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8)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조회 수 47 추천 수 0 2020.10.28 08:42:12

(행1:8)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교회의 참 모습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제자훈련을 마친 제자들이 본문의 명령대로 땅끝까지 흩어져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순식간에 전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초대교회 교인들이 능력 있고 전도폭발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전문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 반대로 그들은 무명의 무식하고 비천한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성령의 권능이 그들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열매를 맺은 배경에는 하나님의 보이지않는 섭리와 간섭이 작용했었다. 하나님께서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로 있는 것들을 폐하시면서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초대교회를 창립하셨다.

 

그렇게 태동된 초대 교회들은 모이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서로 통용하며 구제했고 또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파가 형성되기 전이었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선포하는 것만이 저들의 지상 과제였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잔을 나누면서 예수님 이야기만을 회상했던 예수복음 제일주의였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끌어 가야 하며 또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권능 있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역이 인간의 미련한 생각과 짧은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는 성령의 지혜가 사역자와 교인들을 인도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영적부흥은 현대에 유행하는 여러 사상과 조류에 영합 하여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얘기들로 사람 숫자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만 이뤄진다. 요즘 사람들이 극도로 개인적이며 영악해져 있어서 전도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시류에 영합하여 사람들이 요구하는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서는 비록 교인 숫자는 늘지 몰라도 내용은 공허한 교회로 변모되고 만다. 교인 숫자만 많고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풍성하시고도 따뜻한 참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프로그램이 다양하더라도 오히려 그 지체들로 군중 속의 고독만 느끼게 만들며 교회자체의 존립의미마저 없어져 버린다. 물론 현대인들의 기호와 정서에 맞는 형식을 갖출 수는 있지만 모든 사역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만큼은 오직 예수, 예수, 예수이어야 한다.

 

땅끝에 관한 추측들

 

본문 말씀은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구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 하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 불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는 말씀과 짝을 이루는 구절이다.

 

이 두 구절이 신자들의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말씀 중에 종말이나 재림의 시기에 대한 힌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지상명령에선 “세상 끝날”을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때와 대비시켰고, 본문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때와 일치한다고 말씀하셨다. 두 구절을 합해서 해석하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세상 끝날이 되고 주님이 재림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주님 재림의 시기를 추측하기 위해 역으로 땅끝이 어디인지 유추해보려는 시도가 자주 있다. 그럼 과연 땅 끝은 어디인가?

 

흔히 행1:8의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우선 땅끝이 말 그대로 아마존, 아프리카의 밀림, 히말라야 같은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오지(奧地)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그런 곳으로 가서 전도하겠는가? 전문 선교사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지레 단정 지어버린다.

 

또 다른 반응은 재림내지 종말과 관련하여 과연 땅끝이 장소적으로 어디인지에만 호기심 위주로 추측하려 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몇 안 되는 제자들만 이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지금도 전문 선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모든 신자는 단 한명의 예외 없이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들고 이 지구상의 땅끝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지상명령이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줄 알고 또 그렇게 순종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신자들조차 사실은 땅끝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때는 땅끝이 북한, 소련, 중공 등 기독교가 불법화되어 있는 공산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적인 냉전종식으로 공산권이 와해되었고 또 아직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도 지하로 복음이 어떤 형태로든 많이 전파되고 있다. 만약 공산권이 땅끝이라면 복음이 상당 부분 들어갔기에 벌써 끝날이 되었어야 하지만 그런 징조는 없지 않는가?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적 성경번역기구인 Wycliff Bible Institute에서는 오늘도 세계 각 민족의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전세계에 약 6000개의 언어가 다른 종족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약 10년 전 통계로 그 중 겨우 2000여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그 이후로 번역이 꽤 진척되었고 또 없어지는 언어도 많지만 그들은 나머지 수천 종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고유의 방언으로 전해질 때가 혹시 끝 날이 아니겠는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또 혹자는 전세계에 약 300개 가량의 나라들이 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아무 제한 없이 종교인 Visa를 내어 주는 나라가 생각보다는 훨씬 적다. 그래서 전 국가가 자유롭게 그 비자를 내어 줄 때가 끝 날이려니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추측 내지 소망은 그만큼 재림을 소망하고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막연히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하는 인간적 기대에 불과하다.

