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말
마태복음 강해(140)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38-42)
표적을 구하면 악하고 음란한가?
바리새인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주님은 곧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었다. 예수님이 조금 심한 것 아닌가? 선생님이라고 예의를 갖추며 정중히 요청했는데 바로 욕을 퍼부은 꼴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표적은 기적(miracle)인데 기적을 보길 원하면 다 악하고 음란한 자인가? 우리도 때로는 도무지 현실적 대책이 서지 않는 너무나 큰 환난이 닥치면 기적적인 도움을 바라고 기도하지 않는가? 그럼 우리도 악하고 음란한 자인가?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만 보면 이를 갈며 미워했는가? 그들이 당신을 종교적 기득권을 침해하는 경쟁자로 여기고 음해하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맞대응을 하셨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주님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셨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제사장들이라고 당신의 사랑에서 제외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온 천하를 덮고도 남는다. 기껏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사람들의 인기를 다투며 시기할 이유라곤 없으며, 까닭 없이 미워할 만큼 속이 좁은 분도 아니다. 그 한량없는 사랑을 거부한 것은 혹시라도 자기들 밥그릇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던 그들이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항상 본문(text)과 문맥(context)에서의 뜻부터 정확하게 찾아내어야 한다. 우리말로는 38절에 “말하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로는 “대답하되”가 맞다. KJV나 ASV 같은 영어역본에는 answered 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럼 바리새인들의 요청은 앞에서 예수님이 질문 내지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34절을 보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사람의 말은 반드시 생각하는 바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악한 자는 악한 말을, 선한 자는 선한 말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지금 표적을 요청하는 자들의 마음의 동기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그들 마음이 어째서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인가? 이 또한 본문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 또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예를 들어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은 요나의 전도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경청했다고 한다. 어떤 표적도 보지 못했고, 아예 보여 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았으며, 요나나 솔로몬은 단지 선지자에 불과했음에도 그랬다.
특별히 니느웨는 소돔과 고모라에 필적하는 사악한 도성이었다. 그들은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요나도 다시스로 도망갔다가 붙잡혀 와서 억지로 화를 내며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회개에 대한 진심과 준비가 없었는데도 그들은 회개했다. 그 까닭은 바로 성령의 충만한 간섭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일방적 은혜와 크신 권능이 임하자 도성 전체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율법을 지키고 성전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백성이었다. 거기다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이 직접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회개는커녕 또다시 표적 타령만 하고 있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자 유대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쫓아내었다고 성령을 말로 훼방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성령이 역사할 틈이라곤 전혀 없었지 않는가?
그들이 지금 표적을 요청하는 까닭도 단지 메시아가 아니라는 꼬투리를 잡아 음해할 뜻이었다. 아니면 기적적인 능력만 맛보려 했거나, 최대한 잘 봐주어서 순전히 마술 쇼 구경하듯이 호기심과 재미로 표적을 다시 보길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교회에 열심히 출석은 하는데 전혀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다. 진정으로 회개는 하지 않고 초자연적 현상을 체험하는 데만 관심을 쏟는 자이다. 말씀을 연구 정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바꾸는 일에는 등한히 하는 자이다. 오직 기적적 능력만 빌려서 자기 문제를 해결 받고 세상에서 형통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표적의 목적을 회개와 연결시켰다. 표적을 보았으면 당신이 누구인지 확신하고 당신의 말씀대로 회개하여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은 신자라면 얼마든지 기적적 도움을 간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아무리 기도해도 고난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에 제발 이 기도가 응답이 될지 안 될 지 여부만이라도 알게끔 어떤 징조를 보여 달라고 간구해도 된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치러갈 때에 담대함을 얻으려고 두 번이나 표적을 구했듯이 말이다. 나아가 정말로 순수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를 알고 싶어서 그 믿을 만한 표적을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
요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소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려고 표적을 구하느냐 여부다.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눈앞에 서있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전혀 없었다. 나아가 부인하고 거부할 구실만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정중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도 틀림없이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닌 그냥 랍비에 불과한 인간이 아니냐는 냉소적 의미였을 것이다. 때로는 예의 차리고 정중할수록 속에는 미움과 분노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 않는가?
