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조회 수 1806 추천 수 28 2012.11.04 01: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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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마태복음 강해 (1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숙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排斥)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13:53-58)


전혀 예수답지 못한 예수(?)

심리학과 병리학에서 플라시보효과(placebo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비타민 같은 단순 영양제를 어떤 병에 특효가 있다고 의사가 그럴싸하게 설명하면, 그 말을 믿은 환자에게 치료 효과가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약이 아니면서 약 행세를 한다고 위약(僞藥) 효과라고 한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없으면 치료가 힘든 것은 분명 사실이다.

본문은 천국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의 가르침을 마치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한 기사다. 회당에서 가르쳤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믿지 않고 배척했고 예수님도 많은 능력을 행치 않고 철수했다.  

그럼 조금 이상한 것 아닌가? 예수님이 전혀 예수님답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럴수록 더 큰 능력을 보여서 믿게 해야 하지 않는가? 믿음이 있어야 낫긴 하지만, 예수님은 상대의 믿음과 상관없이 낫게 해줄 수 있지 않는가? 실제로 제자들 앞에서 이적을 베푼 후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호통 친 적이 여러 번 있지 않는가? 그럼 제자들만 특별 대우해 주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도 인간인지라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기대했다가 그러지 못하자 오히려 크게 섭섭하셨는가?  

물론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도 큰 이적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적을 보았다고 자동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이적을 보고 믿으면 이적이 없으면 안 믿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자신도 잘 모른다.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이적으로 고쳐주었지만 결례를 마치고 돌아와 감사한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누가복음 16장의 죽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천국 갔다 온 자가 증언해도 믿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지적했다. 최근에 천국 체험 간증집회를 많이들 열고 있지만 그런다고 교회가 당장 부흥하지 않는다.

인간의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의 마음에 어떤 이적을 보여도 믿지 않을  정도로 선입관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진 견고한 진이 있음을 아셨다. 그들 중에 가장 죄 많은 자 한두 명을 심판하시는 이적을 보여서 모두를 복종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예수님은 독재자 폭군이 되며, 그렇게 믿는 믿음은 결코 올바른 믿음도 아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무화과나무 잎을 말리는 이적을 빼고는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생명을 살리거나 긍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 무화과 잎 이적도 형식적 가식적 위선적으로 변한 유대교의 잘못을 지적하고, 유대인들의 믿음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뜻이었다.  

도무지 인정 못할 가르침

나사렛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치는 지혜와 병 고치는 이적의 능력에 대해 크게 놀랬다. 단순히 잘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평소에 다른 랍비에게선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주 특별한 가르침과 고침이었다. 회당장이 구약성경 두루마리를 읽고 풀어 설명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추측컨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권면까지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13장의 초반 유대 대중들에게 한 것처럼 씨 뿌리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면서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하셨을 것이다. 거기다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바로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당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외의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은 하나도 없다고 선포했을 것이다. 당신이 직접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베푼다고 선언하니 고향 사람들로선 도무지 인정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반문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도 보통 아이들처럼 배가 고프면 울었고 딱지나 구슬치기 하며 자랐다는 것이다. 열세 살 이후로 유대 회당에서 율법 교육을 가르쳤던 랍비가 아마 그들 중에 있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야단 맞을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동네 어른들로서 충고도 가끔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가업을 반드시 아들이 물러 받게 되어 있다.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즉, 최근까지도 목수 일을 하고 있어서 가구를 고치거나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다 고향을 떠나선 성경을 잘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을 것이므로 회당에서 가르침을 허용했고 열심히 경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강해만 하면 될 것을 그 성경자체가 바로 자기를 위해 지어졌다고 말하니 그 누군들 믿겠는가? 미쳤다고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보다 더한 취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나사렛 사람들은 비록 변방이긴 해도 분명 유대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모세오경을 암송하며 묵상했다. 유대 절기 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 제사도 드렸다.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그들이 메시아가 오시어 갈릴리를 영화롭게 한다는 이사야의 예언(사9:1)을 알았어도 예수님에게 적용하지 못했다. 미가 선지자의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는(미5:2) 예언도,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가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어도 서로 연결시킬 수 없었다. 심지어 제자로 부름 받은 나다니엘조차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박했지 않는가?

