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버리고 귀만 갖고 있어라.
사도행전강해(25)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쌔 바리새인 가마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가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29-42)
분기탱천한 두 가지 이유
예수 이름으로는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두 번째로 어겨 유대 재판정에 선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은 계속해서 어기겠다는 뜻이다. 또 언뜻 보면 한 술 더 떠 그간에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고 덤비는 것 같다. 그 이름조차 거명하지 말라고 강요하지만 바로 너희가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피고로서 자기변호나 판결의 부당성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더욱 그분에 대해 바로 알라고 간절히 권하려는 뜻이었다.
너희가 그분을 죽였지만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다시 살렸지 않느냐, 그래서 조상 대대로 기다리던 메시야이지 않느냐, 우리 죄를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삼 년간 수제자로 따라 다녔건만 저주하며 스승을 부인하고 달아난 나 같은 자의 죄도 사해주신 분께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너희들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했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어서 성령의 간섭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권면이었다. 도리어 정반대의 격렬한 반발만 불러 일으켰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33절)의 원어상의 의미는 살기가 충천한 노기를 말한다.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극단적인 증오심이다. 그런 반응을 보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변론하면 할수록, 그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자신들의 죄가 더 엄하게 질책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도 현장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느냐 마느냐의,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을 것 같은, 사안이 너무나 놀랍고도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지 않는가? 베드로도 유대 공회와 직접 원수가 되어 맞서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같은 동족이기에 예수를 모르는 그들을 아주 불쌍히 여겼을 것이다. 순순히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각오로 변증한 말로 인해 한 나라의 최고 실력자와 등을 쌓는 정도를 넘어서 당장 그 사회에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지 염려해야 할 판국이 되었다.
지금 공회원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들이 그를 죽였다는 지적에 발끈했다. 이처럼 극도의 증오심이 생기는 이유는 기실 논리적이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다. 그들이 그런 극단적 반응을 보이게 된 감정적 이유가 최소한 둘은 더 있다.
첫째는 사도들이 분명 탈옥을 했는데도 탈옥수로서 심판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두었던 감옥은 성전에 딸린 일종의 보호 내지 구치소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간수나 감옥 시설물에 전혀 피해가 없고 탈옥수들이 여전히 성전 경내, 그것도 처음 체포되었던 바로 그 범죄(?) 현장에 버젓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게 예수의 이름으로는 증거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했고 감옥에까지 가두었는데도 아무 효력도 없었다. 사도들은 아랑곳도하지 않고 다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더 뜨겁게 호응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사도들의 말씀의 권세와 이적의 능력은 자기들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가만히 따져 보아라. 얼마나 약이 오르겠는가? 차라리 탈옥하여 멀리 도망갔더라면, 설령 그곳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하고 다시 체포하지 못해도, 한갓 잡범으로 취급해 대수롭지 않았을 것 아닌가? 대신에 자기들 바로 턱 밑에서 계속해서 약을 올리는 꼴이지 않는가?
둘째는 사도들의 변증 결론 부분에서 은연중에 영적 찔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기에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초대에 마땅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자신들의 죄책감이 없어지거나 줄기는커녕 사도들이 틀렸다고 입증할 근거 또한 전혀 없었다. 그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도 안할 수도 없으니 겉으로 말도 못하고 속에선 화만 더 끓어올랐다. 방구 뀐 사람이 먼저 화를 낸다는 속담처럼 잘못을 지적당하면 그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화부터 내는 참으로 썩어빠진 존재가 인간이지 않는가?
당연히 공회원들이 살기등등하여 벌떼처럼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리새인 중에 가장 존경 받는 가마리엘이 아주 합리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사도들의 행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들을 벌주는 우리가 그분께 대항하는 격이 되고, 만약 사도들이 틀렸다면 이전에 일어났던 두 경우처럼 자연히 소멸될 테니까 가만 놓아두자고 했다. 너무나 타당한 해결책이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들끓을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조용히 처리하자는 것이다. 문제를 크게 만들수록 오히려 민간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사도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갈 뿐이라는 계산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다시 강하게 위협하고는 풀어주는 것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 지어졌다.
