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14:1-12)

조회 수 1028 추천 수 32 2012.11.26 18: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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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태복음 강해(154)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12)


죄인과 의인의 대표

본문은 침례 요한이 유대지역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다. 이 사건에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정반대의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헤롯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을 믿는 의인의 대표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헤롯은 이복동생 빌립의 처인 헤로디아를 그들이 결혼 중에 있을 때에 유혹하여 자기 처로 삼아버렸다. 아무리 정통 유대인이 아닌 에돔 족속 출신에다 로마 제국이 세운 세속적 왕이라고 하지만 그는 유대의 왕이었다. 그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시늉이라고 했어야 하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대놓고 어겼다. 형제가 죽어야만 그 처가 다른 형제와 결혼할 수 있는 계대결혼법도 완전히 무시했다. 무엇보다 헤롯과 아내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다. 하나님은 성적 순결을 너무나 중요시하기에 만약 어기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했다. 헤롯은 말하자면 세 번 죽어 마땅했고, 왕이 아니었다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헤롯의 불륜은 당시 유대사회에는 누구나 아는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처럼 아무도 입도 벙긋 못하는 와중에 요한은 담대하게 왕과 왕비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헤롯으로선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일단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마침 자기 생일날 헤로디아의 계교대로 그를 죽이게 되었다. 그로선 앓던 이가 쑥 빠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헤로디아가 소반에 담긴 요한의 머리에서 혀를 꺼내어 바늘로 잔인하게 사정없이 찔렀다고 한다. 절대 그 혀를 놀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권력과 사치와 정욕에 사로잡힌 죄인에게는 요한의 진리의 외침은 너무나도 듣기 싫은 소음이었던 것이다.

요한으로선  꼭 그를 비방 정죄하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단에 미혹되어 죄에 찌든 그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품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였다. 그럼에도 그들 부부는 너무나도 어리석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헤로디아가 바늘로 요한의 혀를 찌른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그동안 요한의 외침이 자기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는데 그 앙갚음을 한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스스로 인식은 못해도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나쁜 짓을 했으면 고치면 그만이고 자기에게도 유익한데도 오히려 방귀 뀐 사람이 성을 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이다.

헤롯의 진짜 잘못

헤롯은 너무나 음란했고 잔인하게 무고한 자를 살인까지 했다. 그런데 그의 근본적인 잘못은 따로 있다. 그런 죄를 범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다. 먼저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그를 선지자로 존경하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또 딸이 멋진 춤을 추자 뭐든지 주겠다고 약속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잔치에 틀림없이 로마의 귀족, 군인, 부자들이 와 있었을 텐데 딸이 그들을 기쁘게 해주어서 자기 얼굴을 크게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성경도 분명히 왕이 근심했으나 그와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허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9절) 왕의 이름을 걸고 귀빈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큰소리 친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관하고 결정지은 것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오직 사람들 눈치만 보는 자였다. 그 눈치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며칠 전 한국에서 아이들이 집에서 오줌 냄새 난다고 불평하자 엄마가 농담으로 아빠가 오줌 샀는가보다 말했다.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 자기를 창피 준다고 남편이 흉기로 아내를 찔렀다고 하지 않는가?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도 거의 모든 싸움의 원인이 자존심 세우기이며 이혼은 물론 살인까지 감행한다.

헤롯이 왕이라서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제 맘대로 했을 것 같은가? 지금도 말한 마디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듯이 말이다.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는 로마가 세운 왕이었다. 그 자리에 이르도록 형제들끼리 경쟁에서 이겨야 했다. 또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모략, 술수, 아부, 뇌물을 동원했을 것이다. 시쳇말로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것을 그만큼 잘 아는 자도 없었다.

그는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오직 인간에게서 온다고 믿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힘을 잘 조정하여 권력과 재물을 많이 쟁취할수록 자기의 힘도 덩달아 올라간다고 여긴다. 그렇게 해서 얻은 힘을 또 사람들 사이에 꾸겨진 체면과 떨어진 자존심을 세우고 높이는 데만 사용한다. 침례 요한으로부터 자기는 세 번 죽어 마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왕인 자기가 갖고 있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인간 사회에서 권력과 재물과 명예로 자기를 치장하여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바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 삶과 인생을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닌 주위 사람이라고 실토하는 셈이다. 요컨대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점치러 가는 사람들의 행태

헤롯은 또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선 자기가 죽인 요한의 영이 그 속에 들어가 그런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했다. 참 의미심장하다. 예수님보다 요한의 능력을 더 크게 평가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은 그가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잘못 평가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의 내면에 들어가 어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말하자면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존재와 초자연적 세계가 있음을 믿은 것이다. 나아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이 보이는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둘 다를 주관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믿기는커녕 인정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요한의 외침을 듣고 회개했더라면 십자가의 강도처럼 구원 받았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또 오직 보이는 세계인 이 땅에만 자기 인생의 모든 목표와 소망을 걸었다는 뜻이다.

