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은 예비보다 망각하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극성을 부리는 종말 예언
최근 들어 영적으로 아주 더 혼탁해진 것 같다. 조금이라도 깨인 자라면 다 공감할 것이다. 온갖 이단 사설들이 활개치고 있고 또 하나님께 직통으로 계시를 받아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어지간한 신자라면 그런 자들을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을 만큼 흔해졌다.
심지어 일반 교인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고무 교육 훈련시키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일부이긴 해도 교회들도 직간접으로 소위 예언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목사 중에도 직접 예언을 하거나, 그런 자들을 특별집회의 강사로 초청한다. 또 외부의 그런 예언을 인용하면서 경고 내지 협박성 설교도 한다.
거기다 그 예언들 대부분이 참혹한 환난을 미리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식이다. 예컨대 한국의 천안함 사태나, 일본의 쓰나미 등을 몇 달 앞서 예언했다는 것이다. 미국 LA에 진도 10이 넘는 대지진이 곧바로 일어나 백만 명 넘게 죽을 것이라는 등이다. 나아가 종말과 재림이 바로 코앞에 닥쳤다고도 한다. 이미 일어난 재앙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소개되니까 쉽게 현혹된다. 최소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기도하게 만든다.
작금의 사태가 정말 이 땅의 종말을 예시하는 것인가? 주님의 재림이 진짜로 벽에 걸린 캘린더를 다 넘기기 전에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시대마다 항상 있어온 현상이지만 매스컴의 발달로 과대포장된 것인가? 누구나 그런 예언을 들을 수 있다 보니까 군중심리에 휩쓸린 것인가? 그래서 잠시 반짝했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자기 장례식을 준비한 한 여자 가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그 시기와 방식은 어느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오랜 투병생활을 한 환자가 죽음이 다가옴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어도 운명하는 순간만은 절대 미리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은 믿음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절실한 충고다. 죽음을 대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폐암으로 죽은 일본의 한 원조 아이돌 여자가수 겸 배우의 장례식이 큰 화제를 낳았다는 TV뉴스를 우연히 보았다. 생전의 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장례식에 참석할 지인들을 향한 고별인사를 죽기 직전에 녹음해 두었기 때문이다. 생전의 육성이 들려진 장례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그 모습을 보게 된 저 또한 저절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산다는 것이 이처럼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거나, 비석에 쓸 유언을 작성해 보는 것인가? 그 여가수는 의사들이 완전히 손을 들었고 또 온몸에서 기력이 서서히 다 빠져나가는 것을 절감했기에 그럴 수 있었을 뿐이다. 내일 당장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고 매일 장례식장 알아보고, 그 순서를 정하고, 지인들에게 자기 장례식에 꼭 와달라고 요청하면서 보내는 바보는 없다. 그러는 와중에, 아니 그러기도 전에 죽을지 모르지 않는가?
인간의 지성은 우리 스스로도 놀랠 정도로 뛰어나다. 현시대의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보면 앞으로 얼마만큼 더 발달할지 아무도 쉽사리 짐작하지 못한다. 인간 두뇌의 일부 기능만 쓰고도 그러하다. 그렇게 똑똑한 인간에게 이해하기 힘든 아주 어리석은 측면이 하나 있다. 쉽게 망각하는 버릇이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고도 한번 뿐인 죽음이 자기에게도 언젠가는 닥치고 만다는 그 엄연한 진리를 말이다.
모든 이가 죽음은 마냥 잊고 산다. 나에게만 죽음이 해당되지 않는 양 여긴다.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지금 활기찬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면 두렵고 초조해 한 순간도 온전히 살지 못할 것이다. 매일을 마지막 날로 여기며 살라는 것은 그래서 죽음을 잊고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는 것이다. 역설적이긴 해도 자기 죽음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똑똑하다는 증거다. 아니 인간이 매일 공포에 떨지 말도록 하나님이 다른 것은 몰라도 죽음만 자동으로 망각되도록 만드셨다.
