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마태복음강해(148)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1-35)
천국 확장의 두 가지 모습
마태복음 13장에는 7가지 천국비유가 나온다. 첫째,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비밀인 십자가 복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지난주에 살펴본 둘째,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복음이 세상에 소개된 이후의 상태를 말한다. 그 영원한 운명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뉠 자들이 마지막 날까지 이 땅에 공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살펴볼 셋째 겨자씨와 넷째 누룩의 비유는 복음이 세상에서 번져나가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두 비유 모두 이 땅에서의 현재적 천국이 확장된다는 의미이나 그 구체적 내용은 조금 다르다. 주석가들마다 그 해석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겨자씨 비유는 개인적 확장을, 누룩 비유는 공동체적 확장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겨자씨는 한 알의 씨앗이 뿌려져서 아무리 커져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누룩은 가루 서 말에 들어가 전부 부풀리게 만든다고 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단수와 복수의 수적 개념으로 두 비유를 구별했다.
먼저 개인적 확장은 신자의 영적성숙을 뜻한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심령 속에 심겨졌으면 반드시 자란다. 겨자가 작은 씨라고 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보잘 것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아 인식을 못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 씨가 심령에 뿌려지면 즉, 성령이 내주하여 역사하면 그 결과는 엄청나다.
훅 불면 날아가는 그 작은 씨가 3-5 미터 크기의 나무로 변한다. 이는 삼십, 육십, 백배의 수치적 개념으로도 도무지 계산이 안 될 정도다. 그런데도 주님은 겨자씨가 다 자란 표시를 나무의 길이나 크기로 설명하지 않았다.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했다. 세파에 찌들고 고달픈 사람들이 신자에게서 위로와 기도를 받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적 확장은 어떤 모습인가? 가루 서 말, 약 22 리터는 당시 유대 보통 한 가정의 식구가 하루 동안 먹을 빵의 양이라고 한다. 만약 주부가 그 반죽을 전부 부풀리지 못하면 식구들이 끼니를 굶게 된다. 신자가 속한 공동체는 아무도 굶어선 안 된다.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억울하게 손해보고 멸시와 상처와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한 명도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공평이 실현되고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모두 받아 누려야 한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는 겨자나무가 되어 있는가? 교회는 아무도 굶지 않게 빵을 함께 나누는가? 그 실상은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그 반대다. 신자는 뒤로 호박씨나 까는 위선자로 취급당한다. 교회에는 분쟁과 스캔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악명으로 불리며 가장 싫어하는 종교가 된 지 오래다. 솔직히 어디 가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자신이 없고 괜스레 주눅이 들 정도가 되었다.
사막은 살아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본 영화 중에 “사막은 살아 있다”라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있었다. 미국 와서 보니까 캘리포니아의 데스벨리(Death Valley) 국립공원의 사막이 그 배경이었던 것 같다. 연중 비라곤 거의 오지 않고 예사로 섭씨 40도를 넘기기에 생명이라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이다. 그런 황량한 사막에서도 들꽃, 벌레, 도마뱀 등의 생명체들이 활기차게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하나 있다. 들꽃이 씨가 떨어지고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키우는 장면을 근접 촬영한 것이었다. 최소한 몇 달이 걸렸을 기간을 수십 초로 축약시켜 보여주니 그 부쩍부쩍 자라는 모습이 확실히 구분되었다. 지금은 예사로 보는 기술이지만 약 50년 전이라 아주 신기했다. 생명의 엄청난 활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햇살을 배경으로 해서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했다.
만약 육안으로 지켜보았다면 아무리 해도 그 자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생물이라곤 살지 않을 것 같은 그 황량한 사막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풍성하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처럼 사막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메마른 심령에 어떤 거룩한 결실도 맺을 수 없었고 그런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수시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온전한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참 생명의 씨앗이 이미 심겨져 있다. 그 겉 사람은 아무리 후패해도 속사람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신다. 완전히 자라 풍성한 결실을 맺기까지는 아직 멀었고, 또 그 자라는 모습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다.