 

땅끝에 대한 오해

 

땅끝의 의미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단순히 장소적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앞뒤 문맥으로 따져 본 이 단어의 원래 용법은 오히려 인종적인 의미다. 예수님께서 하신 지상 사역은 갈릴리에서 출발해 예루살렘에서 마친 유대인 중심의 사역이었다.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시는 천상의 사역은 현실적으로 그 제자들에게 위임되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라고 명했다. 유대는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지역이고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이 사는 곳이며 땅끝은 완전한 이방인들의 나라다. 인종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땅끝을 굳이 장소적으로 한 곳을 지정하려면 사실은 이스라엘이 된다. 그 이유는 제자들과 예수님이 문답한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 제자들이 자기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자 실망이 무척 컸었는데 부활하셔서 나타나자 기운이 되살아 났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즉 로마를 쳐 부실 때가 언제이냐고 물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궁금해 하듯이 하나님의 시간표를 여쭤본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늘 그래 왔듯이 직접적인 대답은 피하시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엉뚱한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동문서답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답을 말씀하신 것이다. 법대에 다니는 아들이 “아빠 내 차 언제 사줄 꺼야?”라고 물을 때 아빠가 “고시나 패스해라”라고 대답했다면 무슨 뜻인가? 고시에 패스하면 그때 자동차를 사주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님이 땅 끝에 복음이 전파되면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했다. 말의 순서만 바꾸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가 바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 때가 되므로 이스라엘이 곧 땅끝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역설적으로 따지자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거나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완악하게 거부하는 민족으로 세우려 하신 것이다.

 

땅끝의 참된 의미

 

‘땅끝’은 그 문자적 표현과는 달리 일차적으로 장소적 의미가 아니다. 어디라고 지적할 곳이 따로 없다. 꼭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특정한 장소에 가서 선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땅끝이 한 곳을 지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성경을 보면 "to the ends of the world"로 분명히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 신자들이 현재 서 있는 곳이나 또 주님의 복음이 안 들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땅끝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 없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증거가 시작되었으니까 그 복음이 지구를 샅샅이 훑어서 마지막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이 이치로 따져도 옳다. 주님은 전세계에 한군데도 빠짐없이 구석구석에서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되어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불리워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로 따져 가장 먼 곳도 사실은 지구를 한바퀴 돌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에 어떻게 되는가? 출발한 자의 등뒤로 돌아와 그림자가 진 쪽으로 오게 된다. 따라서 신자에게서 가장 거리가 먼 땅끝이란 바로 우리의 어둡고도 미쳐 깨닫지 못했던 등뒤다. 불행하고 고독하고 병마에 찌들려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는 불우한 이웃들이다.

 

그들이 그저 불쌍하고 소외되고 핍박 받아서 땅끝이 아니다. 불우이웃돕기식의 도움은 반드시 신자가 안 해도 되며 사회 봉사 구호 기관들에게 맡겨도 된다. 단지 아직도 살아계신 주님의 그 풍성하신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한 자만이 신자에게 땅 끝이 된다. 현실적 빈부, 사회적 지위, 지식의 유무와 관계 없이 예수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땅끝이다. 아무리 재벌회장이나 대학총장이라도 예수를 알지 못하면 그 영혼이 사단에 붙잡혀 미혹되어있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쪽이 믿고 다른 쪽은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가 침대에서 그 틈이 1mm도 안 떨어져서 자고 있을지라도 사실은 그들 영혼의 간격은 지구를 한바퀴 도는 만큼이나 멀다. 아무리 육신은 마주 보고 자더라도 영혼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 그 사이에 있다. 재물과 육신적 애정과 권력과 명예로는 그 틈새를 결코 채우지 못한다. 각자가 추구하는 인생과 삶의 가치와 소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대화가 영혼육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는커녕 서로 겉만 헛돌 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땅끝의 의미를 또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가로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사39:3)”에서 원방(遠方)이 본문의 ‘땅끝’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항상 앗씨리아, 바벨론, 로마 등 적국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의 대적들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야 할 땅끝이다.

우리와 원수 된 자들,

사이가 멀어진 자들,

오해와 불신으로 담을 쌓고 있는 자들,

교회에 출석하다 상처 받고 나오지 않는 자들,

이단으로 넘어간 자들,

그 모두가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이다.

