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8-23) 술과 담배도 하나님의 공의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2)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8-23)
불가능한 유토피아
영국의 16세기 사상가 토마스 모어는 모든 인간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유토피아’(utopia)라고 명명했는데 문자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같은 영국의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독재자나 불법에 지배되는 비인간적인 암울한 사회를 의미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헬라어 ‘장소’를 의미하는 ‘토피아’에 각기 없다는 뜻의 접두어 ‘우’와 부정적 의미의 접두어 ‘디스’를 붙인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는 영국 성공회 신부로 개신교와는 담을 쌓았고, 스튜어트 밀은 모든 종교를 배척하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분석은 인간 사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으며 인간 사회의 실상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고난과 비극을 보면 유토피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토머스 모어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리고 악인이 형통하면서 의인을 박해하는 일들이 너무 흔하므로 마치 하나님이 방치하는 것처럼 여겨지니까 스튜어트 밀의 분석대로 세상은 정말로 아무 소망이 없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인 것 같습니다. 성경마저 하나님은 믿음이 좋고 의로운 욥을 더 성숙시키려고 죄 없는 자식과 종들까지 희생시켰고, 욥 본인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고 하니까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아무리 세상 현실이 우리의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가도 욥기가 가르치는 결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이 불합리 불공평하고 때로는 불의한 것 같이 보여도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비뚤어지지 않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불완전하고 죄로 찌든 인간이 단 한 치의 하자 없이 의롭고 완전한 그분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리 큰 고난과 불행이 생겨도 그 원인과 의미를 끝까지 깜깜히 모른 채 무조건 그분께 복종만 하며 평생토록 노예처럼 살아가야만 합니까? 만약 그래야 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냉혹하고 잔인한 독재자 폭군에 불과해집니다. 이 땅을 디스토피아로 만든 그분을 굳이 믿고 의지하며 경배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답변합니다. 우선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당신의 뜻을 인간이 평생토록 모르도록 방치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얼마든지 당신을 경배하며 기쁨과 감사로 살만한 가치 있는 인생을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인간의 고난과 세상의 비극에 관한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자동차와 닮은 자연
아주 간단한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기”(20절)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만 잘 살펴보면 당신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후에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주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환난이 빈번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져보려는 것부터,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분의 신성(神性)입니다. 헬라 원어 ‘데이오테스’는 영어로 Godhead로 번역되었듯이 신의 위격(位格)과 특성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자연을 잘 관찰하면 하나님의 실존하심과 그 능력이 엄청나다는 점 이상으로 그분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운행 질서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유익 등을 잘 따져보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완전무결한 지혜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빤한 비유이지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처음으로 자동차를 보는 경우와 같습니다. 가장 먼저 그 복잡한 차가 저절로 우연히 생겼을 리는 만무하고 반드시 아주 높은 지능을 가진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거리 교통과 운송 수단으로 아주 편리해서 인간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만들었다는 설계자의 선한 목적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목적대로 자동차를 오래 잘 운행하려면 수시로 정비하고 기름칠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나 장식용으로 가만히 놓아두면 자동차는 녹이 슬어서 고철로 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 그분의 인간을 향한 의로운 뜻을 알 수 있기에 당연히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자연을 그 주신 목적대로 잘 관리해야만 그 유익을 누릴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방치하거나 훼손하면 거꾸로 자연이 인간에게 해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이 자연을 보고 판단한 내용과 의미는 후자였고, 그 결과 하나님께 감사 경배하기는커녕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분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꿨습니다. 최근에는 자연을 탐욕적으로 훼손 파괴하는 바람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폐해를 거꾸로 모든 인간이 몽땅 덮어쓰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가 불을 피워서 음식을 끓여 먹은 나무를 자기가 깎아서 신상을 만들어 놓고 또 자기가 그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니 너무 어리석다고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무가 인간이 기도하는 대로 이뤄줄 능력은 전혀 없고 아예 그 말을 듣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신이 되느냐는 것입니다.(사44:9-20) 바울도 그래서 자연을 만드신 그분 대신에 자연 자체를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섬긴 인간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너무 어리석다고 견책한 것입니다.
