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있는 신자들
사도행전강해(28)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였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행7:1-8)
율법을 어긴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
스데반이 거짓 증언자들에 의해 하나님, 성전, 율법을 모독한다고 참소 당했지만 전혀 평정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 눈에 천사 같아 보였다. 검사의 고소가 끝나자 재판장 격인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사실상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호통 친 것이다. 피고 스데반이 그 질문에 대답하여 자기변호를 시작했는데 본문은 그 첫 부분이다.
그가 한 피고인 진술은 그대로 그들을 향한 설교가 되었는데 사도행전 전체에서 가장 긴 설교다. 대적자들을 앞에 두고 한 설교인지라 말하자면 최초의 기독교 변증(apology)인 셈이다. 본문은 그 서론 중의 서두로 언뜻 기독교는 물론 자신의 변호와도 별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 학위논문처럼 아주 정연한 방어(Defence) 논리가 내포되어 있다.
검사가 고발한 표면적 죄목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담긴 뜻은 기독교로 인해 경제적 종교적 기득권을 상실할 가능성을 염려했고, 또 율법대로 제사지내야만 하나님이 임재하는 참 예배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데반은 공회원들의 그런 두 가지 속내를 간파하고 반론을 폈다. 하나님이 율법을 수여하고 성전 제사를 드리게 한 뜻은 이스라엘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려는 것이었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처음부터 되돌아보아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가 내린 변론의 결론을 보라.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아니하며, 오직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데에 율법의 근본 뜻이 있지 형식적으로 지켰다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 성령을 거슬렸고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했던 조상들의 전철을 따르느냐고 다그치는 말로 끝맺었다. 율법을 잘 지키라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너희가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고 말한 것이다.
쉬운 말로 스데반은 너희가 자꾸 모세, 율법, 성전을 들먹거리는데 그럼 진짜 한번 정확히 따져 보자면서 변론을 시작한 것이다. 그럼 모세부터 말하면 될 텐데 왜 율법과 상관없는 아브라함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을까? 그 이유는 영광의 하나님이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그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었고, 모세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 언약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일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며 몬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당신께서 그를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모든 언약을 정하시고 당신께서 보증하셨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 언약에 참예하여 하나님께서 실현하실 은혜를 받아 누리면 되었다.
이 언약은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주셨다. 율법을 실제로 준수해야 할 백성들이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율법의 수여는 단지 시기적으로 미뤄진 것뿐이지 이 은혜 언약 안에 성전 제사까지 이미 다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로 당신의 공동체, 교회를 설립할 것이다. 그래서 그 백성 삼음의 증표로 할례의 언약을 모세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미리 주었다고 스데반은 밝히고(8절)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성전이 세워지기 근 천 년 전이었고, 율법이 오기 오백 년 전이었고, 스스로 할례를 시행하기도 전이었다. 결국 스데반이 지금 서두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택하신 자에게 믿음을 허락하사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는 것이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지낸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너희가 예수님의 복음 안에 들어온 자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도했는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 후손인 우리도 그의 온전한 믿음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촉구한 것이다.
물론 유대 공회원들이 비록 모세 율법과 성전 제사 지상주의에 빠져 있긴 했어도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그 언약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과 스데반의 차이는 언약을 믿긴 믿되 구체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는 부분이었는데 영적으로 미치는 영향과 결과가 정반대로 갈라질 만큼 컸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많은 신자도 솔직히 유대인들의 실패에 동승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는 어떤 곳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장래 일은 전혀 염려치 않고 담대하게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우리 또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측면만 강조하다 보면 마치 그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은 양 오해할 수 있다. 당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현실적 보호막과 안전장치를 다 벗어버리고 어떤 위험이 닥칠지 전혀 모르는 상황 앞에 완전 벌거숭이로 맞선다는 뜻이다. 우리로선 솔직히 본받기에 아주 버거운 일이다. 갈 바마저 전혀 모르는데 과연 전혀 주저하지 않았을지는 의문이다. 정작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그대로 순종했다는 결과적 사실보다는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이유와 배경이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다른 신들” 즉, 갈대아 우르의 여러 우상들을 숭배했다고 한다.