당시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민족적 영웅이거나, 종교적으로 뛰어난 성자 랍비였다. 고난 받을 종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바로 눈앞의 평소 잘 알고 있는 평범한 목수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선입관과 편견에 고착되어 있으면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 아니 믿지 않는다.  

너무나 음흉한 핑계

오늘날의 불신자들도 예수님에 대해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 올 수 있다는 말인가? 동정녀 탄생은 설화이지 절대 사실일 수 없기에 기독교가 너무 엉터리라고 비방한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이 백세에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은 사건은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순전히 생리학적으로만 따져 보자. 사라도 폐경이 되었고 아브라함도 임포텐스였다. 비아그라도 없던 시절인지라 성관계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임신 가능성은 제로였다. 하나님이 사라의 태를 열고 아브라함의 성기능을 회복시키는 두 가지 이적을 일으켰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 마리아는 숫처녀로 건강한 난자를 보유했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이적만 필요했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어느 쪽이 더 쉬운가?

사실은 이런 변증은 아무 필요도 의미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불경(不敬)하기까지 하다. 그분에게 능치 못할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무(無)에서 온 천지를 만드셨다. 그 안에는 당연히 인간도 포함된다. 거기다 부부간의 사랑을 더 아름답고 충만하게 가꾸라고 성적 기능까지 부여하셨다. 하나님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소망, 믿음, 사랑의 근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말씀이 성육신(成肉身)하고 동정녀로 탄생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뜻이다. 정작 문제는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었고, 그것도 동정녀 탄생의 방식으로 와야만 했던 이유와 목적과 그 결과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에게 능력이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게 되면 그 다음 단계는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따져야 한다. 그러면 자기들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살아야만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까지 그들은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비과학적이라는 핑계를 대고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겠다는 깊은 속내를 감춘 것이다. 예수 안 믿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처럼 얼마나 교묘하고 음흉하게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역하는 죄인지 모른다.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보인 세 가지 반응을 서로 연결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크게 놀랐다. 일반 랍비와 전혀 달랐을 뿐 아니라 초자연적 권위가 느껴졌다는 뜻이다. 또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알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재차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고 했다. 초자연적 권위의 출처는 하나님과 사탄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아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사탄의 능력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직접 그렇게 발설은 하지 않았고 또 정확하게 인식했든 안 했든 말이다. 그 세 반응들의 의미는 예수는 사탄의 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벙어리와 봉사 된 사람을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비난한 것과 똑 같은 반응인 것이다. 예수님을 미친 자보다 더하게 귀신 들린 자 취급을 한 것이다.  

사탄의 영에 미혹된 불신자.

불신자들은 스스로 의식은 못해도 사탄에 그 영이 미혹되어 있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사탄이 막고 있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 시대로 전자 칩을 사용하지만 이전에 필름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인화하려면 암실이 필요했다. 시커먼 천으로 사방을 완전히 둘러싸 빛이라곤 새어 들어올 틈새가 없이 캄캄했다. 불신자의 심령이 바로 그렇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 출신 배경을 문제 삼고 또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로마 사형수기에 예수님을 도저히 믿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히 편견과 선입관에 묶여 있는 탓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여서 지정의(知情意)가 큰 왜곡과 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까닭은 자신들의 심령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그 영혼이 타락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께로 온 영으로만 알 수 있다. 성령의 간섭이 아니고는 참 빛이자 참 생명으로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사탄의 영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무당이나 박수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관습이 왜 나쁘냐는 것이다. 귀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효도만 하는 것인데 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기독교가 부모 공경을 나쁘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의 첫째가 바로 무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추모 예배도 드린다. 불신자들이 제사가 미신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실은 말 뿐이다. 집안이 평강하면 조상의 음덕(蔭德)이라고 잘 살게 되었다고 감사한다. 반대로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조상귀신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 만물을 운행하시고 인간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조상귀신으로 대체해 놓은 것이다. 겉으로는 조상을 공경한다는 고상한 용어로 포장했지만 그 내용은 우상 숭배다. 거기다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과 말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나아가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한다. 귀신같은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면 사실상 귀신을 믿는 것과 같다. 아니 실제로 조상귀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불신자의 영혼이 완전히 타락되었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항상 죄를 짓거나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의와 선과 사랑을 추구하고 실현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정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곧게 서있지 못하고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도 세상에 미련과 원한이 남아 있으면 귀신이 되어서 떠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면 조상귀신이 찾아와서 먹고 간다고 한다. 또 조상을 제대로 잘 모시면 후손들의 삶에 재앙이 없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녀가 혹시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부모님은 당신들이 제사도 못 받아먹게 되었다고 크게 반대하고 핍박한다.    

