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정말로 예수를 닮으려면? (행6:8-15)

조회 수 2702 추천 수 135 2009.04.11 16: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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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예수를 닮으려면?
사도행전강해(27)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8-15)


머쓱해진 공회원들

하나님이 집사를 세운 뜻이 단순히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기에 불편이 없도록 교회 내의 업무만 처리토록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가 예수님을 전파하는 일에 한 치의 방해도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뿐 아니라 집사도 때를 얻으나 못 얻으나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인 스데반도 유대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듯이 말이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12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각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즉, 헬라파 유대인들이 각기 전용의 회당을 마련해두고 귀향할 때마다 사용했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이 그런 회당을 순회하며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다. 아직 유대교의 관습에 젖어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변론을 벌렸지만 그를 당하지 못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유대인들이 그를 스승 예수님과 동일한 죄목과 절차로 거짓증인을 세워 공회에 참소했다.  

잘 알다시피 스데반 사건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로 결말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데반을 포함해 지금껏 사도들을 향한 유대공회의 재판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4장) 경고만 받았고, 둘째는(5장) 매질과 위협을 당했고, 이제 세 번째는(7장) 죽음으로 순교했다. 기독교가 흥왕할수록 핍박은 늘어났다. 반면에 신자들은 핍박 때문에라도 할 수 없이 각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또 가는 곳마다 복음은 더 살아났다.  

성경은 스데반이 죽은 바로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8:1)고 증언하고 있다. 이어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4,5절)라고 했다. 같은 헬라파 집사 빌립이 드디어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을 입으면 행하게 되리라고 약속한 그대로였다. 역설적으로 핍박은 하나님이 일으킨 셈이다. 나아가 집사는, 아니 모든 성도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만 머물지 말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십자가 군병이다. 바꿔 말해 성령의 권능을 입은 증거는 어떤 형태가 되었든 예수의 증인이 되어 있는 지로 가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본문은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 엉터리 참소 가운데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았다고 한다. 천사를 본 사람들이 비교해서 한 말이 아니라 전혀 동요하지 않고 얼굴에 평강과 자유가 넘치며 (아마도) 빛까지 나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는 비록 거짓이긴 해도 증인들이 고발하는 죄목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며 또 이 법정이 절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을 줄 빤히 짐작했을 것이다. 공회원과 청중들도 그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를 주목해 봤다. 당연히 그가 벌벌 떨거나 최소한 당황할 줄 예상했는데 전혀 미동도 않으니까 더더욱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쳐다본 사람들이 도리어 머쓱해졌을 것이다.    

스데반에게 걸린 죄목이 무엇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슬렸다.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다. 이 중 하나만 적용해도 사형인데 그런 죄를 무려 여섯 번이나 강조했다. 공회원들을 자극시킬만한 모든 죄목을 다 동원했다. 성전과 율법을 강조한 이유는 유대교 신앙의 두 가지 핵심 지주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 참람한 죄인일 뿐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선민의식, 애국심, 신앙심 등의 뿌리마저 부인하는 반역자라는 것이다.

공회원들이 성전 모독에 특별히 민감한 이유가 있다. 우선 성전이 자신들의 경제적인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성인 남자는 일 년에 최소 세 번 성전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도 당연히 참가해야 했다.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성전 장사치와 환전상과 결탁하여 얻는 이득은 엄청났다. 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숙박, 식사, 구매 등에 사용한 비용은 시민 경제를 살찌게 했다. 성전이 없어지면 제사장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인지라 거짓 증인들이 얼마든지 나섰고 또 예수님과 사도들을 극도로 미워한 현실적 이유였다.

나아가 헬라파 유대인들이 같은 입장인 스데반에게 더 심하게 반발한 것은 뼈를 고국에 묻겠다는 의도를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몇 번씩 조국을 방문하고 또 늙어선 완전 귀향하겠다는 뜻은 마음 놓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성전이 헐리면 자신들의 애국심과 종교심을 무참히 짓밟힌다고 여긴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그 제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었다.

예수가 함께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고 오묘하다. 성경의 기록 또한 너무나 세밀하다. 지금 고소인들이 참소하는 가운데 부지중(不知中)에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한 셈이 되었다. 비유컨대 증인이나 검사가 오히려 자기 죄를 낱낱이 자백하는 꼴이다.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했으며(제9계명 위반), 무고한 자를 살인하려(제7계명 위반) 했지 않는가?