데라에게는 하란, 아브라함, 나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본문에선 둘만 언급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데라가 장자인 하란을 불의 신(火神)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초태생이라 바쳤는지 우상숭배를 거절했기에 바쳤는지 이유는 불명하다. 단순히 전승만 아닐 것은 우르(Ur)라는 지명이 화로(火爐, Fire Oven)를 뜻하기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 유프라테스 강 하구에 위치했는데 우상숭배 제단이자 바벨탑의 일종으로 보이는 지그랏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어쨌든 사람을 제물로 바친 풍습이 성행했고 아브라함 가족도 그 풍습에서 자유스럽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갈대아 우르에는 우상숭배 죄악과 도덕적 타락이 관영해 소돔과 고모라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자기가 속한 사회의 관습이자 부모도 믿고 따르는 종교였지만 틀림없이 자기마저 꼭 따라야만 하는지 심한 영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도 언제든지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상당 기간 동안 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커녕 인식도 없었겠지만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감, 최소한 의아심은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아닌데, 과연 이런 종교를 계속 믿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뇌했을 것이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떠나라고 명했을 때에 그가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다면, 아비처럼 적극적 신자가 아니라도 최소한 그 풍습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상태에선 결코 쉽게 떠나지 못했을 것 아닌가? 아니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을 오히려 거부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현현하시어 말씀하셨는지 성령의 세미한 음성으로 그 마음에 들려주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기 이전에 분명히 이런 의문들이 줄을 이어 괴로웠을 것이다. 과연 인생이 이것으로 끝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인간을 제물로 바쳐도 행복과 만족은커녕 환난과 고뇌는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온갖 실패와 상처와 허물과 죄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니 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 제물로 바친 것은 허사 아닌가? 아니 무엇보다 신전에서조차 평강은커녕 도리어 불안 초조 허무 방황이 그치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 등등...
다른 말로 자기 인생의 온전한 의미와 목표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대신에 항상 까닭 없는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희미한 불씨로 살아나려 했다는 뜻이다. 바로 그 불씨에 성령으로 점화시킨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으로 세울 사람을 오래 전부터 준비시키신다. 일순간에 영적 거인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떠나라는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까닭은 결코 담대한 믿음에 의한 순간적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밤을 한숨과 고뇌로 지새운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중간기착지인 하란에서 한참을 지체했다. 당시의 무역거래의 요충지였던지라 돈과 물자와 세상 쾌락이 만연하던 곳이다. 그가 아직도 이전 습관에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는지, 부친 데라가 고집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기간을 머물렀다. 또 그곳에서 많은 소유를 늘렸다.(창12:5) 실제로 하나님의 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언약(창12:1-3)은 그곳에서 받았다. 아비 데라가 죽자 하나님이 다시 그를 재촉한 것이다. 그도 내가 왜 아직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지, 내 갈 길은 따로 있지 않는가, 이러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새롭게 다짐하고 가나안으로 향해 떠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영혼에 안식이 전혀 없었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믿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다고 생기지 않는다. 또 그런다고 믿음이 있다는 확실한 표시도 아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내면의 처절한 싸움이자 그 결과적 산물이다. 스데반은 지금 유대 공회원들에게 몸에 할례를 받는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심령에 할례를 받아야만 의로워지고 믿음이 생긴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면서 무엇을 준다고 약속했는가? 가나안 땅과 큰 민족과 창대한 이름과 복의 근원이다. 그럼 현실적으로 하나 달라진 것 없지 않는가? 버린 것을 다시 더 크고 좋게 해서 되돌려 준다고 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해석했다.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시공간적으로 이동만 했다. 또 자기들을 택하여 세상의 가장 큰 민족으로 삼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에 열심만 내면 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런 해석으로 인해 지금 스데반을 공회에서 재판해서 죽이려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민족이 우상 숭배만 하고 참 하나님을 몰랐던 당시에 유대인들만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도 여호와 신앙이 아브라함을 통해 자손들에게 전해졌다고 강조했듯이 그 믿음은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찾아서 누릴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이전에 버렸던 것을 다시 더 크고 좋게 받을 것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9,10) 약속의 본질은 하나님의 지으실 터를 바라보며 외방에서 우거하여 장막으로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언약에 후손인 이삭과 야곱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당연히 스데반 때의 모든 유대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언약이다.