조상들 모두가 귀신이 되었다. 자신도 제사를 받겠다고 하니까 자신도 귀신이 되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미련이 남아서 남겠다는 뜻이다. 이 땅에 대한 아쉬움을 죽어서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땅에 살 때도 잘 먹고 잘 사는 형통과 출세만이 인생의 목적과 의미요 보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전 끝이라고도 말한다. 각 개인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존재가 멸절된다고 한다. 심판과 구원이 없다고 한다. 저들의 종교관, 내세관, 신관, 등이 너무 뒤죽박죽이라 지금 설명을 하면서도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전혀 없다. 각기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말이 그렇다. 지금 불신자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기 전에 바로 제가 그랬다는 고백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들은 천국의 비밀과 영적인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영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다. 그들의 영혼이 타락하여 지정의의 활동은 비뚤어졌고 그 판단 기준도 일시적 상대적 세속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지정의가 뒤죽박죽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평생을 자아 발견을 하려고 그렇게 용을 써보지만 모두가 실패하고 만다. 필연적으로 이 땅의 삶이 허공을 치는 것 같고,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해도 또 아무리 신나는 일을 해도 여전히 갈급하고 허망하다.

하나님께 속아버린 사탄

더더욱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지정의가 자기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사탄의 미혹한 영에게 속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런 영적 원리를 전혀 모른다. 말하자면 자기(지정의)가 자신(영혼)에게 속고 있는 꼴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바로 거짓의 아비이자 흑암의 세력이 작용한 것이다. 바로 사탄의 프로시보 효과가 먹힌 것이다.  

전혀 똑똑하지도 않고, 어리석고 연약하며 추한 인간에게 사탄은 네가 최고라고 속였다. 네 죄와 현실의 고난에서 네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니 하나님은 전혀 필요 없다고 말이다. 네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은 바로 인간인 너이기에 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이브 때부터 지금까지 사탄의 프르시보 효과는 모든 불신자에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고, 그것도 동정녀 탄생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를 깨트려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장 먼저 알아챈 자가 바로 귀신들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에 의해 마지막 날에 영원한 심판을 당할 것도 알았다. 그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들을 멸하려 왔는지 미리 확인까지 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공사역을 준비하고 계실 때에는 사탄이 직접 나서서 시험까지 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신 후에도 여전히 감시와 훼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아, 과부, 창녀, 세리, 죄인, 병자들 같이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만 만나고 다니면서 로마당국과는 전혀 마찰을 빚지 않자 혹시 메시아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요즘으로  치면 조상 제사를 꼭 드려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을 전혀 몰랐다.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바로 그 예수가  흠 없고 죄 없는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져서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하고 죄인을 깨끗케 해서 구속하시려는 창조 때부터의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임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완전히 죽었던 예수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할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분의 부활 권능과 은혜를 겸허히 진심으로 믿는 모든 자를 그 영혼이 그동안 사탄에게 미혹당하여 지정의가 왜곡되게 작동되고 있었어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도 몰랐다.

결정적으로 자기가 장악했던 그 죄인의 심령 깊숙한 곳에 성령으로 대신 내주케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타락했던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왜곡되었던 지정의를 바로 잡아주어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은 도무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탄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간 셈이다. 원래 거짓말의 명수는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속게 마련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탄을 거짓으로 속인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악하고 부정하고 치사한 것들이라도 하나님과는 절대 공존하지 못한다. 그분이 거짓을 말하거나 다른 이를 일부러 속이는 법은 절대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바로 하나님 본체시다. 영원한 참 생명이시다. 그런 분이 무덤의 울타리에 갇힐 수는 결코 없었다. 부활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사단이 부활할 것을 몰랐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의 당신 되심을 증거한 것뿐이다.    