성전을 헌다는 참소에 대해 스데반은 이렇게 변론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7:47-50)

성전을 헌다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목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선언했기(시102:25)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과 율법을 우상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향해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렘6:10)라고 이미 정죄했는데도, 너희는 여전히 조상의 전례를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행7:51)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형식적 육체적 할례에 그치면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율법을 수여 받고 내려올 때에 사람들이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광채가 났다. 말하자면 지금 스데반처럼 천사같이 보인 것이다.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를 발견한 것은 바로 고소인들이었다. 성전과 율법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정죄하는 고소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부재(不在)한 대신에 그분은 오히려 참소 당하는 피고 곁에 서있었다. 재판장의 모든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의식은 못했어도 이미 하나님의 판결은 피고는 무죄, 고소인이 유죄라고 확정된 셈이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실제로 똑 같이 걸어갔다. 십자가 죽음과 돌로 쳐죽는 것과 그 형벌만 달랐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죽기까지 순종했다. 우리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믿음의 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가 위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이미 선언했던 말씀을(14절) 그대로 다시 전했을 뿐이다.

그는 회당에서 전도할 때나, 지금 재판을 받을 때나,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계속 함께 하셨고 얼굴이 천사 같이 보인 것도 예수님의 모습이 그를 통해 비춰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스데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에 안고서 동행하셨다. 스데반에게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수 없고 진정한 평강과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든 자는 스데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다. 보배 되신 예수를 자기 몸에 지닌 자다. 바울로 회심하기 전에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진멸하려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주님은 그더러 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느냐고 말하지 않고 당신을 핍박하는지 물었다. 모든 신자에게 당신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이자 보증이다.

말하자면 신자는 스데반처럼 핍박을 받을수록 천사의 얼굴이 나타나야 하며, 평소에도 예수님의 향기가 맡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는 말도 그리스도를 닮은(Christ-like) 자라는 뜻이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예수의 빛깔이 저절로 묻어져 나와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모두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것도 매일 새벽 기도에 나오고, 아침마다 경건의 시간을 갖고, 주 중에도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과 찬양 예배에 출석하며, 주일은 한 번도 빠지지 않는데도 그렇다. 얼굴에 빛은커녕 수심과 짜증으로 가득 차있다. 물론 아무리 교회 행사에 열심이며 집에서도 혼자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도 그것과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 대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혹시라도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가?  

성자가 되려 하지 말라.

대부분의 신자가 가장 잘못하는 것은 신자니까 성자(聖者)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박사를 모델로 삼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듯이 신자도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믿고 노력한다.

그래서 구제와 선행과 봉사에 열심을 내고, 성품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바꾸며, 자기 속에서 샘솟는 정욕을 죽여서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자기 뜻을 부인하며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격 수양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문제는 노력할수록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한 적이 훨씬 많다. 또 노력하는 중에도 힘이 들어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한가, 기도와 말씀에 게을렀는가, 등등 온갖 실망이 겹친다. 나중에는 내 주제에 무슨 슈바이처나 테레사가 되겠다고 나섰단 말인가? 그냥 평범하게 주일만 잘 지키면 되지 하면서 주저앉고 만다.

사실은 아주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품성을 가꾸고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일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닮아야 할 대상을 잘못 택한 것이다. 신자가 정작 닮아야 할 분은 예수이지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인격이나 사랑으로 따져 오히려 그 두 사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럼 오르기는커녕 도무지 쳐다보기도 힘든 산이라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본보기로 삼아 닮아야 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다른 점부터 찾아서 닮도록 해야 한다. 비슷한 실력을 갖춘 자라면 구태여 모델로 삼을 필요 없다. 현재 잘하고 있는 점을 조금만 더 훈련하면 된다. 중세시대의 도제(徒弟)제도에선 스승(Master)과 함께 기거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그대로 흉내 내어야 한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삼 년간 동고동락하신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단순히 말씀만 가르칠 것 같으면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면 되었다.

신자에겐 이미 예수님이 항상 동행해 주신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분의 모든 것을 흉내 내어야 한다. 단 그분이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을 찾아내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인 것인가?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나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흉내 내어야 하는가? 이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신적 권능을 갖고 베푸신 이적, 사역, 가르침, 십자가 죽음 같은 것을 닮으려야 닮을 수도 없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닮으라는 말이 아니다.

