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3-7) 고난이 없으면 신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2)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3-7)

 

의인의 억울한 고난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이 쳐들어와 유다를 멸망시키고 많은 백성을 죽이고 재산을 몽땅 약탈해 갈 것을 알고도 여호와를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유다의 권력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공의를 굽게 만들어서 의인을 괴롭히는 죄악을 심판하려고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일으킬 것이지만, 그들도 당신의 때에 속히 심판하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의인은 동족 악인에게 줄곧 괴롭힘을 당한 위에, 이방 족속에 의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환난을 이중으로 겪을 판입니다. 이스라엘의 의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긴 마찬가지지만, 인간 사회 전체를 뒤흔들 만큼 아주 흉악한 악인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죄의 종류나 질과 양에서 최악인 자들이 그에 마땅한 형벌을 받지 않기에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뭔가 형평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신자는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바벨론 같이 최고 흉포한 악당들을 하나님이 언젠가는 당신의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진리를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자꾸 미뤄짐으로써 그들의 형통은 더 늘어나니까 의인들의 억울한 고난도 계속 늘어납니다. 하박국이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스라엘의 회복은 70년 뒤에야 이뤄져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고 그 후로도 바벨론의 영화는 오래 지속되었듯이 말입니다. 

 

지금도 북한의 김씨 세습 왕조가 속히 무너지게 해달라고 남한의 신자는 물론 북한 주민들도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너무나 잔인한 인권 탄압이 더 많이 자행됩니다. 정말로 더 분통이 터지는 일은 그런 사악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풍요만 더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마치 말로만 격려하고 치우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의인이 실제로 더 심한 고난을 먼저 더 오래 겪게 되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형평성이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곤혹스러운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제외하면 믿음이 좋은 데도 최고로 억울한 고난을 겪은 자는 구약에선 욥을, 신약에선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회심한 후로 지중해 세계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오직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고 각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만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극심한 고난뿐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3-27) 

 

한 번만 맞아도 자칫 죽을 수 있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그 외의 경우까지 합치면 거의 열 번도 넘게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른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시민인데도 미치광이나 다름없었던 네로 황제의 정치적 모략에 희생되어 십자가 처형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한 번만 맞아도 선교 사역을 중단할 것입니다. 

 

풍요에 너무 익숙해진 현세대는 SNS에 악플만 달려도 당장 손절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동족들의 모함만 받아도 아무리 하나님이 시킨 일이라도 죄송하지만 더러워서 계속 못 하겠다고 하면서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낼 것입니다. 신자라면 다들 느끼다시피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가 가장 크고 아픈데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의 거짓 선생들로부터 온갖 모함과 핍박에 시달렸어도 눈도 꿈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과 우리의 차이

 

그러면 그가 우리와 어떤 점에서 다르기에 하나님을 전혀 의심 원망하지 않고 온갖 고난이 이어지는데도 순교까지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신자가 그의 믿음이 우리보다 월등했다거나 하나님이 그에게 견딜 힘을 주었다고 단순히 이해하고 치웁니다. 

 

