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고난을 이긴 첫째 비결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저희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엘에이의 집사님 부부의 개인적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겠다. 제 홈페이지에 칼럼을 연재하는 분으로 이미 본인의 사정을 그 칼럼에서 진솔하게 많이 밝혀 놓았기에 말씀드려도 될 것 같다. 그 부부에게 작년 말부터 올해에 큰 고난이 한꺼번에 닥쳤다.
남편은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갑상선의 암이 자꾸 재발하여 네 번째 수술을 받았다. 은퇴하여 사회보장연금을 받을 수 있는 67세가 되려면 몇 년이 남았다. 미리 은퇴하면 연금 액수가 대폭 준다. 그 나이에 다른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서 Uber 택시를 몰았는데 최하 하루 12시간 6일간 꼬박 운전해도 한 달에 2-3천불이 고작이다.
집 모기지도 갚아야 하고 엘에이 생활비가 엄청나서 턱없이 부족한 판인데 아내마저 이번에 저희가 방문했던 바로 앞 달에 해고당했다. 장가간 아들이 손녀를 낳았는데 너무 미숙아인지라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멤피스로 돌아오자 여자 집사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남편이 네 번째 수술 후에 부작용으로 기침이 끊이지 않아 정밀 검사를 했더니 다시 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난감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마치 욥이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에게 물어왔으나 저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막막해서 아직 답을 못하고 있다.
정금 같은 신앙?
욥은 알다시피 졸지에 자식을 다 잃고 본인도 불치병에 걸려 큰 고통을 겪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욥과는 정도가 다르지만 비슷하게나마 큰 고난들이 겹치는 일이 가끔 있다. 최소한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고난이나 문제를 한두 개씩 안고 있지 않는 가정과 개인은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욥기를 읽고 다시 힘을 얻는다. 특별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는 말씀을 붙들고 고난을 이긴다.
하나님이 나의 성장과 유익을 위해 두들겨 패시는데 내가 발버둥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내 믿음이 자라는데 방해만 될 것이다. 욥이 입술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니 신자 체면이 있는지라 자꾸 속에서 치솟는 불평과 의심을 죽이려고 노력한다. 언젠가는 이 고난이 끝나고 하나님이 욥처럼 큰 복을 주실 것이며 그러다보면 내 믿음도 자라 있겠지 굳세게 다짐한다.
그러나 솔직하고도 엄밀히 따지면 이는 “세월이 약”이라는 불신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아주 좋게 해석해야 믿음을 고난에 대한 면역력 즉 맷집을 키우는 것과 동격화한 셈이다. 의지력과 끈기의 싸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고난을 당하면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의심 원망하거나, 스스로 자책감 내지 죄책감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것에 비교하면 백번 좋은 일이다. 또 믿음의 외적 결과는 인내의 모습을 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내가 정금 같은 믿음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욥이 단순히 참아낸 모습을 두고 성경이 정금 같은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욥기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욥 같은 고난이 닥치면 욥처럼 이겨내라는 것이다. 성경에 욥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 너무나 큰 은혜이자 축복이다. 정말로 살펴볼 내용이 심오하고도 풍부하다. 오늘 야외예배에 연관하여 간단하게 하나만 살펴보자.
따발총 같은 하나님의 질문들
욥은 그 극심한 고난 중에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은 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난을 받게 된 이유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따졌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대답은 않고 38, 39장에서 마치 기관총을 쏘듯이 자연세계에 대해 약 100개의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대부분이 오늘날의 첨단과학으로도 답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약 4천 년 전의 사람인 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욥은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은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데 무지한 말로 깨달을 수 없는 이치를 알려고 덤빈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주님께 항복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성만 인정했다면 그 또한 정금 같은 믿음이 아니다. 불신자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은 인정한다.