정답은 사실 나와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품성을 거룩하게 바꾸고 또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는 자꾸만 예수님이 행하셨던 결과적 모습만 흉내 내려는 데 있다. 온유하고 자상한 성격으로 바뀌어야지, 모든 것을 희생하며 힘든 이웃을 사랑해야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등의 목표만 세워놓고 그대로 행하려고 자꾸 노력한다.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행동이나 결과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떤 마음과 동기를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섬길 수 있었는지부터 잘 헤아려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마음과 동기야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느냐?”라고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통분하고 민망하여 우셨더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영어로 하면 “Jesus wept."로 두 단어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 그 무덤 앞에 서서 우셨다는 설명이다. 지금의 울음은 단순히 친구를 잃은 슬픔이 아니다. 무덤 앞에선 누구나 곡하듯이 예의상 소리 내어 우는 울음도 아니다.

슬픔과 애통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속에서부터 저절로 터져 나오는 흐느끼는 울음이다.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할 정도로 분명히 격심한 슬픔이 베어 나왔다. 그러나 죽은 친구가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통곡이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33,34절), 비로소 예수님은 우셨다. 단순히 친구를 잃은 슬픔에 그쳤다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울어야 한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시간을 더 지체해서 죽은 지 나흘 뒤에 무덤 앞에 당도했다. 또 무덤 앞에 와서도 가족과 친지들이 우는 것을 다 보신 후에 울었다.

결정적으로는 주님의 마음에 통분함과 민망함이 슬픔보다 먼저 찾아 왔다. (친구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통분’함은 화가 치밀었다는 것이며, ‘민망’함은 안쓰럽고 안타깝다는 뜻이다. 사단에게 미혹된 채 죄악의 질곡에 빠져서 사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비참한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인간들은 자신들의 그런 상태를 전혀 모른 채 여전히 자기가 의롭고 잘났다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뻐기고 있으니 불쌍하다 못해 화가 치민 것이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리어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기 전날 밤에 말씀으로 제자들을 다 가르치고 기도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누가 큰지 다툼을 벌렸다. 스승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뜻을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가깝게 지냈던 마리아마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를 단순히 큰 능력을 발휘하는 마술사나 치료사 정도로만 알았다.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 하나님이시자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다.

당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당신께서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인간들의 상태가 얼마나 무지하며 어리석어 보였겠는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롭다고 자랑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인데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고 지옥 구덩이로 몰고 가고 있다. 여전히 죄와 사단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아예 참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신과 가장 가까웠던 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서 지금껏 세상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당신을 랍비나 마술사 정도로 알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그날 밤에도 갈릴리 바다를 잠시면 지나갈 광풍에 두려워 떨었다. 아마 예수님이 인간 랍비에 불과했다면 아예 상대도 않고 똑똑하고 눈치 빠른 제자들로 다 갈아치웠을 것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의 인간을 향한 마음은 오직 하나, “너무나 불쌍하다”는 것뿐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에, 그들이 서로 누가 큰지 다툴 때에, 나면서 소경을 고쳐 줄 때에, 사회적으로 격리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해줄 때에,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줄 때에, 맨 나중에는 닭 울기 전에 당신을 세 번 부인하는 수제자 베드로를 쳐다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겼을까?

“주께서 돌이켜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끝나자 예수님이 먼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를 그윽이 쳐다보았다.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서 말이다. 나사로 무덤 앞에서 통분하고 민망해 했던 바로 그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더러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나인 성 과부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자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어 살려 주셨다. 당신이 대신 울어줄 테니 울음을 그치라고 하셨다. 인간의 모든 슬픔, 고뇌, 갈등, 고통, 허물, 죄악, 마지막 사망까지 십자가에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시고 우리더러는 웃으라고 한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이 살려내자 사람들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눅7:16)고 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몰라도 사역의 성격은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을 정말 불쌍히 여기셨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마저 그렇게 대했다.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을 절대 끄지 않으셨다. 생명의 주관자로서 인간의 마지막 대적인 사망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후에 당신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참 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오로지 불쌍하게만 여기셨다.    

누가 정말 의로운가?