외방에서 우거한다는 말은 우리처럼 외국에서 영주권자(Alien Resident)로 산다는 뜻이다. 혈통, 민족, 문화, 관습, 제도가 전혀 다른 곳에서 시민권은 없이 같이 살 수 있는 권리만 허용 받은 것이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에 거주하되 죽을 때까지 가나안 인이 결코 아니며,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임시 거처인 장막(tent)에 거주해야 했다.
물론 우거의 역사적 의미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끝나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에 해당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모든 세대의 혈통적, 영적 이스라엘 둘 다에게 해당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땅은 단지 우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정작 본향이 따로 있기에 인생은 나그네 길로서 떠돌이처럼 살아야 한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 사람과 절대 같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땅에 아무 가치와 목적도 없이 그저 그냥 살다가 천국에만 가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그네를 말하는 헬라어 파로이코스는 ‘옆에’,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파라’와,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가 합쳐진 합성어다. 잠시 옆집에서 사는 자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진짜 자기 집은 따로 있다. 그래도 옆집이니까 원래 집과는 방불하며 본 집에 들어가 살 준비와 훈련을 쌓는 곳이다.
하나님 언약의 초점이 현실적으로 가나안 땅과 큰 민족과 창대한 이름을 준다는 데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당신께서 지시할 땅으로만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당신께서 다 이루어주겠다는 것이다. 갈대아에서나 가나안에서나 아브라함이 토지를 경작하고 후손을 양육하며 존경 받는 사회인으로 살아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전에는 우상이 이끄는 대로 혹은 자기 마음대로 이 땅이 전부인 양 착각하여 먹고 마시는 것에 전무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마련해주며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달라진 것이다.
갈대아를 떠나라는 것은 또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절대 전부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복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에서 계속 고뇌했던 문제를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 순례를 통해 그 해답을 직접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모든 열방이 이 땅을 본향으로 생각하지만 이스라엘만은 옆집으로 간주하라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그네로 살아야만 궁극적인 본향을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죄악의 땅에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흘러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 안에 온전히 들어왔을 때만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이다.
사실은 젖과 꿀도 현실적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 목축과 양봉을 주업으로 하게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이 땅에선 떠돌이 같은 삶을 살게 하려고 일부러 고생 시킨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 가더라도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든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땅으로 갈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나그네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지 않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바로 그곳이 성전이다. 하나님이 부재하면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성전 마당만 밟았지 성전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모세의 율법과 성전제사를 주신 이유도 언약의 내용을 항상 상기하고 실천하는 방안이었다. 이 땅은 죽을 때까지 옆집일 뿐이기에 본향에 대한 소망을 아름답고도 견고하게 가꾸는 대기 장소와 기간일 뿐이다. 스데반도 아브라함은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받지 못했고 “그 씨마저 다른 땅에 나느네” 되었다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영적 순례를 떠난 적이 있는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가 과연 그와 같은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 그와 같은 영적 고뇌라도 겪은 적이 있는가? 이대로 계속 살아도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자신이 있을지 삶의 방식을 심각하게 되돌아보았는가? 자기 존재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발견하고 확립했는가? 자신의 전부를 걸어도 될 만한 인생의 목표를 발견했는가?
