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금령 해석의 세 가지 전제
어떤 논의든 시작하기 전에 그 논의할 범주를 정해 놓아야 한다. 인간 타락의 시발점이 되는 선악과 금령에 대해서도 그래야 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들은 논의할 의미와 필요가 없다. 수학 문제를 풀어내려면 기본적으로 구구셈이 동원되는데 구구셈의 옳고 그름에 대해 시비 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선악과 금령에서도 구구셈 같이 절대적 전제가 되는 최소 세 가지의 진리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 선각자가 각성하여 고안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서 인생 만사를 통치하시는 그분이 태초에 최초의 인간에게 직접 계시해준 명령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라고는 인정하나 정말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그리 없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니까 그런가보다 여기고 치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 진술이 성경 66권의 절대적 전제가 된다. 창조를 믿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 구절 다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기록된 모든 내용이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며 동행한 성경저자들에게 실제로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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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대적 전제 하에서만 성경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더 이상 성경을 논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 아무리 그 후에 나오는 여러 말씀에서 도덕적 종교적 감동과 교훈을 받아 그대로 실천해도 창조주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성경도 단순히 일반적 윤리 교과서나 종교적 성찰에 관한 책으로 전락한다. 비유하자면 다른 집의 가훈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실천한다고 해서 그 집의 자식이 절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인간과 교제하며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 창조했다. 그럼 인간에게 당신이 충분히 그러기에 합당한 분임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인간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실체를 잘 모르는 분을 어떻게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에 당신의 신성과 권능을 이미 내재해 놓았다. 그러나 자연은 당신이 실존하고 능력이 많으며 질서 있게 피조세계를 다스린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과 당신의 땅을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 방안은 인간의 이성으로 분명하게 인지, 이해, 분별, 반응, 적용할 수 있게끔 분명한 의미가 담긴 말씀일 수밖에 없다.
광대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그 말씀에 두 가지 큰 특성이 있다. 그분을 알아갈 수 있는 무한한 개방성이 있다. 당신께서 당신에 대해서 전부를 드러낸 것은 아니며 그럴 수는 없지만 인간이 그분에 대해서 알아나가는 데에는 그 말씀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다는 뜻이다.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 실현해 나가면서 그분에 대해 점점 더 새롭고 경건한 의미를 깨달으며 죽을 때까지 그분과의 더 깊은 교제가 가능하다. 나날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반면에 그분은 그 말씀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지므로 말씀이라는 유한한 제약성이 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하기에 말씀 외에 그분을 정확하게 알아나갈 방도가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 죽음의 사건은 인간이 타락하고도 한참 후에 일어났다. 실제로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극소수였기에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 그 구원진리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 십자가 전이든 후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으로만 알려질 수밖에 없다.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구체적인 뜻을 드러내면 그분을 알기 위해선 그 범위를 절대로 벗어나선 안 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갈 수는 있어도 항상 말씀이라는 한계에 제약을 받게 된다.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않는 그분에 대한 열성 믿음 심지어 종교적 체험도 그분과는 아무 관계없으며 이단적인 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개방성과 제한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은 절대로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단 한 치의 거짓과 위계가 공존하지 않기에 그분의 말씀 또한 절대적 진리이다. 인간이 말씀의 제한성에 갇히든 개방성에 따라 성장하든 진리 밖으로 나갈 수는 전혀 없다. 그분의 명령도 그 자체로 이미 절대적 진리다. 인간이 의심 반발하여 따질 대상이 결코 아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만 남는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거짓에 넘어가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한 명령이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완벽하게 선하신 존재이다. 우주 가운데 유일하게 그러하다. 당신은 세상 어떤 것에도 의존은커녕 눈곱만한 영향도 받지 않는 분이다. 모든 인간이 매일 뼈저리게 체험하듯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또 영향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면 완전한 선을 행사할 수 없다. 당신을 제약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다.
