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9:23-26) 하나님이 주시는 보화를 받았는가?
왜 오직 예수인가?(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3-26)
유일한 구원의 길이란?
지난 20여 년간 인터넷 기독교변증 문서사역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을 얻는 방안을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어도 확신이 없으니 나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것인가. 지금도 많은 죄를 짓고 있어서 하나님께 벌 받을 것 같은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구원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되는지,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등등입니다.
그 다양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왜 오직 예수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 66권을 통해 모든 세대 모든 인간더러 반드시 알게 해주고 싶은 궁극적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 진리가 정확히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나머지 세부적인 진리들도 필연적으로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 외의 모든 신앙적 의심들도 근본적으로 이 질문의 해답을 못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 시리즈도 왜 오직 예수여야만 하는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둘 것입니다. 어떤 토론이나 논문이라도 가장먼저 논의할 주제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고 왜 그 주제를 택했는지 밝히면서 시작합니다. 오늘 첫 시간은 논문으로 치면 서론 격으로 시리즈 전체 주제인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명제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술의 의미조차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스마트 폰이 컴퓨터 기능이 내장된 전화기라는 근본 의미는 모르고 휴대용 사진기로만 활용하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인데 그런 인식이 없거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그냥 교회에서 종교적 활동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다른 길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길은 다 틀렸고 그것 하나만 옳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길을 무시 비방 폄하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마다 고유의 신관과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각기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가르치며 각 신자들도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정서적 안정을 얻는데 큰 도움을 받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관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종교는 구원을 얻으려면 인간 쪽의 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신에게 점수를 따서 합격하거나 최소한 분노를 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심판입니다.
반면에 유일하게 기독교의 하나님만은 인간이 바치는 치성이 많다고 해서 은혜를 더 베푸는 것도 아니며 적다고 해서 분노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은 인간들 사이에 우열을 나눌 만큼 그 영적 수준에서 차이가 전혀 나지 않고 나아가 어떤 인간도 당신의 의의 기준에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무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구원의 은혜를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해주십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구원과 다른 모든 종교의 그것과는 출발지와 가는 방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도착지 또한 달라집니다. 우월을 가리려면 같은 길을 가는데 누가 빨리 편하고 안전하게 가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정반대의 길을 가는 두 사람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에선 같은 길을 가는 모든 종교 중에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쪽으로 가므로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밖에선 이런 차이를 모르기에 모로 가도 서울을 갈 수 있고 각기 믿는 신들의 이름만 다르지 동일한 한 분 절대자인데 왜 너희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인간 쪽의 선행을 먼저 요구하는 절대자와 당신 쪽에서 먼저 은혜를 베풀겠다는 절대자는 절대로 한 분 하나님이 될 수도 없습니다.
구원의 길이 유일하다면 반드시 그 길만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전혀 부족함 없는 완전한 길이며 나아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추가적인 수정 가감도 필요 없이 적용되는 영원한 길이 됩니다. 구원에서 유일성은 그 구원의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도 당연히 보장된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그렇지 않으면 유일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구원의 길에 소망이 없음을 확실히 알면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흔들림도 없게 됩니다.
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
그렇다고 모든 신자가 비교 종교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전부 그 내용이므로 그 진리대로 확신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 두 가지 구원관을 정확히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인들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마저 그 문자적 의미만 알고 있지 이 비유가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진리를 정확하게 모르기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바퀴벌레도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데도 예수님이 낙타로 예를 들어서 많이 과장한 것 같지만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봐야 합니다. 고대의 성읍은 항상 통행금지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되면 성문을 닫고 출입을 금합니다. 그런데 밤중에도 긴급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큰 성문 옆이나 하단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만한 작은 쪽문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 문을 일명 바늘귀 문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이 그런 문에 비유했다고 추정합니다. 인간이 고개를 굽혀서야 겨우 들어가는 문을 허리에 커다란 혹이 붙은 낙타는 아무리 구부려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가 절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은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에 있었던 사건과 연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청년이 니고데모처럼 주님을 찾아와서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16절) 주님은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어떤 계명에 순종해야하는지 반문했고 주님은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들을 지키면 된다고 했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주님은 인간관계 여섯 계명 중에서 마지막 10번째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대답해주었습니다. 원래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고 간단하게 줄였는데 청년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웃의 것들을 탐내지 않는 것은 이웃에게 잘못만 범하지 않으면 되는 소극적 수동적 사랑이지만 주님의 의도는 적극적 능동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니까 어떤 희생과 수고가 따르더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청년은 미처 그런 깊은 의미인 줄은 깨닫지 못하고 지금껏 그 계명들을 다 잘 지키고 있으므로 혹시 아직 부족한 것이 남았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청년더러 네가 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말하는데 이웃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런 차원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다시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전 재산을 헌납해야 하는가?
