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10:25-29)
제사를 중지하더라도 형제와 화해부터 하라.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10:25-37)는 너무나 유명해서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는데 모든 이가 보고도 피하여 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끝까지 도와주었다는 비유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마저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자기 돈을 써가며 도와주었다. 오늘 날로 치면 목사나 예수 믿는 신자도 외면한 길거리에 쓰려져 있는 홈리스를 불신자가 병원에 데려가 자기 돈으로 치료해주었다는 뜻이다.
많은 신자들이, 아니 솔직히 목사인 저도 이 비유를 들으면 양심에 많이 찔린다. 실제로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자들이 많은데도 자기 일이 바쁘고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모른 체 넘어가기 일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구차한 변명도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침 성전제사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했다. 제사 중에라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사람이 죽어가는 일도 아닌데도 제사를 그만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라고 하셨지 않는가?
시편 기자도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사를 드리는 근본 목적은 먼저 자신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또 그 회복된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채로는 아무리 율법의 규정대로 경건하게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고 한다. 상한 심령은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것을 참회하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동일한 죄를 반복해 짓고도 단순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 후에 혹은 빌면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오던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지만 예배시간에 맞추느라 지나치고 온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자 핑계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제사를 중지하더라도 돌아가서 화해부터 하라고 하셨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과 멀어진 자기 자신 전부에 대해 처절하게 통분하면서, 쉽게 말해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등을 짐으로써 의의 길에서 벗어나 죄를 지었고 또 영적으로도 너무나 갈급하고 피폐했음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철저하게 깨어지는 것이다. 또 그런 자신의 더럽고 추한 내면을 보고 세상의 어떤 슬프고 힘든 일보다도 더 애통해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한두 개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는 것, 그것도 단지 입술로만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예배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단순히 예배에서 하나님께 용서만 빌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잘못을 바로 잡으라는 데에 초점이 모여 있다. 또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는 임하기는커녕 자신의 정신적 평강과 안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회개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평소에도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영혼을 벌거벗기는 살아 역사하는 말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게 된 계기는 구제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한 것이다. 그 질문을 한 까닭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시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물은 것이다.
그 율법사는 그 두 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즉 그가 교제하는 자기 이웃은 바로 율법사, 제사장, 레위인 같은 자기와 동류(同類) 그룹이었고, 또 그들을 정말로 자기 몸처럼 사랑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계명을 지켜 영생을 얻는다면 자기가 일등이라는 교만에 가득 찬 질문, 아니 질문이라기보다 예수 같이 이름 없는 랍비라면 당연히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은연중의 채근이자 협박이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그의 치사하고도 음흉한 의도를 꿰뚫어 아시고 그의 가장 추한 치부를 찔러 드러내었다. 그 율법사가 자신의 친한 이웃이라고 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길에서 강도 만나 죽어가는 불쌍한 자를 외면하고 지나쳤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 율법사의 이웃들인 유대 종교지도자가 정죄한 자다. 앗시리아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했고 또 영적으로 간음했으니 유대인더러 교제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불쌍한 자를 보고도 외면했지만 하나님과 가장 멀어 보이는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비유를 말씀한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예리하게 반문했다. “너의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말이다. 율법사로선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께 완전히 저주 받은 자로 취급했던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외에 다른 대답은 있을 수 없었고, 어린이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가장 잘 지켜 천국에 일등으로 갈 것이라고 자부한 자에게 그렇게 경멸했던 사마리아인보다 율법을 더 못 지켰다고 견책한 것이다. (실제로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 구약경전으로 인정했으니 율법을 더 엄격히 준행했을 수 있다.)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의 정의(定意)는 율법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신분, 지위, 가문, 학벌, 재력, 취미, 기호, 종교 등이 같은 자들만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주위에 붙여 준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배려와 도움과 기도가 필요한 자들은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아니 신자더러 그렇게 섬기라고 하나님이 붙여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과연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여부를 이웃 사랑으로 증험하시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자기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자를 골랐다고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고르면 아무래도 그에게서 유익을 얻으려고 이해타산을 따지기에 현실적 지위와 외모를 보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상대방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한다. 요컨대 이웃이 신자를 그들의 이웃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가 이웃을 고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대신에 이웃들에게 항상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살아서 이웃들로 언제든 신자를 의지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결국 그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했는데 그렇게 못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 일은 어린아이들이 가장 잘한다. 말도 못하는 유아라도 자기에게 사탕을 주거나 칭찬을 하거나 귀여워하는 사람을 정확히 골라내어 그 사람만 좋아 한다. 자기 동료 그룹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교제나 취미 활동한 것에 불과하다. 불신자들도 아주 잘 하는 일이다. 그런 인간관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사랑이 개입할 필요도 여지도 없다.