성경에 기록은 안 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는 동안 욥이 아무 생각 없이 시쳇말로 멍 때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받아 적을 틈도 없다. 일일이 질문을 기록하면서 곰곰이 따져보고 나름대로 답을 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면 계절과 온도와 습도 등의 차이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어쩜 욥이 그런 식으로 대답했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은 다시 왜 계절이 넷으로 구분되며 온도와 습도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되물었을 것이며 그럼 욥으로선 묵묵부답이 될 수밖에 없다.
상대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다음 단계는 이 질문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 따지게 마련이다. 왜 하필 이 질문을 이런 상황에서 하는지 궁금해진다. 하나님은 지금 의도적으로 욥의 생각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이해도 안 되고 억울해하는 그의 개인적인 고난에서 자연세계와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보라는 뜻이다.
욥이 당한 고난의 현실적인 일차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도적 떼가 습격해 칼로 종들을 죽였다. 태풍이 닥쳐 집이 무너져 아들들이 죽었다. 아담이 원죄로 타락한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도적 떼가 살인한 것은 죄인들의 책임이지 하나님이 고난을 일부러 준 것이 아니라는 데에 욥의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또 태풍이 닥친 것도 당시 피조세계도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거기다 태풍은 모조건 돌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발생하는 계절이 있고 며칠 전부터 온도, 습도, 구름, 바람 등의 징조가 있다. 아무리 욥 당시라 해도 그 징조는 알 수 있다.
그런 때는 튼튼하게 보호벽을 만들고 문을 걸어 잠그고 대비해야 한다. 고대에는 동굴이나 바위틈으로 피신해야 한다. 태풍이 몰려오는데도 욥의 아들들은 모여서 파티를 벌렸다. 인간의 부주의요 잘못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골탕 먹이려 혹은 인내력만 키우게 만들려고 병 주고 약을 주는 일을 반복해서 행하시는 그런 한가하거나 불합리한 분이 아님을 욥은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라도 대답했다면...
만약 욥이 100개의 질문 가운데 하나라도 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병을 고쳐주시고 복을 부어주었을 것이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도리어 욥에게 재앙을 막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을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욥이 한 개의 답이라도 얻었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성품과 속성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그분의 뜻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과의 질의응답 내지 논쟁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 질문 백 개를 다 대답할 수 있는 신앙의 영웅은 아무도 없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실상을 전부 깨달을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 쪽에서 당신을 보여주고 알게 해주는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알게 되는 것이 해변에서 모래알 하나 집어 드는 것만큼 적을지라도 정확하게만 알면 어떤 극심한 고난이 겹쳐도 혹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지라도 정금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도 대양처럼 넓은 우물과 같다. 그 물을 작은 쪽박 하나로, 아니 티스푼 하나만큼만 떠 마셔도 물맛과 성분은 항상 똑같듯이 우리의 갈증과 허망함을 충분히 해소하고도 남는다. 욥이 자기 생각과 시선을 자기 고통에서 자연으로 돌리자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그에게 임했다.
자연은 항상 그곳에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다. 바로 내 곁에 있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경이 실은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무료로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살아서 숨 쉬고 걷고 띄고 하는 모든 힘을 자연에서 무제한으로 공급 받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365일 24시간 단 1초도 우리에게서 떨어지거나 부족한 적 없이 동일한 은혜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을 배반한 적이 없다. 인간이 그러지... 심지어 우리가 기침하고 하품하고 이제 오늘 오후에 햇빛이 비춰 노곤해지면 기지개를 켜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하고 풍성한 섭리와 권능이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보일 반응으로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란다. 최근에 많이 회자되는 아주 뻔한 말이지만,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지만 살아보지 못한 날이다.”는 정말로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그분의 진리다. 이처럼 아주 평범한 일상사 가운데 그분의 진리는 있게 마련이다.
