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말라. (행5:12‐29)

조회 수 1791 추천 수 137 2009.04.08 0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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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말라.
사도행전강해 (24)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며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5:12‐29)


핍박은 기도 응답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땅 판 돈을 일부 감추어 성령을 속인 죄로 그 자리에서 급사하는 벌을 받았다. 본문은 그 사건 후에 초대교회와 사도들에게 나타난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성결하게 된 후에 당연히 일어나는 변화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내부의 죄를 제거한 후에 사단과 세상을 향해 당당히 맞서면 부흥한다. 아간의 죄가 제거되니까 가나안 정복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과 마찬가지다.

이천 년 교회사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진리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타협하면 양적인 성장이 있고 외부의 핍박과 사단의 도전은 없어지지만, 그 필연적 결과로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영적으로 바로 서있지 않으니까 사단이 구태여 교회를 흔들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또한 자기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는 신자들을 구태여 핍박할 이유도 없다. 교회에 한군데라도 영적으로 곪기 시작하면 그 병균을 도려내지 않는 한 끝까지 썩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당연히 그 반대되는 현상도 분명 일어난다. 교회가 영적으로 온전히 서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대로 증거 되면 외부의 핍박이 늘어나고 사단의 방해는 심해져서 그 양적 성장은 둔화된다. 그러나 내부 분열은 없어지고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정작 싸워야 할 외부의 대적인 죄와 사단과 세상에 대해선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신자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택함을 받아 세상으로부터 불려나와 자기들의 반대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귀에 속한 세상의 교회를 향한 미움과 핍박은 교회가 예수를 증거 하는 세기에 비례해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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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개인적 삶과 그 신앙공동체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영적 사이클이 있다. 영적으로 부흥하면 사단의 방해가 있고 그 방해를 이겨내면 부흥하고 그러면 또 다시 큰 방해가 닥친다는 것이다. 사단은 성도와 공동체를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목적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영적 부흥이 평안으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참 신자라면 주님의 십자가 군병이라는 신분을 이 땅에서 벗을 수 없다. 주님나라 가는 그 날까지 영적 전투를 계속해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다. 그 전투에 휴전 혹은 정전이 신자의 결심과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가 사단과 전투를 하고 있지 않아 세상의 비방과 핍박이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만큼 멀어져서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나니아의 죄를 제거한 초대 교회는 하나가 되었고 당연히 병이 낫고 귀신이 물러가는 등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또 다시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 투옥해버렸다. 그럼 그 전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4:29,30)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의아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실은 그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사실은 세상의 핍박을 더 받게 해달라는 뜻이지 않는가?

사도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에는 바로 담대하게 전했다. 담대하게 전해달라는 기도는 사실은 핍박에 굴하지 않게끔 자신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달라는 기도였다. 기도할수록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그들은 곧 바로 나가 전했다. 또 너무나 담대하게 전했기에 기적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핍박 또한 즉각 시작됐다. 복음을 시시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아가 관원들이 사도들을 투옥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적으로 충만해 있는 사도들을 감옥의 철제 창살과 옥문 정도로는 그 담대함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성령의 권능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인간이 만든 세상 감옥이 어떻게 그들을, 다른 말로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묶어 둘 수 있겠는가?

문자적 기록만으로 당시 상황을 접하는 후대의 신자에겐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옥문을 열어 준 것이 아주 큰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라. 응당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지 않는가? 사도들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들이 믿음 위에 확고하게 서있는 모습은 하늘 보좌까지 상달되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기껏 몇 평 안 되는 감옥 바닥을 흔들어 문이 절로 열리는 일이야 하나님으로선 눈 한번 깜짝하는 일에도 비기지 못한다. 또 그런 체험을 한 사도들로선 사자가 구태여 명하지 않아도 다시 성전으로 나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지 않았겠는가?

마땅히 또 기꺼이

사도들은 다시 공회의 재판에 회부되고 또 협박을 받았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이전에 있었던 사건(행4장)과 핍박의 강도가 훨씬 세어졌다는 것 빼고는 동일한 결과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하나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갈등이 동족사이에서도 재빠른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첫 판결 때는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어서 훈계 방면하고선 “예수의 이름으로는 무엇이던 절대 하지 말라”는 새 규례를 정했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 규례에 걸어 사형을 부과하려 시도했지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할 수 없이 풀어주었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본격적으로 따라 걷게 된 것이다.    