정말 가마리엘은 현명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무슨 수를 동원해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은 공회의 권세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큰소리치는 자의 배경에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분이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다 모여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위협하여 풀어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산헤드린이 얻은 것은, 아니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꼴이 되었다. 사도들의 영향력이 떨어지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퍼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매 맞은 자들이 오히려 기뻐했다. 때리는 자들로선 더 크게 치미는 분노를 씩씩거리며 삭일 수밖에 없었다.
사도들은 성전이든 집에서든 날마다 예수의 이름을 증거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anytime, anywhere, anybody) 복음을 전했다. 재판 중에 제사장들에게도 전했듯이 말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했다. 그들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위대해 보이는가? 물론 사도들의 믿음과 담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막상 본인들은 어떠했을까? 전도는 물론 전도로 능욕 받는 일조차 아주 기쁘고 감사한 일로 받아들였다. 전도가 그들에겐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아예 몸에 밴 자연스런 일상사였다. 사람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대로 행했을 뿐이다.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였는가? 바로 하나님 본체이지 않는가? 세상의 어떤 군왕과 방백이 전하지 말라고 말려도 사도들에겐 전혀 씨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은 눈으로 직접 목격한(eyewitness) 진실을 넘어 실제 체험으로 겪었다는 것이다. 또 모든 이가 반드시 알아서 인생의 근본부터 변화시켜야 할 중차대한 일이기에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종교법정을 나오면서 진리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고 혼자 중얼거린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구가 둥근 것은 객관적 학술적 진리다. 어부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도로 완전히 탈바꿈했듯이 예수는 누구라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그 생각, 말, 행동 전부를 완전히 뒤바뀌게 만드는 분이다. 모든 사람이 주관적 체험적 개인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만나야만 할 분이었다. 채찍질이 베드로가 어부였을 때는 그를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겠지만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도가 된 이후로는 아무 쓸모없는 낭비였다.
우리의 현주소
지금 우리의 형편을 사도들과 대비해보자. 우리도 예수 그리스가 구세주임을 확신한다. 그들만큼 대담한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생명까지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슬그머니 꽁무니가 빠진다. 하나님과 사단과의 사이에 중간 회색지대가 없음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된 것 같지 않고 항상 어정쩡하다.
사실은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도 명확히 알고 있으며 그분을 믿는 믿음에 큰 하자가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깨달아 알게 된 그분의 뜻을 삶에 접목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잘못된 상황인식이다. 그분의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완연히 드러났고 또 성경 66권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보다 순종해야 하는 바로 그 단계에 결정적 하자가 있다.
바꿔 말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내용을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순종이라면 일단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핍박을 달게 받으면서 뭔가 거창한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다. 내 가정, 직장, 가진 것들을 희생하며 내 몸을 산제사로 바쳐야 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순종의 모습이다. 자기희생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순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순종은 반드시 자발적 의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스스로 희생이라고 간주될 만큼 강요된 선택이라면 복종 내지 굴종이다. 다른 말로 반드시 현실적 희생과 고난이 따라야 순종이고 혹시라도 축복과 영광이 따라오면 순종이 아니라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현실적 외부 상황은, 그것이 순종하기 전이든 과정이든 결과로 나타나든 불문하고, 순종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한 것은 무조건 신자의 개인적 욕심, 스스로의 뜻과 계획, 사단과 세상이 주는 것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런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 해도 말이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학위를 취득한 후에 서울 큰 대학의 교수직과 시골의 이름 없는 대학에 월급은 더 적은 신설학과 교수로 다 청빙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주로 후자를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안락한 생활이 조금 희생되더라도 시골 학생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은 분명 순종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교수 생활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고 결코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떻게 그 일을 하느냐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생길 시간과 돈의 여유를 하나님의 뜻, 다른 말로 그 교수직을 맡게 하신 목적에 맞추어 쓰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는 것이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을 아예 무시하고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밀어붙이라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전도함에 특별한 때와 장소와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고, 습성에 젖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전도하다 보면 핍박 뿐 아니라 의외로 적극적 호응과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희생이 전제 되어야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기 전부터 희생을 전제로 하면 벌써 인간의 공적이 쌓인다. 다른 사람은 희생하지 못했는데 자신은 과감하게 감수했다는 인간적 의가 발생한다. 순종하는 과정과 결과에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혀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참 순종이다. 쉽게 말해 복종과 굴종에는 항상 억울함이 동반하지만 순종에는 결코 억울함이 없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좋아서 택한 길에 억울함이 개입될 여지란 없지 않는가?
