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3:13-14) 모세와 유대인들이 쓴 수건의 의미?
13절 [우리는 -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같이 아니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들은 모세처럼 하지 않는다고 즉, 모세 수건 사건과 다르게 혹은 반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모세가 수건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나 신약에선 그 이유가 제거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본문 안에서 그 이유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렸던 대상은 장차 없어지므로 백성들로 그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수여 받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으나 모세가 부르자 곁으로 왔고 모세는 율법을 전했습니다.(출34:29-32) 그리고 말하기를 마치고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고 그 후로도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전할 때마다 백성들이 그 광채를 보게 되므로 다시 수건을 가리는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33-35절)
그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은 일차적으로는 모세 얼굴의 광채인데 백성들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백성들에겐 모세 얼굴의 광채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식되니까 그분을 직접 만나면 죽는다는 인식 때문에 계속 두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모세가 수건을 가리지 않는 상태인데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자기 얼굴의 광채를 가려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백성들이 자기가 전한 율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자꾸 그 광채에만 주목할 것을 염려해서 수건을 가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백성들이 율법을 정확히 배워서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바울이 인용하면서 “장차 없어질 결국”을 보지 못하게 수건을 가렸다고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만 광채가 생겼으니 바울이 말하는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정결법과 제사법을 상징합니다.(히9:9-10)
그럼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을 가렸는데도 바울은 모세의 뜻과는 반대로 그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세의 당시 의도를 틀렸다고 해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구약 시대 전체를 아우르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율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에 율법은 결국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모세로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경한 후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워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로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광채를 가렸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수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지금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율법은 때가 되면, 모세 얼굴의 광채도 사라졌듯이, 그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 복음으로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절대로 약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까 즉, “장차 없어질 결국”이 아니니까 사도들이 굳이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로 선포되어야 하며 그것을 순전히 믿는 자는 마찬가지로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세처럼 굳이 수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상징적의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4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 즉,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입니다. 모세의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지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구원을 얻겠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조건 없는 긍휼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율법은 죄의 저주 아래로 이끕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3:6)고 전제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출애굽 때도 신약 시대에도 실제로 수건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고(14절) 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다고 했습니다.(15절) 결국 유대인들의 마음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이유와 고집들을 수건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또 주의 영을 받아서 자유롭게 되면 수건을 벗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14절에서 수건이 모세의 것처럼 표현된 것은 백성들이 모세가 수건으로 가린 이유를 몰랐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어서 15절이 그런 의미라고 보충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아 소지하고 있고, 율법대로 동물 희생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서신을 저작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도 그런 완고한 고집(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에게 단호하고도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갈1:6-10)
유대인들은(십자가 이전의 제자들도 포함하여서)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서 예수님에게 로마를 물리치고 현실적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기만 바랐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주님을 향한 열렬한 환호가 극렬한 저주로 바뀌어서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또 그런 기대를 아직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여전히 신약은 인정하지 않고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열방들 위에 최고로 높여 줄 자기들만의 메시아가 시온 성전에 나타날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린 이유와 그것을 바울이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한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12/20/2022)
상기 설명에 대한 보충
상기 수건의 비유는 반드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비추어봐야 하는데 그 주제는 반드시 앞뒤 문맥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선 율법(돌판에 새긴 구 언약)이 은혜(심비에 새겨진 새 언약)로 대체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3:1-12)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며 구약성경을 읽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3:15-18)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갖는 그 완악한 마음을 바울은 모세의 수건 사건에 비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가린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의 해석이지 모세가 그 당시에 품은 의도가 아님) 모세 당시로서는 장차이지만 바울 때는 그 장차가 이미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이미 없어졌는데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서 구약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없어진 것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구 언약입니다.
모세로선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 가르칠 때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율법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얼굴의 광채 즉,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백성들이 광채만 주목하는 이유도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택한 족속에 율법까지 받았으니 구원은 염려할 것 없고 하나님이 큰 복을 부어주리라는 기대만 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하는 구 언약은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들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여호와를 알게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출19:1-6) 또 하나님은 그런 언약 백성으로 즉, 다른 이들 앞에 여호와를 아는 백성으로 그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출20장 이하) 그런데도 구약 백성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다른 민족들은 무시 배척 저주하면서 율법도 형식적으로만 지켰습니다. 모세의 돌비에 새긴 구 언약은 실패했으며 하나님은 그래서 예레미야와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을 맺었습니다.(렘31:31-34)
그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뜻합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을 두고 바울은 수건(모세의)으로 가려졌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가 수건을 덮었을 때는 모세도 백성들도 앞으로 율법의 정신은 살아있어도 제사법 정결법 같은 죄 사함의 계명들이 종결되고 또 얼마 전에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이 무효화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때는 모세와 그 후계자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저작했으니 구약성경도 저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완비된 구약성경과 또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에 대해 능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여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끌어가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담의 타락 때에 약속하신 원시복음을 실현해 나가는 구원이 역사의 초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뀐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경륜과 의미를 로마서를 필두로 13개의 서신서를 통해서 자세히 설파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들이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된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 마치 모세가 수건으로 광채를 가려야만 했던 이유와 같더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끔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렇게 한 원인은 백성들이 자기들은 선민이라서 죄에서 구원받을 필요는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어 주시는 현실적 축복만 기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그리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세 당시의 백성들의 마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인류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구속사적 차원에선 모세 수건의 의미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된다고 비유(설명)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이 특유의 선민의식으로 헛된 교만에 젖어 있고 현실적 축복만 바라는 완악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애굽에서 탈출시키듯이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기만 바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가리고 있는 (모세의) 수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수건에 가려진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2/2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