어떤 극심한 고난 중에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과 뜻을 갖고 함께 하신다. 우린 지금 당장 그 하나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또 그런 고난 중에 쌓은 체험, 실력, 지혜, 깨달음, 믿음 등이 반드시 나중에 그분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
질서정연한 자연
욥이 자연세계에 자기 생각을 집중하자 자연이 단순히 아름답다고 여긴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너무나 질서정연함도 깨달았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사계절의 구분에 따라 정확히 내렸다. 사계절은 평생에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래서 달력을 만들고 절기를 정해서 그에 따라 모든 생활의 조절이 가능했다. 오늘 해가 서쪽으로 져서 내일 해가 동쪽으로 뜨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나 완벽하시고 정미하신 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역사는 100% 완전한 진실이요 선함이요 아름다움의 집합체였다. 인간의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나아가 추하고 더럽게 오염된 모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달았다.
본문 5절에서 욥이 어떤 고백을 하는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는 백 가지 질문에 듣기만 하고 대답 한 마디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실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자기 시선을 자연에 돌리고 생각을 창조 섭리에 집중하자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발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고 했다. 욥도 자연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고, 특별히 핑계치 못한다고 했듯이 하나님을 만나 뵈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드는 삶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자연 속을 산책하며 하나님에 대한 영성을 키웠다고 한다. 욥에게 던진 그런 질문에 인간이 도무지 대답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주권과 섭리 앞에 겸허히 무릎 꿇고 감사와 경배를 돌리면서 그분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을 시인으로 만드신 하나님
푸른 하늘을 보면 가슴이 시원히 뻥 뚫린다. 초록 숲을 보면 마음에 안정과 평강이 생긴다. 노란 꽃을 보면 따뜻하고 포근함을 느끼고 붉은 장미를 보면 열정과 힘이 샘솟는다. 만약 하늘이 붉은 색이었다면 모든 인간이 정신 이상에 걸릴 것이다. 만약에 피가 흰색이었다면 살인에 무감각해져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하늘에 잿빛 구름으로 가득 차고 시커멓게 어두워질 때도 있다. 그럴 때도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실패와 잘못을 반추하고 광야 같은 인생길에 대해 고뇌 갈등하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색깔을 구분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뿐이다. 나아가 그 구분된 색깔의 의미가 실제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자연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존재도 인간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예술가로 만드셨다. 예술적 소양이 전혀 없다 해도 이 아름다운 자연을 자신의 정원으로 삼아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해주셨다.
그 자연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한 번도 변함이 없고 또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는 사랑을 증거 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는 신자다. 신자만이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깨닫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사실은 인간이 그분께 받은 복은 이미 다 받은 것이다.
신자는 단순히 자연을 보고 아름답고 신비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어떤 큰 고난 중에도 요나단 에드워드처럼 자연을 산책하며 그분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져야 한다. 특별히 욥에게 던진 100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에게 던질 질문이 어찌 백 개뿐이겠는가? 자연의 신비는 정말로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 수억 수조의 질문도 모자란다.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직도 극소수뿐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조건 광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아직도 전혀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신비들이 합력해서 당신만의 완벽한 진선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완전한 사랑과 권능 속에 신자의 존재가 붙들려 있고 신자는 그에 힘입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요컨대 신자는 어떤 극심한 고난 중에도 자연을 보면서 시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욥기다. 실제로 욥기는 성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가서 형태로 기록되었지 않는가?
예의 엘에이 계신 여자 집사님의 질문에 그동안 이모저모로 바빠서 아직 답변을 못 드렸다. 아마 이 설교문을 볼 것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여전히 이것 하나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이 허락한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비록 해변의 모래알 하나뿐이라고 해도 아니 전혀 없다고 해도, 그분의 사랑과 권능은 온 지구상의 해변의 모래알 다 합친 것보다 더 많고 풍성하고 완전하다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 그 하나 말이다.
10/23/2016 (야외예배 설교)
어제 공원에서 가진 추계 야외예배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바람 소리와 기타 잡음이 들어갈 것 같아 녹음이나 녹화를 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오던 창세기 강해가 아니라서 이 사이트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