 

우리 주위를 예수님의 심장으로 잠시만 둘러 보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는 미혹된 영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두가 우리의 땅끝이다. 그런 뜻에서 모든 교회는 아무리 도시 한 복판에 초현대식 건물로 거창하게 서있든 시골 벽촌에 종탑이 달린 자그마한 교회로 초라하게 서있든 땅끝에 있는 교회다. 오늘날 교회 밖 세상은 절대적 진리가 사라져 오직 시기와 분쟁으로 날 샌다. 그러나 교회 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성도 간에도 서로 상처 주고 받으며 담쌓고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옮겨 다닌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윤리와 인간적인 감정이 교회 일을 치리하는 기준이 되어 간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예수님의 십자가가 증거 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지 않고 있다면 그 어디나 땅끝이다.

 

땅끝의 가장 중요한 의미

 

따라서 땅끝을 생각할 때 사실 장소적인 의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다 거의 모든 신자가 ‘땅끝’의 가장 중요한 의미마저 놓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공간적, 인종적, 종교적 의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뜻은 따로 있다. 마28:20과 행1:8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표현이 무엇인가? ‘끝 날까지’ 와 ‘땅끝까지’의 ‘까지’ 즉 계속적이면서 진행형으로 표현되는 시간적 개념이다. 두 구절을 함께 하면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모든 권세로 우리와 함께 할 테니 너희는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가 된다.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어디까지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어떤 출발점이 전제가 된다. ‘어디까지’는 ‘어디서부터’가 있어야 의미가 확실해진다. 본문의 경우 어디서부터는 두말할 것 없이 ‘지금부터’와 ‘여기서부터’다. 주님과 신자가 땅끝까지 끝 날까지 복음을 들고 함께 가야 하는데 주님은 당신의 권세로 신자의 사역 위에 함께 하므로 신자는 순종으로 지금 당장 일어서서 순종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동안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신자가 그렇게 계속해서 순종할 수 있도록 주님은 본문에서 성령의 권능을 입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신자가 지상 명령과 본문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지금 꼭 제까지 나서서 그럴 필요 있습니까? 유능하고 경건한 선교사나 주의 종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또는 “제가 조금 믿음이 자라고 난 뒤에 아니면 지금보다 시간과 돈에 조금 더 여유가 있고 난 뒤에 하겠습니다” 이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내일 모레 당장 다시 오신다는 것이 확정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때도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있을 사람이 우리 가운데 과연 있을까? 아마존, 평양 그 어디라도 당장에 보따리 싸서 가겠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평양이나 아마존으로 가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십자가를 증거 하라는 것이다. 주위에 주를 모르는 자들과 우리와 원수졌던 사람들에게 말이다. 한두 번 만나 애기 해보고 안 통하고 반응이 좋지 않다고 그만 두어선 안 된다. 평생을 그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으면서 그의 입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말고는 이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라는 눈물어린 고백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해 공간적, 인종적, 종교적인 의미의 전도는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시작은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일을 다 마치지는 못했다. 시간적 개념의 전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제자들이나 혹은 오늘날 오지에 가 있는 선교사들에게만 명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에게 명하신 것이다. 언제까지이며 어디까지인가? 세상 끝날과 땅끝이다. 주님이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가 속해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적 영역 안에서 바로 시작해서 그 영역에 있을 동안에는 다른 말로는 그 영역을 벗어 날 때까지는 잠시도 쉬지않고 계속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아무런 결론 없이 마친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언급 없이 끝이 난다. 바울의 전도 여행의 출발지가 안디옥이란 것만 알뿐이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복음을 증거하는 일만 계속했다. 비록 그로선 지금의 스페인이 땅끝이라고 생각하고 그곳까지 가기를 소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전부 땅끝이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이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으로 시작됐으면 그 결론은 땅끝에 도달한 것으로 마쳐야 함에도 단순히 바울이 생애를 마감한 그 장소에서 기록이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신자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자기 있는 곳에서부터 찾기 시작하였고 가는 곳곳마다 땅끝이 되었다.

 

또 사도행전의 기록이 끝이 나지 않은 것은 그 뒤에 많은 공백의 페이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빈 여백을 각 세대의 모든 신자더러 메우라는 것이다. 바울의 뒤를 이어 우리 모두가 이름과 빛도 없이, 숫자적인 외형적인 업적이 크게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주께서는 아시므로 그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한 그 자그마한 사역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성경에 더 이상 기록될 수 없지만 천국에서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사도행전의 뒷장에 분명히 메워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 일을 우리에게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가엽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곳이 바로 땅끝이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어디에 가 있던지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면 그 어느 한곳도 땅 끝이 아닌 곳은 없다.

 

(3/2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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