점을 치러 가는 사람은 헤롯처럼 귀신은 믿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사업이 대박이 나겠는지, 사대 독자인데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본다. 그럼 점괘는 지금 살고 있는 처에게 액운이 끼어 있으니 이혼하고 새 장가 들라고 한다. 헤롯처럼 간음의 죄를 범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헤롯이나 그들 모두가 점쟁이처럼 사탄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천지신명 혹은 칠성신의 내 인생을 향한 거룩한 뜻과 계획대로 살고 싶으니까 신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사람들 위를 밟고 올라가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을 방도만 궁금한 것이다. 장래 일이 두려운 것 같지만 실은 사람들이 두렵다는 뜻이다.

요한은 정반대였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으며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고 살았다. 세상 호사와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소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는 사람들 눈치는 전혀 보지 않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감히 왕과 왕비를 천하의 죄인이라고 외칠 수는 결코 없었을 것 아닌가?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 6:3에 의하면 헤롯이 딸의 춤에 만족하여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살로메는 엄마의 뜻에 따라 요한을 달라고 했다. 헤로디아로선 요한의 진리의 외침을 듣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라의 절반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나라의 절반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은 죽어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 반대로 나라의 절반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기 생명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누가 더 부자인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분이 시작이자 끝이다. 날이 갈수록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얼바인의 수백만 불짜리 저택이 은행경매로 넘어가더라도 나에게는 예수님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가 정 안 되면 염려하지 않고 평강할 수라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면, 천하 만물의 주인 되시는 그분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면 내가 천하 만물을 소유한 것인데 집 한 채가 대수인가 말이다.

실감이 잘 안 나겠지만 신자는 천하를 소유했다. 그랜드캐년에 가면 누구나 입을 쩍 벌릴 정도로 장엄하고 신비롭다. 저절로 “아! 좋다.”는 찬탄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불신자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내 것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즐길 수 있으면 내 것이 아닌가? 공원 입장료를 낸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전기세 수도요금 내어도 여전히 내 집인 것과 같다.

그러나 신자들 대부분이 그런 인식은 없다. 대신에 돌아오는 길에 들른 라스베가스 윈호텔의 뷔페를 그저 맛있기만 하다. 그런데 즐겁게 먹다가도 불현듯 배가 살살 아파 온다. 호텔 사장이 갑자기 너무 부러워진 것이다. 호텔도 여러 개 갖고 있다고 하던데 그 중에 하나만, 아니 호텔 안의 아이스크림 가게라도 하나 내어주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심정이 드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다. 저도 수시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부족한 부분이다. 윈 호텔 사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랜드케년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그저 자기 금고만  끌어안고 잔다는 것이다. 금고 안의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랜드케년을 살 수 없지 않는가? 그럼 신자와 그 사장 중에 과연 누가 더 부자인가?

아직도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신자가 얼마나 부자인지 가르쳐주겠다. 신자가 만나는 모든 사람, 겪는 모든 사건, 소속된 모든 공동체에 예수님의 권세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든지 아름답고 풍성하게 실현할 수 있지 않는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이 신자를 통해 주위로 흘러가게 할 수 있지 않는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십자가 보혈로 살려내고 예수님의 참 생명을 풍성히 심어줄 수 있지 않는가?

신자는 우로 행하든 좌로 행하든 그 땅을 다 차지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해 주시기 때문이다. 물이 바다같이 온 세상을 덮듯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미국 땅을 전부 뒤덮을 수 있다.

그것도 하나은 당신께서 남겨둔 거룩한 단 한 사람의 신자를 통해서도 그럴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이 타락한 미국 땅과, 분단된 조국을, 눈물로 끌어안고 기도하면 그렇게 하신다. 아니 예수를 모르는 이웃을 한 사람씩 찾아가 작은 사랑만 베풀어도 하나님은 세상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만한 모습으로, 우리가 아닌 하나님 당신의 힘으로 뒤바꿀 수 있다.

