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83) 주기도문 강해 (15) 11/9/200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찬양으로 끝나는 기도
본문에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좀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 괄호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인데 성경에는 아주 드물게 이런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이 표시는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원본에 없는 말씀을 추가해 넣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이 임의로 성경을 조작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오리지날 원본은 없어지고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筆寫本)만 남아 있다. 본문의 말씀은 가장 오래되고 믿을만한 사본에는 없지만 상당한 양의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다. 또 내용적으로도 앞 뒤 문맥에 일치하고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전체 뜻을 더 살려 주므로 그대로 두되 괄호로 표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34:16)고 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임은 틀림 없지만 그 저작, 수집, 보관, 계승하는 일에서부터 번역하는 전 과정과 심지어 2, 3천년 후의 오늘 날의 신자가 읽고 묵상하는 중에도 성령이 역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절대 사사로이 풀어선 안 된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성령님이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옵소서라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지 않으면 은혜와 능력을 맛보지 못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도덕교과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세상에서 최고로 효과가 빠른 수면제가 될 뿐이다.
비록 본문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어 마치 참고해야 할 각주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해준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가장 일차적인 의미로 기도는 경배로 시작하여 간구하는 내용을 아뢴 후에 찬양으로 마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구절이 추가된 이유를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송영(Doxology)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는데 이 기도문도 기도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덧 붙였다고 해석한다.
하나님 왜 숨으시나이까?
유대인들이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고 마쳤는가? 시편 10편으로 가보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절) 솔직히 우리가 어쩌다 기도하는 그 심정과 너무나 같지 않은가? 특별 작정 새벽기도에 나오는 바로 그 이유다. 그러나 어떻게 시편이 끝나는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7,18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마친다.
하나만 더 살펴 보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 염려와 불안을 안고 기도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5,6절)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쳤다.
신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기도를 마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인들처럼 기도의 형식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잠시 2-3분 기도하는 그 사이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을 받아서인가? 그것은 기도 중에 성령이 주시는 지혜, 위로, 용기, 소망,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이 되면 신자는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의 램프를 가진 마술사이고 하나님은 도깨비이거나 램프 속에 있는 거인에 불과하다.
기도란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더러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의뢰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셔야 한다. 내가 겪는 문제와 고통을 감당하고 해결하고 책임져야 할 자는 결국 신자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란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소망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또 오해는 마셔야 한다. 지혜와 위로와 힘을 달라고 해서 기도 중에 갑자기 ‘뾰봉’하고 슬프고 힘든 것들이 싹 가시고 속에서 기쁨이 퐁퐁 솟아나거나, 한 방에 모든 것을 해결할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구름 위를 걸어 가듯 평강이 넘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주 가끔 신자가 너무 낙심하고 있어 그대로 두면 도저히 병이 나 큰 일 날 것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임하여 그럴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힘들다.
그럼 기도를 통해 얻는 하나님의 지혜와 위로와 능력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아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다.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녀들을 그 분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섭리의 원칙과 ‘나’라는 존재와 인생에 대해 그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계시는지를 깨달음에서 얻는 영적 충만이다.
기도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를 넘어뜨리려 해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나는 그의 사랑 받는 자녀의 자리에 다시 든든하게 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며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아니하시고 나의 들어오고 나감을 너무나도 세밀하게 알고 계시다는 그 사실을 내가 다시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나아가 나의 들어오고 나감을 그 분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 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그 모든 것들이 그 분의 선한 뜻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아 그분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키워 나가는 작업이 기도다. 장차 반드시 그대로 어김 없이 이뤄진다는 믿음을 붙드는 것이다.
기도 걱정 꾼들(Prayer Worriers)
어떤 미국 선교사가 자기를 후원해주는 기도의 후원자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기도의 용사들에게(My Dear Prayer Warriors)’라고 해야 할 것을 용사라는 단어에서 ‘a’ 대신에 ‘o’로 미스타이핑 해버렸다. 그 뜻이 어떻게 되어버렸는가? ‘기도의 걱정 꾼들에게(My Dear Prayer Worriors)’로 변했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그런 것이 아닐까?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기도하고 기도를 마칠 때는 어떤 기분이 되는가? “이젠 기도로 다 아뢰었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뭐!”인가? 아무리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다고 해도 실제로 골리앗과 싸운 것은 다윗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에 대한 약속을 심어주고 다윗은 그것을 믿고 천하무적 골리앗 앞에 생명을 걸고 물매 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갔다.
기도란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얼마나 허상과 거짓 투성이며 신자들 앞에 허장성세로 큰 소리만 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 알아 절대로 그 허수아비 같은 세력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신자가 가지고 있는 무기의 종류를 알고 그 능력을 믿어 하나님에게 이제 그 거짓의 세력과 당당하게 싸우러 나가겠다는 출정보고를 하는 것이 기도다. 기도가 하나님이 대신 싸워 달라는 부탁으로 그쳐선 안 된다.