살고 죽는 것, 다른 말로 이 땅에서의 인생을 시작하고 마감하는 일은 완전히 인간의 통제 밖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시작은 기억도 나지 않으며 끝은 짐작도 안 된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 인간 스스로 통제 가능한 것은 그 중간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생에서 행할 최우선적 일은 그 중간을 성실히 사는 것이다. 출생은 기념하되 죽음은 망각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간단하고 명백한 절대 불변의 진리다. 천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모든 피조물은 그래야 한다. 실제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은 그렇게 하고 있다. 유독 인간만 그 중간 여정을 제 멋대로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특별히 자유의지를 주신 까닭이 그 중간을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하고 활기차게 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꾸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인간이다.
인생의 처음과 끝이 하나님께 달렸다면 당연히 그 중간도 그러하다. 신자는 그 중간도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최선을 다해 그분의 인도에 따르며 살아야 한다. 매일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 자체는 잊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한 시도 낭비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누려야 한다.
밭을 매고 있어라.
죽음이 신자 개인의 종말이라면, 주님의 재림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종말이 된다. 개인의 출생과 죽음의 시기를 아무도 모르듯이, 이 땅의 창조와 종말의 구체적 시기 또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개인이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듯이, 인류 공동체도 종말이 바로 내일 닥치는 것처럼 간주하고 대처해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적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림과 종말 자체는 완전히 망각하고, 자기와 미래 세대의 유익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이 언제 종말이 임할지 모르니까 깨어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신 본문의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재림이 임박했다고 만사를 제쳐두고 전도하거나 예배당에 모여 기도만 할 수는 결코 없다. 인류의 종말이 두려워서 신자가 세상을 향해 재림만 매일 선포 경고하면서 다니는 것은, 한 개인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매일 장례식 준비만 하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그야말로 바보짓이다.
예수님도 깨어서 예비하라는 당부를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집주인은 깨어 있어야만 도적이 그 집을 뚫지 못한다는(43절) 말씀을 가지고 흔히들 항상 전도하고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문자적 해석을 해선 안 된다. 만약 진짜로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집주인은 밤마다 잠자지 않고 꼬박 새워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얼마나 불합리한 계명인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일관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한 문장 안에서, 예컨대 본문의 한 비유 안에서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다른 부분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예수님의 뜻은 어느 날에 당신께서 다시 오실지 인간이 구체적으로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생각지 않을 때에 올 수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했다. 바로 앞의 진술이 전제, 조건, 원인, 근거라는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절) 종말의 때의 상황을 설명하신 구절이다. 어떤 뜻인가?
이 또한 비유이므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선 안 된다.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르고 불시에, 그것도 사람들이 아주 일상적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에 임한다는 것이다. 전도나 기도만 하고 있는 자를 데려간다고 하지 않았다. 비유이긴 해도 예수님은 여인들이 밭을 매고 매를 갈고 있을 때에 즉, 출생과 죽음의 중간 과정을 성실히 살고 있는 중에 다시 오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혹시라도 이 말씀을 소위 말하는 휴거의 초자연성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마지막 때에 신자들이 엘리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공중으로 들려 올린 것처럼 될 것이라는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두 사람 중에도 데려감과 버려둠으로 명확히 나뉜다는 것이다. ‘데려감’의 원어도 받아들이다, 교제하다. 좋아하다, 하나가 되다 등의 뜻이다. 밭 매다가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식의 의미는 전혀 없다.
즉, 사람들이 동일한 일을 동일한 장소에서 하고 있어도 구원할 자는 구원하시고 심판할 자는 심판하신다는 의미다. 모든 외부적 자격과 상황이 거의 같은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조차 쭉정이와 알곡이 마지막까지 섞여 있도록 버려두시다가 당신께서 다시 오셔서 정확히 구별하신다는 것이다.
