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행4:5-12)
사도행전강해(19)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5-12)
복음은 선포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법정에서 피고인 진술을 하고 있는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자. 대제사장의 하녀에게도 비겁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성령의 권능을 입고선 대제사장 앞에서조차 담대하게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 검사 겸 재판장 격인 제사장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라고 심문했다. 제사장 허락도 없이 설교했다고 엄히 추궁한 것인데도 그는 두려움과 주저함이라곤 전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다.
제사장이 베드로를 붙잡아 온 목적은 그를 협박해서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금지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 베드로가 오히려 그들을 추궁하고 있다. 또 추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적임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증거하면서 구원으로 초대하고 있다.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층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인 줄 알고 너희들이 십자가에 매달은 바로 그 분이 사실은 머릿돌 즉,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였다고 했다. 비록 너희들이 모르고 그랬을지라도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름을 믿어 구원받을 기회를 다시 줄 테니까 그대로 따르고 안 따르고는 너희 책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지금 그 약속이 당신의 수제자를 통해 실현된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권능의 진정한 모습은 초자연적 능력이기 이전에 복음을 확장하는 일에 아주 담대해지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도 오직 복음을 올바르고도 효과적으로 증거할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변증은 제사장의 질문에 대답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여 그들의 추궁에서 모면부터 하고보자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복음으로 설득하고 권유하고 있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 설득(persuade)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메시아라고 단순히 선포(proclaim)하고 있다.
비교 분석 하여 상대를 설득 권유하거나, 토론할 내용이라면 이미 진리가 아니다. 예컨대 1+1=2라는 진리에 무슨 사족이 따로 필요한가? 진리란 그저 진리로서 존재하는 법이다. 인간의 반응이 어떠하든 진리는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진리인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설득하기 보다는 선포되어져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죽이셨다는 것도 구태여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복음은 베드로 같은 사도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신자에게 설득 대신에 선포하라고 맡겨진 것이다. 진리가 외부로 선포되지 않으면, 꼭 말로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진리임이 증거 되지 않으면, 단순히 인간 관념의 영역 안에서 사장(死藏)되는 지식일 뿐이다.
복음에서 절대적 진리라는 본질이 퇴색, 변화, 실종되면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이유가 없다. 또 복음이 증거되지 않고 신자 속에 머물기만 하면 성령을 부어주셔서 담대한 권능으로 덧입힐 필요도 없다. 구원을 주기로 예정한 자를 죽기 직전에 그냥 조용히 구원해주면 된다. 다른 말로 복음을 선포 혹은 증거하고 있지 않다면, 최소한 그럴 소원마저 없다면, 스스로 신자인 양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 또한 신자가 인정하든 안 하든 진리다.
예수와 위인의 차이.
물론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원하고 또 실제로 열심히 전하고는 있다. 그런데 한두 번이라도 “제대로” -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확정적으로 선포한다는 뜻임 - 전해보면 불신자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받게 되는데 막상 마땅하게 대응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도 창조주가 있고 모두 죄인이기에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는 인정한다. 비록 그 구체적 내용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지만 큰 흐름에선 바른 방향으로 지향한다. 그러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진술에 이르면, 바로 그것이 진짜 전해야 할 핵심인데도, 상호 소통의 장이 아예 닫혀 버린다. 다른 말로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배척해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진리이거나 아니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고 말한 그대로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진리가 진리로서 인정되지만, 불신자에게는 예수님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한 가르침이나 사역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자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한 내용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 특별히 종교의 창시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와 예수님에 대한 그것이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좋아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의 인물됨과 업적에 대한 전적 부인은 결코 하지 않는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선 호감도의 차이는 없다. 온전히 인정하느냐 아니면 아예 불인정하느냐로 나눠질 뿐이다. 인정하는 자는 한 없이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인정하지 않는 자는 한 없이 싫어하고 미워한다.
성경대로의 예수님 되심은 합리적 설명으로 인간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 그분은 그야말로 절대적 진리 아니면 절대적 비(非) 진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히 역사적 위인의 반열에 분류시킬 수 없게 만들고 또 필연적으로 진리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전도할 대상자가 왜 이리 쉬운 것도 못 알아먹는지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중에는 콱 지어박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수시로 아니 거의 매번 토론과 논쟁을 거쳐 상호 궤변으로 흐르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납득시켜 예수 믿게 만들 욕심에 무리한 설명을 동원하고 심지어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식의 반 강제적인 협박(?)도 본의 아니게 해본다. 신자로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1+1=2처럼 너무나 명료한 진리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거의 대부분이 절대적 비 진리라는 냉소뿐이다.