예수 믿은 신자는 누구라도 최소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 이는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열매가 이미 맺힌 셈이다. 예수 믿은 것이 살아가는 중에 가장 잘한 일이다. 주일에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교회에 나와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과 생판 남을 위해서 애통해 하며 기도하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믿고 보니까 예수 모르는 불신자의 현실적 형편이 나보다 월등해도 그 현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예수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지고 그래서 전도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비록 교리를 체계적으로 알지 못해 미숙한 전도가 되어도 그 영혼을 안타까워하는 신자의 진심이 전해졌다면 하나님은 아주 기뻐하신다.
물론 신자도 때로 하나님을 벗어나서 죄를 짓는다. 그러나 성령의 깨우침에 따라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고 고치려 노력한다. 이전에 세상 속에서 사탄에 미혹되어 살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고, 더 강하고 자극적인 죄일수록 신나고 재미있었다. 함께 참여하여 공범이 되지 않는 자를 잘못한다고 야단까지 쳤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선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고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생명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지 않는가? 예배, 기도, 찬양, 성경, 전도하고 있다면 이미 천국비밀의 씨앗은 심겨진 것은 물론 싹이 트고 한참 자란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겐 기도, 성경, 예배 같은 일이야말로 가장 지겨운 법이다.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시간 낭비라고 밖에는 생각지 못한다.
솔로몬 대신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는?
비록 그 이름도 죽음의 계곡이고 우리 눈에는 도무지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면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신다. 씨앗이 스스로 햇볕, 물, 영양소를 만들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심었으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실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방식에 따라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신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의 열전에 이스라엘을 최강국으로 만든 솔로몬의 이름이 빠져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계획에 따라 자신의 지혜로 말과 병거를 허다하게 비축했다. 열방과 외교적 화친을 맺느라 각국의 우상을 들여왔고 그 결과 백성들의 믿음을 부패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솔로몬 대신에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다른 이름을 올렸다. 누구인가? 바로 들의 백합화다. 왜 그를 뽑았는가? 백합화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했다. 기도하고 성경 읽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심어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들꽃으로 정해준 그 위치에서 일생을 두고 벗어나지 않았다.
작금 기독교가 이렇게 위축되고 세상에 대해 힘이 약해진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것이 그 첫째 이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참 생명에 대한 정확하고도 확고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있어도 지식적 앎의 수준에 머물지 체험을 통해 절감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참 생명을 정말로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예수!”라고, 또 “예수가 알파요 오메가”라고 입술로는 고백을 해도 실제로는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이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죄, 심판, 지옥 형벌 같은 용어를 구사하면 아주 큰일 나는 것처럼 여긴다. 진리란 그 본성상 절대성, 유일성,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확신은커녕 알지도 못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구원의 길은 전혀 없다.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만이 모든 인간들에게 절대적 가치와 의미와 목표와 권능이 되기에 예수가 진리다. 신자 안에 심겨진 그분의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다. 그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 못시킬 극악무도한 죄인도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 진정한 소망을 둔 신자를 그분이 반드시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엄청난 보배인지 신자들 스스로 자신이 없으니까 교회도 기독교도 약해지는 것이다. 진짜로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갈망한다면 당연히 자라게 해주신다. 진짜로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두었다면 어찌 분쟁과 스캔들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의와 공평을 실현하기도 바쁠 것 아닌가? 또 초대교회 같은 은혜와 권능이 지금도 나타날 것 아닌가?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신다.”(빌1:6)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어”(빌2:13)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신자와 교회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하는데, 정작 그 자랑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엉뚱하게도 교회 건물 크기, 교인 숫자 등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움직이는 것을 언제 볼 수 있는가?
지금껏 교회는 겨자씨가 어떻게 큰 나무가 될 수 있는지, 누룩이 어떻게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론을 찾느라 바빴다. 이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마치 좋은 땅이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되는지 묻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심었다면 그 심은 대로 하나님이 거두신다. 겨자씨는 일단 심겨지면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은 가루에 들어가기만 하면 반죽은 부풀려진다.