종말예언에 불안해지는 까닭?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으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진리는 절대 잊지 않되, 그 죽음의 때와 방식은 망각하고 평소대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물론 인생 전부를 주님께 의탁하여 인도에 따라야 한다. 신자가 재림에 대비해 깨어 있어야 함도 마찬가지다. 불시에 재림이 임한다는 진리는 절대 잊지 말되, 그 재림과 종말 자체는 망각하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항상 해오던 대로 신자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면 된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온갖 예언들이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더 그래야 한다. 엄밀히 말해 신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사안이 아니다. 그 예언한 내용에 신뢰성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신자라면 주님이 언젠가는 불시에 재림하신다는 진리 자체는 이미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다시 신경 쓸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소명을 열심히 수행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그런 예언에 관심을 두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 소명대로 살고 있지 않거나 죄에 빠져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비유컨대 공부 잘하는 학생은 자율 학습 시간에는 더 열심히 공부하며 선생님이 언제 돌아올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칠판에 적어놓고 간 숙제는 뒷전이고 떠들고 놀기만 했던 학생들만 선생님이 언제 돌아올지 서로 알아맞히느라 정신 못 차리지만 말이다. 선생이 돌아오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척하여 칭찬 받으려는 얌체 짓일 뿐이다.
간혹 그런 예언들이 맞고 틀림은 둘째 치고 단순히 경고의 의미를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를테면 과학자들도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으니 LA에 대지진이 오지 않도록 교회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또 그렇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대비나 기도가 현실의 일상적 생활은 두말할 것 없고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초조나 염려의 색깔로 물들이게 해선 큰 잘못이다. 그러는 것은 재림과 종말에 대한 의미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니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 잘 모른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구원을 모른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신자가 아니라는 뜻인데도 말이다.
종말의 의미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하더라.”(계7:9-12)
구원 받은 자들이 천국 보좌 앞에서 찬송을 하는 장면이다. 구원하심이 오직 하나님과 그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또 그래서 그 대속의 은혜를 온전히 믿은 자는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 골고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의 구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다. 이렇게 찬송하는 자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어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3,14절)
찬송하는 자들은 바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한다. 마지막 때의 환난에서 건짐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또 그렇게 된 까닭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둘을 연결하면 예수를 온전히 믿은 자는 대환난에서도 대피함을 받는다는, 최소한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환난 때에 혹시 순교를 당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천국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스러움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최초의 순교는 이후에 있을 순교의 본이 된다. 스데반은 오히려 평강과 기쁨 가운데 죽었지 않는가?
요컨대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대환난에서 신자를 구원하러 오시는 것이다. 그 때까지 회개치 않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은 그와 동시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절차다. 세상의 심판은 신자의 구원이다. 신자에게는 마지막 때가 결코 염려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정반대다. 그 때를 소망과 기대로 가슴 벅차게 맞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 진리를 잘 모르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사정이 뒤바뀌고 있다. 종말적 현상이 나타날수록 원론적으로 말해 불신자는 두려움에 빠져야 하고 신자는 아주 기뻐해야 하는데 말이다. 신자들이 도리어 온갖 이상한 예언들과 최근에 부쩍 잦아진 자연재앙에 대해 그저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니까 반성경적인 예언들이 덩달아 기승을 부린다.
그 원인은 간단하고도 자명하다. 십자가 복음이 강단에서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신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성실히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살고 있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셔도 하등 불안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매일 매일이 즉, 예수님 오신 그 날이 이미 신자에게 마지막 날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오늘 당장 죽어도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서 눈뜰 것을 확신하는 신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자기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움은 있을지언정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있어야 하며, 오늘이 바로 주님 오실 날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고자 기도하며 순종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신자일수록 죽음은 완전히 망각하고 오늘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히 밭을 가는 자라야 천국의 더 큰 영광을 맛볼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 않는가?
2/8/2013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음만을 지속 가르치는 교회, 예수님 십자가로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강단에서 지속 선포하는 그런 교회, 강단 저 너머 커다란 십자가만 상징으로 달아놓고 다가올 재림을 두려워 어찌할 줄 모르는 성도들이 되어지게 만드는 일이 제발 없도록 참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그 진정의 교회가 점점 많아지길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