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양자 된 신자
(Relationship? or Fellowship?)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롬8:12-15)
약 25년 전 저희가 미국 이민 오기 전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제 친구 중의 한 사람이 택시회사 사장이었는데 아주 신실한 신자였다. 매일 아침마다 신자 직원들과 예배를 보고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한 불신자가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신자인척 그 예배에 참석했다. 하루는 그가 대표 기도할 차례가 되었다. 회사가 발전하고 오늘도 모든 기사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일상적 내용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를 마쳐야겠는데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라 당황되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기도 끝”하고 마쳤다고 한다.
여러분 기도를 어떻게 끝맺는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이다. 그럼 또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오늘의 본문도 신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내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권능인 줄 실감하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 육신의 아버지조차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로마 귀족들은 첩들이 많아서 자식들도 아주 많이 낳았다. 그 모두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정 시기까지 가정교사를 붙여서 후계자 교육과 훈련을 시키면서 분석 평가하도록 했다. 이 교사의 평가점수를 보고 받은 아버지가 최종적으로 몇 명 내지 한 명만 아들로 결정했다.
자기 집안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고 키울 만한 똑똑한 자만 뽑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집안의 종이 되거나 아예 노예로 팔아버린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MBA를 하고 Wall Street에서 6 digit(십만 불) 이상의 연봉을 받는 아들만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만 18살 성인이 되면 곧바로 집에서 쫓아내고 거지가 되던 갱이 되든 상관을 않는 것이다.
아버지조차 아버지라고 못 부르던 시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선 당신께서 실제로 독생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거기다 당신을 믿는 신자도 당신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예의를 갖추어 공손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서, 아주 친밀하게 아빠라고 말이다.
현재에도 세상 어느 종교도 자기들이 믿는 신(神-god)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감히 인간이 그랬다간 아주 불경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까닭에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 않는가?
사람들이 자기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잘못하면 벌을 주는 신으로만 알기 때문이다. 또 수시로 신이 스스로 기분이 틀어지면 인간을 제 멋대로 조종하여 곤경에 빠트린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신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갖다 바치기 바쁘다. 예컨대 우상에 수백 번이라도 절한다. 결국 인간이 행하기에 따라서 상과 벌을 비례로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이의 조상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었다. 우르라는 지명은 불(fire)을 뜻한다. 자식을 불에 태워 우상 신에게 바치는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제물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인간,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이지 않는가? 최고 좋은 것을 바쳐서 최고로 많이 받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행위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노년에 자식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다. 칼로 찔러 죽이고 불로 완전히 태우라고 명했다. 물론 하나님은 이삭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어린 양을 제물로 미리 준비해 놓았다. 대신에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최고로 아끼는 것과 하나님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지 시험해보려 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혹시라도 아브라함에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이전의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고쳐주려는 것이다. 신에게 좋은 것을 갖다 바쳐야만 좋은 것을 받고, 혹시라도 그러지 못하면 벌 받는다는 바로 그 인식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까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이셨다. 그래서 그분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 무한하신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겸허하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 이름을 자신의 손바닥에 새긴다. 더 이상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한 형벌은 없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모든 죄를 던지시고 기억도 않는다. 동과 서는 영원토록 만날 수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입양되어졌다. 하나님은 실제로 신자의 아빠가 되었고 신자는 그분의 진짜 아들이 되었다. 그분을 아빠라 부르며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
요컨대 하나님과 신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relationship)로 맺어졌다. 그 관계는 어느 누구도 절대로 변경, 취소, 포기케 못한다. 영원토록 그 관계는 지속된다. 쉽게 말해 저와 지금 이 설교를 통역하는 David 전도사가 아버지와 아들인 것은 절대적 진리다. 아버지와 아들이 된 각 자의 신분과 권리에 절대 변함이 없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니라 해도 여전히 그렇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싫고 미워서 오래 동안 만나지 않아도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이다. 솔직히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내 아빠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가? 그러나 절대 이뤄질 수 없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런 사람과 많이 친해져서 아빠보다 더 대화를 많이 하고 아주 비싼 물건을 선물로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아니다. 지금 여러분의 아빠가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친 아빠이기에 그 사람들이 결코 주지 못하는 참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셨다. 당신을 따르는 자를 하나님과 혈연관계의 아들로 삼아주기 위해서였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독생자 하나님이 대신 죽으셨고, 성령 하나님이 보증하셨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 관계를 끊거나 약화시키지 못한다. 사탄 마귀도 훼방은 해도 절대로 신자를 조종하지 못한다.
작금 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신자가 오해하는 사항이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강해지면 그분과의 관계(relationship)도 강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과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면,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하면, 하나님의 복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신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학생이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학생이라고 할 수 없듯이 그런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맺어졌고 그 관계가 너무 좋기에 저절로 기꺼이 성실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제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에 등록서류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라고 대답했었다. 그 때에 나도 커서 내 아들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그 소원이 이뤄졌다. David 전도사에게 닮은 달걀 두 개가 그려진 생일 카드에 아빠를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글이 써져 있었다. 저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지금 저와 David 전도사를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에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정말로 아빠, 아버지답게 대해달라는 것이다. 신자로부터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며, 가장 존경하며, 가장 닮고 싶다는 고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 변화 성장되어가는 것을 그분은 가장 기뻐하신다.
오래된 영화 벤허에, 로마사령관이 유대인 벤허를 양자로 삼으며 자기 반지를 빼서 끼워주었다. 총사령관의 문양(symbol)이 찍힌 반지다. 지금으로 치면 친필 싸인이나 도장과 같다. 어렸을 적 친구였다가 나중에 원수가 된 로마군 호민관에게 그 도장을 보여주자 꼼짝 못하고 벤허의 말에 순종했다.
신자의 신분이 바로 그렇다. 하물면 로마 사령관의 도장도 두려울 것 하나 없는데 우주의 주인인 하나님의 도장을 이미 받아 끼고 있다. 도장이 아니라 아예 성령 하나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슬퍼할 때에 그분도 슬퍼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에 그분도 기뻐하신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던 내 혼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 아니 그분이 앞서 가서 행하신다. 하나님과 한 편인데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올 한 해도 우리 모두에게 이런 저런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믿음으로 이겨내셔야 한다. 특별히 그분이 아빠라는 믿음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임을 믿는가? 진짜로 아빠임을 믿는가? 여러분이 다 아멘으로 대답하셨지만, 제가 묻는 질문이나 여러분의 대답 둘 다 아주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는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믿습니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 분이 제 아버지입니다. 혹은 아닙니다.”라고만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사실(fact)이거나 허위(lie) 둘 중 하나이지 제 삼의 대안은 없다. 남의 아빠는 아무리 열심히 자기 아빠라고 믿어도 절대 아빠가 될 수 없다. 친 아빠는 비록 그 교제가 조금 약해져도 아빠인 관계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빠가 되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된 근거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이 내 죄가 아무리 진홍 같아도 예수님의 피로 백설 같이 희게 해주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내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그분이 절대 다시는 기억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답게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 주차장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스티커를 붙인 차를 발견했다. 바로 “Fear Not"이라는 문구다. 그 스티커의 마지막 T자가 바로 십자가 모양이었다.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짜로 내 아빠가 되었으며, 또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신자는 두려워하지 않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아빠임을 믿지 말고 그냥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된다. 올해부터 하나님을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닮고 싶은 아버지처럼 대해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앞세우며 당당하게 맞서라. 무슨 문제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라. 그러면 올해는 지난해와는 전혀 다르며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와 권능으로 채워질 것이다.
1/15/2012
바로 앞 글을 올린 마찬가지 이유로 때 늦었지만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