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turbed or Overjoyed?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2:1-10)
가족과 원수지게 하는 예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직접 밝히는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 심정적으로 흔쾌히 납득되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다. 바로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며, 또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되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마10:34-37)
이왕이면 당신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화평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대신에 갈가리 찢어서 서로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가뜩이나 올해 한국과 미국에서 대선을 치르면서 상호 의견 차이는 인정했던 이전과는 달리 아주 작은 차이로도 서로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 판국이지 않는가?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들이 원수가 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예수님이 인간 구원의 참되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요14:6) 예수를 믿지 않으면 여러 가지 다르고 틀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예 길이 아닌 광야나 사막만 있을 뿐이다. 10-20% 조금 부족한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非)진리 반(反)진리만 있다. 헛되거나 가짜 같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멸망과 죽음만 기다린다. 이 두 차원 사이에는 서로 융화, 조정, 타협, 균형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 사이를 예수님이 이간하고 분열시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갖는 고유의 본성상 그분을 접하는 사람이 보이는 결과적 반응이 그렇게 될 뿐이다. 필연적으로 정반대되는 두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관과 목표와 방향이 등을 지고 완전히 둘로 나뉘는 것이다.
온 예루살렘 성의 소동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이 구분이 명확히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특이하게도 예수님은 말을 하기는커녕 기지도 못하고 구유에 누워 잠만 자고 있는데도 마구간 밖의 어른들 사이는 완전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한 아기가 태어나 새근새근 자고 있는 동안에 바깥세상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만 보아도 예수님이 메시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먼저 헤롯 왕궁과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자.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 즉,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 단순히 그 소식에 신기해하거나 놀랐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로 'disturbed'로 번역되었듯이 비행기가 난기류에 휩싸여 요동을 치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왔다면 정통 유대인이 아니고 권력의 화신인 헤롯왕은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러나 성경은 “온 예루살렘”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염려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수난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오로지 정치적 메시아만 기대했던 것이다.
정치적 메시아라면 폭군 헤롯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럼 왕궁의 신하들은 지금껏 향유하던 특권을 일시에 잃어버리게 되니 염려할 수 있다. 성중의 백성들은 왜 걱정했을까? 평소 헤롯의 포악한 성격을 보나,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메시아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를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들에게 죽음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고통을 가져다주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북한의 삼대 세습왕조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절대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자들이 벤즈 같은 사치품을 하사 받으며 풍요롭게 사는 호사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들 또한 폭동, 혁명, 전쟁 같은 급변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독재적인 북한의 권력층과 김정일 부자라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못 느끼는 철면피는 아닐 것이다. 자기들이 인민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 때로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재물의 단맛에 중독되어서 양심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돈이 자기들의 주인이 된 것이다. 물질의 공평한 분배로 정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산주의에서 돈이 우상이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인간의 죄스런 본성은 문화, 관습, 제도, 사상, 종교와 무관하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참된 개혁과 진보는 거부 혹은 주저하고 먹고 살 것만 주면 그 자리에 안주하려 든다. 세상에서의 형통과 안일 때문에 참 진리, 올바른 길, 진짜 생명은 버리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고 죄에 찌든 자연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박사의 넘치는 기쁨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의 반대편에는 아주 초라한 베들레헴이 있었다. 동방박사들은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보고는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다. 강조 문구가 무려 네 번이나 사용되었다. 도저히 주체가 되지 않는 기쁨이 넘친(overjoyed) 것이다.