성경을 읽을 때 신자들이 예사로 범하는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인간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영적 위인이라서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 수많은 고난을 당당하게 이겨냈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라고 사도답지 않은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좋아하거나 뭔가 보상이 따르는 일에 열심을 내기 마련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일을 했고 고난은 그에 부차적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입니다. 그로선 그 일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 환난으로 겪는 고통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언뜻 공의가 굽어 보이는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과 원망이 생기지 않으려면, 바울처럼 가장 먼저 자신이 받는 고난부터 전혀 억울하게 여겨지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특별히 고난을 어떤 의미로 주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3절)이라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서, 특별히 당신의 극렬한 원수였던 자기를 위해서도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아낌없이 내주실 만큼 자비로운 아버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4절)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식을 훈련할 목적이 아닌 이상 외면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환난과 위로 둘 다에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어떤 환난에도, 예컨대 죽음의 문턱까지 가도 그분의 위로를 받지 못했던 적은 바울에겐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마음은 오직 자비이고 베푸시는 것은 위로뿐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처럼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연약 무지한 인간이라 수시로 넘어지고 죄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격려의 말씀도 단순히 당신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버텨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고난 중에 기도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담력, 의지, 끈기, 용기 등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싸움이 자칫 의지력이 강한지 약한지에 따라 달라지고, 천성적으로 잘 참는 자는 믿음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소유로는 도무지 인생살이의 거친 파도를 해쳐나갈 수 없이 가난하고 연약해서, 심지어 동족들로부터도 천대받아 그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자들에게부터 당신의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현실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심지어 기도할 힘도 나지 않는 환난이 종종 있습니다. 하박국 당시에 유다가 바벨론에 망해서 왕이 두 눈이 뽑히고 포로로 잡혀가는 판국에 담대한 인내력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모든 환난 중에 위로하는 하나님이시므로 신자를 향한 당신의 뜻과 계획은 환난이 아니라 위로입니다. 그렇다고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병은 악인들이 주었고 하나님은 그중에 의인에게 약을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바는 이미 겪고 있는 고달프고 억울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위로를 주시고 그것이 오히려 참된 위로였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정서적으로 조금 안정됩니다. 또 위로와 힘을 주는 성경 구절을 골라서 읽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고난을 반드시 끝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이 끝나면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고난에서 구해주었다고 감사합니다. 문제는 고난 중에 하박국처럼 고통에 떨면서도 그분을 기뻐하며 찬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사실상 자기 의지와 끈기의 싸움을 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고난이 또 닥치면 금방 하나님을 의심 원망하며 자기 의지와 끈기로 견뎌내는 씨름을 되풀이합니다. 계속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았으니까 자기 믿음에 뭔가 하자가 있다는 의심은 전혀 하지 못합니다. 하박국이나 바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신앙이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닐 수 있는데, 본인은 그 사실을 평생 모르고 지나칩니다. 

 

모든 의심과 원망은 상대를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고 더 나아가 유다를 회복시키려는 그분만의 궁극적인 방안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을 완전히 해소했기에 고난 중에도 그분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억울한 고난의 은혜. 

 

아담이 타락한 후로 모든 인간은 자기만 높이려는 탐욕과 교만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니까 분쟁과 죄악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현실의 물질계 차원 안에서 죄인끼리 부대끼며 살다 보니까 누구나 재물과 권력이 고난을 극복하는 최고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느낍니다. 결국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최고 많이 차지하려는 더 심한 악인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실존하는 한 세상에서 굽어진 공의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현세대에서 더 절감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눈앞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인생의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작금 많은 신자도 반복되는 고난을 간절히 기도해서 이겨내기만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방식의 신앙생활을 평생토록 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모습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바울도 하박국처럼 환난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께 받은 확실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들어온 신자에겐 성령이 평생을 내주하여 보호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주님이 속히 다시 오셔서 세상의 공의를 완전하게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하박국처럼 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어도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 자신만의 그런 깨우침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약속을 받지 못하고 고난만 받는 불신자들이 너무 불쌍해졌습니다. 나아가 그런 약속은 받았으나 온전한 체험적인 확신이 없는 성도들도 염려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한 이유가 같은 고난을 받아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자를 위로하라는 뜻이라는 확신도 얻게 된 것입니다.(6절) 

 

바울이 말하는 위로는 고난을 끝까지 견디는 비결을 가르쳐주거나 따뜻하게 격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믿음과 무관하게 의롭고 현명한 불신자도 행할 수 있기에 굳이 성경이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받은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겪은 것들입니다. 그러면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겪는 자와 먼저 나누어야 할 위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절)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에게 보장된 영생의 영광을 확실하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7절)는 마지막 말씀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현재 우리와 같은 고난을 받고 있어서 아주 괴롭겠지만 우리와 같은 위로도 받으리라 확신하므로 너희를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너희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도들과 교인들이 같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받는 고난의 종류와 세기도 같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고난 중에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위로와 소망을 공유하고 또 그 참된 위로가 신자 공동체를 넘어서 주변에까지 번져 나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환난에 위로가 넘치면 역설적으로 말해 고난이 지속되면 하나님의 위로도 더 많이 지속적으로 베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피학대성 환자처럼 일부러 고난을 찾아 나선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고난은 사도, 아니 예수님에게도 분명 힘들고 고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다 보니까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난인지라 기쁘게 견디어 냈고, 또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에 감사하게 누리고 그런 위로로 다른 이도 위로한 것입니다. 