한 마디로 인생이 이게 과연 전부인가, 혹은 지금 이것은 아닌 데라는 갈등을 느꼈다면 그 확실하고도 완전한 해답을 얻었는가? 모든 주위 여건이나 다른 사람들 눈치 볼 것 없이 스스로 정말 솔직하게 따져 보라. 그저 되는 대로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살고 있거나,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현재 방식대로 살고 있다면 아직은 영적 갈등을 시작도 안 한 것이다. 육신만 살아 있고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시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건은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자에게는 비교적 실감나게 이해가 된다. 현실적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와 외방에서 나그네처럼 살고 있다. 시민권을 얻어 미국인 행세를 해도 아무래도 전혀 미국인이 된 것 같지 않다. 항상 두고 온 본향이 그립다. 최근엔 아이들 자녀 교육을 위해서 혹은 여러분처럼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 온 자도 많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이민 왔을 때는 대개가 어떤 형태로든 한국에서 큰 실패를 겪은 후다. 실패를 겪지 않았다면 최소한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민 생활은 익숙했던 문화, 관습, 제도, 언어, 또 인적 물적 자원 등 모든 보호막을 버리고 완전히 벌판 한 가운데 버려진 것 같다. 그야말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자연히 자기 인생과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갈등했고 하란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만 따르겠다고 작정한 상태에 도달한다. 이민 오면 아무래도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맞다.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정립하여 새로운 항해 길을 떠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영적 순례를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사실상 그는 가고 있는 동안에도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고 귀환해서도 어디로 갔다 왔는지 정확히 몰랐다. 분명히 인도를 목적지로 삼아 항해했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미국 걸프 만의 서인도제도였는데도 본인은 인도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는 것이 단순히 모든 인간은 죽게 마련이며 무덤에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먼저 내 삶이 내 계획과 의지와 능력만으로 절대 목적한 바대로 가지 않더라는 진리를 절감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 삼의 다른 힘이 내 인생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절대적 주인한테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내 인생의 행로뿐 아니라 의미와 가치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부여해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바위나 흙은 광물이다. 화초와 야채는 식물이다. 개와 고양이는 동물이다.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물론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영양을 섭취해서 자라난 생물학적 동물로 그치지 않는다. 동물은 그야말로 오로지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배고프면 먹이를 찾고 배부르면 누워 잔다. 때로는 먹이가 적은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 있어도 최선을 다해 생존을 위해 적응한다. 동물의 삶과 평생에 다른 제 삼의 힘이 작용하는 바람에 스스로 당혹해하는 법이란 없다. 과연 이렇게 살다가 평생을 끝내야할지 고민할 리 또한 만무하다.
바꿔 말해 인간은 광물과 동식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의 육신은 땅에서 먹고 살아야 하지만 그 내면은 사실상 다른 분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그분의 생기를 받고 살아야만 온전해지는 존재다. 만약에 인간이 개나 고양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구태여 내가 누구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풍족하면 그만이다. 어떤 쾌락을 즐겨도 또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문제 될 것 없다. 오히려 주일 날 교회에 나오면 나오는 만큼 시간과 경비로 손해다. 감옥에만 안 갈 정도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돈을 많이 버는 자가 최고로 현명하다. 영적 순례를 시작할 필요도, 이유도, 근거도 전혀 없다.
인간이 죄를 범해 수치와 두려움을 느낀다는 자체가 벌써 절대적 존재에 의해 도덕적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렇게 만든 분은 더더욱 도덕적 존재다. 또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래도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변화될 때에만이 참 인간으로서 온전한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 선조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비록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었어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풍요롭게 해달라는 기원뿐이었다. 오직 먹이 걱정만 한다는 면에서 짐승과 같았는데 단지 사단의 힘이라도 빌리겠다는 것만 달랐다. 아니 그 전에 사단이 이미 인간의 영혼을 부패시켜 이 땅의 향락만 찾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당신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은 바로 짐승 같은 삶에서 나그네 같은 삶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사단의 종 된 삶을 끊고 당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라는 구원으로의 초대였다.
