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3:28-33) 메뚜기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구약성경강해(23) / 민수기강해(13) - 가데스바네야의 반역(3)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8-33)
메뚜기 같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건을 세 번째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2주 전에는 모세의 믿음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이미 확실히 보장해 놓은 미래임을 알기에 그 전투과정은 전혀 염려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결과를 백성들도 미리 맛보라고 포도를 따오게 했으나 백성은 힘든 전쟁에만 신경 쓰느라 잘 차려진 잔치 상을 제 발로 차버렸습니다.
둘째로 지난주에는 열두 명의 정탐꾼들의 믿음을 살펴봤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 인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현재 되어져 가는 가시적 상황에서만 찾으려는 연약한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 증거를 보여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도 하나님은 그 증거를 보여주셨는데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극상품 포도를 하나님의 약속의 보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열 명은 강대한 적군만 보느라 포도는 보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잊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해진 탓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차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에 그들에게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소명의식이 희박했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살필 차례인데 33절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유를 그들 스스로 분명히 밝혔습니다. 열 명 정탐꾼의 말이긴 해도 전백성이 그 말대로 행했으니 백성들의 영적 상태인 셈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장대한 거인 족속인데 반해 자기들은 메뚜기 밖에 안 되며 그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뜩이나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데다 무기 체계마저 변변찮았습니다. 거기다 이제 개인별 체격조건에서도 너무 열등해 게임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싸워보나마나 패배는 기정사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가 승리는 보장되었으니 포도를 맛보려고 한 것과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상대적인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레 패배의식에 빠지는 것을 본문의 표현을 빌려 메뚜기 신드롬(grasshopper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환경만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문제와 고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기에 사방이 막혀 빠져나갈 방도가 아예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메뚜기신드롬을 극복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환경 자체를 조성하신 이가 그분이며 또 고난이 아무리 커보여도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커져 보이는가?
그런데 정말로 솔직히 각자의 지금까지의 신앙 체험을 되돌아볼 때에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이 가능했습니까? 또 문제와 하나님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커보였습니까?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에는 “그렇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데 이 문제 하나 해결 못해줄 리는 없지.”라는 믿음이 잠시 생깁니다. 그래서 정말 적극적 능동적 낙관적 긍정적으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꿔보려 노력했더니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사라졌습니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그 반대일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고난은 해결될 기미는 없고 다른 고난이 더 겹칩니다. 하나님이 자꾸 더 작게 보이다가 점차 잊어져 갑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니까 억지로라도 기도하지만 나중에는 기도할 힘조차 없어질 때가 종종 있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자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자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은 우리 생각보다 엄청 더 끈질기고 간교합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사고활동이 그렇게 순진하거나 순수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통제 못할 만큼 복잡하고 변덕이 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데스 바네야 거역 사건을 세 번째로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다 같이 여호와를 믿고 따랐음에도 모세 아론 갈렙 여호수아만 순종하고 나머지 전 백성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들 앞에 벌어진 상황은 동일했기에 그들이 서로 비교할 대상도 같았습니다. 그것을 분별하여서 판단하고 택할 영적 옵션만 둘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택 옵션이 둘 뿐이라도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기에 그 결과도 서로 상종할 수 없는 양쪽 끝에 도달하게 됩니다. 조금 더 좋고 조금 덜 좋은 것으로 나뉘는 것이 순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금 더 좋고 소중한 것을 차지하려고 어지간히 노력하는 정도로는 믿음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먼저 모세는 과정과 결과 중 결과만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하나님이 마련한 과정이며 하나님이 보장한 결과로 하나님 안에서만 그 둘을 비교했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 둘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승리의 열매에 시선을 집중한 반면에, 열 명은 강력한 대적에만 신경을 쏟았습니다. 두 명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 남아 있었으나 열 명은 하나님 밖에 나가려는 구실을 찾아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벌써 하나님 밖에 있으니 그런 핑계만 눈에 보인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와선 백성들이 자신들과 대적의 신체 크기만 즉, 인간적 조건들만 비교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모세 갈렙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고는 메뚜기신드롬에 빠져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환경과 비교해 봐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모세처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 온전히 들어와 견고히 서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환경과 하나님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서만 그분과 환경을 비교하는 것이 바로 그분만 바라본다는 뜻이며 역으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을 두고 언어유희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열 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따르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알곡보다 심판 날에 불에 태워질 쭉정이 교인들이 훨씬 더 많듯이 말입니다.