큰 나무로 아직 자라지 않은 것이나, 가루 서 말이 다 부풀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겨자씨나 누룩이 아직 안 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십자가 구원을 못 받았거나 받았어도 그 십자가의 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 적용,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에 대한 확신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완전한지 알지 못한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영적 치매에 걸려 있다. 아침에 성경통독하고 큐티할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꾸 자기에게서 멀게만 느껴지니까, 자기 힘으로 하려고 들고, 또 그러니까 두려워지고, 두려워지니까 신자나 교회가 힘이 빠지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빛 다음으로 빠른 것이 무엇인가? 태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의 자전하는 속도다. 해는 시속 1,660 Km라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가만히 바라보면 그 자리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해의 움직임을 언제 감지할 수 있는가? 바로 해 뜰 때와 질 때인데 해 주위에 비교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내면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움직임을 신자가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는 쾌락과 죄악에 찌들었던 이전의 무의미하고 무가치했던 삶을 청산한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용서를 받고 영생까지 선물로 받는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사는 새로운 풍요로운 삶이 헛되고 헛되었던 옛날과 비교되기에 그 감격이 엄청나다. 정말로 성령이 역사함을 인식할 수 있다.
또 해질 때 즉, 인생을 마감하고 죽을 때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던 신자라면 이 땅의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기대가 생긴다. 물론 생전 처음 가보는 미지의 세계인지라 두렵고 떨릴 수 있으나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때야 말로 세상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미련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기 안에 오직 예수만 남게 된다.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평강이 넘친다.
이처럼 신자의 속에 역사하는 성령도 죄에서 건짐을 받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간절히 소망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천국의 영원한 가치와 연결하여 묵상할 때에, 가장 크게 역사한다. 아니 그분의 역사는 동일한데 신자가 인식하고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은혜가 가장 커진다.
신자가 정말로 예수 닮기를 소원하고 그분의 일군으로 쓰임 받으려 준비하고 있다면 내 눈에 당장 가시적 성과가 안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참 생명은 우리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도 동일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듯이, 신자도 처음 믿을 때나 천국 입성을 앞둔 때가 아니라도 그 중간인 이 땅에서의 현실적 삶에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승리를 항상 맛볼 수 있다.
신자가 성숙한 표시는?
그럼 그런 승리의 모습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너무 거창하고 심오하게 생각할 것 없다. 겨자씨가 심겨지는 목적은 겨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열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헌법을 만들 때에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안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단순히 두 사람의 결합이라고 표현했듯이, 겨자가 큰 나무가 되면 열매도 너무나도 당연히 많이 열리는 법이다. 따라서 겨자는 겨자로서 기능만 하면 되듯이 신자는 신자로서 역할만 하면 된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자격과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모르거나 잊고서 도덕적 성자나 능력적인 슈퍼맨이 되고자 노력한다. 일종의 과대망상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의 들꽃은 하나님이 심어준 그 자리에서 아무리 환경이 척박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을 인내하여서 꽃을 피웠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바에 책임지고 성실히 충성하면 된다. 그 자리에 없어선 안 되는 사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서야 한다.
말하자면 종교적 형태나 실력을 드러내기 이전에 직장인, 주부, 아버지, 어머니 등의 역할에 진짜로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룩의 비유에서 이스라엘 주부는 매일 식구들이 먹을 빵을 부풀려야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 지겨운 일을 감사함으로 평생 동안 기꺼이 수행함으로써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 어머니가 현숙하며 성실하게 하나님이 맡겨준 주부 역할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아이들은 반드시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현재형의 천국이 확장되는 모습이다.
겨자나무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 자리에 가만히 큰 나무로서 서있는데도 새들이 먼저 깃들이러 날아온다. 신자라면 동료나 불신자 이웃이 이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나의 고민, 문제, 상처를 털어놓고 상담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라는 뜻이다. 신자가 갖고 있는 재물이나 지위나 권세가, 특별히 그 학력과 지성이 훨씬 열등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냄새 맡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웃들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이 의지하는 그 힘에 자기도 함께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믿음이 가장 성숙한 표시는 무엇이겠는가? 도덕적 의로움과 종교적 열성은 둘째다.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고 포근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을 먼저 세밀히 배려하는 온유함이 몸 전체에서 배어나오는 자다. 현실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거나, 다른 이를 안 좋게 비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자다. 다른 이에게 섣불리 털어놓지 못할 군급하고 부끄럽고 두렵기도 한 나만의 사정을 이 사람만은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게 하는 자다. 최소한 내 이 기막힌 사정을 군말 없이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신뢰감을 주는 자다.