인간의 영혼은 하늘에 속해 있고 발은 땅을 디디고 서있기에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다른 말로 나그네 같은 삶을 살지 않으면 오히려 인간답지 못하다. 비록 발은 땅에 붙이고 살지만 머리는 반드시 하늘을 향해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떠나라고 했다.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인생의 주인으로 하나님 한 분만 확실히 모셔야지 이전의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거나 둘 다 섬길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타야 할 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갈대아에서 불러내었다. 인생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영적으로도 갈등할 만큼 했던 나이다. 자의에 의해 기꺼이 당신을 따르라는 것이다. 또 그만한 나이에 이전의 삶을 끊는다면 두 번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감안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전 방식만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 대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당신께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불림을 받아(창12장)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기 전에(11장) 성경에 어떤 기사가 있는가? 그의 선조들에 대한 지루한 족보 이야기다.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몇 살에 죽었다는 말 뿐이다. 노아의 홍수로 심판을 받은 후에 인류 가운데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고 허무하게 살다가 죽었다. 불의 신에 자식마저 바쳐가면서까지 이 땅에서 형통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렇게 살아서 되는가? 인생이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아무도 갈등하지 않았다. 간혹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들었을지 몰라도 심각하게 하나님을 찾고 찾으며 씨름하는 자라곤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한 의인을 보았다. 아니 당신께서 택하여 믿음의 씨앗을 그 심령에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고 75 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했다. 택한 자의 영적 자세가 아직 온전치는 못해도 최소한 이제는 더 이상 이전의 삶에 추호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단지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멍에에 묶여서 도무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이제는 적극적, 능동적으로 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보장이자, 그 실현의 첫 걸음이었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여 그저 풍요와 쾌락과 죄악을 쫓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인생을 끝내선 안 된다는 것을 이제 택한 백성의 바뀐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또 그 구원의 계획은 단 한 치의 차질 없이 당신의 일정과 방식대로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 진전시킬 것이다. 모든 인간의 허물과 실패와 고통과 죄악을 당신의 아들로 짊어지게 해서 십자가에 직접 죽이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어 믿음이 생기게 할 것이며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겸비하게 무릎 꿇고 나오는 자는 누구라도 어떤 형편에 있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이 땅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나그네 같이 살게 한 후에 천국 본향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바로 그런 언약의 첫 열매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택해진 것이다.
솔직히 교회에 출석하는 자 중에도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영혼과 육신이 곤비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나왔다. 목적지는 분명 인도로 잡았다. 그러나 항로는 전혀 다르다. 여전히 이 땅의 형통을 위해서만 즉, 유학생활이나 이민생활의 고난을 해결 받고 정신적 위로를 구하는 것으로 그친다. 또 그런 도움을 구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도덕과 종교 생활에 힘을 쏟는다. 그럼 도착지는 인도가 아니라 미국 땅이 되어버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는 뜻이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여서 종교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나야 한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미 선행을 많이 했던 한 부자청년 관원에게 그것으로 모자라니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 선행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어느 것을 따를지 확실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타야 하는 배는 오직 노아의 방주 뿐이다. 콜럼버스의 배는 당시로선 최고의 기술수준을 자랑하는 최신예 호화선이었다. 속력이나 시설이나 흠잡을 데 없었다. 노아의 방주는 전혀 다르다. 아무 모양 없이 커기만 했다. 돛도 달지 않고 방주(方舟)란 말 그대로 물에 떠있기만 했다.
그러나 이 두 배의 차이는 사실 선박 건조 기술과 시설에 달린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의 배는 인간 선장이 방향과 속도를 결정해 움직였고, 노아의 방주는 완전히 하나님의 손길에만 맡겨졌다. 배를 건조할 때부터 오직 그분의 지시에 따랐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주의 문을 여닫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중간에 기착할 항구도 없었으며, 노아가 임의로 닻을 내릴 수도 없었다.
