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싫고 아론은 좋다.
사도행전강해(31)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정녕이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행7:30-43)
스데반 변론의 초점
모세의 120년 생애가 40년씩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스데반은 이제 마지막 40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모세가 80 노인이 되었을 때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동족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존하여 사백 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동족을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해 내었다. 모세는 정말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로서 “생명의 도” 즉, 율법을 전수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 공회가 자신에게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부과했기에 그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율법과 성전제도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직설적으로 입증해선 불난 데 기름 붙는 격이 된다. 그보다는 율법과 성전제도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오직 그 뜻만 계속 따라야 한다고 강조할 참이었다.
당시 유대인으로선 아무도 율법과 성전을 반발, 거부, 비방 하지 않았다.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모든 율법이 당신에 대해 설명한 책이라고 규정했고 또 당신께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성전마저 완전히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선포했다. 정상 유대인이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그야말로 그것들을 유대인에게 수여한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아니면 아예 미친 사람이든지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말했으니 그 제도에 담긴 뜻까지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데반은 지금 유대 공회원들에게 그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형식적, 가식적, 기복적으로 제사 절차에만 집착했던 잘못을 버리라는 뜻으로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모세를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까지 지칭한 이유가 있다. 그가 하나님께 율법을 직접 받아 그 제도를 처음 설립한 것과 예수님이 그것을 헐고 복음으로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인류를 구속하는 당신의 계획의 두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모세 율법의 구약 시대와 예수 복음의 신약 시대 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지금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오히려 그 두 기둥을 허물어버리는 큰 죄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애굽 당시의 선조들은 모세를, 지금 재판정에 모인 유대 공회원들은 예수를 배척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했는데”, 너희가 예수를 죽였던 마음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생애 두 번째로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셈이다. 첫 번째 바로의 왕자 신분에서 당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노예로 있는 동족의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도덕적 정의감에 불타 인간적 방식으로 도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또한 그를 더욱 낮추어 연단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광야로 내몰리게 했다. 지도자가 될 만한 선천적 자질과 후천적 훈련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분의 방식으로 연단을 받아서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일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의 배척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그를 통해 역사하는 놀랍고도 엄청난 이적을 열 번이나 목도했다. 마지막에는 정말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해의 기적을 거쳐 애굽이 더 이상 괴롭힐 수 없는 완전하고도 철저한 구원을 얻었다. 광야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로 일용할 양식이 더도 덜도 말고 채워졌다. 우리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그를 배척했겠는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애굽으로 향한 마음이란?
모세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백성들은 그를 배척했다. 하나님에게 하자가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럼 어떤 핑계를 갖다 대어도 백성들의 잘못이자 죄다. 스데반은 지금 그 배척한 이유를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체 애굽으로 향한 마음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종살이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애굽으로 향했다는 것은 바꿔 말해 현재의 광야 생활이 싫다는 뜻이다. 그래서 흔히들 광야에서 겪는 힘든 고난보다는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등 따습고 배부른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해석한다. 또 성경 곳곳에서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물론 일차적인 이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스데반의 변론과 연결해선 더 깊이 살펴볼 여지가 있다. 아무리 광야지만 백성들이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은 아니었다. 정말 돌아가고 싶었다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40일 사이에 그냥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그들도 노예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분명 절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정녕이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34절) 모세를 구원자로 세웠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고기 가마 곁을 그리워했다고 설명한 출애굽기 기사에는 모세뿐 아니라 아론에게도 같이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데반은 지금 모세만 배척하고 오히려 아론을 추종했던 금송아지 사건을 들어 변론하고 있다. 그럼 단순히 고난 때문에 돌아갈 마음이 있었던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고 나아가 그 이유를 더 부각시키고 싶었다는 뜻이 된다.
