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반대하지 않고 싫어했다.
사도행전강해 (18)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12)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
사도행전의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약속하신 사건이, 2장에서는 그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하여 이 땅에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설립되었고, 3장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여 사도들을 통해 복음이 활발히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 골자였다. 이제 4장에선 사도들이 처음으로 핍박 받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럼 뭔가 그 진행 순서에 차질이 생긴 것 같지 않는가? 예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이 실천되어 교회가 설립되어 한창 복음이 퍼져 나갔다면 그 다음에는 더 큰 부흥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사적으로 보아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유대인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 가운데로 인도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설립되자마자 핍박부터 받았다.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사도들이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보였다. 그 기적은 당연히 하나님이 일으켜 세운 것으로서 누가 봐도 분명 선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누가 일으켜 세웠든 간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면 모두가 축하해주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인간이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로선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제 4장에서는 갓 출현한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나타나야 하고 현실적으로도 신자들이 그분의 축복을 더 많이 받는 내용으로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큰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들을 칭찬 아니 보호는 못 해줄망정 오히려 핍박을 당하게 했다.
모든 일이 우리 상식과 기대와는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실제로 그분이 복 주시는 내용에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 교회가 핍박받기 시작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영광이 신자가 영광스러워지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신자의 영광과 다르다고 하면 대부분의 신자는 이렇게 이해하려 든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신자도 십자가를 지고 핍박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도 따지고 보면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께 항복하여 내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삶의 모든 부분을 그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시기에 그 인도하심에 완전히 내어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삶을 아주 세밀한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끌고 계신다. 신자가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깨닫든 말든 상관없이 그분의 통치는 당신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다른 말로 사도들이 지금 핍박 받기 시작한 것도 하나님의 정교한 프로그램 안에 입력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다시 신자가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믿음의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 신자가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의 계획가운데서 쓰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신자가 그분께 쓰임 받는 모습은 현실적으로 영광스러울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다. 아주 화려하거나 그 반대로 너무나 비참한 모습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전부 혹은 먼저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란 자기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의 영광에 동참했다는 것만으로 큰 영광으로 알아 감사할 줄 알게 된 자다. 핍박 받으며 쓰임 받았기에 편안한 모습으로 쓰임 받은 자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본인이 이해하거나, 제 삼자가 간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가 거룩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운 법이다. 인간으로서 그것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분이 베푸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만도 영광스러운데 직접 당신께서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이루시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영광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8:4-8)
다윗은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 대신 이 땅을 다스리며 또 그분께 경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만도 정말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그런 영광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실종해버린 인간 즉, 겉은 인간이되 그 속은 전혀 인간이 아닌 기형적 인간이 된 것이다.
반면에 신자는 어떠한 자인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 자다. 인간으로 참 인간답게 즉, 하나님의 자녀로 변모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분에 넘치는 영광인데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바꿔 말해 신자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복의 모습이 신자의 인간적 기대와 일치하지는 않는 것으로 그분께 의심과 불만을 가질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들어온 신자라면 그 일생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항상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다. 아니 신자의 삶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역사와 우주 만물의 운행도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문자 그대로 세상 역사는 그 분의 역사(History = His Story)일 뿐이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초대 교회가 왜 축복 대신에 핍박부터 받았는가? 과연 그 핍박이 정말로 하나님의 계획이었는가? 본문을 통해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의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일반 백성들은 사도들을 열렬히 따라 다녔거나 최소한 아직까지 반대는 하지 않았다. 관리들과 제사장들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가 가르치는 내용이 틀렸다고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잘못된 내용이 하나 없는데도 체포했다. 성경은 분명 부활하는 도를 “싫어하여”(2절)라고 표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싫다는 것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마음에 안 차거나 다른 특별한 사유가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인간은 옳은 것은 더 싫어하는 존재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단적인 예이지 않는가?
당시 이스라엘의 사대 종파 중의 하나인 사두개인들은 부활교리를 믿지 않았다. 그럼 더더욱 부활교리에 반대했다고 표현해야 논리적인데도 구태여 싫어했다고 말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귀족과 제사장들로 이뤄진 정치적 지배계급에 속했다. 양 손에 권력과 재물을 같이 거머쥔 기득권층이었다.