지금 신학교에 가있는 저희 교회 출신 L 집사에게 저는 희생하며 순종하라고 충고하지 않았다. 주의 종으로 헌신하겠다면 대체로 힘든 고난의 길로 들어섰으니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권면한다.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폐가 있다. 이미 고난의 길이라고 생각 되면 소명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목회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려움이 따르긴 한다. 그러나 이미 감사와 기쁨으로 기꺼이 자원한 것이다.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 예상한 고난은 엄밀히 말해 고난이 아니다.
대신에 저는 인간으로선 최고로 영광스런 길을 가게 되었으니 축하한다고 했다. 그리고 고난보다는 외로운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희생과 고난을 무릅쓰고 평소보다 몇 배의 의지력을 동원해서 하는 일이란 참 순종이 아니다. 순종은 오히려 남들이 잘 가지 않지만 본인은 너무나 그 길이 좋고 응당 가야만 하는 길임을 확신하기에 기꺼이, 최소한 억울한 마음은 없이 담담하게,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려움이 아니라 외로움을 각오하는 것이 순종이다.
여러분이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 연구소, 교수, 회사, 개인 비즈니스 중 어떤 일을 택해도 순종이다. 특별히 일할 때에 외적 환경과 보수에 상관없이 자기 내면에 평강과 기쁨이 분명히 생길 것 같은 일이면 된다. 정작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또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정말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자신의 믿음을 견고케 해주고 모든 부분에서 세밀하게 인도해 달라고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해도 참 신자답게 행하는 것이 순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을 봐주지 말라.
많은 신자들이 순종에 희생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까닭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꾸만 뭔가 자신이 그분의 일을 해드려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저는 제 믿음의 분량과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성경교사 정도면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목사가 되는 것에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받기로 결심한 것은 그런 판단이 바로 하나님이 직접 불러 소명을 주셨음에도 모세가 몇 번이나 사양했던 불순종의 모습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미세한 음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목회를 네가 하는 것이냐? 교회가 지금에까지 이른 모든 것이 네 능력인 줄 착각하느냐? 그 전부를 내가 한 것이다. 주의 종으로 내가 세웠으면 내가 주의 종답게 만들어 줄 것 아니냐? 눈물을 듬뿍 쏟게 하는 일도, 애를 먹이는 성도를 일부러 붙이는 것도, 연단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게 되는 모든 일이 내가 한 일이다. 너를 깎고 다듬는 것뿐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 이룰 일 모두가 내 책임이자 내 몫이다. 너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꺼이 따를 것인지 여부만 결정해라.”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걱정해주는 것 같다. 그분의 영광을 더 드러내려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고 여긴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시쳇말로 착각에는 아무 세금도 안 붙는다지만 너무나 잘못된 착각이다. 그 정반대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당신의 영광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께 쓰임 받는 도구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그분에 대한 사랑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될 만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가마리엘 교법사가 한 말을 잘 따져 보라. 그런 말을 하게 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도 물론 있겠지만 그 내용만은 정말 진리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아닌가? 그분은 오직 그분의 뜻대로만 한다. 유대 공의회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봤지만 실제로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게 만든 것도 그분이 하신 일이듯이 말이다.