또 이전에는 베드로와 요한만 잡혔지만 이번에는 베드로와 ‘사도들’이라고 표현했듯이 사도들 전부가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핍박을 받았다.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는 경고로 끝낼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자기들 명령을 어긴, 다른 말로 앞으로도 상습범이 될 소지가 있었다. 거기다 모든 사도들이 담대하게 이구동성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했다. 자연히 핍박은 거세지고 모두를 투옥할 수밖에 없었다. 큰 부흥이 도리어 큰 핍박을 불러온다는 영적 원리 그대로 되었다.

지금 두 번의 동일한 사안에서 몇몇 차이를 살펴 초대 교회의 외적 역사를 추적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보다는 확고한 공통점을 발견하여 초대교회의 영적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 그 가장 크고도 중요한 공통점은 사도들이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따랐다는 점이다.

‘마땅히’는 진리를 알고 믿는 바탕 위에 사는 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올바른 길이기에 그 길 말고 다른 길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대체 방안이 하나도 없다. 선택은 오직 하나다. 또 ‘기꺼이’는 그 진리를 따르는 일이 너무나 보람차고 감사가 넘치며 기뻐서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신나서 한다는 뜻이다. 당장 눈앞의 사람들 눈치는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따르는 것이다. 물론 그분과의 깊고도 풍성한 영적 교제가 먹고 마시는 일보다도 훨씬 더 일상사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사도들은 영적으로 바로 서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솔직히 우리들의 신앙은 너무나 다르고 초라하다. 나름대로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과 세상과 충돌되는 부분이 별로 없다. 그들로부터의 핍박은 둘째 치고 과연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 지에 대한 갈등과 고민조차 잘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부흥이 안 되어 있기에 사단의 방해가 없다. 결과적으로, 아니 사사실은 그렇게 된 원인이, 신앙이 편안하게 교회 생활하는 것으로 대체 되어버렸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사람을 따르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싸움이다. 하나님에게도 잘 보이고 사람에게도 잘 보일 수 는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둘 다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회색지대 또한 결코 있을 수 없다. 불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지만 사단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무지(無知)한 말이다.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했기 때문에 주님을 알지도 찾지도 못한다. 그들이 귀신 들린 자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만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의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산다는 뜻이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가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진노와 저주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는 뜻이다. 비슷한 곳이지만 더 좋은 곳으로가 아니라, 완전 정반대의 곳에 이미 와있다. 어찌 둘이 함께 할 수 있는가? 도저히 타협, 조정, 융합, 심지어 관용조차 될 수 없는 한 쪽의 극단에서 다른 쪽의 극단으로 옮겨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분의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 아직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말도 한다. 이는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탓이자 심지어 억지다.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아는 참 신자라면 그럴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사실상 아주 선명하고도 완연하게 이미 드러났다. 죽기까지 자기를, 그것도 죄에 빠져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따르며 살라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음이 안 든다면 아직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그 중간의 회색지대란 전혀 없다. 서있던 장소에서 완전히 정반대로 옮겨졌기에 별로 고민할 거리도 없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자동으로 물러가고 생명이 들어오면 죽음은 끝나는 것만큼 명백하다.

문제는 신자가 여전히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가야할 길임을 이미 알고도 머뭇거리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내 방식대로 바꿀 수 있는지에만 온 머리를 싸매고 있든지 말이다. 그러면서도 핑계는 저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몰라 따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람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들 한다. 아직은 중간 회색 지대에 있지 사단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고는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중간회색 지대인 여기가 좋사오니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거나, 최소한 양해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신자의 착각이다. 이미 신자는 빛 가운데 들어와 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은 중간 회색지대도 아니며 사단 쪽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에 속했던 곳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으로 홍해를 건넌 후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웠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에라도 절대로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다면 당연히 가나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도 하나님 뜻을 모르겠다고 우기면서 중립 지대에 남으려 했다. 홍해를 건넌 후에는 하나님의 땅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신다. 배역한 세대를 다 죽이고 나서 그 후손 만으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중립 지대라고 착각하고 머뭇거린 자들은 평생을 광야에서만 헤매다가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수천 년 전 다른 나라 선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구원을 받아 믿음은 생겼지만 평생에 열매 한 번 못 맺고 죽는 것과 같다.    

