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태복음강해 (16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28-33)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에도 수시로 믿음의 실수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되며 안도감까지 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우리 생각만큼 결코 적거나 약하지 않았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오늘날의 신자에 비해 교리적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뿐이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의 열정에는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다.
본문 같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라면 물에 띄어들 수 있겠는가?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 다 죽게 되었다고 걱정할 만큼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었다. 그 캄캄한 밤에 물 위를 걷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짓이다.
“만약 주시어든”(28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그가 주님인지 아닌지 의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과 함께라면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 혹은 “제가 뛰어 내릴 테니 주님이 저를 붙들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말씀으로 명령만 하시면 제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한 믿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쨌든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다. 예수님도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다. 또 그래서 지금껏, “아무리 위급하고 고통스러워도 그 환경을 보지 말고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라.”고 배워왔다. 이 진술만 따로 떼어 보면 분명히 진리다. 신자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본문의 상황에는 부적합한 가르침이다.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깊이 따져볼 여지가 많다.
주께 시선을 붙들어 맨 베드로
우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힐난조가 아니다.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 잘 따져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 무엇보다 베드로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시선을 뗐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조오련이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 같은 수영천재라도 그 상황에선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물의 전문가는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베드로가 한가하게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야말로 역사상 어느 누구도 걸어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 즉, 바다 위를 걸으려는 판국이다. 주위 경관을 쳐다볼 여유라곤 없다.
성경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말한다. 바람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캄캄한 바다에 파도가 치니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안 보인 것이다. 눈에 물이 튀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닦으려고 눈을 비비는 사이에도 주님은 안 보였을 것이다. 다시 보려니 또 파도가 치니까 주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을 수 있다. 큰 파도가 좀 오래 치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이러다 물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을 것이다.
베드로는 한 번도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거나 돌린 적이 없었을 것이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수록 주님 쪽만 바라봤을 것이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의 여건이 예수님을 향해 갈구하는 시선마저 가로막은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분명히 계셨다. 또 베드로 쪽을 향해 계속 걸어오고 계셨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잠시 주님이 자기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환난이 닥치면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강요나 권면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온다. 고난이 겹칠수록 하나님만 더욱 바라본다. 교회에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하는 교인도 어려움을 겪으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과 그 권능이 크심에 대해 의심을 하면 기도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자꾸 응답이 지체되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이 지금 가까이 오고 있고 그 거리가 단축되고 있음에 대해 망각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환경이 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환경이 크게 보인 것이 아니다. 환경이 크게 보이니까 주님을 찾았지만, 자꾸 여건이 더 어려워지므로 주님을 더 찾아도, 응답이 늦어져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물 위를 걷는 기적에는 지금껏 배워온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기적의 과학적 의미
기적을 과학적으로 따지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이 운행되도록 일정한 법칙을 부여해 놓았다. 또 그 법칙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꿀 때까지는 한 치의 어김없이 작동하게끔 되어 있다. 예컨대 해는 영원토록 동에서 떠서 서로 지지 그 반대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인간은 절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법칙도 있다. 왜냐하면 중력(重力), 부력(浮力), 만유인력(萬有引力) 같은 물리적 법칙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이런 엄청난 법칙들의 작동을 그가 걸어가는 주위에만 일시적으로 중지시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기적에는 다른 기적들과 구별되는 특성이 또 하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근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기만 했다. 또 불치병이 낫거나, 귀신이 쫓겨 가는 이적도 거의 전부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베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진 12년 된 혈루병 여인의 경우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었다. 그러나 베드로도 주님이 나를 물 위를 걷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밤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본문의 기적에선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또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서너 가지 물리적 법칙을 중지시켜주셨다. 여전히 파도가 베드로 개인은 물론 배까지 삼킬 듯 흉흉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협지 스타일로 공중 부양을 시킨 것도 아니요,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움직일 수 있도록 발에 모터를 달아준 것도 아니요, 축지법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반드시 믿음으로 순종하여 한 발자국을 떼야만 그 발이 디디는 부분만 딱딱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줄지어 서서 마른 땅을 건넌 홍해나 요단의 기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물리적 법칙 몇을 빼고 신자의 믿음의 법칙을 하나 첨부시킨 것이다. 인간 베드로의 믿음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반드시 톱니처럼 함께 물려야만 기적의 효능이 발휘하게끔 한 것이다.