나물보다 커서 나무(?)
본문 32절에서 예수님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하셨다. 작은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라고 했다. 단순하게 “크게 자라 나무가 되매”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나물과 비교했다. 그 까닭은 이스라엘 겨자는 사실은 1-2년 밖에 살지 않는다. 나무의 수명은 수백 년 최하 수십 년이다. 엄격히 말해 겨자는 나물(채소)이지만 크면 나무와 똑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채소는 새가 뜯어 먹기만 하지 깃들이러 오지는 않는다. 종(種)으로 따지면 채소인데도 새가 쉬러오는 나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자도 들어 쓰셔서 당신의 위대하고 고귀한 일을 맡기고 열매 맺게 한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대박 같은 은혜나 권능으로만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의 본성이나 능력으로는 도무지 나무가 될 소지가 없지만 그 안에 예수님의 참 생명이 거하기에 불신자가 그 빛을 보고 찾아오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신자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포근해야 한다. 그 자리, 그 시간에,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미소와 기쁨과 생기와 평강이 넘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자리를 떠나면 모든 이에게 진한 아쉬움이 생길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타산을 따져 다시 찾을지 몰라도, 신자가 주는 아쉬움은 다르다. 그곳의 모든 이에게 신자 그 사람이라야만 채울 수 있는 정서적, 정신적, 영적인 갈증 내지 부족함이 생겼다는 느낌이 생겨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셨다.(살전5:16&18) 언뜻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계명 같지 않은가? 신자를 감정도 배알도 없는 바보 취급하는 것 같지 않는가? 종교적 형식에 묶이는 위선자로 만드는 것 같지 않는가? 현실은 전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없는데 어찌 범사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의 영화에 나오는 사막의 들꽃이 되었다고 가정해보라. 단 인간처럼 지정의 인식을 갖춘 들꽃으로 말이다. 그 황량한 사막에서 단번에 시들어 죽지 않고 때를 따라 수분과 영양을 공급 받아서 혹독한 무더위를 이기고 결국에는 꽃을 맺게 되었다면 절대로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돌리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오직 그분께 감사하고 아주 기뻐할 것이다.
가장 말이 안 될 것 같은 이 계명도, 신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또 그 신비한 활력과 생기로 사막 같이 죽은 우리 안에서도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있다면, 가장 말이 되는 계명으로 바뀌게 된다. 사막에 비가 오지 않아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변한다. 대신에 어떤 옥토라도 예수가 없으면 죽은 땅이다.
여러분 현재의 형편이 죽음의 계곡에 빠져 도무지 헤쳐 나올 길이 없는 듯이 여겨지는가? 그 영혼이 사막 같이 완전히 메말랐는가?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감정일 뿐이다. 결코 그것이 사실(fact)도 진실(truth)도 아니다. 사실과 진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완전한 통치를 받기를 갈망한다면 그분께서 반드시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 생명의 씨앗을 싹트고 자라게 해서 새가 깃들일만한 큰 나무로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신자도 교회도 기독교도 다 힘을 잃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분께 전부를 드려서 그분의 온전한 통치를 받기를 소망하라. 그래서 우리 속에 보배로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게 하라. 실은 우리는 완전히 비워진 채로 그분의 빛을 반사만 하면 된다. 기껏해야 나물밖에 안될 나 같은 자도 그분의 거룩한 남은 그루터기이기에 그분께서 큰 나무가 되게 하신다.
9/16/2012
이 균형없음은 메마른 땅에 생명주시려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자주 망각하는 치매환자의 증세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귀한 말씀으로 다시금 그 분의 온전한 통치를 받길 소원하며 오직 그 분의 영광의 광채가 드러나길 소원하는 자로 자라나는 나물이, 그 나물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