극과 극인 두 종류의 사람들

사도들이 제사장들의 협박을 한 마디로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슨 일에나 긍정적이고 담력이 세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원래 무식하고 나약하며 비겁했었다. 가장 활달했던 베드로마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듯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한 주인으로 섬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니 실제로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목도했고 또 성령이 임한 후에는 십자가에 드러난 뜻을 비로소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판단을 흐려지게 만들 만한 중간회색지대란 없었다. 죄악과 죽음과 사단에 묶여 있던 옛 사람과 의와 생명과 주님 안으로 들어온 새 사람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은혜와 권능은 말할 수 없이 풍성했기에 도무지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본문에선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사고와 삶이 정확히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주의 사자가 밤중에 옥문을 열고 꺼내주자 꼭두새벽부터 자기들이 체포되었던 바로 그 장소로 다시 가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증거했다. 같은 시각에 유대 공의회에선 사도들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고 시기가 가득하여 죽이려 했다. 한 쪽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람을 죽이려는 공모를 하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오직 그 이름이라야만 참 생명이 살아나기에,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다. 반면에 관원들은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라고 사도들의 의도를 정반대로 곡해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또 그 가르침대로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당신을 매단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던 분의 이름은 관원들에게는 오히려 죽음의 신호처럼 들렸다. 그분 앞에 무릎 꿇을 생각은커녕 죽음으로 내몬 죄가 없다고 강변하기 바빴다. 참 복음이 선포되면 듣는 자로선 생명과 죽음 두 가지 냄새밖에 맡을 수 없는데 죽음에 속했기에 죽음의 냄새만 맡은 것이다.  

사도들은 관원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가 복음을 통해 관원들의 영혼마저 주님의 참 사랑으로 초대하려 했다. 그런데도 정작 저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사도들을 옭아매어서 사람들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할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를 죽인 당시에서 영적으로, 아니 도덕적으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저들 스스로 죄책감에 눌려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

그들은 누구였는가? 로마 총독 빌라도마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죽일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해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고 발뺌하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절)고 대답했던 자들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때는 자기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쳐놓고는 이제 와서 “그 피를 자기에게 돌리지 말라”고 완전 오리발을 내밀었다. 법을 다루는 자들이 법정에서 선서한 말을 동일한 사안과 원고 앞에서 번복하고 있다. 법에 따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었고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증거하지 말라는 자기들이 새롭게 제정한 명령의 효력마저 부인하는 꼴이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관원들의 잘못을 빌미로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기존의 종교와 새로운 종교 간에 명분 싸움을 하여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20)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 엄청난 진리이자 참 생명이기에 전하지 않고 모른 척 할 수는 절대 없었다. 자기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된 후에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너무나 풍성해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또 함께 나누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었다. 세상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위치와 신분을 뛰어넘는 하늘의 보배였기에 만나는 자 누구에게나 시급히 알려주고 싶었다.  

사도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도덕적으로 사람들 칭송을 받을 정도로 의로워진 것인가? 정치적으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경건해진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더 이상 여러 갈래 길을 앞에 두고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매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는 것뿐이었다. 사도들이 특별히 영적으로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진정으로 알고 또 그 안에 살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모든 신자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갈 진정한 목표를 찾았기에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예수를 알고 나면 정말로 그분의 뜻대로 살고 또 십자가를 증거하고 싶어진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서 아직 본격적인 실천을 하고 있지는 못할지언정 그런 소원은 갖게 된다. 최소한 이전의 옛 사람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은 한다. 자기 인생이 바뀌었음을 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려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A. W. 토저가 “거듭났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기에 누가 내게 그것을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 대로다.

왜 아직 망설이는가?

사도들과 유대 관원들을 비교해 알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세상 사람의 길은 확연하게 다르다. 애매모호해서 혼돈할 여지가 전혀 없다. 상호 겹쳐지는 측면조차 없다. 비록 겉으로는 세상에서 같이 어울려 살고 있는 것 같아도 내면적으로 정 반대의 길을 등을 진 채 걸어간다. 그런데도 왜 신자들은 아직도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는가? 여전히 그분의 뜻만 계속해서 묻고 있는 자도 있고, 묻다가 지쳐서 슬그머니 중도 포기하는 자도 많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뜻을 자꾸만 현실 상황에서 구체적 직업의 종류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출발부터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유학생인 여러분도 졸업 후에 연구소로 갈지, 대학의 교수직을 맡을지, 기업체에 직장을 구할지, 개인 비즈니스를 할지를 두고, 그것도 한국으로 돌아갈지 미국에 남을지를 결정하고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다.