기득권층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체제 수호파이기 마련이다.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와 행사하고 있는 특권을 유지하려 들기에 개혁과 변화를 싫어한다. 종교적으로도 이전부터 내려오는 형식과 전통을 지키려 든다. 그 가르침도 자신들의 현실적 지위와 권세를 변호할 목적으로 항상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견지하려 든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직분을 고수할 필요성 때문에라도 모세오경을 가장 중요시했다. 또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일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자연히 부활도 부인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진리조차 체험, 묵상, 기도 등의 절차를 거쳐 검증하기보다는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로 무조건 부인부터 하고 본 것이다. 그들 내심으로는 어쩌면 부활을 인정하거나 믿고 싶은 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종교적 신념 여부와 관계없이 영생에 대한 소원은 다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의 도에 대해 마음을 열고 경청하거나, 따져보거나, 아니면 합당한 논리를 들어 반대해야 사회 지도층으로써 취해야 할 정당하고도 책임 있는 태도였다. 그 대신 무조건 싫어한 것은 사실상 자신들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사도들이 설교했던 장소인 솔로몬 행각(행3:11)은 당시 누구든지 와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허용된 장소였다. 마치 정치와 사상에 대한 토론에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종로의 파고다 공원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성전에 와서까지 부활 교리를 가르치니까, 다른 말로 유대교인들을 상대로 이단종교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사도들을 체포했다 해도 자기들이 정한 규칙을 스스로 깨는 짓이었다.
놀랍게도 성경은 사도들을 체포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너희가 무슨 권세로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누구나 무엇이든 증거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에서 증거 했는데도 누구 권세로 하느냐고 따졌다. 시쳇말로 허가증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한 번도 따지지 않았던, 아니 따질 수 없었던 문제를 갑자기 걸고넘어진 것이다. 선한 목자로서 양들에게 존경 받아야 할 제사장들이 갑자기 이리의 본색을 가진 독재자였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가만 따지고 보면 사실은 라이센스 문제도 아니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들어 부활의 도를 증거한 것이 핍박의 발단이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누구를 증거”했는지 더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증거해도 된다고 허락해놓고선 그 내용을 걸고넘어질 수는 없으니까 애꿎은 라이센스 타령을 한 것이다.
정치적 권력을 누리는 사두개인들로선 매사를 오직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관점으로만 해석하여 적용했다. 로마제국에 대한 소요나 민란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대가로 경제적 정치적 이권을 보장받았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증거하는 부활의 도가 정치적 소요로 진전될 폭발력을 충분히 지녔다고 그들은 판단했던 것이다.
특별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부활이 종막을 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첫 열매일 뿐이라고 증거한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부활이 어떤 신령한 능력을 지닌 한 젊은이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예외성, 일과성의 해프닝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 모두가 예수 안에서 부활을 맛보고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허락된 부활의 확실한 증거와 선례이기에 유대인더러 부활을 누리기 위해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2).
사두개인을 제외한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란 항상 하나님의 날, 심판의 날, 종말에 맞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최대의 영광이자 축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로 초대한 것은 이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사두개인들에게는 로마제국이 곧 멸망할 것인 반면에 다윗왕국이 회복될 것이라는 선포와 다름없었다. 당연히 정치적인 소요로 이어져 자기들의 기득권이 상실될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의 공사역과 승천 이후에 유대 사회의 일반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그 어떤 이유였든 하나님의 날을 대망하고 있었는데 반해, 그들의 지도자들 특별히 성전제사를 맡은 자들은 도리어 그날이 오는 것을 반대하는 말도 안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도 무엇이었는가? 거짓 지도자들이 겉으로는 율법과 성전예배 즉, 종교적 형식과 합리주의로 치장을 했지만 뒤로는 자기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보호에만 급급했기 때문이었지 않는가?
지금도 그들은 부활의 도가 틀렸다거나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말로 사도들이 거짓된 사상으로 민간을 미혹시키고 있기에 자기들이 나서서 참된 진리로 인도하겠다는 뜻은 전혀 없었다. 분명히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라고 따졌듯이, 기적이 일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했느냐가 시비의 초점이었다. 그래서 어떤 판결을 내렸는가?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17절)
사두개인들은 양식 있는 종교지도자로선 취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 잡아서 말도 안 되는 판결로 유도했다. 너희들이 부활의 도를 전하든, 앉은뱅이를 일으키든 아무 상관하지 않겠지만 오직 “예수 ‐ 메시야의 이름”으로만 증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오해받거나, 종교적 분쟁이 생기거나, 유대와 로마 당국에 반대하는 추종자만 만들지 말라, 한 마디로 자기들 이권에 영향을 주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이 기사를 접하면서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가? 그에 반해 사도들은 얼마나 억울한 일만 당했는가?” 정도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정작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도무지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은 진행시키고 계셨다는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운 정도가 아니다.
베드로는 어떤 자였는가? 대제사장의 비자‐여종에게도 비굴하게 굴었던 자다. 제사장 앞에는 더더욱 나설 수 없었던 비겁하고 소심한 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딴판으로 변모했다.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 제사장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 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정도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예수님은 증인이 “되어라”고 명령하지 않고 대신에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증인으로 행하게 하는 주체는 성령이며 사도들은 수동적으로 성령님의 주도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제사장 앞에서 담대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핍박을 자초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뻔히 고난을 당할 줄 알면서 어찌 맨 정신으로 쉽사리 그리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아니 온전한 믿음으로 행했을지라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뿐만 아니라 제사장 앞에서 담대하게 된 일들의 배후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셨던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으킨 기적과 방언의 궁극적 목적은 오직 그를 담대히 변화시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케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임해 예수님의 증인으로 담대하게 변모되었지만 그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땅 끝까지 이를 생각은 아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성령이 행할 두 번째 작업 즉, 땅 끝으로 흩으시는 일을 시작하실 참이었다. 핍박을 받으면 자연히 도망을 가게 되고 또 그러면 복음도 함께 사방으로 번져 나가게 될 것 아닌가?