예수님더러 반 협박조로 질문했던, 최대한 양보해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려 왔던 그 율법사는 얼굴도 못 들 정도로 창피만 당했다. 이 비유를 결론지은 성경 구절을 보라.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틀림없이 그는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간 곳도 없고 완전히 꼬리를 내리며 도망치듯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훨씬 더 차원 높은 구약의 계명
율법에는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이 또 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출23:4) 자세히 살피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보다도 이웃사랑의 차원이 훨씬 더 높다. 길을 가다 원수의 가축이 길을 잃은 것을 보거든 그 원수에게 데려다 주라고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짐승에 불과한데다 맹수에 물려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원수의 소유다. 도무지 도와줄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럴 기분이 전혀 내키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원수에게 돌려주려면 다시 먼 길을 가야한다. 시간적 금전적으로 큰 손해다. 그리고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다시는 상대도 하기 싫었던 원수와 상면해야 한다. 자기 짐승을 돌려주었다고 원수가 보상할 리도 없지만, 설령 보상을 해주어도 받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도무지 귀찮기만 하는 일이다.
인간적 기준으로 따지면 이 경우야말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도 될 것이다. 아니 안 그래도 원수에게 피해 청구할 것도 많은데 일일이 따지기 싫으니 그 가축을 챙겨서 배상 받은 것으로 쳐도 된다. 솔직히 우리가 그런 경우에 맞닥트리면 어떻게 하겠는지 따져보라. 이 계명대로 준행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축을 죽이거나 자기 소유로 취득하지 않은 것만도 의롭다고 칭찬 받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거룩하고 온전하시다. 또 그러하기에 당신의 백성도 거룩하고 온전하길 바라신다. 그분은 영원토록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항상 거룩하고 온전하시다. 그 점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신자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거룩하고 온전하심이 당신의 자녀들이 거룩하고 온전해짐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 전에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의 의미와 가치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거룩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흡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는 아무리 작아도 언제나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계명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예수님의 사마리아 인의 비유보다 더 고급한 차원의 의와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 율법이 유대 민족 고유의 오래된 관습과 제도가 결코 아니다. 율법에는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만의 의다. 세상에는 없는 의다. 인간이 고안해낸 상식, 도덕, 사상, 철학, 종교로는 다룰 수 없고, 아니 이해도 안 되는 그분만의 의와 거룩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더러 그런 자리에 이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종교적 멍에를 짊어지게 해서 당신의 종으로 얽어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렇게 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율법사와 제사장들이었다. 종교 권력을 이용해 자기들만 치부하고 연약한 대중들은 자기들 영향력 아래 두려고 인간 상식에만 합당한 계명과 유전들을 양산(量産)해내었던 것이다.
만약 언뜻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 계명을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승복하고 기쁨과 감사로 순종한다고 가정해보라. 원수끼리 금방 용서와 화해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 원수질 일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설령 진심으로 승복하지는 않지만 의지적으로 일단 지키기만 해도, 가축을 원수에게 몰아가고 있는 동안에 서로 미워하게 된 사연과 과정과 차후 일어날 상황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원수와 다시 대화의 물꼬를 여는 계기는 되지 않겠는가? 그럼 아무래도 인간관계에서의 용서와 긍휼이 훨씬 더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저급한(?) 차원의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었을 리 없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었을 것 아닌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틀림없이 유대인일 것이다. 성경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라고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유대경내라고 말하고 있기에 명시적 언급은 없어도 유대인으로 봐야 한다. 만약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났다면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유대인에게 같이 멸시 받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주었다는 일반적인 뜻이 된다.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의미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 예수님은 같은 동족이 죽어 가는데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척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동족의 영적, 육적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직무태만의 죄를 범한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미워해도 마땅한 유대인을 끝까지 보살펴주었다는 것이다.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그 율법사에게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가 율법을, 그것도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데 과연 그럴까? 율법은 동족은커녕 원수의 가축이 길에서 다친 것도 아니고 헤매고 있어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너희는 지금 동족이 죽어 가는데도 외면하고선 도대체 무슨 계명을 어떻게 지켰다는 것인가? 율법의 참 뜻은 물론이고 어떤 율법이 있는지도 다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러고도 네가 율법사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감히 나에게 영생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눅10:31),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32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둘 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30절) 중이었다. 성전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혹은 어디론가 가는 중이라는 뜻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구차한 변명 즉, 그들이 성선제사에 늦었을 것이라는 변증은 아예 성립 되지 않는다. 그런 변명을 한 기독교인도 이 율법사와 똑같이 인간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 드러내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분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 속내를 완전히 까뒤집으면 우리 모두가 치사하기까지 한 그 변명에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어쉬었는가 말이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모두의 심령이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그것도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전히 벌거벗겼지 않는가?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 주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밝히는 차원만도 아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살펴본 대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규정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율법을 풀어 가르쳐야 할 율법사가 말이다.