제가 한국에 계속 있었더라면 아마 목사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신학공부하기도 부끄러운데다 여러 사회적 개인적 여건에 묶여 감히 마음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 이민 오고는, 절대로 제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자연히 모든 사람들이 자꾸만 불쌍하게 여겨졌다. 우선 한국의 대학 졸업장은 아무 소용없이 아내부터 세탁소와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또 공무원 했던 60대 남자 분이 빌딩의 야간경비원을 하는 모습을 보는데 어찌 측은한 마음이 안 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도 빌딩 관리자와 말이 잘 안 통하니까 저를 통역으로 급히 불러서 가봤다. 제 발음이 나쁘니까 다른 사람 데려 오라고 그 자리에서 퇴방을 맞았다. 명색이 한국의 최고 지성인 두 사람이 죄송하지만 수위한테 야단맞은 셈이니 이제는 내가 나를 봐도 너무나 측은해졌다.  

그 때에 하나님이 저를 미국에 이민 오게 하신 또 다른 뜻을 깨달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도울 만한 형편이 안 됨을 알기에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이들을 위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로선 제 소명을 견고히 붙들게 되고 하나님은 저를 당신의 종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교민 모두가 너무 힘들게 사는 것을, 그것도 동일한 처지와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되니까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선 끼리끼리 노느라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은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미국에선 만나는 사람 모두가 꺼져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십자가 진리를 더욱 절감하게 된 것이다.

유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언어 때문에 겪는 고통은 훨씬 더할 것이다. 머릿속에 개념은 정리 되는데 글로 논술하려니 도무지 감감할 것이다.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어깨 통증이 오는 자도 많이 봤다. 페이퍼 제출 마감 날짜는 다가오는데 진도는 안 나가니 속이 터진다. 임시로 술이나 담배로 그 속을 삭이려니 아내가 아니 신자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바가지를 끓는다. 오죽하면 명색이 집사가 그러겠는가? 또 얼마나 불쌍한가?  
  
가만히 따져 보라. 남편은 연구 실적은 오르지 않고, 담당 교수에게 심심하면 야단맞고, 가난한 유학생 주제에 돈은 부족하고, 풀이 죽을 대로 죽어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으려 집에 왔는데 이젠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어대니 얼마나 불쌍한가? 그럼 아내의 잘못인가? 아니다. 아내도 하루 종일 아이랑 집에서 지내려니 완전히 감옥이다. 차는 아빠가 몰고 나갔으니 쇼핑 몰에 갈 수도 없고 가봐야 돈도 없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쏘다닐 수도 없다. TV를 켜야 아직 영어가 미숙해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저녁에 남편에게서 조금 위로를 받으려니 오히려 구박만 당한다. 유학생 아내가 우울증에 안 걸리고 정상인 것만도 남편은 감사해야 한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다. 일 잘하고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자에게 기가 죽거나 미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나님이 집사로 세운 참 뜻을 모르니 얼마나 불쌍한가? 포도원의 작은 여우 같이 말 많고 이간질 하는 교인도 한둘은 있게 마련이다. 같이 상대해서 상처 받고 편 가름할 것 전혀 없다.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 얼마나 측은한가? 아주 의롭고 경건해 보이는 자도 부러워 할 이유가 없다. 아마 율법적 경건을 지키려다 스스로 탈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갖는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도 불쌍하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누가 경건하고 의로운 신자인가?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자인가? 죄 안 짓고 이웃을 잘 도와주는 자인가? 말씀과 기도에 능한 자인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이 경건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경건한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다 경건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의로운 신자는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며, 같이 울어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 자기부터 죄인임을 철두철미 인정하기에 다 같은 죄인으로서 남을 외모로 대하지 않고 함께 측은하게 여기는 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인 것이다.    

기도 많이 하면 얼굴에 빛이 난다.

흔히들 기도 많이 한 자는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 말에 속고 있는 사항이 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초자연적 은사를 받아서 어떤 신령한 능력을 갖게 되는 양 착각한다. 물론 성령의 은사 가운데 분명 초자연적 은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교회(성도들)의 덕을 세우기 위해 각 사람에게 당신께서 나눠주시는 것이다. 신자가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이 보이거나,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비취거나, 예수님의 모습에 신적 권능이 나타나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그런 초자연적 은사와는 다른 경우다. 오직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 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스데반이나 모세도 분명 기도를 많이 했으되 예수님처럼 했기 때문에 광채가 난 것이다.