혹시라도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예루살렘에서 도망가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성령님이 하신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4:1) 관원들이 와서 저희를 잡아갔다. 베드로는 결론도 못 내리고 설교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부흥회 마지막에 결신의 초대시간도 못 갖고 한창 설교 중에 경찰에 끌려 나간 셈이다. 그런데도 이미 성령이 역사하여 그 날로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가 오천 명이나 되었지 않는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 120명에서 오순절에 3천명, 지금 또 5천명, 그러다 행21:20에 의하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몇 명의 사도들의 인간적 노력과 수고로만 일어날 그런 역사가 아니지 않는가?
또 이 때로 부터 약 30년 후, A. D. 66년에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와 동시에 성전을 책임진 사두개인 가문도 완전 몰락하여 성경과 역사에서 아예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오로지 성전 예배를 담보삼아 로마에 빌붙어 잘 먹고 잘 살아 보려 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영원히 자기편이 되어서 성전을 지켜 주어야할 로마인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성전을 파괴해버렸다.
말하자면 더 이상 제사장직분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그들의 기득권은 산산조각이 되어버렸다. 사람과 세상 앞에 하나님을 믿는 본을 보여야 할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 대신에 세상권력을 의지하자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던 바로 그 세상권력으로 하여금 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셨다.
온전하고도 영원한 단번의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제사장인 사두개인들이 주도했다. 그분의 죽음은 무슨 의미였는가? 앞으로는 성전제사의 기능 즉, 사두개인들의 역할이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 사건에서도 사두개인들 스스로의 손을 빌어 자신들 직무의 종식을 선포케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는 언제 어디서든 그 모습 그대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정말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만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또 바로 그 사두개인들의 손을 빌어서 사도들을 땅 끝으로 흩으시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너무나도 놀랍고 신비하지 않는가?
태초부터 지금껏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드라마를 당신만의 신령하고 정교한 계획에 따라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각본을 쓰시고, 무대장치, 의상, 조명, 효과 모든 것을 마련하신 뒤에 인간들에게 각자 각자가 처한 시대와 상황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기셨다. 모든 역사의 실제 주인공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사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든 환대를 받든 그들 인생의 주인공도 역시 하나님 한분이시다. 그들의 전도 사역마저도 스스로 계획하고 연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슈퍼컴퓨터에 연결 시켜라.
신자란 어떤 자인가? 바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섭리와 주권 앞에 온전히 항복한 자다. 또 그 항복한 이후로는, 사실은 그전부터이지만,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슈퍼컴퓨터에 입력이 되어 한 치의 차질 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자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어 궁극적으로 복을 주시며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다. 단지 그 복이 나타나는 방법과 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뿐이다.
따라서 신자는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복에 관한 개념부터 바뀌어야 한다. 현실적 풍요와 안일의 모습과는 반드시 달라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환난과 풍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것 자체로는 하나님의 복도 벌도 절대 아니다. 신자가 어떤 특정한 여건이나 사건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사도들이 현실적으로 박해받는 것은 땅 끝까지 증인을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 과정, 그것도 외적 모습일 뿐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모든 약속의 권세와 영역 안에 붙잡혀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단 한 순간도, 정말 문자 그대로 침 삼키는 순간에도 외면하거나 모른 척 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붙들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크신 계획 가운데로 이끌어주시는 것만큼 신자에게 큰 복이 되는 것이 더 있겠는가? 그 계획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실패할 리는 전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통해 드러날 것 아닌가? 얼마나 대단한 일이며 당연히 본인은 기대감으로 벅차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즉, 환난과 핍박 중에도 말이다.
사두개인들은 순전히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기득권자들은 누구인가? 통계에 따르면 전 국민의 1/4 이 신자인데 서울 특별히 강남에선 그 비율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한국의 기득권자들의 상당수가 신자들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한국의 기득권층 신자들은 자기들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하기보다느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 신자들은 사두개인들보다도 더 교활한 모습일 수 있다는 뜻이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기에 한국 부자들은 잘 믿어서 교회도 부흥하고 천국 가는 자들이 많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잘 믿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은 잘 믿으면 하나님이 돈을 벌게 해주고, 병도 낫게 해주고, 아이들 대학도 붙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도깨비 방망이를 나눠주는 줄 착각하고 있다. 그것도 헌금 많이 한 자들 순서대로 고성능 방망이를 받을 줄 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실상이 그러하다. 또 그렇게 된 데는 물론 목회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교인들 쪽에서도 기왕에 돈을 많이 벌고 또 번 돈을 큰 탈 없이 잘 지켜보려는 심보도 촉진제로 작용된 것이다.