성도가 설마 나쁜 직업을 택해 악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럼 하나님은 성도가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해도 좋아하실 것 아닌가?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직업의 종류나 주거 지역을 선택코자 하는 우리의 기도는 아무리 오래 간절히 해도 하나님이 명확한 응답을 거의 하지 않으신다. 명확한 대답이 없다는 자체가 벌써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확실한 응답이지 않는가?  

다른 말로 그런 일들은 신자 개인더러 정하라는 뜻이다. 또 신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을 이미 다 주셨다. 자기가 하나님께 어떤 재능과 은사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특별히 무슨 일을 해야 자신의 장기가 드러나고 신나는지는 본인만큼 잘 아는 자도 없다. 그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면 교수로, 혼자 파고들어 무엇이든 알아내는 일에 흥미가 있으면 연구소로,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일을 하여 뭔가를 성취하고 싶으면 기업체를 택하면 된다.

그럼 신자로서 믿음과 기도는 왜 필요한가? 성령이 영혼을 소생시켜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또 어느 곳에서든 당신의 예비하심과 보호를 바라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 그렇게 기도해도 또 다시 어려운 문제들이 닥칠 것이므로 믿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안에 바로 세움으로써 이겨내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 개인적 경험을 나누자면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이나 뜻이 있으리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다.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 온전한 목적도 없었다. 오로지 세상에서 먹고 마실 것을 풍성히 하려고 당시로선 가장 손쉽고 인기 있는 직종인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는 전혀 무관한, 아니 정반대의 곳에서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었다. 또 온갖 어려움들을 혼자 힘으로만 이겨내려 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그분에 대한 인식도 전무하고 오직 사람의 눈치만 봤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서로 눈치를 보는 데는 도가 통한 경지였다. 당연히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뜻은 오직 하나다. 당신의 자녀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 변화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일생을 썩는 밀알로 보내어 자신보다 이웃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고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는 자나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자에게는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관심이 있지 무슨 일을 하느냐는 부차적 문제다.

간혹 신자들이 무슨 일을 해야만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되고 그분의 영광이 더 드러나게 될지 궁금해 한다. 마치 신자가 하나님의 입장과 능력을 많이 배려해 주는 것 같다. 신자가 먼저 그분의 자녀답게 바로 서있다면 무슨 일을 해도 당신께서 지키시고 나아가 당신께서 그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그분께 달렸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미리 염려할 필요나 이유는 단 한 치도 없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의 뜻에 더 부합할까 염려하는 이유를 엄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그 일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실패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신자 개인의 욕심인 경우가 더 많다. 무슨 일을 하든 사도들처럼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따르면 된다. 그리고 그런 판단과 실천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그분의 계시는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신자가 무슨 일을 하든 신자답게 서있다면 이미 죄악과 죽음과 사단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있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을 리가 있는가? 혹시라도 하나님이 환난 심지어 순교로까지 허락 내지 인도한다 해도 진정으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소원했다면 전혀 염려할 문제 또한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그런 환난과 핍박이라면 더 기뻐하고 영광스러워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 성공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실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며 자신이 성공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살고 싶은 것이다. 믿음도 좋고 현실도 형통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정작 염려한 것은 세상에서의 가시적, 외형적 성공여부였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공이 아니지 않는가? 딱 한 가지만 따져 보라. 하나님이 신자로 당신의 자녀가 그 자녀답게 서있다면 실패시킬 리는 전무하지 않는가?    

본문에 아주 단적인 예가 있다. 당시 탈옥은 마땅히 사형을 당해야 한다. 어차피 죽을 사형수가 아닌 다음에는 어지간해선 탈옥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관원들은 사도들을 잡아서 돌로 쳐 죽이려 했다. 그런데 천국 복음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고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명백한 하나님의 뜻

구약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 말라, 놀래지 말라, 당신께서 지켜 줄 테니 담대하게 나를 믿고 제발 세상 앞에 당당하게 맞서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면서 아담에게 금령을 줄 때부터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라기를 통해 한탄하실 때까지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시종일관 동일했다. 단 한 단어도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항상 그 말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9,10)

신약성경도 구약성경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6)

그래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면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6,30) 당신의 백성으로 택한 자가 당신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지켜 보호하시고 일용할 양식은 책임져 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명백하다. 도대체 혼동될 여지라고는 없다. 택한 백성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하면 된다. 진정으로 걱정할 문제는 자신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알의 이름 없는 밀알로 썩어 없어질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일의 성공 가능성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 온전한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만 드러내면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 주신다. 이 만큼 명백하고 분명한 뜻이 어디 있는가? 더 이상 고민하고 갈등하고 연구할 것이라고는 없다.  