평가가 믿음을 결정 짓는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둘로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 땅의 거민이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며 심히 크고 아낙 자손을 보았다는 것(28절)은 보고(報告, report)입니다. 아낙은 가나안의 원주민으로 체격이 장대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미국으로 치면 아낙은 인디언이고 가나안 칠족은 나중에 땅을 차지한 유럽계의 여러 백인 민족인 셈입니다.
보고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열두 명의 보고는 일치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도 가나안 방어 태세가 견고하다는 데에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메뚜기신드롬에 걸렸습니까?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惡評)하였기 때문입니다.(33절) 평가(評價, evaluation)는 객관적 사실을 분석하여서 자기 의견을 첨부하는 것입니다. 악평했다는 것은 부정적 비관적인,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보고와 평가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가를 시작하자마자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의 신장이 장대했다고 합니다.(32절) 아낙 자손만 거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앞 28절에서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고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라 크게 놀랐다는 뜻입니다. 전부 다 거인이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구태여 아낙 자손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29절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이름을 다 거명하는데 그들이 거인족속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가 32절 끝에 와서 아낙만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이 순간적으로 전부 거인족속으로 둔갑했습니다. 나아가 33절에선 그런 허풍이 더 심해집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라고 합니다.
네피림은 창세기 6:4에 딱 한 번만 언급된 노아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포악한 거인 족속을 말합니다. 그러나 네피림이 아낙 자손의 선조이라거나 여타 어떤 연결 고리도 성경에 설명이 없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가뜩이나 전쟁이 치르기 싫었던 차에 그 구실로 삼으려고 자기들 마음대로 끌어다 붙인 것입니다. 모든 족속이 거인 족속일 뿐 아니라 네피림 슈퍼 거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낙 자손이 장대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다윗과 싸운 골리앗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 사십년의 형벌이 끝나고 다시 진군할 때에 가장 먼저 바산 족속과 싸워 이깁니다. 바산 왕 옥의 철침상의 길이가 아홉 규빗이었습니다.(신3:11) 미국 NBA프로 농구선수들이 평균 6피트(약 2미터)에 비하면 아무리 침대를 여유 있게 만들어도 4미터가 넘으면(45.6센티 X 9) 엄청난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 컸기에 성경에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나중에 사울 왕 때에 블레셋 족속과의 전투할 때에 가드 사람 골리앗 한 명 때문에 골치 아팠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부 메뚜기 같고 그들이 전부 골리앗이었다면 그렇게 오래 대치할 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클 정도로 장대했으며(삼상10:23) 블레셋도 함부로 얕보지 못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거짓
열 명의 정탐꾼의 평가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적군의 상황을 과장한 것을 넘어서 객관적 사실을 완전히 거짓말로 바꾼 것입니다. 가나안 군대 전부가 골리앗 같은 자로만 이뤄줬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런 거인은 극소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산 왕 옥도 골리앗만한 거인이었음이 틀림없었으나 이스라엘은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광야의 형벌이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각오와 믿음으로 진군했기에 바산 왕 옥이 그 앞에 감히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소년 다윗이 할례 없는 족속이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한다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골리앗과 맞서서 물매 돌 한 방으로 즉사시켰지 않습니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백 년간 혹독한 육체노동만 평생을 하며 애굽의 노예로 지냈습니다. 로마의 검투사들이 거의 전부 노예 출신이듯이 이스라엘도 틀림없이 아주 강건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신장이 조금 작았을지 몰라도 신체 조건으로 따지면 결코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사울같이 일부 거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 열 명의 거짓말에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 네 명을 제외한 60만 명의 장정이, 또 그 가족 모두가 다 속아 넘어갔습니다. 단순히 거인들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이 신장이 장대하다고 했습니다. 군인이 아니라 아예 백성 전부가 슈퍼 거인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군인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일대일로 붙어서도 어차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그들은 미국 농구 NBA 올스타 급이고 우리는 중학교 농구팀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 시합을 해볼 엄두라고는 전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단순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열등감에 빠져 패배의식에 젖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악평은 이스라엘의 절대적 열세를 넘어서, 싸우면 무조건 전부 다 전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거짓말을 했기에 역사상 최대의 거역이 따른 것입니다.