그가 공회원들을 설득한 말이 결과적으로 사도들의 행적이 하나님의 일임을 인정해 준 꼴이 되었지 않는가? 이미 복음은 편만이 전파되어지고, 이적과 기사는 많이 일어났고, 기독교인 모임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 초대 교회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시기적으로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그것 빼고는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이미 강력하게 임하고 있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미 온전한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하에 이뤄지고 있는 법이다. 신자가 따로 그분을 위해 해서 바칠 일이 없다. 우리가 세상 것 무엇으로 갖다 바쳐봐야 그분의 영광에는 한 치의 가감도 없다.
그분이 모든 일을 당신의 전적 주권으로 하고 있다면 신자를 언제 들어 쓰시는가? 신자의 인격과 믿음이 다 갖춰지고 그 주위 여건과 돈에 여유가 생겼을 때인가? 아니다. 신자가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으면 된다. 순종코자 하는 의사가 선결 문제다. 절대 억지로는 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하나님은 사울더러 아말렉 사람뿐만 아니라 그 모든 소유까지 다 진멸하라고 명했다.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서 제사 드리기로 했다. 명령을 어긴 첫째 원인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바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을 위해 인간이 뭔가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그는 일단 제사만 잘 지내면 된다고 여겼다. 제사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만 오기에 그분께 순종하지 않고는 아무리 거창하고 거룩한 종교 행위를 해도 오히려 죄가 된다. 지금 여호와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렸는데도 사술의 죄이자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했다. 하나님 본인보다 제사에 능력이 있다고 여겼으니 제사는 당연히 우상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의사 자체가 없었다. 아주 잘 봐주어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뭔가 이루어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으로선 신자가 순종해주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우리 또한 주일 날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교회에 나온다. 믿음으로 제물을 들고 와서 제단에 바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진정으로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는지는 예배와는 별개의 문제다.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
성경에 나타난 완전한 순종의 모습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어쩌면 우리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예표가 되는 인간이 행한 순종도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여호와께 바친 모습은 인간 신자가 충분히 본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22:9,10) 아브라함은 번제로 바칠 아들을 결박했고, 단을 쌓았으며, 나무에 지필 불을 갖고 있었고, 급기야 시퍼런 칼을 머리 위로 올려서 곧장 내려칠 작정이었다. 제사의 형식만 갖추어서 죽이는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이려 했다.
바로 완전한 순종의 모습이다. 단순히 아들의 목숨을 바치려 했다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무조건 하나님의 뜻대로 당장 따랐다. 그저 시늉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다음으로 미룬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순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정말로 순종할 의사가 있는지 또 그렇게 따를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도 생명을 바쳤는지 안 바쳤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순종했는지 아니면 시늉만 하고 치우느냐의 여부다. 실제 칼집에서 날이 시퍼런 칼을 뽑아 종이라도 자르느냐, 영화 촬영용의 화려하고 커다란 칼을 들고 힘껏 바위를 내리치느냐가 다르다. 전자가 순종이라면 후자는 제사다. 후자는 소리만 컸지 실제 잘린 것은 하나도 없다. 칼날만 손상된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견고한 믿음으로 제물을 들고 제단 앞까지는 담대하게 나온다. 그 다음이 문제다. 정작 순종할 의사(意思)가 즉, 시행할 의지가 없다.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갖고 있는 소원은 의사가 아니다. 당장에라도 행동으로 옮길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 의사다.
성경이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그는 하나님께 받은 약속대로 행했다고 한다.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손이 하늘의 뭇별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었다. 이삭을 통해 후손이 나오려면 제물로 죽여도 다시 살려야 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거나 모든 잘못은 그분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따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 해놓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완전히 죽이려 했고 또 그러면 하나님은 부활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순종이란 결국 모든 일의, 특별히 순종하고 난 후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고 믿고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신자가 꼭 희생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적으로 그분의 책임이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희생이 더 많이 요구되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안 믿으면 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브라함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를 자꾸만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선택의 문제로 인식하기에 제대로 순종할 수 없다. 일의 종류를 감안하면 필연적으로 하고 싶은 일, 쉽게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심지어 생색나는 일 등으로 알게 모르게 분류하여서 그에 따라 순종의 세기와 시기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또 일의 종류를 감안하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드리거나, 최소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또 이왕이면 더 좋은 일을 해드려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그럼 우리가 그 일의 세부계획과 일정표를 마련해야 한다.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과 일정표대로 당신께서 당신의 일을 진행시키되 우리는 일군으로 부름 받았을 뿐이다. 그럼 그냥 무엇이든 하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것이 그분 책임 아닌가?