또 “어휴! 그 동안 계속 눌렸는데 기도했더니 이젠 좀 살 것 같네”같은 기분으로 기도를 마치는가? 기도가 자기 최면을 걸어 일시적으로 감정의 위로만 받고 스트레스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침상을 눈물로 적셨다. 밤새 고민하고 갈등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온갖 궁리를 다해 봤지만 결국은 ‘여호와만이 나의 목자’라는 부인할래야 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다니엘은 힛데갈강 가에서 세 이레 동안 금식 기도했더니 여호와의 사자에게서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단10:11)라는 음성을 들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밤새 환도뼈가 부러지면서까지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면서도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그 복이 무엇이었는가? 세상의 축복인가? 아니다. 그는 이미 부자가 될 대로 되었다. 내일 이 강을 넘어 고향 땅에 들어가면 형이 나를 당장 죽일 것인데 하나님 나와 함께 할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 부분에 대한 분명한 확답을 달라고 졸라댄 것이다.
기도란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확신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울고 또 울어야 한다. 밤새 울어야 한다. 언제까지 울어야 하는가? 웃을 수 있을 때까지다.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을 들고 나와 주께 엎드리면 천국을 보게 된다. 장엄한 천국의 장면을 환상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통치와 내 인생을 향하신 인도와 보호가 얼마나 아름답고 선하며 소름이 끼치도록 정미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끝내면 더 이상 그 문제와 고통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억지로 걱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의 통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내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근심의 구름 장막을 완전히 걷어내고 그분의 충만으로 대신 채울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하고도 불안하면 기도한 것이 아니라 넋두리나 타령을 한 것이다. 아니면 아직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신자의 기도 중에 가장 문제는 기도하면 할수록 염려가 없어지지 않고 더 불안해지는 경우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문제가 생각해 보니 더 크게 보인다. 자기 마음을 사탄에게 뺏기고 있다는 증거다.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두고 있다.
비근한 예로 교회마다 연례 행사로 하는 특별 작정 40일 새벽 기도에 참가하는 신자들의 마음을 솔직히 살펴보라. 30일이 지나면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응답이 될 때가 되었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지? 39일쯤 되면 이제 겨우 하루 밖에 남지 않았는데? 군대 제대를 앞둔 병사처럼 매일 날자를 꼽아 가며 기도한다. 마치 자기가 40일을 채우는 그 정성과 열심을 하나님께 보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기대한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세상에서 형통만 빌다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뤄질 기미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만 키운다. 그 문제가 주는 현실적 고통에다 하나님이 자기를 외면하고 있지나 않는지 하는 영적인 불안마저 보태져 걱정이 두 배가 된다.
드디어 40일 째 새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올해도 혹시나 하고 참석했더니 또 역시나로 끝나는군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만 키운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하나님에게 내 고민, 불만, 문제 다 말씀 드렸으니 알아서 해주셔야 합니다. 정 힘들면 꼭 해결해달라는 것이 아니고요 이 문제가 더 이상 곪아 터지지만 않게 해주십시오. 그럼 내년에 와서 다시 뵙겠습니다”로 끝낸다. 그러나 또 다른 속 마음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에 참석했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내년 까지는 해결해 주시겠지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그럼 하나님이 혹시라도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은 아닐는지? “나중에 보자는 사람치고 겁나는 사람 아무도 없더라. 내년까지도 해결 안 해 주어야 그나마 내년 새벽기도에 나올 테니 이 문제 해결되는 것보다 그래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너에게 더 낫지 않겠니.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 내년에 또 다시 보자.”
기도란 초조한 걱정거리들을 다시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염려를 좀 더 심각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작업이 아니다. 기도는 걱정꾼, 염려꾼, 불평불만꾼들이 하나님의 용사로 바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내 의지와 도덕성과 종교성으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답게 인정하고 엎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 용기, 소망, 비전, 믿음의 약속들로 채워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우리 영혼 속에 다시 솟아나며 나의 전 존재와 전 일생을 걸고 그 분의 의로운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이 생긴다. 삶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전 생명을 바치는 것까지 오직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통치에 내어드리며 또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도다.
가사를 고쳐야 할 가스펠 송
기도를 시작할 때는 시편 기자들처럼 온갖 세상의 염려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갖고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일단 하면 야곱처럼 복을 받지 않고선 절대 기도를 중지하면 안 된다. 끝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한다. 기도를 마칠 때는 다니엘이 들었던 음성을 우리도 똑 같이 들어야 한다.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크게 입은 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도를 끝낸 후에는 다윗처럼 여호와 만이 나의 목자임을 확신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스스로 담대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라는 복음송을 다 잘 아실 것이다. 이제 이 가사를 좀 고쳐야 하지 않겠나 싶다. 1절은 그대로 두면 된다. 대신에 2절은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로 3절은 ‘기도하고선 왜 염려하십니까?’로 말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4절을 반드시 부쳐야 한다. “기도하고선 왜 가만히 있습니까?”
본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이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한 후에 걱정하지 말라 기도했으면 나가서 싸우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대로 섭리되고 통치되는 영역이 이 땅에 미치지 않은 구석은 단 하나도 없다. 내 상처와 실패와 슬픔과 고통과 환난과 앞 날을 가로 막는 어떤 방해 세력 위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한다.