 

참 위로는 십자가뿐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로 헌신한 한 미국 신학생이 사랑하는 약혼녀가 아무 원인도 모르는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손도 못 쓰고 며칠 만에 요절했습니다. 그로선 곧 결혼하여 은혜롭게 목회를 함께 열심히 하겠다고 헌신했는데 갑자기 약혼녀의 생명을 앗아간, 아니면 그렇게 허락한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당신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래도 주님만 의지하고 다시 힘을 내세요”라는 위로는 오히려 분노만 치솟게 했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내가 겪는 이 창자가 끊기는 것 같은 애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반감과 분노만 생겼습니다. 다니던 신학교를 중퇴하고 술로 지새다가 결국 마약에도 손을 대는 바람에 법의 심판을 받아 감옥에서 아무 소망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감옥에서 신학생은 아니나 약혼녀가 이름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은 같은 처지의 청년을 만났습니다.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절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참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선 둘 다 고통 중에 있어서 남을 위로해 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똑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자기 사정을 정확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각자에게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같은 처지의 청년을 만남으로써 그 신학생은 자기만 그런 이유 없는 큰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고통이 더 복잡하고 컸다는 점을 확인하고 자신의 억울함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얻는 위로는 선입견과 편견이 포함된 도덕적 종교적 기준에 바탕을 두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이해타산과 감정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참 위로였을 뿐입니다. 

 

불현듯 그 신학생은 예수님이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십자가 처형을 계획하여 기꺼이 감당하신 이유가 바로 이처럼 억울한 고난 중에 있는 인간들에게 참된 위로를 주려는 뜻이었다는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그런 고통을 허락한 목적도 자기를 주님처럼 십자가 사형수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춰서 온전한 그리스도 복음의 사역자로 세우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아무 의미 없이 너무나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긴 약혼녀도 이 땅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천국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아가 그녀가 주님 보좌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신을 위해서 계속 기도했기에 이런 극적 만남이 일어났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애굽 왕자 신분으로 동족끼리 싸움을 중재하려 했으나 살인자 주제에 우리를 재판하려느냐고 단번에 배척당했습니다. 애굽 관원의 학대에서 동족을 구해주려다가 그 관원을 몰래 죽이기까지 한 자신의 동족을 향한 열정과 사랑에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자기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호사스럽게만 살았기에 자기들 어려운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바로의 왕자라는 그 잘난 사회적 도덕적 기준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모세가 사십 년간 비천한 목동으로 일반 서민의 삶을 살고서 80세에 다시 동족 앞에 나서자 비로소 그들이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신학생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정확히 깨달아야만 자기가 사역할 양 떼에게 참 위로를 줄 수 있기에 그런 억울한 일을 하나님이 겪게 했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 체험과 지혜를 비롯해 도덕적 기준과 신학적 지식으로는, 자기가 이전에 주변 사람들의 입에 발린 위로에 크게 반발했듯이 성도들에게 절대로 참 위로가 되지 못한다고 생생한 체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세월을 허비했던 방황과 사방이 꽉 막힌 절망 위로 하늘에서 참 빛이 비취는 위로를 받아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이 걸어가신 사역자의 길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대한 의심과 원망도 완전히 해소된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이유 

 