개가 인간보다 낫다.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성경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종이란 영어에 해당되는 단어가 마땅하게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루는 휘파람을 불자 애완견이 멀리서부터 꼬리를 흔들며 선교사에게 달려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모습을 본 한 원주민이 “너의 개는 귀만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는 당연히 ‘순종’을 ‘귀만 갖고 있다’라고 번역했다.
그렇다. 순종이란 하나님에 대해서 귀만 갖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분석하거나 따지지 않는 것이다. 입술로 불평불만을 터트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직 귀 뿐이다. 그분께 들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여 어서 말씀만 하시옵소서.”라는 자세로 일 년 365일을 사는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히브리 종은 안식년인 7년째에 자유를 주게 되어있다. 그러나 종이 주인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계속 종으로 남기로 하면 주인은 그를 가족처럼 받아들였고 종은 평생에 그 주인을 모시겠다는 서약으로 재판장 앞에서 귀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출21:6)주인이 말만하면 종은 그대로 순종하며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라는 표시다. 하나님은 신자의 주인이다. 신자가 하나님과 교제 동행함에 영영히 또 가장 먼저 소용되는 것은 순종이다. 기도는 그분께 귀를 갖다 대는 행위이며 믿음은 그 귀가 들은 대로 행할 수 있는 추진력이다.
우리가 아무리 근사한 제물을 들고 제단에 나와도 복잡한 머리나 가벼운 입술과 함께라면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온전히 믿고 신뢰한다면 순종만 하면 되는데 그 순종의 열매가 없거나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면 믿음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입술로 아무리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머리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부하고 있다면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구원조차 받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죄의 심판에서 해방 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영영토록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신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예의 선교사의 개처럼 오직 귀만 있는 것이 구원받은 가장 확실한 표시라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한 뜻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더 이상 인간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엇인가 이뤄서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 아닌가?
다윗이 장막에 둔 여호와의 궤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성전을 지어 봉헌하려 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17)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은 모든 책임을 당신께 온전히 맡기고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으로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원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잘 되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가 또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해드려야 한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니까 자꾸 더 잘하고 싶은 것이 문제다. 다른 말로 먼 앞날까지 미리 알아서 깨끗하게 마무리 될 일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나 하나님에게 기쁨과 영광이 될 것 같다.
물론 인생은 밤길을 걷는 것 같이 앞이 캄캄히 안 보일 때가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당장 내일도 예측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도 혹시라도 캄캄한 밤길인지라 앞에 낭떠러지가 있거나 맹수가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광조명탄을 수십 개 터뜨려 수십 킬로 전방까지 훤하게 밝혀주길 바란다. 물론 무조건 카펫이 깔린 탄탄대로로만 인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위험이 있어도 좋다. 그러나 최소한 오백 미터 앞에 강이 있다면 건너갈 수 있는 보트가 마련되어 있든지, 천 미터 전방에 허기진 늑대들이 모여 있다면 총을 쥐어 주든지, 바로 그 옆에 낭떠러지가 있다면 로프나 사다리가 달려 있는 것을 확실히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순종이 아니다. 아무 믿음 없는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미리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는 로봇이 순서에 따라 행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시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한 밤중에 혼자서 외출 시키면서 작은 손전등 하나만 쥐어준다. 기껏 해야 10미터 전방이 보일까 말까하는 전등이다.