유대인들의 요구에 응하신 예수님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지금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는가? 들어주었는가? 비록 그들을 꾸짖긴 했어도 그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야단만 치고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원수처럼 여기지 않았고 악하고 음란한데도 사랑하셨다는 반증이다.
표적을 여러 번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음해하려 들었으며, 당신께서도 공사역 중에 유일하게 저주했었던 그들에게마저 보여줄 표적이라면 무슨 뜻인가? 최후의 표적이자, 가장 권세 있는 표적이자. 절대적 표적이자, 유일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했으니 특별히 그들에겐 마지막 표적이 된다. 지금까지는 표적을 호기심으로 보았던, 음해할 목적으로 보았던 간에 이 표적만은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다. 요컨대 마지막 구원의 기회이며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에 대한 당신의 인내와 긍휼은 십자가로 그 효력이 마친다는 것이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물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한다. 십자가가 마지막 내지 유일한 표적이기에 그 전의 모든 표적들은 사실상 마지막 이 십자가 표적으로 이끄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미처 알지 못하지만 이는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보자. 쉽게 피곤하고, 눈이 침침하고, 단 것이 먹고 싶고, 제 때에 밥을 먹지 않으면 탈진할 것 같고, 눈이 침침해지면 그 모두를 종합해서 당뇨병이라고 진단해야 한다. 각기 따로 안과 혹은 발 전문 의사만 찾아가면 부분적 치료효과는 어느 정도 있어도 정작 고쳐야 할 당뇨병에 대한 치료는 받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 표적, 이적, 기사라고 번역된 것은 전부 기적(miracle)을 말한다. 표적 기사를 접하는 신자들은 그 크고 경이로운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각각의 독립된 의미만 찾으려 든다. 물론 신구약 성경의 모든 기적들은 특수한 개별 상황에 따라서 일어났기에 각기 고유의 의미가 있고 또 그 의미를 신앙생활에 잘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집착하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형국이 된다. 예수님이 일으킨 이적들도 각각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표적들은 마지막 표적인 십자가로 향하는 표적이다. 이전의 모든 표적들의 공통된 의미를 찾아서 마지막 십자가 표적에 적용 해석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뜻하는 바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예수님이 가장 먼저 보인 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도 인간이 이 땅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즐겁게 생활하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제 곧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강력하게 이뤄지고 성령의 시대가 다가오므로 잘 대비하라는 것이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 가진 것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으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아주 귀하게 쓰실 뿐 아니라 내놓은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더 큰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또 주님을 모신 공동체는 서로 희생하며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하늘에서 내린 떡인 당신과 광야에서 모세가 준 만나를 대조시킴으로써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적마다 각각의 고유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너무 재미있지 않는가? 물은 화학적으로 수소 원자 둘과 산소 원자 하나가 합친 것이다. 포도주가 되려면 알코올은 물론 포도자체의 성분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일 년 동안 자란 포도를 수확하여 여러 과정을 거쳐 완전 발효되어야만 비로소 포도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물에다 알코올 맛을 내는 보라색 염료를 탄 것이 결코 아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 전에는 아예 없었던 알코올과 포도성분의 원소들이 순식간에 물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갖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고 하니까 마치 복사기에 넣어서 계속 카피한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쥐꼬리 같은 헌금을 하고도 삼십 배, 육십 배로 불려 주겠지 헛된 망상을 한다. 아니다. 복사기가 계속해서 복사할 수 있는 까닭은 백지가 그만큼 따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기적 시에는 복사할 원본만 있었지 복사해낼 백지는 없었다.
예수님이 아이의 도시락을 하늘을 향해 들고 축사하자 제자들 앞에 갑자기 빵과 고기가 나타난 것이다. 빵을 만들려면 밀을 파종해 일 년을 기다렸다가 수확, 추수, 탈곡, 정제, 분쇄, 가공한 후에 누룩을 넣고 반죽을 하여 화로에 구워야 한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아니다. 말리고 소금에 염장한 것이다. 호수나 바다에 나가서 잡아서 말리고 염장하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소요된다. 이 또한 없던 것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물위를 걷는 것은 중력이나 부력의 법칙을 깨트리는 것인데 그 법칙을 부여한 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어떠한가? 생명을 주시고 영혼을 심어주는 창조주라는 뜻이 아닌가? 본문 바로 앞에서 귀신들리고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친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지으시어 눈과 귀와 정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시는 창조주가 아니고는 말씀 한마디로 절대 고치지 못한다.