이제 악인이 더 오래 더 크게 형통하며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고 평안하게 죽도록 하나님이 허락하는 이유도 밝혀졌습니다. 그런 자들도 어차피 인생살이의 이런저런 고난을 겪을 것이나, 고난 중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참 위로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참 위로가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다가 죽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최고로 불행한 삶을 산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며 설치는 것은, 그것이 약자를 착취 핍박해서 그런 형통을 이뤘어도, 그들로 끝까지 그 추악한 죄악 가운데 평생을 마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세우는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롬1:28) 하신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만 신자가 먼저 형벌을 받고 또 더 크게 받는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악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부럽다고 여겨지면 자연히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방관하는 것 같아서 원망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으며 그리스도가 주는 위로를 받는 신자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려 나왔는데도 계속해서 그 일에 게으르거나 세상을 즐기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고난의 이유를 깨달아서 회개케 하고 다시 헌신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둘째는 바울처럼 그분의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세상의 핍박입니다. 신자라면 두 번째 고난이 많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된 위로도 더 풍성해집니다. 혹시라도 의심이 나면 한 번 바울처럼 헌신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의 세상 사람에게 나쁜 일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고 거꾸로 하늘의 은혜가 넘치는 너무나 좋은 일들만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 탐욕과 교만을 더 많이 채워주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것도 열렬히 추종하던 동족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주님께 등을 돌린 유대인들이 겉으로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의로운 명분을 내걸었으나 정확히 따져보면 자기들 현실 삶의 풍요만 추구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에 대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설명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애통, 고통, 수치, 멸시, 핍박을 최고로 억울하게 겪었기에, 오늘날 모든 의인의 억울한 고통에 그분만의 참 위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을 지으셨기에 인간이 겪는 문제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죄인을 위해서 내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외면한 채 인간적인 도덕 종교로는 절대로 인생에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도덕과 종교만 의지하던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 부인한 후에 다 큰 어른이 목 놓아 통곡할 정도로 무참하게 자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자랑하던 사회적 위치와 특별히 율법의 의가 배설물에 불과했다고 철저히 깨닫고선, 그렇게 엄청난 억울한 고난을 겪고도 오히려  연약한 교회와 성도가 불쌍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바울도 그래서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고 다른 이를 대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빌2:5-11) 단순히 사회적으로 비슷한 처지와 신분으로 낮아지는 외적 겸손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이를 나보다 우월하게 대우해 주거나 최소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 주는 내적인 도덕적 겸손도 아닙니다. 그런 식의 겸손은 일반인도 다 잘 행합니다. 주님은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당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 주고 싶다는 그런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으로만 이 땅의 사역을 수행하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신자도 그런 마음으로 다른 모든 이를, 특별히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특별히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과 무엇보다 은혜로운 십자가 사역을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받은 고난인지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위로를 넘치도록 받습니다. 평생을 해 아래에서 현실 형통만 추구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됨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들로선 고난을 없애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에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이 인생에서 최고의 위로라는 진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탄에 미혹된 그런 영적 무지함을 신자더러 깨트리라고 신자를 불러내었고 그래서 인간으로 인해 받는 고난 중에 주님은 당신의 참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었어도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수많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위로는 모르고 고난을 견뎌내는 신앙생활만 하고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님이 크신 사랑으로 항상 함께하심부터 온전히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만 해주어도 병이 낫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습니다. 세상 최고로 기쁜 일은 그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로 세상 최고의 돈과 권력으로 떵떵거리던 로마 군병, 귀족, 왕족들마저 주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 위로가 전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아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허망하고 갈급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예수로 인해서 생전 처음으로 절감한 것입니다. 그 후로 예수 십자가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하늘에서 주는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억울해 보이는 고난과 죽음은 마지막 때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으며 더 많아질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먼저 하늘의 위로를 받지 않으면, 또 그래서 그들에게 참 위로를 전해줄 수 없다면 모든 이의 인생은 처참한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없기에 예수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와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해 내게 하는 것이 그분이 세우는 공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 더 전해지는 방향으로만 세상과 역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세상 죄악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니 자신부터 억울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의심되고 원망스럽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을 주위에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전해 보십시오.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핍박이 따를 것이며 또 그런 고난 중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위로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들의 영혼이 너무 안타까워서 자기가 받는 고난은 오히려 감사할 것이며, 최소한 전혀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2/18/2024)


모루두개

2024.02.18 21:21:46
*.230.44.2

일체의 비결의 배운 바울, 기도의 시작은 주기도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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