예수님이 신자가 걱정할 것이라고는 단 두 가지뿐이라고 잘라 말했지 않는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자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자신을 사랑하라거나, 자기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눈을 닦고 찾아도 없다. 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뜻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택한 자가 당신을 사랑하고 또 당신이 창조한 백성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 자를 당신께서 사랑 안하실 리가 있는가? 아니 사랑하지 않는 자라면 아예 택할 리도 없지 않는가? 이미 신자가 되었다면 자기 사랑은 구태여 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박사 학위 받았다고 꼭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또 하나님과 예수님께 평생을 걸기로 헌신했다고 해서 꼭 목사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물론 둘 다 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무슨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자꾸 그런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다는 것은 오히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반증이다. 나아가 이미 말한 대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욕심과 죄악의 산물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여전히 연약하고 무지하며 무능하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도 365번 나온다고 한다. 믿음을 가진 신자라도 환경과 사람을 보면 일 년 365일 내내 두려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바로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너무나 명료한 뜻을 매일 같이 잊고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 나아가 사단의 훼방과, 옛 사람의 습성과, 자기 욕심 때문에 그 간단한 진리마저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럼 새로운 진로를 택할 때에, 혹은 환난이 닥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종과 횡으로 행하는 땅을, 아니 눈으로 보이는 모든 땅을 다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땅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물이 없어 목축에 부적합할 것 같은 가나안 땅에 남더라도 당신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무슨 일을 해도 망하지 않게 해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기도하여서 직업의 종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미 드러난 당신의 뜻을 잊고 있던 것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또 믿음으로는 무슨 일이든 택해 실천하되 자꾸만 밀알로 썩고 싶지 않다는 유혹과 본성이 생길 때마다 이겨내면 된다.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해야만 하나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 기대하는 자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권능과 은혜조차 맛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갈 바 모르나 한 발이라도 내디딜 때에 당신의 영광을 당신께서 당신의 방식과 때에 드러내는 법이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계속 기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해도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더 미혹에 빠질 확률이 높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세상 앞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겠다고 결단, 노력, 실천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자연히 드러나고 또 영광도 함께 빛나게 된다.

인생은 생각한 것보다는 극히 짧다.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둘째, 셋째의 기회란 절대 없다. 오직 한 번뿐이다. 저처럼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가 늦게야 다시 갈아 끼우면 그만큼 손해다. 물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선 그 실패마저도 나중에는 당신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는 괴로운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말로 쓰러지고 넘어져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겠다고 하느니 미리부터 그분께 항복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그런 얕은(?) 지혜로 형성될 문제는 아니다. 그런 실패마저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여정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스스로 마음이 열린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사랑했기에 택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에게 필요하고도 가장 적합한 재능과 은사와 심지어 믿음의 분량까지도 이미 당신께서 다 마련해 놓았음도 알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당장 시작하면 된다. 아니 해야 한다. 물론 자기 재능과 은사와 경험과 합당하게 연결되는지는 사전에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전혀 엉뚱한 일을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와 신자가 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해주시리라는 근거로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맹신 내지 미신일 뿐이다.

자신에 대해선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고 그 다음에는 본인이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분명한 음성으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 자신이 자신을 살펴서 판단 결정해야 한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이라면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라고 준 것이지 않는가? 또 직업의 종류나 장소에 대한 기도 응답이 없는 것도 언제든 원하는 일을 시작하라는 신호이지 않는가? 나아가 본인의 재능과 은사에 맞는 일을 신자답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할양이면 당신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확실한 보장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묻고만 있다면 그 기간만큼 손해일 뿐이다. 아니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핑계로 자신의 두려움과 주저함을 단지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종교 행위로 대체하는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자신을 해부해 보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심으로는 사람을 의식하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종교적 수사만 남발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중심을 보지 않고 또 못 알아챌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 365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놓았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 같이 정말로 자기 모든 것을 걸고 당신 뜻대로 행하는 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이루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말이다.    

4/7/2009

유타대학촌교회 8/25/1996 주일 설교

날마다순종

2021.01.05 15:09:57
*.14.99.253

한없이 답답하고 어리석어 늘상 옆에서 깨쳐주지 않으면 안되는 이런 저같은 자도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하나님, 절뚝대며 툭하면 넘어지고 수시로 엇나가도 걸음마 떼듯 잡아주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대체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인간의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영원한 저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세세토록 찬양과 감사로 경배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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