선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니며 만물을 창조할 수도 없다. 창조에 악한 것이 개입되면 창조 직후부터 온갖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별과 별 끼리 충돌하지 않고 완전한 질서에 따라 자전 공전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그분의 완벽한 진리와 선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이 지구에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고 대답했다.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당신마저 선하지 않다고 하셨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와있기에 죄는 없지만 시험과 유혹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도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고 선언했다. 물질이 아니시니 그림자는 당연히 없지만 인간에게 회전하는 그림자를 만드는 해와 달의 회전에서 초월한 분이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 둘을 완전히 선하게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하늘에서 내려줄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하늘에서 내려준 절대적 진리일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하다. 계명 자체에 하자나 잘못이 없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에게도 절대적으로 선한 명령이 된다. 당장에 명령을 지키기 힘들거나, 뭔가 선하지 않은 것 같거나,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명령을 주시는지 모를 때조차도 그 명령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바꿔 말해 그분의 모든 명령은 모든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명령을 실제로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할 주체는 인간이다. 또 그럼으로써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순전한 교제가 이어져야 한다. 인간이 그 명령에서 선하심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럴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릴 바에는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하지 말았어야 한다. 무조건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독재자 폭군이 되며 그 명령에 순종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인간의 유익을 위한 계명이라면 더 기꺼이 더 많이 순종할수록 그 유익은 늘어난다. 하나님의 명령만은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가 아니라 감사히 받아서 누려야 할 축복이다. 선악과 명령도 인간의 유익을 위한 축복의 말씀이었고 아담은 감사함으로 지켰어야만 했다.
창조에 연관된 명령이다.
선악과 명령에 대해 많은 이들이 쉽게 간과하는 측면이 하나 있다. 그것을 어김으로써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기 때문에 항상 죄악이나 구원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인류 타락의 기사는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고 선악과 금령은 타락 전의 창조 담화(1,2장)에 속한다. 말하자면 타락을 따지기 이전에 창조와 연결해서 그 금령을 묵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잘못이고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었다.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생존 환경을 완벽하게 마련하신 후에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했다. 그 후에 인간에 대한 축복을 몇 가지 명령의 형태로 주셨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명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존 유지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 땅에서의 삶에서 첫째로 지켜야 할 사항은 생명 유지다.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바로 이 첫째 명령을 어긴 것으로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된다. 동물에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만 주셨다. 짐승은 새끼나 종족을 구하려고 희생하는 경우를 빼고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동식물도 하나님의 첫째 명령을 철저히 순종한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 가장 신령한 존재로 지어졌고 다른 동식물을 다스릴 위치에 있다. 그런데 동물도 짓지 않는 자살이라는 죄를 범한다면 인간이기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고 짐승 수준에도 못 미친 것이니까 사실상 따로 벌 줄 필요도 없다.
두 번째로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을 대신 해서 청지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창1:28)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지어서 당신과 진리의 말씀으로 교통할 수 있게 했다. 그 후에 세 번째 주신 명령이 선악과 금령이다.
창조와 연관된 명령이란 무슨 뜻인가? 우선 아직 타락하기 전이므로 신자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또 창조된 이후에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에 적용된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여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명령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의도하신 인간의 모습대로 살아가려면 선악과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선을 받아서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고 지키지 못하면 그 반대의 자리로 떨어진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목적에는 인간을 향한 축복뿐이었지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의도는 한 치도 없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사실상 은혜의 축복인 선악과 명령을 발동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그 받은 은혜대로 다스리면 그에 따른 축복도 자연히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으로만 인간 창조를 마감했다고 가정해보라. 인간은 그냥 하나님의 일꾼, 정확히 말해 지구라는 공장의 기계로봇일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생길 수 없다. 주인인 하나님은 매일 그날 할 일을 할당해주고 인간은 그것을 완수해야만 하는 종이다. 종은 주인의 땅을 구태여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꿀 필요가 없다. 동식물과 인간이 생육 번성하는 일에 방해되는 일만 제거하면 된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은 애초부터 인간과 아름답게 교제하자는 축복의 계명인데 왜 이런 계명을 주어서 인간을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했느냐고 따질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축복의 계명은 감사함으로 지키면 인간에게 큰 유익이 될 뿐이다. 그 반대는 인간이 전혀 인간답게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시인하는 셈이다.
선악과 금령은 절대적 진리, 절대적 선, 절대적 축복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에 대한 시시비비는 아예 처음부터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명령에 담긴 그분의 더 깊은 은혜와 의미를 찾아서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창조 이후에 인간에게 맡겨진 과제다.
불행하게도 최초 인간은 그 축복을 누리는 일에 실패했고 그래서 우리도 동일한 처지에 빠졌다. 그 타락의 계기가 된 선악과 금령에 대해 정확히 깨달아야 올바른 구원의 길도 이해할 수 있고 구원 후에, 창조 이후가 아니라, 따라올 축복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상기의 세 가지 절대적 전제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를 빼버리면 선악과 금령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라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왜 그러한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0/3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