바꿔 말해 예수님을 말로 설명하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의 내용조차 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듣지 않고는 복음을 알 수 없으며,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주면 상대가 깨닫고 믿으리라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독교 진리에 밝고 언변에 뛰어난 신자라도 말로서는 불신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전도가 주로 어떻게 결론을 맺는가? “거 봐라!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지 않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구세주란 증거를 대서 나를 납득시켜보라고, 그럼 내가 당연히 믿지 안 믿을 것 같아?” 자기를 설득시켜 보라고 요구하는 자에게 선포되어야 할 진리가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음은 당연하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바울사도만큼 논리정연한 사람도 없다. 그조차 전도에 대해 어떻게 실토했는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 이뤄진다고 했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진리란 설득되어질 성질이 아니다. 이해해서 납득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확정된 명료한 사실(Fact)로서 신앙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 사실은 알기만 하면 그만이지 구태여 믿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 이성적 논리와 상충되는 즉, 말도 안 되는 엉터리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인간 이해력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에 속한다는 뜻일 뿐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라면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를 인간에게 밝혀 보여주거나 심어 주어야 한다. 비유컨대 어린이가 미적분 수학문제를 풀려면 그 지성이 타고난 천재이든지 교육을 받아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은 더더욱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전달되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온전한 믿음은 결국 그리스도 진리 안에 들어와야만 생긴다. 역으로 또 온전한 믿음이 생겨야 그 진리가 이해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논리적 궤변이나 괜스레 멋지게 표현한 말장난이 아니다. 인간 이성을 초월한 영역 즉, 인간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온전히 비춰지면 복음이 아주 쉽게 이해되어져 진리로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이 성령으로 신자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는 은혜는 초자연적 신비이기에 그 구체적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구원을 얻은 신자 모두에게 일어나는 실제적 체험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복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능력”이기에 성령이 역사하면 반드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1:16,17) 된다.
더 심각한 신자의 오류
문제는 교회 밖의 불신자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성령이 간섭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들이 솔직히 아주 많다.
예컨대 기독교의 근본교리라고 하니까 아무 반발 없이 막연하게 수용해 버린 교인들이다. 혹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해 납득되어 진리로 받아들인 교인도 있다. 그래서 그분이 가르친 계명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친 교인들은 예수가 기독교 교리나 성경의 문자적 기록 속에만 갇혀 있지 살아서 자신과 동행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또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그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당하면서까지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어찌 안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는 교인도 있다. 유사 이래 이런 위대하고 의로운 분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을 감성적으로 보면서 그 최고 선행에 보답하기 위해 믿는다는 식이다.
이처럼 예수님께 감성적 도덕적 종교적 측면에서 영향을 받아 믿은 교인들도 교회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기에 겉으로 봐선 아무 문제가 없고 아주 경건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가 불신자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십자가의 도가 어디까지나 기독교 특유의 사상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니까 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또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에게는 어떤 정서적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도 한다. 예수는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일 뿐 나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감성적, 도덕적, 종교적 측면에서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인이 불신자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고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아주 틀렸다.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일대일의 연결 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확고한 인식이 안 되어 있다. 하나님이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이름으로 예수 말고는 주지 않았음을 머리로만 믿지 그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지 않는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대신해 그 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영생을 얻었고 오직 그 분의 의로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게 되었다는 처절한 고백이 자신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위에서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고 말한 뜻은 두 가지다. 우선 교회의 모든 일들을 자기가 믿은 방식으로만 접근하려 든다. 조금이라도 감정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감동을 끼치지 못하거나 틀려 보이면 크게 잘못되었다고 물고 늘어진다. 그보다 진짜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과 개인적인 연결 고리가 없기에 아직은 구원 받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감히 단언컨대 신앙 상의 모든 오류는 자기 스스로 예수를 믿은, 다른 말로 예수가 자기를 구원해 준 것이 아닌, 데서부터 발발한다. 간혹 불신자들도 예수를 믿어보려 시도는 해보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지 않는가? 예수를 감정적, 도덕적, 종교적으로만 믿었던 교인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하늘에 있는 예수에게 올라간 것이지 하늘에서 예수가 직접 자기를 찾아 내려오셨다는 확신이 없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을 절대 방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이 인간이 땅에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 진리를 깨닫게 한 것도 구원 이후에도 하나님이 인간 각자와 개인적 관계를 갖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원을 개인적 체험으로 갖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다. 