주님은 새벽이나 밤중이나 한적하게 혼자 있을 때는 항상 기도하셨다. 그러나 기도를 무조건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안위와 형통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놓고 기도한 것을 빼고는 말이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용서의 기도를 하셨듯이 오직 죄인을 구원할 뜻으로만 기도하셨다. 당신의 소명을 실현하여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를 풀어주려는 기도뿐이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많이 하신 이유 또한 인간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분은 기도하면서도 속으로 통분하고 민망해 흐느끼셨다.

스데반이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해 반발하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어떤 심정이 들었겠는가? 우리처럼 이렇게 쉬운 교리를 왜 못 알아 먹지라고 우습게 알았겠는가? 자꾸 토론을 걸어오니 귀찮게 여겼겠는가? 급기야 거짓 증언으로 참소하니까 미워서 분노를 터뜨렸겠는가? 만약 이 셋 중에 하나라도 해당되면 사람들이 주목했을 때에 천사 같아 보였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여전히 사단에 미혹되어 있는 형제들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그가 천사 같이 보인 까닭이 무엇인가? 고소인들조차 오로지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다. 또 불쌍히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부터 복음 안에서 완전히 거듭났기 때문이다.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해 주셨음을 온전히 체험한 것이다.

지금 재판장의 공회원들처럼 예수를 단순히 랍비나 여호와 하나님의 대적으로 보았는데 어느 날 성령이 임하여 그분의 정체성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다른 말로 자신의 영적 실체야말로 너무나 더럽고 추한 시체임을 똑똑히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의가 자신에게 덧입히지 않으면 남을 것이라곤 절망뿐임을 절감한 것이다.

베드로는 목숨 걸고 스승을 지키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자 자신의 실체가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천하의 죄인임을 깨닫고 밖에 나가 통곡했다. 스데반도 분명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베드로와 유사한 경로를 통해 회심하는 체험을 겪었을 것이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자 성령이 내주하여 죄 씻음의 확신과 함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사단의 사슬에서 완전히 놓인 것이다. 죄와 사단과 사망이 그를 더 이상 노예로  부려 먹을 수 없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의 영혼과 정신과 육신을 완전히 통치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안에 완전히 들어오고 나니까 아직도 그 밖에 있는 자들은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진 것이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을 때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는 스승과 마지막까지 같은 길을 걸어갔을 뿐 아니라 스승의 마음마저 자기 마음에 품었던 것이다.

신자가 단순히 이웃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고 온유하고 의롭게 되려고 노력한다고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 삶과 인생의 외적 행로가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박사의 그것과 닮을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심장 없이는 예수를 닮을 수는 없다. 삶과 인생을 바꾸려 노력하기 전에 자신의 존재부터 예수님의 보혈로 완전히 씻음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 있어야 한다.  

성자가 되려 하지 말라. 예수를 닮으려 해라. 마찬가지로 예수의 행적이 아니라 그 마음을 닮아야 한다. 성경이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하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빌2:3,4)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썩어빠진 영혼이었음을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신자는 단지 먼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다. 불신자는 우리와 모든 것이 똑 같되 아직 그리스도의 광채가 그 영혼에 비취지 못한 것만 다를 뿐이다. 내 영혼에 비췬 그리스도의 광채가 너무나 귀한 보배임을 절감하기에 불신자를 보면 자연히 안타깝고 애통해져야 한다. 주위에 연약한 성도들 또한 그 외모를 보지 않고 주님 안에서 다 같이 불쌍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남들더러는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대신에 자신은 그를 위해서 주님 앞에서 울어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예수를 닮게 된다. 또 그러면 주위 사람들 모두가 우리 얼굴에서 예수님의 광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는가?

4/10/2009
유타대학촌교회 10/6/1996 주일 설교


김순희

2010.04.15 12:30:12
*.160.176.34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잣대가 되는 것 같다.
나의 영적상태는 나의 잣대로는 괜찮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전 존재가 씻김 받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도
관념으로 이미 이루어졌다고 착각함에는 자기의 잣대로 재고 있기에 그런 것 같다.

관념적인 것과 실체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십자가의 은혜가 이렇게 꼬~옥 개인적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대충, 너무나 쉽게만 넘겨버리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아니 그런 목회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날마다순종

2021.01.08 16:00:46
*.14.99.253

예수님의 그 한량없는 긍휼하신 마음을 닮아 그 마음 저도 품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늘 구하옵니다. 그리 도와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성자가 되려 하지 말라. 예수를 닮으려 해라. 마찬가지로 예수의 행적이 아니라 그 마음을 닮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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