백성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정도가 아니라 요즘 자주 화두에 오르는 공황(panic) 상태에 완전히 빠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시커먼 그림자가 이스라엘 진 전체에 드리워진 것입니다. 열 명의 거짓 선동에 모두 이백만이 넘어갔습니다. 알게 모르게 무시무시한 흑암의 그림자가 뒤덮은 것입니다. 단순히 상대적 열등감으로는 온 백성이 밤새도록 울부짖을 정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모든’이라는 단어 하나
그런데 이와 똑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이 이전에도 있었던 같지 않습니까? 어딘가 많이 들어본 거짓말 같지 않습니까? 바로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이 이브를 속였을 때입니다. 지금 그런 동일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확실히 경고했습니다.(창2:17) 사탄은 뱀의 입을 빌려서 이브에게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모든’ 실과를 먹지 못하게 했느냐라는 질문을 슬쩍 던졌습니다.(창3:1) 하나님은 선악과 하나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과일은 먹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브에게 마치 모든 과일을 못 먹게 하는 하나님인 것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여서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는 꼬투리를 심어준 것입니다. 이브는 “하나님이 왜 모든 과일을 먹게 하지 않았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한다면 모든 과일을 먹게 허락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했어야지?”라는 식으로 생각이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만 안 먹으면 되는데도 ‘모든’이라는 단어에 온 마음이 빼앗겨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못 먹게 한 하나님인지라 우리가 하려는 모든 일을 독선적으로 통제만 하려 한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사탄에 대한 이브의 답변에 하나님에 대한 그런 의심과 불만이 묻어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먹지도 만지지도 말게 했다고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만지지 말라”는 말까지 자기가 첨부했습니다. 그만큼 불만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정녕 죽는다”는 경고를 “죽을까 하노라”라고 변개했습니다. 먹어도 안 죽을 수도 있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허용해야 할 것이며 그래야만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그 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악과를 따먹더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자기가 하나님 대신에 단정 지었습니다. 이브의 의심 불만에 완전히 불을 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녕 죽는다는 계명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정반대의 뜻으로 둔갑시켜버렸습니다. 사탄은 아주 간단하게 인간을 속였습니다. 한 가지만 금지한 것을 ‘모든’이라는 단어 하나만 사용해서 마치 모든 것을 금지시키는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장대한 아낙 자손이 있었고 그중에 골리앗 같은 소수의 슈퍼 거인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처음 보고할 때부터 아낙 자손을 발견한 사실을 맨 먼저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움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의 싹이 튼 것입니다. 그리고는 악평하여서 ‘모든’이라는 단어 하나만 사용해서 가나안 백성들 전부가 골리앗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이 이제는 완전히 패닉으로 변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정녕 승리를 주실 것이므로 미리 포도 맛을 즐기자고 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모든 가나안 백성이 슈퍼맨이므로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정녕 패배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뜻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밖으로 나간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브가 사탄의 편으로 완전히 넘어가서 품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택해서 사랑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주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한 대로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하나님이어야만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방망이를 하나님이 흔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자기들의 노예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을 벌써 떠난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환경을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했다면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은 너무나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의 반응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잘못은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가나안이 강력하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갈렙은 백성을 안돈시키려고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 앞에서”라는 말을 먼저 기록합니다.(30절) 총사령관에게 잘 보이려 아부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모세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이며 백성들도 모세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한 대로 모세는 당연히 승리할 것이므로 전투 과정은 전혀 염려하지 말고 결과인 포도를 즐기자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가 백성에게 한 말은 또 “지금까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시 받은 내용이 한 번이라도 실현되지 않은 적이 없지 않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를 보면 그분의 권능과 역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고난 중에도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였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해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열 명의 아낙 자손을 보았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들은 이미 이 전쟁에 대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장에서 모세가 광야의 형벌을 마치고 새 세대들과 가나안으로 다시 진군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회상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이런 진술을 합니다. 가데스 바네야에 처음 이르자 모세는 하나님이 선조 때부터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이 우리 앞에 있으니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서 얻으라고 명령합니다.(신1:21) 결과는 확정되어 있으니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얻는다고 독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대로 따르지 않았고 정탐꾼부터 보내자고 요구했습니다. 성경은 그 요구를 “너희가 다”그랬다고 합니다.(신1:22) 모든 백성이 그 때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에게 투철한 소명의식이 없었고 오히려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서 정탐했기에 부정적인 것만 보이고 또 그것만 침소봉대하다 못해 아예 거짓말로 선동한 것입니다.