십자가 이전의 모든 표적들이 오직 십자가만을 위한 표적이었다면 어떤 뜻이 되는가? 창조주 하나님 당신께서 진짜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진짜로 하나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체험하셨다는 것이다. 진짜로 그분이 내 같이 연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고 죄에 찌든 자를 위하여, 아니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된 유일한 기적이다. 그만큼 기적의 규모가 크고 모습이 신기해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목을 매다는 인간들로선 가장 은혜로운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다. 기적의 혜택을 직접 맛본 증인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만약 이 기적을 복음서에 누락하면 현장에 있던 2만 명이 왜 그 기록을 빠트렸는지 항의가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초대교회에 복음서가 회람될 때에 이 기록을 보고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생하게 목격한, 아니 직접 겪은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가공된 이야기라면 난리가 났을 것 아닌가? 기독교는 시작도 못하고 사그라졌을 것이다.
성경 기록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자 절대적 진리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이셨고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되살아나셨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약속대로 그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들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어 당신의 부활에 연합시켜 천국 영광으로 이끄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거짓이 없는 진짜다. 어느 누가 부인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지구상에 예수 믿는 신자가 한 명도 남지 않아도 여전히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절대적 표적이며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정말로 이 진리를 확신하는가? 또 실제로 그 확신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또한 표적의 능력만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한마디 말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대제사장의 힐문에도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너무나 간단하다. 아무리 말로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힐문은 법정용어로 검사의 심문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대제사장이 “네 죄를 네가 알겠다. 지금 당장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친 셈이다.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했는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고 말이다.
아무 말씀 없었지만 주님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까? 이 괘씸한 놈들 다 죽인다고 이를 갈았을까? 둘 다 아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에 눌려 있는 모든 인간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했을 것이다. 당신을 비방하고 죽일 모의를 하던 악하고 음란한 유대 관원들에게도 골고다 십자가는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들마저 당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침묵하신 것 같지만 사실은 온 천하 인류에 대고 두 가지 메시지를 선포했다. 먼저 아무 엄숙하고 장중한 음성으로 “나는 너희들의 죄를 죽기까지 저주한다. 너희들이 죄에 빠져 더럽고 추하게 사는 모습을 너무나 싫어한다.”라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럼에도 너희 죄인들은 죽기까지 사랑한다. 흑암의 세력에 미혹되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고 속삭였다.
종교학적으로 따져 인류가 종교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해일, 태풍, 지진, 허리케인, 홍수 등이 이뤄내는 엄청난 결과에 너무나 두려워서 어떻게 하든 신의 진노를 풀려고 제사를 지내고 희생제물을 바쳤다. 또 바친 만큼 복을 받거나 최소한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모든 종교가 그러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개신교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는 그런 노선을 따른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즉,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 당신께 바쳐지는 희생제물이 되었다.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바로 제물이 되었으니 너희가 내 기분을 억지로 맞추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결코 기분 내키는 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꼭 바쳐야만 좋은 것을 주고 바치지 않으면 나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너희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괴롭고 힘들어 할수록 나 또한 더 괴롭고 힘들다는 것이다.
자연 재앙은 영적으로는 아담의 타락으로 받은 하나님의 벌이다.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다. 재앙도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연법칙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초월된 일을 행하면서도 재앙이 아니라 훨씬 좋은 결과로 이끌었다. 신자가 어떤 재앙 가운데도 있더라도 오직 당신의 십자가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럼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을 보여주시고,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참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하게 주신다는 뜻이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한마디로 우리가 온갖 허물과 죄 가운데 있어도 절대로 당신께선 우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와서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이고, 치유하고, 가르쳤던 내용이 오직 그것임에도 유대인들이 도무지 깨닫지 못하니 십자가로 가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여기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고 성 밖에 내친 문둥이를 주님은 짓뭉개져서 진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손수 손을 갖다 대고 고쳐주시는 표적과 그 크신 사랑을 보여주었음에도 믿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무리 해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 주님이 “내 심장이라도 꺼내어 보여주랴!”는 뜻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이다. 마지막이자 절대적 표적인 십자가에 우주에 단 하나 뿐인 완전한 사랑이 나타났다. 단 한 치의 이해타산, 거짓, 시기, 분노, 궤휼 등이 포함되지 않은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누구에게 베풀었는가? 바로 단 한시도 그 마음에 이해타산, 거짓, 시기, 분노. 궤휼을 지울 수 없는 바로 우리에게다.