신자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는 별도로 예수님이 그 신자를 알고 계셔야만, 또 그런 사실을 신자도 확신할 수 있어야만 구원은 성립된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절대로 인간의 감정적, 도덕적, 종교적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그런 반응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려 들어선 진리가 제대로 진리로서 인식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선 아무리 큰 열정을 갖더라도 진리가 더 진리다워지거나 덜 진리 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과 인격적이고도 체험적 대면이 즉,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주는 성령의 거듭남 없이는 절대 십자가가 자신의 전부를 걸만한 진리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이후에 달라진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게 된 이후에 가장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성령이 오신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순절에 120 여명의 제자들에게 방언이 터진 것이나, 지금 베드로가 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 천하가 공지(共知)하는 너무나 수치스런 사실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보았고 갈릴리에 가서 기다리라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그 잠시도 참지 못하고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
예수님은 그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면서 제자로 불러내었다. 그는 그 말씀이 오병이어 같은 기적과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는 권세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일로 달성 되었다고 착각했다. 또 스승이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워 왕이 되고 자기도 직속 고관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줄 기대했다. 그러나 스승이 허무하게 죽게 되자 저주하면서까지 배반했던 것이다. 어쩌면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언행이 자기 기대에 못 미치자 사람 낚는 것은 포기하고 고기 잡으러 갔을 지도 모른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당신께서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라고 가르친 의미를 절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고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확하게 볼 수 없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하실 역할을 부연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인간이 예수님의 공로에 감정적 도덕적으로 감동하고 종교적으로 납득 동의한 후에 스스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 것 자체가 여전히 자기가 한 일일 뿐이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해주신 일은 하나도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간더러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력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 처절하게 깨닫도록 해 준다.
무식하고 비겁했던 어부 베드로가 담대한 복음의 전도자로 변모되자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 약속대로 당신을 믿지 않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제사장마저 담대하게 책망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야말로 사람을 낚는 진정한 어부가 된 것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비로소 자신의 영적 실체를 똑똑히 깨닫고 평생을 두고 예수만 따르는 자로 바뀐 것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진리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고난과 죄와 사망 가운데 비참하게 지내고 있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더러 “너희 스스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의로워지도록 잘 해봐! 죽어서 내 앞에 오면 그 때 가서 내가 판단해 줄게.”라고 방관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인간을 구하려 오히려 죄인의 모습이 되어 이 땅에 스스로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여럿이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나님의 입장에 대입하면 인간더러 모든 수단을 강구해 스스로 구원해 보라고 방치해 둔다는 뜻이지 않는가? 정말 열심을 갖고 감정적, 도덕적, 종교적인 맥락에서 주님을 십자가 처형장의 마당에까지 따라가며 스스로 구원 얻어 보려 했던 베드로마저 무참하게 실패했지 않는가? 반면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 도리어 거푸 세 번이나 용서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 온전한 평강과 자유를 얻었지 않는가?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가는 길은 절대 다양하지 않다. 단 하나의 길 뿐이므로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자기라는 존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인생이, 수고로 점철된 무거운 짐이라고 여기는 자는 단순히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기만 하면 된다.
불신자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을 전해 봐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차이 때문이다. 기독교가 증거 하는 예수님이 유일한 길(The Only Way)인데 저들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는 분명 유일한 길이라고 증거 했는데도 엉뚱하게 가장 좋은 길(The Best Way)로 곡해한다. 어째서 그 길이 제일 좋다고 하는가 하고 따진다. 그들로선 여전히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분석하고 납득해서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치관과 종교적 사상이 다 다른데 어째서 예수가 유일하거나 제일 낫다고 고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냥 다른 종교보다 더 좋거나 가장 좋은 길이었다면 구태여 핍박을 자초하며 복음을 전할 이유는 없다. 좋은 것(Good)이나, 좀 더 좋은 것(Better)이나, 가장 좋은 것(Best)이나 사실은 좋기는 매양 한가지인데 굳이 욕먹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세상의 어느 종교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을 한 사람씩 일대일로 만나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가르치는가? 아니 실제로 그런 성령의 거듭남의 체험이 일어나는가? 그래서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실체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앞에 무참하게 항복하는 것만이 믿음의 출발이자 구원의 길이 되는 종교는 또 어디 있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이는 결코 종교적 교리의 진술이 아니다. 자신의 철저한 깨어짐 없이는 어느 누구도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또 그런 확신 없이는 핍박을 각오하고 남들에게 예수님을 절대 유일한 길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는 지금 생명을 걸고 자기 스승조차 십자가에 매단 바로 그 대제사장에게 대들고 있는 셈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실 것이라는 확신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성령의 간섭이 절대 마취제나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처럼 절대적 진리 안에 들어와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권세자에게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할 수 있는 자로 바뀌게 해준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한들...