그 땅을 차지할 생각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32절에서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 즉, 아무 쓸모없어서 구태여 차지할 필요 없는 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선악과 금령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이 세상은 전부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분이 거룩하게 통치하므로 그분 밖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스스로 자존하시는 유일한 존재일 뿐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나오니까 그분을 등지는 순간 바로 죽음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상황에도 오직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사건과 연결시키면 고난을 하나님과 비교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은 아예 비교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분과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만 들어오면 영원한 생명이요 밖에 나가면 바로 영원한 죽음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분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런 분이 약속했기에 그 약속대로 주저하지 말고 들어가서 취하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모세 앞에서 그와 같은 믿음으로 30절에서 “곧 즉,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라고 백성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이라고 두려움이 없었을 리는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어쨌든 아군의 죽음을 동반합니다. 그 죽음이 자기들에게 임할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정말 골리앗 정도 되면 모를까 전쟁 앞에 두렵지 않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명한 전쟁입니다. 그럼 두려울수록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산성이요 도피처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야 이전에 아말렉과 목숨을 건 전투도 해봤습니다. 따라서 가데스 바네야에선 전투에 대한 두려움 때문 만에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정말로 차지해야겠다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붙잡았어야 했고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열등감에 젖은 패배의식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그전부터 그분의 손을 붙들고 있지 않았거나 하나님이 억지로 그들을 끌고 온 셈입니다. 그런 상황이니까 사탄이 열 명의 정탐꾼을 얼마든지 농락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열두 지파의 두령들인 그들부터 패닉에 빠지게 만들자 이스라엘 전부를 죽음의 그림자로 패닉에 빠트리는 것도 사탄에겐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상대적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은 인생에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 그래서 크신 하나님을 환경이나 고난과 비교해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 바라보는 믿음으로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 밖으로 나가지 않을 믿음이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그분은 정말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실제로 나의 처음이자 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 밖으로 나가면 현실에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실패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죽음이라는 체험적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그분 안으로만 들어오면 아무리 나빠서 실패 내지 죽음 같이 보여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축복이요 기쁨인 줄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할 힘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더라도 주님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의심 불만 원망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내가 찾고 의지할 첫째 존재, 아니 마지막까지 그분만이 내 곁에 남아 있어야 할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고난이 평생 끝나지 않고 그대로 죽더라도, 다른 말로 아예 비방 멸시 핍박 죽음만 당하는 상황에 그분이 밀어 넣더라도 그분을 내 스스로 떠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떠나는 순간 곧바로 죽음이요 주님의 얼굴을 뵈는 순간 곧바로 생명이기에 원망 의심을 품고도 그분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믿음이 없어서 불순종한 것이며 그런 믿음 외에 메뚜기 신드롬을 해소할 방도는 없습니다.
5/5/2019
하나님이 명한 전쟁입니다. 그럼 두려울수록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산성이요 도피처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