더 본질적인 의미는 모든 인간은 인간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더더욱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죽어가는 동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것도 당신의 종들이 그러한데, 어찌 원수의 가축까지 사랑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이다. 아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웃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죄악에 대해 격분한 요나만큼 신실한 주의 종조차, 최소한 예수님께 찾아온 율법사보다는 훨씬 의로웠을 텐데도, 니느웨의 육축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않는가? 요나보다 더 큰 표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지 않고는 요나서 결론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사악한 도성의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은 물론 그 가축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말씀은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라는 열쇠가 없었다면 영원한 미궁으로 빠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비로소 사람들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또 그에 대조해 인간의 비참한 실패와 무능력을 알게 되었다. 출애굽기의 계명보다 영적으로 훨씬 차원이 낮은 사마리아인의 비유 앞에서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는 물론, 오늘 날의 저를 비롯한 모든 목사들도 감히 떳떳하다고 자부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모든 인간에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소망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절대 의인으로 서지 못한다. 모든 이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모르고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또 예수님께 찾아 와서 자기 자랑을 일삼은 율법사의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물론 간혹 불신자들 가운데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원수마저 내 몸 같이 사랑하고 또 자기를 핍박하는 그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자는 절대 없다. 길가다 우연히 만난 원수의 가축까지 끝까지 돌보며 원수에게 돌려주는 바보는 인간 사회에선 없다. 그 진리를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으로 알게 해주셨다.
더 중요하게는 당신께서 실제로 그 진리 됨을 온몸으로 실현해 보였다. 율법의 선행은 인간을 결코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선포하셨다. 율법이 부족하고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처참한 영적 실패에서 회복될 수 있을 뿐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왔기에 알게 모르게 짓고 있는 죄를 회개만 하면 된다고 안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접하면서 그러지 못한 것을 반성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증명한 인간의 무능력만 핑계되어선 안 된다. 그럼 서두에 언급한 치사한 변명과 다를 바 없다.
바꿔 말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으로 신자 된 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면 사람도 아니다. 비록 현실에서 보기 힘들어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엄밀히 말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뜻일 뿐이다. 신자가 그런 칭찬을 들었다고 기뻐할 일이 결코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도리어 불신자만의 몫이다.
신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다반사, 아니 일상사여야 한다. 신자는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출애굽기의 계명으로 말이다. 원수까지 살리는, 나아가 원수의 재산까지 보살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은 아무 빛도 이름도 없이 땅에 떨어져 썩어버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자를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꾸어 의롭다 칭해주신 뜻도 신자더러 바로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잠시 하나님께 “미안합니다.”라고 말로만 때우지 말라는 것이다. 반성하고 회개한 것이 장래의 바뀐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에게까지 립서비스 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겠는가? 골고다 십자가가 신자에게 아무런 은혜와 권능이 되지 못하니, 인간적 표현으로 말해 당신께서 땅을 치고 한탄할 일이지 않겠는가?
율법을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에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는 순간 성령이 내주하여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이 함께 하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완전히 깨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성령의 법, 생명의 법에 의지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신뢰하고서 그 권능을 견고히 붙들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온전하신 하나님은 그런 신자는 반드시 온전하게 해주신다. 성경이 너무나 무리해 보이는, 때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계명으로 우리를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기꺼이 순종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은 신자의 순종으로 완성된다.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창조 때부터 당신을 따르는 당신의 백성에게 맡겨졌지 않은가?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뜻은 바로 그 일에 남은 평생 동안에 자기 모든 힘을 다해 충성하겠다는 결단, 헌신, 아니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님을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참된 뜻이다. 종교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절대 신자더러 바치라고만 하지 않는다. 진짜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신자의 의와 거룩으로 완성된다는 진리를 말이다. 그분의 의와 거룩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너무나 거룩하고 의로운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영광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은 진짜 보상이자, 축복이자, 특권이지 않는가? 어찌 그 좋은 것들을 마다할, 아니 주저할 수 있는가? 그럴수록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손해가 아닌가?
10/22/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