그 손전등이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또 믿음은 순종하려는 의사다.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조그만 손전등 하나만 들고도 얼마든지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앞에 낭떠러지, 강, 맹수, 웅덩이가 있으리라는 것쯤은 안다. 모르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뿐이다. 그럼에도 손전등 하나 들고 하나님 말씀의 표시판에 따라 한 걸음씩 전진하다 보면 반드시 그분이 정해 놓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캄캄한 밤길에 혼자 불러내어서 작은 손전등 하나 쥐어 주고선 몰라라 하시겠는가? 어떤 절벽, 웅덩이, 강, 맹수도 하나님이 다 막아 주실 수 있기에 총이나 로프 같은 보호 장구를 주지 않은 것 아닌가? 정말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여 순종하는 신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 주신다. 반드시 그런 자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신자 쪽에선 하나님이 수십 킬로 전방을 안 보여줘서 순종을 못하겠다고 했다. 하나님 쪽에선 그 반대의 이유로 멀리까지 보여주지 않으신다. 낭떠러지나 맹수까지 다 보여주면 아무리 수십 키로 떨어져 있고 총과 로프를 쥐어 주어도 따르지 않기에 안 보여 주신다. 멀리 안 보여준다고 불평했다가 막상 훤히 다 보여주면 왜 이런 험한 곳으로 이끌고 가느냐는 불만이 안 나올 것 같은가? 하나님은 그것까지 아시니까 믿음이라는 작은 손전등만 쥐어 주고 순종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보여주지 않아도 당신께서 다 책임지고 또 그래서 한 걸음씩만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종의 본질
다시 말하지만 희생하면서 힘든 환난을 무릅쓰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억울한 희생이다. 자칫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는 종교 행위가 된다. 나아가 스스로 희생을 예상 하고 감내하면 이미 그 일은 자기 책임 하에 이루는 것이다.
갈 바 모르지만, 다른 말로 자신이 책임지는 부분은 하나 없이, 그냥 하나님께 안심하고 턱 맡기는 것이 순종이다. 우리가 연약한 지라 더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눈 찔끔 감고 그분의 뒤만 따르는 것이다. 순종은 자청해서 환난을 겪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과 나만의 동행인지라 외로울 따름이다.
순종을 한 마디로 가장 잘 설명해주는 성경 말씀이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16:6)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것이 순종이라고 한다. 말장난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군말 않고 하는 것이 순종이라는 것이다. 종이 주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종이 되기를 고의로 거절하는 것이다. 신자가 주인으로 삼는 분의 종이 되는 것이 순종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다. 내가 뭔가 일을 해서 바치겠다는 것은 이미 아무리 경건하고 의로운 일이라도 주인이 시킨 일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 된다.
바울 사도는 또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님 또는 의의 종이 되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순종의 종이라고 했다. 순종할 의사 자체가 없으면 아무리 믿음을 갖고 훈련하고 연습해도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순종의 종부터 되어야 한다. 무조건 하나님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또 그러면 자연히 의는 따라 온다는 것이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주저하고 따지고 있다면 과연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 것인가? 그분의 그분다우심, 능력과 사랑, 인도와 간섭,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 아닌가? 사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자신들의 담대함을 자랑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머리로 분석하고 입술로 따졌지만 이제는 귀만 갖다 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아니 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니까, 아직 믿음이 약하니까, 여전히 순종할 소원은 있는데 육신이 약해서 등의 생각이 드는가? 그럼 정말로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라. 진정으로 그분만 따를 의사가 있는지 말이다. 신자로서의 의무감이나,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당장에 행동으로 옳길 태세가 갖추어져 있는지 따져 보라. 만약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교환해서 자기에게 닥칠 희생과 손해가 조금이라도 두렵다면 믿음을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순종할 의사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주셨기에 이제는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주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사도들처럼 세상에서 사람들 눈치는 전혀 상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며 때를 얻으나 못 얻으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관계없이 주님의 자녀답게 바로 서는 것이 참 순종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꼭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4/8/2009
유타대학촌 교회 9/1/1996 주일 설교
오직 하나님과 호젓이 걷는 길이기에.....
사랑 받고 있음에 행복하여, 너무나 행복하여서
귀만 쫑끗 세우고 주님 앞에 잔잔히 미소 지으며
서 있는 삶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