통하지 않는 인간의 핑계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주관 통치하시므로, 즉 시공간 자체를 만드신 분이라 그것을 초월해서 영계에 계십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에 불과해 물질계에 제약받는 인간은 영이신 그분을 아예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먼저 당신을 보여 주어야 볼 수 있고 또 알게 해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본체를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영이시고 인간은 물질이라는 존재론적 차이를 떠나서 그러지 못할 현실적 이유도 있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에겐 엄청 대단해서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주 전체로 따지면 먼지 하나에 불과하므로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지구라는 작은 물질계 안에 좌정해 계실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완전한 선(善)이신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단 일 초도 공존하지 못하기에 죄에 찌든 인간이 그분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 곧바로 타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살려주려고 당신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피조물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간극(間隙)이 있는데, 그 간극 또한 하나님 쪽에서 먼저 메꿔 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인간을 당신 쪽으로 끌어주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 그분에게 스스로 접근해 갈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끄셨기에 그분의 인도하심 모두가 인간을 향한 그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도 그분이 보여 주고 알게 해주신 범위 내에서만 그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인간이 24시간 365일 내내 잠깐만 주위를 둘러봐도 얼마든지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자연에다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숨겨두었습니다. 아니 당신의 능력과 신성으로 자연을 만들었기에 자연 속에 자연스레 그분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기, 물, 식량, 같은 자원을 누구에게나 공짜로 이미 다 마련해주었습니다. 다시 아주 빤한 예이지만, 태양이 조금만 가까웠으면 모두 타서 죽었을 것이며, 조금만 멀었으면 다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빤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생존 여건을 허락하신 것 자체가 당신이 공의로운 분임을 넘치도록 입증한 것입니다.
실제로 일부 불신자들도 절대자 하나님은 계신 것 같다고 인정합니다. 자기가 계획한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긴다고 말하고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나름대로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방인도 먹고 마실 것을 두고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연만 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감사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이 진리라고 불신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증명해 준 셈입니다.
요컨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사방팔방을 자연이라는 엄청나고 신묘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24시간 365일 완전히 감싸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더러 당신께 가까이 다가와서 당신을 경배하라고 인간과 당신과의 간극을 당신께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온전하게 채워 놓았던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자격, 조건, 능력, 신분과는 전혀 무관하게 누구나 맘껏 누릴 수 있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은혜입니다. 창조 때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신성에 따라서 하나님만의 완전한 공의가 지구 전체에 완벽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공의에 대해 물고 늘어진 욥더러 자연계의 이치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고 백 개가량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욥은 그 이치를 구체적으로 전혀 알 수 없어서 하나도 답하지 못했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연의 엄청난 규모와 장관이 너무나 경이롭다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개미 같은 미물도 나름대로 자기들 영역 안에서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해와 달과 별들이 조화 균형을 이루며 질서 있게 운행되고 있기에 인간은 매일의 삶을 평안하게 누릴 수 있다는 원리도 함께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지혜가 너무나 보잘것없는데도 그분의 공의가 굽었다고 감히 대들었던 자기가 너무 부끄러워졌고 큰 불경죄를 지었다고 절감하고 진심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욥이 조각한 우상을 섬긴 것은 아니나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그 신성과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알량한 지혜에만 의존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이고 자신만 옳다고 믿었기에 자기를 그분을 대신하는 우상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진화를 믿고 있는 현대인들이 바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논의의 범주
박사 논문이나, 심각한 주제를 토론할 때는 반드시 토론의 범위나 사용할 용어의 정의까지 미리 서로 합의하여서 결정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아주 심각한 주제를 살펴보려고 하기에 그 논의의 범주를 미리 정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과 인생에 말도 안 되는 비극과 환난이 많아서 하나님의 공의가 굽은 것 같다는 의심은 모든 인생사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주관 통치하신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논의가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만 근거해야 하고, 그 전에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계시이자 진리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현실에서 그분의 공의가 굽어 보인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서 하나님의 편을 들어주려고 미사여구로 그분을 선하게 포장해선 안 되고, 그 반대로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그분을 인간 수준으로 깎아내려 동격으로 취급 판단해도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이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으로선 인간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충분하게 다 주셨고, 더 중요하게는 인간이 그런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분이 만든 만물 중의 하나인데 가장 고차원적인 지정의(知情意)는 물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영성까지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내면에 당신의 형상을 닮아서 가장 높은 수준의 능력과 신성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창조에 드러난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정확히 깨닫는 것으로부터 인생을 시작하고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창조만 잘 살펴도 그분의 공의가 굽었다고 의심 불평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가 신앙적 의심에 대해 성경에서 하나님부터 정확히 살펴서 그분에게서 답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굳어진 자신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만 접근합니다. 그런 논의가 출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논리적 추론에 몰두하여 절대적 진리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생각에 무엇이 근본 문제인지, 나아가 신자가 반드시 고수해야 할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성경은 박사 논문처럼 가장 먼저 앞으로 논의할 범위를 창세기 1-3장에 밝혀 놓았고 그것을 바울이 본문으로 간략하게 다시 확인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한 그분의 무한한 은혜라고 확신하는 데서부터 나머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창조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니까, 신자의 믿음도 당연히 그 은혜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인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입니다. 이런 식의 토의를 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믿음도 욥이 결론 내린 그대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분이고 어떤 경우에도 그 공의가 굽지 않는다는 진리가 절대적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논의도 그분의 공의가 굽어 보여도 실제로는 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의심이 생기도록 허락하신 그분의 목적과 뜻이 과연 무엇이며, 그에 대해 신자가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지 등으로 제한하고 또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욥도 그 엄청난 환난의 이유가 정말로 궁금했던 데서 그쳤다면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나 같은 의인이 왜 이런 억울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고 따졌기에 하나님께 죄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혹시라도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앞선다면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다.