천하 제 일의 부자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소유하고 있는 신자라면 천하를 소유한 천하 제 일의 부자다. 세상 사람이 그렇게 보든 안 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가진 재물과 권력이 너무 초라해 그들이 멸시해도 그렇다. 심지어 신자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진다.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렇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픈 가운데도 주님의 전에 나와서 무릎 꿇고 기도하며 말씀보고 찬양하는 신자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매우 더디고 자주 실패하며 넘어질지라도 그렇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살았다. 제대로 편하게 산 적이 없었다. 젊어서 감옥에 갇혔고 억울하게 요절했다. 그럼에도 그는 진리를 선포하여 왕과 왕비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이제 곧 임할 불과 성령의 침례를 대비하라고 외치며 물로 죄를 씻는 회개의 침례를 온 유대 사람에게 베풀어 유대 땅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역사상 최대의, 아니 한 번뿐인 골고다 언덕의 예수 부흥 사건을 일으키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인류의 역사를 예수 전과 예수 후 둘로 나눠지는 일을 요한이 시작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마10:28) 문맥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는 위선적 형식적 종교지도자나 세상의 악한 자들을 뜻한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적용하면 몸만 죽일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질병, 불의의 사고, 이번에 미국 동부를 강타한 사상 최대의 태풍 샌디 같은 자연재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아니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혀다. 겨우 세 치 밖에 안 되는 인간의 혀는 사람을 죽인다. 은행 융자금을 못 갚아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것은 다시 열심히 일하여 새 집을 사면 그만이다. 반면에 사람에게 상처 받은 것은 밤새도록 끙끙대며 뼈가 삭는다. 그리고 그보단 더 무서운 것은, 정확히 말해 혀의 위력에 휘둘리는 원인은 바로 자기 속에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서 괴롭히는 체면, 자존심, 교만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서워한다고 정확히 아셨을까? 그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체휼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그런 것들로 괴롭고 고달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을 이어서 말씀하셨는데 무엇인가?

바로 몸과 영혼까지 능히 지옥에 멸할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은 절대적으로 있다. 예수님도 반드시 다시 오신다. 당신만이 유일하신 길이요 진리일진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필경 풀무 불에 떨어지고야 만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과 아무런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 영혼도 하나님을 전혀 모르기에 그 모르는 채로 영원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두려움

나아가 주님은 종말의 심판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심판을 주는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하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교적 계명과 구원 교리를 잘 깨우치라는 뜻도 아니다.  

두려움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귀신이나 사탄 같이 무서운 것에 대한 공포(fear)가 그 첫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시 그랜드케년의 예를 들면 처음 그곳을 방문하는 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 놀라운 장관에 압도된다. 너무나 크고 신비하고 아름다워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입에서 튀어 나온다. 그렇다고 그 경치가 무서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정말로 제대로 인식한다면 절로 경외감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나 나의 그 진홍 같던 죄가 양털 같이 희게 바꿔주시는 그분의 긍휼을 체험했다면 저절로 무릎을 꿇고 감사의 고백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긍휼, 능력, 지혜, 은혜 등을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세밀하면서도 풍성하게 발견한다면 저절로 또 기꺼이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

예수님이 믿고 따르는 신자에겐 영원한 심판과는 완전히 무관해진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우리를 그 심판에서 이미 구해주셨다. 신자에게 마지막 날에 기다리는 것은 구원의 영광스런 완성뿐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기쁨과 감사로 즉,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으로, 세상과 사람으로 유발되는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골고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무게를 제대로 달 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뜻은 시쳇말로 바꾸어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은 때려 죽여도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고상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 우리는 당장의 아파트 렌트 낼 걱정으로 잠이 안 오지만, 주님은 그런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실뿐 아니라 천하를 차지하게 해 줄 계획을 갖고 계신다. 교회가 연약하여 한 가정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교인들이 그저 안절부절 하지만 하나님은 이 오렌지 카운티 전체를 뒤엎을 성령의 횃불을 들고서 그에 불씨를 붙일 단 한 명의 하나님께 헌신된 신실하고 열정적인 신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불신자는 헤롯처럼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심판은 안중에도 없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것, 특별히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신자는 그 반대가 된 자다. 정말로 두려워해야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사랑 안에 살되, 아무 두려워할 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선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부부 사이에 서로 체면이나 자존심 세우려들지 않으면 된다. 자식을 한국에서 실패했던 자기 인생을 보상 받아 대리만족하려고 억지로 아이비리그에 보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여서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 된다. 또 성도 간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말로서 상처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간략하게 세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이 셋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면 아무리 찬양을 뜨겁게 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성경구절을 줄줄 외워도 그 믿음의 성숙도를 다시 심각하게 점검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11/4/2012

사라의 웃음

2012.11.26 22:06:13
*.109.85.156

잃어버린 양을 찿으시곤 그 어깨에 둘러메시고 기뻐 어쩔 줄 모르시는 예수님, 길을 잃었기에 부끄럽고, 미안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양인데, 예수님은 그저 찿았기에 즐거워만 하시고... 이렇게 구원받은 양이기에, 이젠 예수님 어깨에 둘러메어진 양이기에, 아무것도 염려할 이유,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너무도 소상히 말씀하여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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