결국 이 두 배가 도착한 곳은 각각 어디였는가? 콜럼버스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갔다. 반면에 노아의 방주는 그와 가족이 구원을 얻었다. 방주 바깥에는 생명 있는 모든 짐승을 비롯해 전 인류가 심판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주 안에는 평강과 안식뿐이었다. 노아는 그 방주 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찾았던 것이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9) 노아라는 이름이 하나님이 태초부터 그 인생에 부여하신 목적과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수고와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에게 안위를 줄 자였다. 노아의 방주도 노아와 그 가족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의 언약이었다. 이제 그 세 아들 중에 경건한 셋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여서 노아와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베풀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 유대 민족도 노아처럼 아담의 원죄로 저주 받은 이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는 자들을 안위하도록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다.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묶여 수고하는 자들에게 그 인생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케 하여 천국 소망을 갖고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을 때 발붙일 땅 하나 없이 나그네 같이 살았는데 지금 그의 후손이라 자랑하는 재판장의 공회원들은 과연 그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스데반은 반문한 것이다.
인생은 너무나 짧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와 아브라함의 일생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평가했는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아브라함은 떠나온 갈대아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노아는 미친 사람이라는 비방과 조롱을 아무리 받아도 방주를 짓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땅보다는 하늘의 본향을 더욱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직접 육안으로 목도하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즉, 오래 전에 동일한 은혜 가운데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그 두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한다. 바꿔 말해 나온바 이 땅의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돌아갈 마음에 차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무리 불러도 저희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 아닌가? 교회에서 종교 생활에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누구인가? 아직도 세상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자, 떠나려는 생각이 없는 자다. 하나님의 힘만 빌려 세상의 형통과 안락만 구하는 자다. 현실적 염려는 많이 했어도 정작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실체에 대해선 한 번도 고뇌해 본 적이 없는 자다.
인생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먹고 놀며 누워 자는 시간을 빼면 막상 하루 중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1/3밖에 안 된다. 또 일생 중에 성인이 될 때까지 준비하는 시기와 늙어 은퇴한 기간까지 빼면 시간적으로 정말 얼마 안 된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도 사실은 일방통행이다. 도무지 돌아갈 수 없다. 오직 한 번뿐이다. 실패를 만회할 제 2, 제 3의 기회는 아예 없다.
그 짧은 인생에 어떤 가치를 찾으며,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떤 목적을 갖고 살 것인가? 그 영적 항해에 탑승할 수 있는 배는 콜럼버스의 고속정과 노아의 방주 두 종류로만 나눠진다. 이 땅을 옆집으로 생각하여 우거하는 자로 살다 더 나은 본향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아예 자기 집인 줄 착각하여 시민권까지 취득해 이곳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인지, 종착지는 정반대로 향하는 두 배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이 땅에선 아무 의미와 보람 없이 지내다가 천국만 가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스데반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선조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있었다고 증언하지 않는가?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7절) 종 된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 구원 이후 오직 그분만 섬기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과 시작하는 영적 순례가 현실적 풍요와 형통과 함께 하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 보혈로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멍에를 풀어줄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으로서 방황과 허무와 고뇌와 갈등을 없앨 방도라곤 절대 없다. 요컨대 인간이 참 인간답게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아 때나, 아브라함 때나, 스데반 때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멍에가 풀린 후로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영원한 본향을 찾아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나서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한 후에 그분이 이끄는 대로만 살아야 한다. 그분의 온전하고도 거룩한 통치 아래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려야 한다. 옆집이긴 해도 천국을 맛보아 영원히 썩지 않을 유업을 받을 소망을 날마다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이 짧은 인생 가운데 어느 단계에 해당되는가? 아직도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 그곳에서 떠나긴 했는데 중간기착지인 하란에서 꾸물대고 있는가? 아니면 가나안 땅에 완전히 들어왔는가?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이 땅을 나그네 길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 땅에서 찾을 보물이 여전히 많다고 여기는가?
혹시라도 하나님은 찾되 스데반을 정죄하러 유대 공회로 모인 사람들처럼 율법과 제사를 잘 준행했으니 자기들에게만 복을 부어주겠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자가 설 자리는 오직 스데반이 선 세상에서의 피고석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자리인 줄 몰라서 비방과 조롱을 퍼붓더라도 그곳 외에 신자가 설 자리란 한 군데도 없다.
4/13/2009
10/13/1996 유타대학촌 교회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