이전의 곳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이유를 알려면 현재 있는 장소가 정확이 어디이며 처한 형편이 어떤지 따져봐야 한다. 눈에 보이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이 분명히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싫었을 것이다. 거기다 마땅한 거처도 없이 매일 옮겨 다녀야 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노예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므로 그 정도쯤은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으로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초점은 모세는 배척했지만 아론은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다. 그럼 결국 모세가 자기들을 이끌어 가려는 장소가 싫었다는 뜻이다. 지리적으로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싫어했을 리는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자기 민족끼리 독립해서 나라를 이루려는 데에 반대할 자는 아무도 없다. 백성이 반대했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장소와 현실적 형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었고 그분이 하라는 일만 했다. 모세가 싫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 하에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 싫다는 뜻이다. 스데반이 모세에게 백성들이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전에 무엇부터 말했는가? 천사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모세였다고 한다.
그럼 모세를 배척한 것은 광야 교회를 이루면서 생명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싫었다는 뜻이다. 또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혹은 그 이전에, 그들의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은 세상 향락과 죄악을 멀리하기를 원하시기에 계속 모세와 동행해야 할지 여부를 재고해봐야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형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노예 생활을 했기에 애굽의 생활 방식에 익숙했던 자다. 아마 애굽의 우상 숭배에도 많이 젖어 있었을 것이다. 직접 행했다기보다는 최소한 애굽 종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함께 어울려 지내기에 아론이 모세보다 나아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의 생활방식, 인생관, 종교관에 왠지 거부감을 느꼈다는 뜻이다. 그들이 단순히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다면 그냥 돌아가면 되지 금송아지부터 만들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그야말로 ‘마음’이 애굽을 향했던 즉, 이전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되 자유롭게만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스데반의 이어지는 변증을 보라.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40,41절)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 손으로 스스로 신을 만들고선 기뻐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게 살면서 이웃을 참 사랑으로 섬기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을 생래적(生來的)으로 싫어한다. 목숨 걸고 죄악을 멀리하라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드러기가 날 것처럼 거부한다. 자신이 더럽고 추한 존재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완악하고 부패하여 참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쾌락과 죄악에 탐닉한 즐거움이 너무 크고 좋기 때문이다. 가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선하게 행하기도 하지만 자기 남은 여유를 남들 앞에 자랑하는 수준에 머문다.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선행도 더 교묘한 교만의 죄일 뿐이다.
반면에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하기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도와주기는 잘도 바란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말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인생의 실제적 주인이 따로 있어서 그분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라 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그분께 자기 인생이 이끌려 간다는 사실마저 인정하기는 죽기보다 싫어한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자기 뜻과 계획을 자기가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을 간섭하는 어떤 존재도,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배척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신명나게(?) 자기들을 구원해준 모세마저 배척한 진짜 이유다.
금송아지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났는가?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다 내게로 나아오라”고 했는데도 그러지 않고 벌을 받아 죽은 자가 그날 하루에만 삼천 명 가량이 되었다.(출32:25-29) 마음이 애굽으로 향한 원인이 단순히 물질의 풍요와 일신상의 안락만을 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진짜로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있느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자연히 먹고 마실 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 하는가?
이스라엘이 모세 대신에 아론을 택한 것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을, 말로는 아무리 그분의 이름을 들먹여도, 배척한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혔다. 이때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들을 맛본지 겨우 서너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을 맛보고서 감격에 떨며 찬송을 지어 함께 부른지가 엊그제였다. 대체 이럴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이미 일어난 사건이므로 당연히 그 답은 'Yes'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일회적인 과거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 사이에도 수시로 일어나는 현재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받기 전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면 구원 받은 후의 상태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많이 맛보고도 전혀 삶의 변화가 없이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사는 오늘 날 교인들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다. 당시는 애굽과 광야를 가르는 홍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신자 불신자를 구분할 수 있는 근거나 표식이라곤 없다. 그러니 위선과 가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너무 편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으려 하면서도 그분을 배척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에 대해 잘못 이해했다. 단순히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애굽과 바로를 벌주어서 더 이상 당신에게 항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기들을 구원해 주었다고만 생각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을 따르는 백성을 위해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양으로 여겼다. 출애굽의 의미를 단지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애굽을 벌주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만 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도 가능했다. 모세가 열 번씩이나 질질 끌며 바로와 대결한 일차적 이유는 물론 바로의 마음이 끝까지 완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지막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했더라면 단번에 해결 났을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크신 권능을 천하에 보이고 애굽으로 회개케, 최소한 당신을 인정케 하려는 것이었다.