그들은 멀리 페르시아 쪽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근 2년이나 걸리는 여행길에 나섰고, 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그만큼 재력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또 성경주석가들에 따르면 바사의 궁전에서 환관으로 섬겼던 다니엘이 모세오경을 가르치고 창조주 여호와 신앙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그곳에 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박사들도 그들의 선조로부터 그 신앙을 전수 받았을 것이므로 신분상으로도 아주 상류층에 해당될 것이다. 나아가 박사는 현자(賢者)로, 유대인으로 치면 랍비, 천문학을 비롯한 학문적 수준도 아주 높았던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재력, 신분, 지성, 도덕성, 종교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들로 세상에서도 하나 부러울 것 없이 다 갖춘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그 먼 길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와선 단 한 번만 경배하고 선물을 드리고는 곧바로 돌아갔다. 물론 메시아가 세상에 도래했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결과로 따진 것이다. 그 본인들로선 그런 막중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소명의식을 그 당시에 갖고 있었을 지는 의심스럽다.
그들로 인해 애꿎은 2세 미만의 아이들만 여럿이 죽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질 줄 미리 알았더라면 헤롯 왕궁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그 여행 자체를 출발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들은 단지 특별한 별이 나타나자마자 메시아를 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서 무작정 그 별이 나타난 서쪽으로 향해 길을 떠난 것이다.
말하자면 메시아를 꼭 만나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베들레헴에 도착했어도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귀저기 차고 누어서 자는 아기 예수만 보았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에 만족하며 그렇게 기뻐하고 또 기뻐했을까?
누가복음 2장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난지 8일 만에 할례 예식을 받게 하려고 성전에 데리고 간 기사가 나온다. 시므온이라는 늙은 선지자가 예수를 보고 “주재(主宰)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이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2:29,30)라고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또 과부 된지 84년이나 지난 안나라는 여자 선지자도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눅2:38) 말했다. 쉽게 말해 둘 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셨음이 확실하니까 이제는 눈을 감고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한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게 성령이 임재해 있었고 또 성령의 감동과 지시로 아기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봤다고 증언한다.(눅2:25-27) 아기가 장성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환상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모순과 불의와 재앙과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 하나님이 인간들을 계속해서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인간이 결코 이 땅에 그저 내팽겨진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사탄의 꾐에 넘어간 아담이 당신을 거역하여 타락했음에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창3:15) 언약을 기억하고 이제 곧 성취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그 언약이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거쳐서 재확인되다가 드디어 그 약속대로 유다 지파, 이새의 가문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음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의 주홍 같았던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시려는 것이다. 죄인들과 “항상 함께 하시어”(임마누엘) 그들의 고난, 눌림, 갈증, 수치, 염려, 두려움 등을 해소시켜 주실 것이다. 성전의 그 두 선지자는 아기 예수가 장성하여 하나님이 이 땅을 구속하는 일을 당신의 몸으로 완성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들도 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과 깨우침으로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동일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아기야말로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여자의 후손 임마누엘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경배드렸던 것이다.
시므온, 안나, 동방박사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지만 구원이 갈급했던 자들이었다. 재물, 명예, 지성, 권력 등을 다 가져보았어도 참 만족을 못 느낀 것이다. 양심, 도덕, 종교 등으로는 심령이 온전히 깨끗케 되지 않기에 그것들이 절대 인간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의 지위, 권력, 재물이 더 많아질수록 갈급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모순에 괴로워했었던 것이다.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도리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만 더 많이 깨달아졌다.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이 늘어나도 정작 평강과 기쁨은 없고 오히려 자신의 내면은 텅 비워져 가는 것 같았다. 뭔가 이것은 아닌데, 이런 것들 외에 내 마음을 정말로 시원케 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지 의심과 불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아기 예수를 보았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강과 기쁨이 가슴에 가득히 넘쳤던 것이다. 그들이 기쁘고 기뻤다고 해서 초자연적이고 오묘한 충만감(ecstasy), 절정감( climax) 즉, 일종의 종교적 무아지경에 빠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즉, 절대로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지금 바로 자기들 앞에 임재하시어 따뜻하고 포근한 웃음을 가득 안고 두 팔을 벌리고 자신들을 당신의 품안에 안아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과 안식이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채워지는 것을 확실히 느꼈던 것이다.