마찬 가지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 결코 여러분 스스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던 간에 각자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그분이 여러분 곁에 딱 붙어서 절대 놓지 않으시고 강권적으로라도 이 자리에 갖다 앉히셨다.
또 작금 교회가 이렇게 많고 신자는 흘러넘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가?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선포 안 해서 그러한가? 물론 전도를 안 한 까닭이 가장 먼저다. 전도를 안 한 이유도 분명하다. 교인들마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운명이었는데 예수를 만나 새 생명을 얻게 된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감정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진짜 내면을 속속들이 까뒤집어 살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예수 믿으면 인격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현재 보다 좀 더 나은 길(The Better Way)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하고 믿은 것이다. 자연히 전도할 때도 자기가 착각한 그대로 예수 믿으면 생활이 윤택해지고, 병이 낫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식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예수 안 믿으면 큰 일 납니다, 반드시 영원히 멸망합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라고 외치지 않고 그저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소개하며 설득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진짜 문제 되는 것이 또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길임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신자도 있다. 그런 선포에도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 이유는 하나다. 그 자리에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초자연적인 신비한 역사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요컨대 전도자가 말로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지만 실제 사는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유일한 길처럼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유일한 길임을 아무리 변증해 봐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전하는 신자가 불신자 시절에 똑 같이 그러했듯이 복음의 진리가 아예 말이 안 되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에서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 믿는 자들의 삶이 도저히 유일한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표시가 없다.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드물다. 성령으로 새사람을 입은 자답게 어떤 여건과 사건에서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는 모습이 실종되었다. 오히려 세상에 항복한 모습으로 산다. 주일 날 교회 간다는 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살고 있다. 그런대로 믿음이 있다고 해도 기껏 도덕적으로 조금 나은 정도 외에 십자가의 냄새가 전혀 없다. 신자가 아무리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해도 저들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 믿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된 것이다.
신자들의 집에 가면 가장 많이 붙어 있는 성구가 무엇인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아니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일 것이다. 그것을 본 불신자들은 “아! 예수를 믿는 목적도 결국은 사업 잘되게 해주고,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달라는 것이구나.”로만 이해하게 된다. 그 정도라면 굳이 예수 믿을 필요가 뭐 있나 싶어지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아는 자로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성결하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해지라는 뜻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자신의 썩어빠진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자로써 사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과 자유와 위로를 담대하게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한다.
요컨대 베드로처럼 만나는 모든 이에게 천하 이름 중에 예수 외에 구원을 주는 이가 절대 없다고 담대하게 증거 하는 길로만 걸어 가야한다. 무조건 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로 가면 절대로 서울로 갈 수 없다고 믿어야 한다. 아니 자신은 절대로 모로 가지 않겠다는 결단과 헌신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정말 바울처럼 예수 아니고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분 뜻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
예수를 알기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서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불신자보다 조금 더 선한 자리, 조금 더 편해 보이는 자리, 조금 더 형통해 보이는 자리가 신자가 서있어야 할 곳이 절대 아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지만 영원한 빛으로 향해 가는 길,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참 생명으로 가는 길로만 가야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기도 따라 죽고 그분을 따라 천국 소망을 안고 부활해야 한다. 세상의 형통과 안락이 목표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오직 예수에 의해 살고 예수를 따라 죽는 모습이어야만 한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더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그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아니 정말 자신이 죽었다 살아났다면 때로는 쓰러지더라도 여전히 그 길 위에서 그분을 향해 넘어지게 되어 있다. 말로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실제로 예수의 절대적 진리 됨이 증거 되어져야 한다.
모든 신자는 베드로처럼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부름 받았다. 또 십자가 구원의 진리 안에 들어온 자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이 신자 곁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 신자가 그 분의 손을 뿌리치지만 않으면 함께 사람을 낚을 동료 어부까지 붙여 주신다. 어떻게 따져도 신자가 담대하게 세상 앞에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증거 못할 근거는 없다. 당연히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할 염려도 없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신자는 언제라도 베드로처럼 이유 없이 핍박하는 세상 권세자나 꼴 보기 싫은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더더욱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게 하려는 뜻이다. 신자의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확신, 헌신, 실천의 파장이 그들에게도 미쳐지게 하려는 것이다. 최소한 그분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이라도 불러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다. 동등한 종류의 것으로는 관심이나 호기심을 얻지 못한다.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고는 말이다. 지금 당신은 복음을 설득 권유하고 있는가? 십자가를 선포하고 있는가?
2/5/2009
1996/6/30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