권세도 영원하다. 아무리 내 인생이 고달프게 넘어져 있고 이 땅 또한 굽어지고 헝클어져 더럽고 추한 악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생명력이 넘치게 다시 살려 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만 갖고 계시다. 비록 도저히 사방팔방으로 벽이 막혀 도저히 더 이상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그런 실패와 절망을 안고 눈물을 뿌리며 간구하지만 그 기도가 금대접에 받쳐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것만은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신자가 일대일로 은밀히 하나님과 만나 교제를 나누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영원히 확장된다. 그래서 반드시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리며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토록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만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 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뜻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서 영원히 보장된다. 세상의 어떤 세력과 존재가 그것을 조종, 변경, 왜곡, 취소시킬 수는 절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를 절망케 하거나 실패케 할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기도
어떤 교회에서 주일 날 설교를 마친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실 분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대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한 남루한 차림의 청년이 나와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도저히 지난 세월 동안에 방탕했던 내 죄의 무게가 제 혼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만 그 죄를 씻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겠습니다”고 고백했다. 그 날이 바로 교회에 처음 나온 날이었다.
그 청년은 지난 8년 간 가출을 해 부모와도 연락을 끊고 술, 마약, 도박, 섹스 온갖 죄악에 찌들어 방황했던 자였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자기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와 일어난 변화에 대해 너무 감사해 8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다 편지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자기 엄마에게서 온 답장에는 “네가 그 주일 날 예수님을 영접했던 바로 그 시간에 아버지는 천국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 마지막 돌아 가시기 직전에도 ‘주님 제발 방황하는 제 아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하늘나라에만 영원한 것이 아니다. 천국에서 영원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당연하지만 신자가 사는 이 세상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은 더욱 영원하다. 비록 모든 인생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잠시 잠간 스쳐 지나가며 우리 육신은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세상은 모순과 갈등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신자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이 찰나 같고 당장 쓰러져 무너질 것 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며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그 통치 영역 안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가 우리를 봐도 추하고 더러우며 결점과 허점 투성이고 매일 실수하고 넘어지고 또 쓰러지지만 기도가 있기에 썩어 없어질 이 땅을 영원히 썩지 않는 신령한 것과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도의 통로를 거쳐 하늘 나라 보좌에만 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과 완전함이 신자에게 생명력이 넘치도록 쏟아 부어지게 해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하늘 나라에 살 수 있게 한다. 신자의 삶은 예수를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순간부터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자의 삶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인생이다.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표현할 필요도 없다. 신자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자다. 혹시라도 다른 어떤 종교행위로 그 표현이 대체된다면 그는 종교가일지 몰라도 신자는 아니다.
물론 신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신자만이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기도하지 않고 일어나는 법은 없다. 꼭 그런 거창한 일이 아니라도 당장에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과 환난이 기도하지 않고 없어지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지 않는가?
그 청년의 아버지는 영원을 향해 떠나면서 기도했다. 그 기도의 열매가 이 땅에 남아 있는 아들의 머리 위에 축복으로 쏟아 부어졌고 그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그 아버지의 기도는 영원에서 순간으로 잇는 연결 고리였다. 아들의 찰나 같았던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었다.
울다가 웃는 신자
신자란 울다가도 웃을 줄 아는 자다. 여전히 현실의 삶은 첩첩 산중에서 힘들게 헤매고 있지만 그 속에 한 가닥 빛 줄기를 발견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의 빛을 붙들었기 때문에 울면서 기도를 시작했다가 웃으면서 마칠 줄 아는 자다.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또 웃으면서도 울 줄 아는 자가 신자다. 기도한 후 하나님이 비춰주신 그 빛을 붙들고 그 빛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면 그 빛 속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잘라 일컬음을 얻게”(사61:3)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그 기쁨이 너무나 소중해 절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불신자는 다르다. 절대로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할 줄 모른다. 너무 웃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경우 말고는 없다. 그들은 돈이 없으면 울고 또 돈이 생기면 웃을 뿐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신자를 보면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 생각 못한다. 참 신자라면 저들에게 살짝 맛이 간 것처럼 보여야 한다. 도대체 웃을 수 없고 울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웃고 또 크게 웃어야 할 상황에 오히려 눈물을 흘리니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 맞다. 우리 모두 예수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이다. 가난한 것 같으나 우리 만큼 부요한 자 없으며 가진 것 하나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신자다. 특별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가져야 할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는 신자만의 그 중에서도 기도하는 자의 몫이다.
여러분이 현재 걱정과 불안과 슬픔과 고통에다가 죄악에마저 찌들려 있는가? 심지어 기도할 힘조차 없는가? 그럴수록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기도 걱정꾼(Prayer Worriers)으로 나와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했던 다윗도 그랬다. 하나님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무릎 꿇는 자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고 사랑하신다.
그러나 일단 기도를 하면 절대 야곱처럼 중간에 멈추지 말라. 한 번에 기도원에 올라가 몇 날 며칠 철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 제목을 붙들고 끝까지 웃음이 나올 때까지 쉬지 말고 일하면서도 끈질기게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틀림없이 기도의 용사(Prayer Warriors)로 바꿔 주신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다.
아멘! 튼튼한 무릎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