지금도 처음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는 순간에는 그 때까지 보고 인지했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나무 잎마저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것 같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 같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자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찬송했다는 기록이 바로 사실이며(눅2:13), 나아가 오늘 날에도 신자들이 구원 받을 때에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는 사람이 기생집에서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해도 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인식은 못해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기쁨을 찾아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독재자들이나, 헤롯 왕과 예루살렘 성중의 사람들처럼 물질적 형통을 더 앞세우는 바람에 아기 예수를 거부한 채 사막과 광야에서 헤매기만 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는 어리석은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비진리와 반진리만 쫓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에게서 평강과 기쁨을 발견한 자들에게 절대로 그 인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하지 않는다. 정말로 존귀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완성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과 능력과 은총으로 창조 당시에 당신께서 심히 기뻐했던 그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 정말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분이 바꾸고 자라게 해주신다.
진짜로 믿음이 좋은 신자
오늘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오랜 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선물을 주고받으며 맛있는 성찬을 나누어야 하는가? 물론 그래야 한다.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먼저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뜻을 회상하며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진정한 감사부터 있어야 한다.
단 교리에 동의하는 종교적 의무감으로 감사해선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 가 자신의 삶에 적용되어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감사가 따라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예수님만 생각하면 평강과 기쁨이 흘러넘쳐야 한다. 헤롯왕과 그 신하들처럼 재물을 쫓아 살면서 그것의 많고 적음으로 웃고 울었던 불신자 시절이 오직 실패뿐이었음을 온전히 절감해야 한다. 하나님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를 보면 더 소동하는(disturbed)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옮겨주셨다.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를 직접 만남으로써 넘치는 기쁨을(overjoyed) 갖게 되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허물과 수치와 눌림과 두려움과 걱정과, 그 무엇보다 죄 값을 다 감당하고 죽으심으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그분의 길과 진리와 생명 안에 내가 붙들려 있으며 한 시도 그곳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는 감사가 절로 흘러 넘쳐야 한다.
제가 이전에 담임하던 교회에 저는 그 발등상에도 못 미칠 정도로 믿음이 아주 좋은 젊은 분이 있었다. 불신자들과의 술자리를 한 번도 피하지 않으면서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술을 안 마셨다고 믿음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더 신나게 놀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흥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호응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나서서 더 신나고 기쁘게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런 가운데도 절대로 난잡하거나 퇴폐적으로 흐르지 않게 했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아도 항상 얼굴에 웃음과 기쁨을 머금은 채 유쾌하고 깔끔하게 자리를 마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참석한 불신자들로부터 네야말로 진짜로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 예수를 믿는 것이 네 같은 모습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궁극적으로 인간끼리 화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단 인간적 처세술이나 인간의 의로는 도무지 불가능함을 깨닫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여 구원해주신 소수의 남은 자들로 먼저 하나님과 화해토록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기뻐하는(overjoyed) 삶을 살도록 하신다. 또 그 기쁨의 삶에 다른 이들로 초대하고 동참하는 방식으로 세상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표현한 대로 하자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은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가 된다. 분열된 세상, 찢겨진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길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뿐이라는 뜻이다.
혹시라도 이 거룩하고 기쁜 성탄의 아침에 세상의 것으로 인해 평강이 없는가? 아기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라. 당신의 언약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평생을 두고 기다린 기대와 소망을 전혀 실망시키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회상하는 순간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어 기쁨과 평강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여러분과 이 교회가 새해에는 기쁨이 넘치고 또 넘치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로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하고 시샘 나게 하면서 그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초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났다면 하나님 그분이 신자와 그가 속한 교회를 보면서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12/24/2012년 성탄절 새벽예배 설교
말씀하신 믿음좋은 그 젊은 분이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 성품, 그런 자유함, 정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 어쩔 줄 모름이 매 삶에서, 자잘한 삶의 모습들에서 솔솔 배어나오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웁고 너무나 부럽습니다. 그리고 배워 닯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