한국 기득권자들이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권리를 차지한 과정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정, 부패, 사기, 착취, 아부, 협박, 모략 등으로 그런 위치에 올랐지만 그들도 인간인지이라 양심의 가책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간혹 계속 이렇게 돈을 벌고 권력을 행사해도 되는지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보상받고, 용서받는 듯한 기분을 느껴보려는 것이다. 어차피 부정으로 돈을 벌었는데 까짓것 교회에 조금 헌금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언제든지 그 수십 배를 스스로 챙길 자신이 있는데다, 교회에서 회개하며 예배드렸으니 하나님도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겠지, 최소한 큰 어려움은 막아주시지 않겠는가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복주의 신앙을 가졌거나, 교회 출석하는 것을 보험 드는 것과 동일시한다. 물론 이는 부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많이 해당되는 사항이다. 또 그 반대로 한국의 부자나 권력자 가운데 순수한 십자가 복음의 신앙을 가진 자가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현실적으로 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신앙을 가지는 모든 자는 예수님을 못박고 사도들을 핍박한 사두개인과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의 폐해 때문에 즉, 죄의 용서를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종교개혁을 했다. 인간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절대 사함을 받을 수 없다. 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죄에서 구원을 얻어서 거룩하게 변모시켜서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절)고 했다.
그런데 서울 강남에 사는 한국 최고 엘리트들이 그 정도의 종교적 상식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헌금 조금 더 한다고 하나님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또 복을 더 부어주실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그러는가? 단지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자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꼴이다. 프로이드나 칼 맑스가 종교를 비하한 이유대로 믿음을 일종의 수면제, 진통제, 신경안정제로 착각하는 것이다. 새로이 시작하는 일주일을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기득권을 보호, 확장하자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성전제사 바친 것만으로 자기들 임무를 다한 양 생각하고 로마에 더 열심히 아부하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는 그렇게 시시한 종교가 아니다. 신앙이 온갖 마술 부리는 도깨비방망이거나,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해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허허 웃어넘기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직 십자가에서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흘리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 당신께서 죄에 대해, 악에 대해, 사단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분노하시고 저주를 쏟아 부으셨다. 당신의 그 의로 십자가에 정작 달려 죽어야만 했던 우리의 영혼과 삶과 인생을 송두리 채 변화시켜 주셨다.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흑암에서 빛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빛과, 축복과, 생명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 분이 우리를 지금도 붙들고 계신다.
요컨대 신자인 여러분은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절대 아니다. 죄악과 사단의 조종을 받았던 인생에서 예수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보이지는 않고 또 볼 수도 없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드라마에 캐스팅 된 주역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신자가 신자 된 복은 다른 어느 것보다 바로 이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도 아니요, 금과 은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핍박을 받거나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고통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분의 뜻 안에 살게 되는, 아니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을 향한 그분의 드라마에서 충실하게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전부를 그 분의 선하신 계획에 온전히 내어 맡겨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컴퓨터에 오류가 있을 리는 없다. 절대로 완벽하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두개인들을 통해서도 완벽하게 작동이 되었지 않는가? 여러분이 각자 인생에 대해 스스로 갖고 있으며 작동하고 있는 컴퓨터의 용량이 도대체 얼마만한가? 아주 크게 양보해서 기껏 IBM P/C 정도수준 밖에 더 되는가?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컴퓨터 용량은 그에 비해 어느 정도이겠는가? 우리 컴퓨터로는 그 용량 수치조차 계산도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로 좁혀졌다. 모든 것을 그분의 컴퓨터에 접속시키는 것 말이다. 아니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라면 이미 접속되어 있다. 문제는 항상 그 스위치를 켜놓는 일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늘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신의 권능으로 삼아야 한다.
그 결과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길을 안심하고 나아가 큰 소망을 갖고 온전히 맡겨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그 작은 인생 용량으로도 하나님의 크신 용량을 얼마든지 받아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나만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한 그분의 인생으로 바뀐다. 반드시 나를 통해 당신의 거룩하고도 영광스런 일이 이뤄진다. 우리는 단지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새로운 인생을 즐기며 누리기만 하면 된다. 무식했던 어부가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랐더니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의 심령에 찔림을 주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그런 인생을 말이다.
1/15/2009
(1996/6/23/ 유타대학촌 교회 주일설교)
저도 그랬습니다.
정말 나도 저도 그랬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졍결한 말씀으로 다시 배우지 않는다면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일 수 밖에 없는 신앙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