열 가지 재앙은 주로 애굽이 숭배하는 우상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개구리만 해도 여인의 출산을 돕는 ‘헤크트’라는 신으로 숭상 받았다.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앞에서 애굽의 신들이 정말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문제는 애굽이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필경 그것까지도 아셨을 것이기에 더 깊은 뜻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백성에게 우선적으로 향한다. 이스라엘 족속은 4백 년간이나 우상의 천국에서 살았다. 틀림없이 우상 숭배 의식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또 알게 모르게 그 풍습에 절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백성들의 영혼에 오염된 우상의 흔적들을 완전히 지우려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의 소굴에서 빠져 나온 지 반년도 안 되어, 그것도 참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보고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려 들었지 않는가?
하나님은 바로에게 재앙을 선포하려 가는 모세에게 그런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10:2) 당시 종으로 있던 백성은 이제 눈앞에 펼쳐질 이적으로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알게 될 것이지만, 직접 보지 못하는 그 자손들에게 오직 당신만이 우주의 참 주인임을 대대로 가르치라고 명했다.
인간이 만든 세상의 어떤 신도 하나님을 결코 대적할 수 없다. 애굽의 생명의 수호신 개구리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악취 나는 길거리 쓰레기로 전락했다. 아니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중에서도 아주 미미한 개구리를 신으로 섬길 수 있다니, 개구리가 문제가 아니라 개구리를 섬기는 인간이 오히려 개구리보다 못한 꼴이다.
나아가 이스라엘로선 여호와가 악의 화신 애굽을 무너뜨리고 구해주었기에 홍해를 건너면 당연히 애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라다이스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펼쳐져 있으리라 기대했다. 고통과 한숨과 눈물과는 더 이상 관계없을 줄 예상했다. 그런데 고기는커녕 물 구경하기도 힘든 척박한 땅뿐이었다. 하나님이 열 번이나 재앙을 일으키고 바다를 갈라가며 구원해 내었으면 그만큼 자기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인데 화려하거나 풍부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안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도착하려는 목적지는 단순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목표가 아니었다. 주위 여건과 세상의 것들로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면서 오직 당신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경외하는 영적인 이상향이었다. 광야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과정이었다. 지금 당장 출애굽 한 세대뿐 아니라 후손 대대로 함께 도착해야 했기에 더더욱 광야를 거쳐야 했다. 그들로 빵이 넘치게 있되 하나님이 없는 곳보다 빵이 부족하고 때로는 굶더라도 당신이 함께 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영적 육적인 자유와 상관없이 빵만 있으면 다시 감옥에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고집했다.
지금껏 하나님이 베풀었던 기적들은 세상의 어떤 우상이나 군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 주려 한 것에 최우선적인 목표가 있었다. 아무리 사방이 막혀도 오직 당신만 바라보면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는 진리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절감케 하려는 뜻이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바로의 철 병거라면 현실적으로는 죽음뿐이었다. 완전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그 순간 홍해가 갈라진 것은 최악의 절망에서마저, 아니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히 임한다는 것을 보여준 최고의 증거였지 않는가? 그럼 홍해 앞보다 덜한 고난은 얼마든지 이겨내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홍해를 현실적 풍요를 보장하는 약속이자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로만 받아들였다. 그들 믿음의 창고에는 홍해가 환난이 닥칠 때마다 되돌아보아야 할 하나님 승리의 선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궁무진하다. 당신의 백성을 이끄시는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출애굽 할 때에 광야 생활에 아무 필요도 없는 금은보화를 들고 나오게 했다. 과연 그것을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려는지 보려고, 아니 금송아지를 만들 줄을 미리 아시고 그 재료로 준비시킨 셈이다.
단순히 먼 앞날을 내다보신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인간은 잠시의 불편도 참지 못하는 존재다. 자기들에게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자기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힘을 낼 수 있는 한에는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셨던 것이다. 이미 일어난 기적이 그들의 믿음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까닭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 기적이 일어나기만 바라지 기적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는 사실 관심도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뜻이다.
