동정(Sympathy)의 사랑만 있었고 공감(Empathy)의 사랑은 없거나 몰랐기에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고 실천하려고 온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4:15a) 주님은 연약하고 가난하며 죄에 찌든 우리 속으로 완전히 들어오셨다.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b)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실제로 체험하셨고, 그래서 우리의 죄과는 물론 수치와 고난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한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것도 인간들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죄 중에 완전히 빠져 있을 때에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울 때에 함께 우셨다. 아니 그들보다 더 통분히 여기며 우셨다. 인간이 타락하고 고통 중에 있는 것이 단순히 불쌍하고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그러면 질병과 재앙을 한 순간에 없애버리고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주면 된다.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이 하늘에서 그렇게 조치하면 그만이다.

그분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러, 공감의 사랑을 실천하러 오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가난한지도 모르고 인간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이 땅의 것을 많이 채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강과 만족을 얻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을 더 불쌍하게 여기셨다. 거기다 이웃 사랑을, 그것도 동정적 사랑을 많이 하면 천국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현재 실상

현재의 한국은 물질적으로는 역사상 최고로 풍족해졌다. 이제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분배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정권을 잡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정도다. 그런데 오히려 도덕적으로는 가장 타락해졌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가 이만큼 메말라진 적이 업다. 지역은 물론 계층과 세대 간의 갈등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갈가리 찢겨졌다. 예컨대 부부 간의 이혼율이 미국만큼 높아졌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참 사랑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랑인 동정은 역사상 최고가 되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감적 사랑은 자꾸 퇴색되어 간다.  

바꿔 말해 국민의 약 20%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배경도 솔직히 목사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하나님 중심, 예수 십자가 중심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고 교회 중심으로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종교에 바치는 열성과 시간에 비례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신자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에 없는 예수님 사랑을 이웃에 베풀어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막상 교인과 교회는 작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교회 안에 모여 교회 공동체라도 온전한 사랑으로 섬긴다면 국민의 20%는 행복해질 텐데 그마저 못하고 있다. 아니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했다고 떳떳이 자랑할 수준조차 전혀 안 된다. 대신에 오직 자기만 사랑하기 바쁘다. 자기를 형통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천일 제단만 쌓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이 첫째라고 말했다고 해서 종교적 의무를 강조한 것이 결코 아니다. 또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같다고 해서 세속적 휴머니즘(Humanism, 人間愛)에 힘을 보태거나, 사회구원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의견을 옹호해준 것도 절대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다.  

신자는 바로 그 진리 안에 불림 받아 나온 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매일 받아 누리며 사는 자다. 십자가 진리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 속에 죄의 본성이 아직 남아 있어 게으를 수는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 베드로처럼 은과 금이 없어도 이웃에게 얼마든지 공감적 사랑을 베풀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우리 자신부터 점검해 보아야 할 사항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십자가 권능과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래서 내 자신부터 십자가 안에서 볼 때에 가장 불쌍한 존재라고 절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나아가 주위 모든 사람이 너무나 불쌍하고 나는 그들보다 더 불쌍하다고 온전히 느껴야 한다.

신자는 예수님처럼 불쌍한 이웃 속에 완전히 들어가 함께 공감하며 십자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더 충만히 채워주신다. 우리더러 평안하고 형통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더 나눠주라고 말이다. 또 그러면 주님은 틀림없이 나눠주기에 부족함 없이, 아니 나눠주고 또 나눠줘도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로 부름 받은 소명이자 지금 당장 행해야 할 일이다.  

3/2/2014  


사라의 웃음

2014.03.02 23:04:12
*.109.85.156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뒤뚱일 때가 참 많습니다. 정말 내 가진 것으로 도웁고 싶은 것, 가여우니 함께 아파해주고 슬퍼해주는 것, 또 감정적으로 친근하기에 사랑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행동하며 말하고 있으며 이웃에게도 그렇게 저를 사랑해 주길 원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정말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처절한 모습, 이웃사랑이라는 명목아래에서 자신의 가치를 챙기고 싶어하며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음에 뿌듯한 맘이 되어지고 그것을 또 자랑코자 아니면 스스로 만족코자 애쓰는 너무도 치사한 저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귀한 말씀으로 참 사랑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십자가 사랑 아니면 잠시도 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속에서 올라오는 이 죄성, 너무도 오묘한 죄의 모습들을 우리 주님께 토설하며 대신 감당하신 수치와 부끄러움들을 이 아침에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언제나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넉넉하신 품에 안겨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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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처럼 예수 믿는 신자들 마태복음강해 (211) http://youtu.be/4wLv1_udDO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

힘든 자를 돕지 않으면 벌을 주는 미국 (마태복음강해 #210 - 눅10:25-37) [1]

힘든 자를 돕지 않으면 벌을 주는 미국 마태복음강해 (210) http://youtu.be/W0YWCXFbxg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마태복음강해 #209 - 마22:34-40) [1]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마태복음강해 (209) http://youtu.be/bWDIYgI2Mz4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

신자는 화장(火葬)을 하면 안 되는가? (마태복음강해 #208 - 마22:23-33)

신자는 화장(火葬)을 하면 안 되는가? 마태복음강해 (208) http://youtu.be/rHk38vp_SZQ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 마22:15-22) [1]

예수님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은 이유 마태복음강해 (207) http://youtu.be/G6UHJnNk0y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

네 나이가 몇 살이야? (마태복음강해 #206 - 마22:15-22) [1]

네 나이가 몇 살이야? 마태복음강해 (206)                      http://youtu.be/5N6l91G_P3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 마22:15-22) [1]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http://youtu.be/mLEnl_Tjke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

청함에 응했는가? 택함을 입었는가? (마태복음강해 #204 - 마22:1-14)

청함에 응했는가? 택함을 입었는가? 마태복음 강해(204) http://youtu.be/1rrTPesSP7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참으로 두려운 기준 (마태복음강해 #203 - 마21:42-46) [1]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참으로 두려운 기준 마태복음 강해(203) http://youtu.be/G1P1eOMKDS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마태복음강해 #202 - 마21:33-41) [1]

이단에서 교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비결 마태복음강해 (202) http://youtu.be/ialeYLn6HV4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

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201 - 마21:28-32) [1]

올해는 창기와 세리처럼 살아라. 마태복음강해 (201) http://youtu.be/SZQPKr9_-k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강해 #200 - 마21:23-27) [1]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 강해 (200) http://youtu.be/5lkkuMPM9QU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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