욥은 너무나 큰 고통을 졸지에 다 당해서 살아 있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고 극심한 고통이 나아질 징조조차 없었습니다. 급기야 자기가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어서 빨리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이런저런 고난을 보지 않고 또 이런 갈등과 고민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절실한 간구에 전혀 응답하지 않고서 반문만 하셨기에 침묵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인생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도록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니 신자마저 유토피아 같은 환난이 없는 삶만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기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토마스 모어에게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사실상, 정확히 말해선 결과적으로 그와 같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에덴동산이 유토피아였으나, 인간이 자기 탐욕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의를 거부하는 바람에, 즉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유토피아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실종되었습니다.
그 이상향은 천국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은 그 가는 길을 천사들로 지키게 했습니다.(창3:24) 인간 세상에 이상향을 세워주기 싫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욥같이 당대에 최고로 믿음이 좋은 의인도 자연에서 당신의 신성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고, 나머지 인간들도 그의 세 친구처럼 서로 자기만 옳다고 우겼습니다. 아담이 그랬듯이 인간들 스스로 지금 이상향을 세우길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소원이로되 육신이 따르지 못하는 원죄의 멍에 아래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소원은 인간으로선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입니다. 논리적으로도 아예 성립이 안 되므로 속된 표현으로 말이 아니라 방귀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라는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으며, 무엇이 고통이며 무엇이 평안인 줄도 모르고, 나아가 무엇을 소원하고 기뻐해야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예 무(無) 그 자체로 흑암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공의를 따지는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남은 것이라곤 극심한 고통만 겪는 자기 몸뚱이 하나뿐이라 살고 싶지 않다는 욥의 심정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그에 대한 답변이 바로 그 질문 안에 있기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은 모두가 죽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욥은 아무리 그래도 아직 그 마지막이자 최고의 불행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할 목적이자 이유라고 대답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특별히 믿음의 의인 욥 같은 자에게 극심한 환난을 보도록 하는 근본 이유는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가장 먼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첫째가는 축복임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어떤 피조물도 아니고 자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를 인간이 아니고는 어떤 피조물이 질문하겠습니까?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전혀 모릅니다.