신자는 꼭 고생을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자마자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면 당장에 이런 의아심이 들 것이다. 신자는 꼭 고생과 연단을 거쳐야만 영적 성장을 맛볼 수 있는가? 물론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난, 고행, 희생, 슬픔, 고난, 핍박 등이 아니라도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그렇게 간단한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광야를 거치는 동안 불편하고 고생스러웠던 것은 분명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로 직접 먹이셨다. 광야에서 그 많은 백성이 먹을 음식은 도무지 구할 수 없다. 하나님이 먹이지 않고는 당장에 굶어 죽는다. 그런 곳에서 금과 은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것을 들고 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또 오늘은 어디로 갈지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불같은 더위를 막아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과 현격하게 다른 사막 추위로부터 지켜 주셨다. 구름 기둥이 장막 위를 떠오르면 진군하고 멈추면 장막을 치고 쉬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아무 할 일 없이 먹고 행군하고 쉬고 자기만 하면 되었다.
심지어 이방 대적이나 강도에게서도 지켜 주었다. 물론 자기 생명을 걸어가며 광야까지 쫓아 올 여력과 열성을 갖춘 도적 떼는 드물다. 그러나 이미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를 챙겨서 나온 거지 행색의 한 민족이 광야를 떠돌고 다닌다는 소문은 근방에 다 났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그런 대적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이미 광야 근처 족속들에게 그 거지 떼들을 보호하는 신은 어마어마하게 능력이 커서 멋모르고 덤볐다간 몽땅 다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부터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세계 최강국인 애굽이 10전 10패 했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결정타를 먹었으니 다른 족속으로선 감히 이스라엘을 얕잡아 볼 형편이 아니었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환난이나 위급한 상황을 만난 적이 없었다. 외부대적의 핍박이나 세상쾌락의 유혹도 없었다. 단지 조금 불편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이었다. 신나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일용할 양식은 채워졌다. 심지어 안식일 전날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두 배가 내려서 안식일에 거두러 나갈 필요조차 없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죄악과 환난을 이겨내는 영적 성장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야 내내 아주 힘든 일이라곤 없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영적 훈련장의 가장 큰 특징은 이스라엘이 관심을 쏟을 만한 세상적인 일만 다 제거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대상에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오직 당신만 바라보게 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도리어 아무 문제가 없어도 당신을 진정으로 찾아서 교제 동행하며 감사 찬양할 것인지를 시험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숙사가 딸린 무료 신학교에 입학해서 신학 공부만 하면 되는 셈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광야 교회의 한 가운데 거하면서 모세를 통해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면서까지 직접 교수가 되어서 가르쳤다. 그런데도 그들은 단지 심심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더 정확히는 화려하고 풍부한 세상 안락을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절했던 것이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거쳐 삭막한 광야로 인도한 가운데는 이스라엘이 미처 모르고 놓친 하나님의 드러난 뜻이 또 하나 있다. 백성은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 파라다이스를 꿈꿨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그 의사와는 반대로 광야를 통과하도록 이끌었다. 백성의 소원마저 가로 막을 수 없는 그분만의 열심과 성실이 넘치도록 작용되었다는 뜻이다.
그분은 당신이 목적한 곳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기어이 이끌고 가야만 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는 기쁨으로 따랐지만 광야에 이르자 차츰 불평, 불신, 배역이 따를지라도, 아니 그러리라는 것도 미리 아시고도 말이다. 어쩌면 석 달이 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은 것만 해도 그들로선 상당히 오래 참은 것인지 모른다.