프라시보 효과가 전혀 없는 예수님

그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신자 시절의 뒤죽박죽이었던 지정의의 흐름이 이제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회복하고 올바르게 작동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된 것이다. 한 입으로 두 가지 상반된 원리를 말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을 자기 속에 보배로 소유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더 이상 인생을 갈 지(之)자처럼 오락가락하며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인 참 진리인지 깨닫게 되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참 생명을 찾아서 소유하고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 역사, 인간, 인생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죽어도 자식들에게 귀신이 되어서 제사를 받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사악하며 하나님께 큰 죄가 되는지 철저히 깨닫게 된 것이다.

대신에 믿는 자는 죽어서 영원하고도 거룩한 빛 가운데로 들어감을 알게 된 것이다. 또 거기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면 하고 세세토록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왕 노릇 하리라는 소망이 자신 인생의 목표요 삶의 가치가 된 것이다.
  
달리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확신하기에 제사를 드리거나 받지 않게 된 것이다. 현실의 부족과 고난이 자신을 조금 불편하게 할 수는 있어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는 않게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는 상처, 시기, 질투, 분노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 만에 방문한 나사렛 고향에서 예수님이 이적을 많이 보이지 않은 까닭도 혹시라도 프라시보 효과가 일어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사탄의 종이 사탄의 힘을 빌려서 이적을 보인다고 생각했듯이 이미 사탄의 프로시보 효과는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오해하지 않도록 이적을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은 이적이나 능력으로 당신의 메시아 됨을 증명하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뜻이다. 오직 십자가 구속의 진리로만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가고 오는 모든 인류에게 선포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분에겐 가짜 약 효과는 결코 없다. 오직 절대적 진리 그 자체다. 단 한 치의 거짓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분은 절대적 사랑이요, 절대적 은혜요, 절대적 생명이요, 절대적 하나님이다. 그분의 십자가 외에 구원의 길은 절대로 없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마찬가지로 그분에게 절대적 믿음과 사랑을 바쳐야 한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 그분의 말씀 앞에 오직 “예”만 하는 절대적이고도 순수한, 우리 쪽의 어떤 이해타산도 개입되지 않은, 순종을 말이다. 사탄은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신자로 그분의 십자가 곁에서 떨어지게 만들려 한다. 그중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미혹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10/21/2012


운영자

2012.11.04 01:59:12
*.108.163.238

상기 글은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에 올릴 성격이 아닌데
제가 착각해서 올리는 바람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래 "사라의 웃음"님의 댓글도 제가 카피를 떠서 대신 옮겼습니다. ^0^

*********

사라의 웃음 (2012-11-04 07:33:39)

사단이 알지 못했던 것이 자기가 장악했던 죄인의 심령 깊숙한 곳을 예수님이 오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성령으로 내주케 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군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무참하게 죽여버린 군중들, 그러나 그런 죄인들을 그렇게 사랑하시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으시려 계획하시고 친히 오시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앞에 정말 "예"만하는 성도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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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재림은 예비보다 망각하라. (마24:42-44) [3] 운영자 2013-02-08 1465
236 Disturbed or Overjoyed? (마2:1-10) [4] 운영자 2013-01-15 1195
235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14:28-33) [3] 운영자 2013-01-14 1868
23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4:4-7) 운영자 2013-01-08 1798
233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14:28-33) [2] 운영자 2013-01-02 2167
232 예수님의 진짜 이름(마14:22-27) [2] 운영자 2013-01-01 2367
231 바울에게 절하며 감사하는 하나님(행16:24-26) [5] 운영자 2012-12-18 1119
230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14:1-12) [1] 운영자 2012-11-26 1028
229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눅22:31-34) [1] 운영자 2012-11-09 2061
»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1] 운영자 2012-11-04 1806
227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13:51,52) [3] 운영자 2012-10-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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