축복이 아니라 생명이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의 길이 여럿 있으니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골라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뀐다. 수시로 음란과 거짓과 궤휼과 악독과 분노와 염려 등으로 스스로도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판에 어떻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중병에 걸려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내가 여러 가지 치료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잘 판단하여서 자기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아서 집에 가서 스스로 치료하세요.” 누구나 그 의사를 두고 이상하다 못해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중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법이 아니다. 치료자인 의사가 곧바로 치료해 주어야만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너무나 볼품없고 평범한 한 유대 청년 랍비가 문둥병자, 매국노 세리, 창녀, 죄인, 과부, 고아, 귀신들린 자, 무식한 어부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교제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슬퍼할 때에 같이 슬퍼하고 기뻐할 때에 같이 기뻐하다가 가장 비천하고 수치스럽게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죽음을 당했다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믿으면 영생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도무지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인간이 지어냈다면 화려한 미사여구와 감동 넘치는 스토리로 포장하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도덕적 교훈과 종교적 계명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을 대신해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야기 하나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fact)이자 절대적 진리(truth)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이 바로 영생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영생으로 가는 지도나, 진리를 깨우쳐주는 가르침이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전부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당신을 채워주시는 것이지 인간을 깨우쳐서 당신께 나아와서 받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주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셨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백이 있다.”고 했다. 천하의 난봉꾼 탕자였던 어그스틴은 “오 하나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이기에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그 밖이 화려하고 풍성해도 결국은 텅텅 빈,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헛되고 헛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평생에 꼭 한 번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다.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죽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를 알고 있고 너를 정말로 영원토록 사랑한다. 지금 그 죄에 찌들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아니 그런 허물이 있기에 더더욱 사랑한다.” 이 음성을 듣지 않는 자는 평생을 두고 아무리 돈을 벌고 건강하게 살아도 헛되게 산 것이다. 진짜 가장 큰 실패를 한 것이다.
이미 예수님을 만나 그 말씀을 한번 들었던 자도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아침에 큐티할 때나, 예배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행사에서 항상 그분의 음성에 귀기우려야 한다. 여전히 불신자 시절의 죄의 찌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악하고 추한 죄를 짓는다는 뜻이 아니다. 뭔가 바쳐야 복을 더 받으리라고 기대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로 자꾸 돌아가려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너의 지금 모습이 가장 좋다. 사랑스럽다. 네가 나를 참 생명으로 믿고 나에게 엎드리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더 큰 기쁨이 없다”고 말이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이천 년 전의 주님은 며칠 안 가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동참하는 뜻으로 금식하고 절제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너무나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형식으로 짐짓 슬프고 괴로운 척할 필요는 전혀 없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도 더 풍성하게 주려는 뜻이 아닌가? 그럼 오히려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고달픈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신다. 우리가 현실에 묶여 내 코가 석자인지라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이 슬픈 것보다 내 형편이 더 슬프게 여긴다는 것까지도 아신다. 세상 사람들도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밝아오는 징조라고들 말한다. 창조주이신 예수님 그분을 보배로 모시고 있는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환난 가운데 인내하여 연단을 잘 통과하며 천국 영광의 소망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서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기뻐하지 못하면 평강이라도, 아니 최소한 주위 여건에 따라 그 마음이 요동치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를 바꾸는 당장의 축복보다는 당신의 전부를 참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부를 준다고 해서 당장에 우리를 신령하고 경건한 자로 바꿔준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유일하게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이신 당신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나를 대신해 내 모든 죄 값과 짐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지금도 그 사랑으로 나와 함께 계신데 더 이상 무슨 염려를 하겠는가? 비록 고난주간이라도 진짜로 창조주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또 이루셨던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는다면 오히려 활기차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4/1/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