그럼 당신의 백성들을 고생시켜 가며 광야를 통과케 한 그분의 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려는 것인가?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려는 것인가? 단지 절대적 주권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시는가? 당신께서 택한 백성은 절대 끝까지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것을, 아니 그 이전에 노아와 아담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신 것이다.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어 야곱 가문을 기근에서 지켰다. 이제 그 후손을 어느 민족도 쉽게 넘보지 못할 정도로 창성케 했다. 애굽의 노예 생활조차 사실은 이스라엘로 세계 최강국 애굽의 보호막 아래 있게 한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규모까지 순탄하게 강대하도록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그리고 때가 차매 즉, 언약을 이루실 정확한 시점이 되었으므로 모세라는 구원자를 보내어 양 치던 낡은 지팡이를 통해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 당신만의 큰 권능으로 이적을 일으켜서 영광을 보인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적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분에게 능치 못할 일이란 단 하나도 없다. 당신의 나라는 오직 당신께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세우신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 때문에 당신의 언약들을 신실하게 지키신다. 바로 그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신실함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 신실하심은 물론 오직 당신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함께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을 당신의 백성이 없다면 그 신실하심은 무용지물이 된다. 광대한 우주 안에서 그저 의미 없이 맴도는 메아리일 뿐이다. 한 마디로 출애굽과 홍해의 주인공이 사실은 하나님도 모세나 아론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 시나이 광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능동적으로 계획하여 달성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 심지어 모세마저도 그분의 심부름꾼과 메신저에 불과했다. 백성들이 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킨 일 딱 하나만 하면 되었다.
애굽 전 지역의 장자(長子)를 죽이는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을 걸고 집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로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피가 발린 집은 건너뛰고 피가 발리지 않은 집들만 심판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긴 마찬가지지만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출애굽의 구원은 모세가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번제물의 죽음이 출애굽을 유효케 했고 그 구원자도 어린 양이었다.
하나님이 광야 교회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바랐던 영적 성숙은 바로 이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라는 것이었다. 모든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므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지켜만 보라는 것이다. 아무 일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다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만 사모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 또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오직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이유로 구원해 주었기에 이제는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 생활을 통해 오직 하나님 당신만을 섬기며 순종하며 거룩한 제사장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다.
어린 양 피의 구원과 홍해 물의 세례를 통과한 구약 교회는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 당신의 백성답게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더러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모든 민족에게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언약을 아브라함처럼 당신께 순종함으로써 이루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힘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는 광야만큼 순종을 연습하기 좋은 곳은 없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시는 구원과 성숙의 과정에 이스라엘은 수혜자로서 참여만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단지 불편하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그런 특권과 축복과 은혜를 헌신짝처럼 차버린 것이다.
신자들의 우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내세운 핑계가 무엇이었는가?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그 본심은 자기들 지도자가 없어졌으니 이제 새 지도자를 세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세의 행적이 모호해졌다면 당연히 그를 찾아나서야 했다. 최소한 인간적 의리로도 그래야 했다. 그가 시내 산에 오른 후에 사십일 가까이 나타나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도자 교체 작업에 나섰다. 일종의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새 지도자로 세운 아론 또한 허수아비였을 뿐이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지시대로 백성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이 아론더러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시키기 시작했다. 당장에 금을 모아 금송아지부터 만들자고 하자 아론도 동의해서 따랐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종이 백성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임의로 세운 자를 주의 종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는 자기들 요구대로 따르라고 명했다.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제사 지내고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다. 한 마디로 완전히 자기만족에 취한 것이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내신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모세의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끌고 가려는 목적지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껏 인간의 요구대로 세상 안락을 약속해주는 애굽에서 익히 보아 온 신들과는 전혀 달랐다. 모세와만 말하고 자기들 눈앞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또 자기들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주관하며 그 뜻대로 따르기만 요구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32:1)고 요구했고 아론 또한 당장에 부녀자들의 금 고리를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선언했다.(출32:4) 금 고리가 신으로 둔갑했다. 그것도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른 하나님으로 말이다. 자기 귀에다 대고 절하는 꼴이다.
다시 말하지만 출애굽 구원에서 이스라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단지 노예 생활이 고달프니 구원해 달라는 탄원만 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들을 택하여 일방적으로 사랑을 부어주신 하나님마저 배척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싫다고 거부했다. 무조건 모든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고 덤빈 것이다.
홍해를 건너면 파라다이스가 있을 줄 알았는데 광야이므로 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려는 곳을 어렴풋이 짐작한 것이다. 당신의 뜻대로 거룩해져 선한 삶을 살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은근히 싫어진 것이다. 선하고 의로운 삶 자체를 거부하거나 싫어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을 자기들이 판단 결정하여 계획하고 시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만족과 행복과 기쁨과 안전과 평강을 보장하는 것은 무조건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 맞추어질 때뿐이다. 그것도 자기 힘으로 달성해야만 했다.