배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서 베드로가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박수와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이 닫는 부분 외에는 평상시와 동일했다. 몸이 파도에 흔들려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어쩌면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고 수면을 고요하게 한 후에 콘크리트 바닥처럼 만들어 모든 제자가 걸을 수 있게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몸은 흔들거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했다. 차츰 두려움이 다가오자 그가 내딛는 발에 힘이 빠지고 그 밑의 물도 물컹물컹해지는 듯이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오직 베드로 개인의 믿음을 걸고 당신의 권능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두려움이 커지자 이 기적에 부여한 믿음의 법칙의 효력도 줄어들었다. 즉,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자 주님은 물리적 법칙을 조금씩 다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그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 것이다.
다른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지금 예수님이 주도하고 계셨다. 요컨대 베드로를 물에 빠트린 것도 예수님이었다. 그럼 그 캄캄한 밤중에 믿음을 걸고 엄청난 도전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너무 냉혹하고 야속하고 짓궂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성경 해석의 중요 원리
성경을 해석함에 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다. 한 기사나 한 문맥 안에 동일한 표현이나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물 위를 걷는 기적 기사인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33절까지 정확하게 똑같은 표현과 내용이 두 번 나온다.
먼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자 제자들은 유령인줄 오해했다.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했다.(26,27절) 똑같은 내용이 오늘의 본문에도 나온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30,31절) 제자들과 베드로는 무서워서 소리 질렀고, 예수님은 그 즉시 구원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가 힘들 때에 기도하자마자 응답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되었던 믿음의 법칙은 지금 효력이 다했다. 고난이 겹치고 또 겹쳐서 새벽기도에 나와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사방은 캄캄히 막혀 있다.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나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 여부마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고 신자의 기도를 듣고 신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환난에도 당신의 자녀에게 피할 길은 열어 놓으신다. 아무리 사방이 완전히 다 막혔어도 하늘을 향한 위쪽은 항상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울수록 끝까지 하나님을 소리 질러 불러야 한다. 주위에 믿음이 좋은 신자들이 고개를 흔들고 목사님조차 침묵하며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의 권능은 손곱만큼도 줄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은 오히려 무한대로 더 커진다.
신자의 믿음의 법칙이 산산조각이 나서 세상에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고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이 났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법칙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 모든 허물과 고난과 실패를 바로 잡아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절대로 율법적, 기계적, 자동적, 인과응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법칙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될 수 없다.
저도 목사이지만 목사님들이 너무 쉽게 주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권한다. 물론 틀린 말은 절대 아니지만, 고난 때에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오히려 평온하고 형통할 때에 그 시선이 더 쉽게 세상으로 향하게 된다. 저도 목사지만 힘들면 주님을 찾고, 더 힘들어지면 두렵고 염려가 끊이지 않기에 죽기 살기로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믿음이 약해져도 혹은 자꾸 두렵거나 의심이 들어도 넘치도록 부어지기에 은혜인 것이다. 믿음이 강건하고 전혀 의심이 들지 않을 때만 은혜를 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자 공로인 것이다. 인간의 어떤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부어주실 때에 은혜가 비로소 은혜다워지는 것이다.
믿음에는 법칙이 없다.
하나님 쪽의 은혜에 법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없다면, 인간 쪽의 믿음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초월하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어떤 위대한 일에도 정밀함에서 전혀 부족하지 않고, 아무리 세밀한 일에도 당신의 광대함은 함께 하신다.