이는 굳이 영적으로 따질 것 없이 너무나 타당하고 명백한 진리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십시오. 철학적 도덕적 고민은 물론 이웃 관계에 대해 갈등할 수 없고, 더 근본적으로 생사고락에 관한 의식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골치 아플 일이 아예 없는 나무나 바위가 될 것인가? 아니면 환난을 연속으로 겪어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인가 물어보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백이면 백이 인간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환난에 대해서 이런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만의 특권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더러 그 생명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엄숙히 명한 까닭입니다. 욥을 계속 생존케 해서, 비록 환난이 끝나지 않았어도,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더 풍성하게 베풀어서 아무 기쁨 없이 헛되게 끝날 뻔했던 그 인생의 의미를 반드시 아름답고 선하게 매듭짓게 해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
제가 예수를 믿어서 성경의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나서 감히 말하건대 제 믿음도 아주 조금은 광대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에 보여 주신 신성과 영원하신 능력을 조금씩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욥보다 영적으로 더 뛰어났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고난과 비극이 많아도 하나님의 공의가 절대 굽지 않는다는 진리를 바로 성경의 욥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자연 안에 실현된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발견하고 그에 맞추어 제 인생관을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하게 바꿔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전통적인 교단에선 죄악시하는 술과 담배도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로 그분이 만드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다 남은 빵 그릇에 빗물이 고인 채 두었더니 노랗게 변했고 먹다 남은 포도도 저절로 발효되 인간이 그 물을 마셨더니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졌기에 맥주와 포도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남한이 버리는 음식물로 북한 주민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진 담뱃잎들을 태운 연기를 우연히 마셨더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편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저희가 사는 엘에이 근교에 엔티로프 벨리라는 아주 넓은 평지가 있는데 봄만 되면 양귀비꽃의 일종인 파피(poppy)가 만발해서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제 나름대로 추측해 보니 그 넓은 평야에서 인디언끼리 전투를 벌이고 상처 입은 채로 넘어졌을 텐데, 우연히 상처에 그 꽃과 줄기의 진액이 스며들어 고통이 많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탐욕을 채우려고 지금까지도 전쟁이라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데, 인간 과학자가 마취약을 발명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그 고통을 감해주려고 아편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 공의를 인간들이 계속해서 비틀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뒤치다꺼리할 수 있도록 창조 때부터 당신의 공의를 실현해 놓았습니다. 물론 술과 담배와 아편 등은 신학적으로 일반은총으로, 죄로 찌든 인생살이에서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일 따름입니다. 그분과 개인적 인격적 영적으로 깊이 교제 동행하는 일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인간이 고통 하나 없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되는지도 하나님은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문둥병 환자의 꼴이 됩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병균에 감염되어서 신체가 썩어 들어가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은 제발 바늘에 찔리더라도 고통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느껴보는 것입니다.
나병 또한 인간의 죄악으로 생겼으나 하나님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신만의 완벽한 섭리에 따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믿음으로 나오는 나병환자를, 인간들은 부정하다고 아무도 접촉도 하지 않아도, 일일이 당신만의 사랑과 권능으로 치유해 주시고 심지어 손을 얼굴에 대고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방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실종되고 왜곡되었다고 믿음 좋다는 신자들마저 의심 불평해도, 하나님은 묵묵히 미리부터 환자들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었고 주님은 직접 손을 대고 고쳐주셨습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수록 늙어서 힘이 빠지고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라도 더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까 얼마나 기쁩니까? 비록 그 사랑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할지라도 제가 살고 있는 주변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다 인생살이에 조금 지칠 때면 미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자연 안에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고서 그에 비하면 제가 얼마나 왜소하고 어리석고 완악한 인간 피조물인지 새삼 확인합니다. 작금 믿음 좋다는 신자마저 당신의 공의가 굽었다고 덤비며 또 많은 신자가 솔직히 로마서의 이 구절 하나 제대로 믿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은 이 타락한 인간 세상을 단번에 멸망하지 않고 계속 참아주고 계신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노아에게 마지막 심판 때까지는 자연을 그대로 두겠다고 언약하신 대로(창8:21,22) 하나님은 지금껏 신실하게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주제를 두고 갈등한다는 것 자체는 믿음이 좋은 것이며 또 하나님과 이 땅과 특별히 불쌍한 이웃을 안타깝게 여기므로 질문한 것입니다. 어떤 상대를 사랑할수록 더 깊이 알고 싶어지므로 하나님도 그런 신자를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또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랑 소망을 갖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으니까 신자는 더더욱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태어날 것인지 죽을 것인지 택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과 그분과의 간극입니다. 이왕에 태어나게 한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자인 당신만 온전히 믿고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네가 판단한 바에 따라 살 것인지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출생과 죽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피조물 인간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너무나 쉬운 선택 아닙니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해서 이 땅의 삶에 우선을 두라는 뜻은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금 신자들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자꾸만 인간적인 도덕 철학 사상 종교의 틀에 끼워 맞려 합니다. 세상사가 조금만 이해하기 힘들면 그분의 공의에 문제가 있지 않는지부터 의심합니다. 자기 주위에 24시간 365일 은혜로 감싸고 있는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분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불신자나 마찬가지 꼴이 되어 갑니다. 그분을 찾기는 찾아도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기에 회개하기 전의 욥처럼 자신의 알량한 지혜로만 하나님의 공의를 판단하려 드는 것입니다. 만약 자연에서부터 이미 완벽한 공의를 실현해 놓으신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 믿음부터 재점검해 봐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창조가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믿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판단하는 첫째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11/19/2023)
설교 오디오(31:20 경) 상으로는 잠시 혼돈하여 "심지어 마약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라고 했는데, "심지어 아편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원고 상에는 고쳐 놓았음)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들어서 가끔 이런 실수를 합니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