하나님이 모든 세대 모든 민족의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항은 오직 하나다.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제대로 발견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거룩하심 앞에 온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고 나아가 죄악에 찌들어 더럽고 추한지 정확히 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만족을 구하려는 그 교만함이 오히려 영원한 멸망으로 재촉하는 줄 확실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인간이 참 하나님을 맞닥트리게 되면 오직 두 가지 반응 밖에 보일 수 없다. 자신의 실체를 알아 그분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자와 자신의 실상을 더 고집스럽게 감추고 세상의 것으로만 스스로 치장하려는 자다. 이스라엘은 지금 후자의 길을 택했다. 내가 왜 죄인이냐는 것이다.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 같은 놈이 천하의 악한이지 그 밑에 종살이 한 연약한 나는 오히려 의롭다고 내세운다.
하나님의 관심은 애굽의 바로로 대변되는 세상 죄악과는 상관없이 오직 택한 백성 각자에게로만 향한다. 이제 세상 모든 것을 끊고 당신만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에서 만족 평강 행복 안전을 구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한 후에 모세를 산 위로 불러 올린 뜻이었다.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대로 요구할 수 있는 즉, 아론에게 익숙했던 신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 공회원들에게도 구약 선조들이 홍해의 그 큰 기적을 맛보고도 모세를 배척했었던 똑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 되신 예수를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모세율법과 성전제사로 너희의 의로 삼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있지만 그분의 진정한 뜻에는 사실 관심이 없고 너희가 만든 계명으로 너희 만족을 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따진 것이다. 말하자면 너희는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부어 만들어 그 앞에 제사 지낸 자와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모세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백성을 구하려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행하셨다. 각색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폭풍우도 잠재우며 죽은 자도 살리셨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왕을 삼으려고 호산나하며 열광했다. 그러나 그분이 백성들로 이끌고 가려는 목적지 또한 모세처럼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광야였다. 백성들의 죄를 통박하며 회개로 촉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자기들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는 예수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 큰 이적을 눈으로 목도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을 듣고도 그랬다.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만 드리기만 하면 복을 보장하는 유대 성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오직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갇힌 자를 놓아주려 하셨다.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여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마저 시내 산꼭대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느니 산 밑의 금송아지 밑에서 춤추고 노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너무나 비참한 영적 실상이다.
스데반의 이 변론이 유대 공회원들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아니 더 절실한 설교다. 교회에 열심과 정성으로 나오면서도 사실은 참 하나님보다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자가 너무나 많다. 물론 현대에 깎아 만든 형상을 숭배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반면에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우상을 지닌 자는 교인 가운데도 수두룩하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서 만족, 기쁨, 평강, 행복, 안전, 지혜를 구한다. 나아가 삶의 모든 목표와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아닌 대상에다 전부 걸고 있다. 꼭 죄악과 쾌락을 쫓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순종하느니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모세의 하나님보다는 아론의 신이 더 좋은 것이다. 예수를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병이어나 치유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하나님으로만 모시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어떻게 선포했는가?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고 했다. 또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고 한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자기만족만 찾으려는 신자는 사단에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아직 그 묶임에서 놓이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러분의 진정한 영적 실체가 모세의 하나님과 아론에게 익숙했던 신 들 중에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진짜 솔직히 살펴보라.
4/22/2009
유타대학촌 교회 11/3/1996 주일설교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방법이 전혀 없음을 절감합니다. 이에 이땅에서부터 오직 주님만을 소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아직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대리자로 살아갈 것을 마음에 재차 다져봅니다.
'하나님이 광야 교회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바랐던 영적 성숙은 바로 이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라는 것이었다. 모든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므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지켜만 보라는 것이다. 아무 일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다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만 사모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 또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오직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이유로 구원해 주었기에 이제는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 생활을 통해 오직 하나님 당신만을 섬기며 순종하며 거룩한 제사장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여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