믿음이란 그래서 광대하고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가슴을 크게 열고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받아들이느냐는 차원이다. 인간 쪽의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 부어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어떤 공식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자가 그 오묘하고 아름답고 광대한 은혜의 강에 완전히 빠져 현실의 삶에서부터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 당신께서 모든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죄인을 구속한다는 진리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인들은 다 싫어하고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지혜, 종교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성령의 거듭남으로 그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자랑거리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오직 예수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게 된다. 신자가 현실의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그분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자 은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당시 최고의 믿음을 가진 자였다. 주님만 믿고 따르는 열정에선 역사상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베드로 혼자만을 위해서 해와 달과 바다를 움직이는 그 엄청난 물리적 법칙을 일시 중지시켰다.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베드로 쪽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보이길 분명히 요구하셨다. 반드시 신자의 믿음이 따라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위 여건이 너무 두려워서 그 믿음에 실패하자 징벌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진짜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 “주여, 주여, 주여!”라고 교회 모임에서 결단력을 높이려는 의식 절차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힘들고 두려워서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으로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주신다. 하나님만의 속력으로 달려오신다. 신자로 거의 빠질 뻔 하게는 해도, 완전히 빠져 죽게는 하지 않으신다.
위급할 때만 드리는 기도
시편 50편 15절을 보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여기까지는 너무나 당연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한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다.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도 하나님은 아주 기뻐하시고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니 너무나 엄청난 은혜 아닌가? 그것도 하나님이 기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기뻐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환난을 주고선 할 수 없어서 기도하게 하고는 짐짓 모른 척하고 구해주는 즉, 병 주고 약 주는 분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겪는 고난의 99%가 사실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 때문이지 하나님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진심으로 부르짖으면 건져 주신다고 한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고난을 겪도록 묵인하는 것은 당신을 더 간절히 찾아서 당신을 정확하게 바로 알라는 것이다. 아는 만큼 당신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에 당신과의 참 사랑의 관계로 초대 혹은 인도한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실제로 걸었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상하게도 유독 베드로의 이 실패만큼은 우리 모두가 심정적으로 굉장히 아쉽게 여겨진다. 이왕이면 끝까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유유히 배에 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련이 생긴다. 물론 그랬다면 베드로는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조차 산산조각 났을 때에 즉시 달려와 구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실종될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주도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에 빠트렸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 동료 제자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보려는 소영웅주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그가 완전히 빠지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은혜라는 것이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가 일어나 걷겠다고 설친다고 치자. 뼈의 발육에 안 좋으니까 바른 부모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아기가 넘어져야 정상이고 또 부모도 넘어지도록 놓아둔다. 그러나 아기가 일어서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기는 해도 너무나 귀엽고 예쁠 것이다. 나아가 아기가 억지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주면서 버티면 부모로선 몸에 무리가 가겠다 싶어서 즉시로 손을 잡아주지 않겠는가?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도 하나님이 영화롭게 여기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불신자들은 자연의 물리법칙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인생은 오직 그 법칙들에 의해서만 좌우된다고 믿는다. 기적은 당연히 믿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기계나 물체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기도 응답 받는 것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연의 일치는 기도할 때에 훨씬 더 자주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가 환난이 닥쳐야 겨우 기도를 해도 그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죄악과 술수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계획과 지혜만 믿고 행했더니 남은 것은 실패와 좌절과 상처와 고난뿐이었다는 실토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하든 그 어둡고 힘들었던 세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지배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신학적으로 그런 구체적인 의미는 몰랐어도 흑암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오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정말로 지난해의 묵은 실패, 분노, 상처, 고난 그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주님 앞에 부르짖어 보라. 모든 짐을 그분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다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은혜를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다.
12/30/2012
환난날에 주님을 부를 때, 오직 하나님만이 영화로워지는 이유는 영웅심에서 비롯되어던, 밀려오는 파도에 예수님 얼굴이 가리워 겁이 덜커덕 나서 두려워 벌벌 떨던, 여전히 예수님은 가차이 계시며 그저 한발자욱 한발자욱 힘 겨웁게 땔지라도 또 가차이 다가오시며 손을 잡아 주시려 준비하시는 주님이 계심이 은혜임을 말씀을 통해 배웁니다. 그 모든 상황들을 주도하신 예수님의 속 깊으신 뜻을 배우길 원합니다. 물에 빠지려 비척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무서워서, 넘 무서워서 그저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음이 은혜임을 더더욱 배우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