주님은 지금 선행을 요구하되 네 친척이나 가족을 넘어서 이웃까지 네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마가와 누가는 같은 사건을 두고 단순히 재산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all) 팔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0:21, 눅18:22) 언뜻 선행을 하되 자기 전부를 완전히 내어줄 정도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상 모든 이에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선행을 요구했으니까 오히려 거꾸로 그런 선행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앞뒤 문맥의 흐름을 잘 살펴보면 그런 뜻이라고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의 질문 자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었습니다.(16절) 그에게 선행을 행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관념이 이미 굳어져 있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그대로 따라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래서 그 질문의 의도에 맞추어서 대답해준 것입니다. 네가 정말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을 잘 행할 수 있는지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격점수를 얻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청년이 그 말을 듣고 근심했다고 하므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심사숙고한 후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처음 그 질문을 받자마자 어찌하여 선한 일을 당신에게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대화의 주제가 아니므로 굳이 당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주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지만 온전한 선은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온전하지 않으니까 절대로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미리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 영적 진리를 알 리 없는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은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누가는 그를 관원 즉,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눅18:18) 말합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에는 흠이 없었다고 자부했듯이 그도 당연히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는 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효도했을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랑도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리 따져 봐도 부족할 것 없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신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자신감이 너무나 헛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점을 깨우쳐주려고 다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21절)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의 온전한 기준으로 따지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미리 못 박은 것입니다.
누가 네 이웃인가?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 동족만 그 중에서도 자기와 신분과 지위가 같은 사람들만 이웃으로 대접하고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시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할례 없는 이방인과 민족반역자인 세리와 서슴없이 교제를 나눴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상대하기 꺼려하는 창녀 귀신들린 자 불치병자 불구자 고아 과부 등을 결코 차별하지 않고 상담하고 치유하면서 공평하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하거나 환난에 처한 모든 자들이 네 이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놀랍게도 모세의 율법도 이미 명시적으로 그렇게 명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원수를 갚지 말라고 즉 대적인 이방인에게 복수하지 말아야 하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즉 세리를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도 너희가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에 당연히 포함시키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기들 인본주의적인 윤리 기준에 따라서 율법을 자기들에게 유익하게만 판단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라는 말씀도 사실은 문자적으로 따져서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이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해 궁핍해지면 갖고 있던 재산을 다 팔아서 충당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그와 똑같이 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가난한 자를 사랑해야하는 차원에서 본문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동일한 너무나 놀라운 은혜가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토지와 기업을 지파별로 인구 숫자대로 동등하게 나눴습니다. 거기다 안식년에는 빚을 탕감해주어야 하고 희년에는 저당 잡았거나 빚 대신 받은 토지나 기업을 원래 주인에게 무상으로 조건 없이 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율법대로 정확히 준행하면 이스라엘에는 남들보다 훨씬 부유하거나 아주 가난한 사람이 생길 수 없었습니다. 채무관계로 가난한 자가 부득이하게 생겨도 금방 원상회복이 됩니다. 큰 부자가 되었다면 율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룻기의 보아스처럼 율법을 순전하게 지키며 종들을 선하게 대우해준 부자를 빼고는 천국 가기가 아주 힘들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일에 모든 재산을 팔아서 헌납해야 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해서 당신의 일을 못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지금껏 살펴본 대로 이웃의 범위를 스스로 정하지 말고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고 또 율법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뜻과 목적대로 준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자부하는 대로 율법을 순전히 지켜서 이웃에 가난한 자가 없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첫 걸음은?
이 청년은 틀림없이 니고데모처럼 당시로선 최고 의인 축에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적이 없고 잘 지키고 있으니 구원에 큰 문제가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뜻이 앞섰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 의미로만 따져도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청년이 주님과 주고받는 대화를 다 들었던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나눠주라고 했고 부자는 천국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으니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청년이 처음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제자들에게만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구원에 관한 정답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 자체부터 틀렸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면 기독교의 인간관계 십계명을 다 잘 지키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대답합니다. 너희 예수쟁이들보다는 내가 더 의로울 자신이 있으니 교회 나갈 이유도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분명히 친척이나 가족도 자기처럼 사랑하기 힘든데 이웃까지 그렇게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나아가 민족의 배반자는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고 합니다. 가난한 자는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줄 정도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막상 이웃 사랑에 대한 그런 의미까지 다 가르치면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고 꽁무니를 빼거나 거꾸로 예수쟁이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더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을 포함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수준에는 다다랄 수 없다고 시인한 셈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최고로 엄격한 도덕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예배나 차고도 넘치는 열정과 치성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너무나 가난하고 치사한 영적 수준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신지라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구원해주십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 구원은 가장 하나님다운 역사이자 인간에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래서 오직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며 자신은 철두철미 그분의 의에 못 미치는 아니 평생을 가도 절대로 미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진정으로 겸손하게 시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모든 인간이 가지는 딜레마가 하나 있는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자기 멋에 살고 자기는 최고로 의롭다고 자부합니다. 최소한 자기는 평균 이상으로 의롭다고 큰소리칩니다. 평소에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법을 위반한 적도 없으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인식은 아예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님 쪽으로 첫 걸음도 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당대 최고 의인인 니고데모에게조차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지 않고 현재 사람을 두고 조금 더 착해진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부자 관원이 선행에서 혹시라도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다면 찾아서 보충한다고 구원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 보화를 찾았는가?
바꿔 말해서 청년더러 전 재산을 팔아서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진짜 의미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고서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과 재산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지 확실히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고서라도 하늘의 구원을 얻을 것이냐 구원을 포기하고 이 땅의 재산을 지킬 것인가 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불신자로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최고로 중요하다고 생각지 못합니다. 지금 청년에게도 바로 그 점을 분명히 하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을 얻는 길이자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깊이 근심한 끝에 후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영생을 얻으려 찾아왔다가 스스로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인간 노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구원관이 확고했으니까 인간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길을 제시 받자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어떻게 비유했습니까?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이고, 너무나 고귀한 진주를 찾았기에 전 재산을 팔아서 차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13:44-46) 지금 주님은 마찬가지 맥락에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너에게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행과 구제에 최대한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로 받는 구원이 정말로 자기 전 재산과 바꿀 정도로 귀하게 여기느냐 묻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당시 랍비의 제자가 되려면 스승이 하는 대로 똑같이 행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삶이 정말로 좋고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고는 섣불리 주님을 따라나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의 뜻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보고 나선 그날 밤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그 시신을 거두어서 장례를 치러주려고 빌라도 총독을 찾아갑니다. 이제는 나사렛 예수의 편이 되었다고 금방 소문이 날 것입니다. 공회원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밤중에 비밀리에 주님을 찾아왔던 때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때 그는 몰약과 침향이 섞인 향료를 백 리트라 쯤 들고 왔습니다.(요19:39) 무려 35킬로그램 정도인데 금액으로도 엄청났을 것이며 왕족의 장례에서나 사용할 양이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성령을 받고 새 사람이 되면서 주님을 자신의 보화로 삼았기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왕으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바꾸어야 할 만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체험했다면 구원의 확신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죽음이 자신에게 정말로 좋은 소식으로 들리고 보화가 되었다면 다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전 재산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의 유일성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에 대해서도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성령으로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인격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재창조의 기적입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이전에는 죄악과 쾌락에 젖었어도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즐겼으며 최소한 남들 다 하는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어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로는 성령님이 내주해주시기에 죄악이 너무 싫어지고 무엇보다 자기만 높이려고 안락과 형통을 구하는 것이 첫째 목표가 아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배설물과 보배는 아예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을 진짜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는 자신이 이미 얻은 영생에 대해 전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교회에서 칭송을 받아도 구원의 첫걸음을 올바르게 떼었는지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전혀 안 짓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본문의 관원보다 윤리적으로는 훨씬 열등한 삶을 계속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지난 인생의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택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분이 나를 택했고 함께 해주고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수많은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탓입니다. 본문 청년 같은 생각을 여전히 올바르게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를 택하여 구원의 방법을 배워서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리석은 지혜로 선한 노력을 아무리 해본들 온전한 결실을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종교는 교리를 배워야 믿어지지만 기독교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그랬듯이 먼저 성령으로 믿어진 후에 십자가 진리가 이해된다는 차원에서도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열심히 교회생활한 대가로 자기가 취득한 천국 가는 보험증서를 수시로 꺼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께 은혜를 받고 있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그 명제를 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구원에 대한 진리를 풀어서 설명하고 함께 배워나가는 것일 뿐 진리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과연 그러한지 성령으로 분별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전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자신을 인격적으로 만나달라는 간절한 소망부터 있어야 합니다. 이 시리즈 내내 오직 성령님의 은혜만이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4/24/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