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2 & 16-17) 순전한 복음을 확실히 들었는가?
죄인 구원 담화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2 & 16-17)
성경에 약속된 복음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한마디로 쉽게 줄이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그분께 달렸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볼 때 스스로는 아주 연약하고 보잘것없이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안에선 영원토록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래서 그분을 평생토록 기뻐하며 교제 동행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주제를 성경은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가지 담화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히 아름답게 창조하여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탐욕과 교만에 빠져 그분을 제치고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 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분과 등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서 십자가 대속 은혜로 죄에 빠진 인간을 용서해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 땅의 모든 고난과 죄악을 제거하고 당신의 백성들도 신령한 신체로 부활시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영화롭게 살도록 할 것입니다.
지금 그 세 번째 담화인 죄인의 구원에 관해서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구원에 관해 체계적으로 가장 정확히 설명한 책이 로마서이고 본문은 그 서론입니다. 사실상 로마서 전체를 요약한 결론과 다름없는데 바울은 그것을 한 단어로 복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반드시 들어야만 할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되는 이유 두 가지를 밝혔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 관해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서 복음이라고 합니다.(2절) 바울이 말하는 성경은 당연히 구약이며 복음에 대한 최초의 예언은 지금껏 살펴본 대로 원시 복음이라고 불리는 창3:15입니다. 하나님은 최초 인간이 타락하자 곧바로 특별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레미야 등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어나감으로써 원시 복음을 조금씩 더 구체화 시켜 나갔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도 성령의 영감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이며 그분이 오셔서 행할 일들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 보호하신 목적과 방향은 바로 그 메시아가 오실 그날을 소망하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소망하며 기다리던 백성을 제쳐두고 광야로 사탄부터 만나러 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행하신 첫째 사역이 사탄과 대면해 세 가지 시험을 이기는 일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원시 복음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의 첫째가는 소명대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사탄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멸망은 마지막 날까지 유보되는 대신에 그의 모략을 철저히 분쇄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또 그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모략을 정확히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단순히 당신의 각오를 다지고 영성을 성숙시키며 나아가 사탄과 한 번 시험 삼아 힘겨루기를 해보려고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고 증언하듯이 사탄더러 그 세 가지 시험을 반드시 걸어오게끔 주님이 유도하신 것입니다.
사탄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약속한 여자의 특별한 후손이자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인 줄 알아보고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사탄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완전히 봉쇄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아니까 그 일은 자기 능력 밖에 있으므로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사역 방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꿔보려고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은 세 가지 시험의 기본적인 뜻은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먼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브와 동일한 시험을 이겨냄으로써 원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인간을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현실적 형통을 베푸는 방식으로 구원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대신에 죄에 찌들어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 관계를 완전히 회복시킬 것이라고 사탄에게 분명히 인식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만이 행할 수 있는 구원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탄과 단절시키는 복음
그 시험을 통해 예수님은 두 가지 영적 진리를 분명히 계시해주었습니다. 첫째 구원이란 현실 고난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주는 것이며, 둘째 그 일은 인간과 사탄의 관계부터 끊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가 사탄이 배후에서 강제로 조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탄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타락 전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죄의 본질이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죄에서 구원시킬 것 같으면 사탄을 만나러 갈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으로 가서 도덕적 계명을 가르치는 훈련소를 개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탄의 시험부터 받은 것은 인간의 타락이 사탄과 연결된 영적인 성격이고 그래서 그 구원도 사탄과 해결해야 할 영적인 성격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가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땅에 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약성경 내내 그 일을 메시아가 와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행위언약으로 주신 모세 율법을 완전히 준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내내 이스라엘은 전혀 순종하지 못했고 오히려 우상 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그 비참한 영적인 실상을 발견 확인케 하여서 궁극적이고 완전한 구원을 소망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래서 한 명의 예외 없이 율법에 넘어지는 와중에도 당신께서 남겨두신 일부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겸손히 소망하게 함으로써 구원을 해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간음 살인죄까지 저지른 다윗이 그 죄를 숨김없이 통회 자백하며 자신의 죄를 일일이 처치하지 말고 동에서 서로 멀리 던져서 기억해주지 않기만 바랐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 번 다 너끈히 이기셨습니다. 그처럼 성경 예언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주님에겐 식은 죽 먹기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사역에 계시된 영적인 진리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면 그 사역은 사실상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분명한 영적 실체로 태초부터 실존해 있었고 인간의 타락도 영계에서부터 즉, 영원한 차원에서부터 시발된 것입니다. 그럼 그 사탄을 상대로 예수님이 승리하여서 베푸실 십자가 구원도 신자로 하여금 영원한 세계와 연결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 현실적 형통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후에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의 결국도 성경의 마지막 네 번째 담화처럼 새 하늘과 땅에서 죄와 고통이 전혀 없이 세세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 인생의 첫째 목표가 돼야 합니다.
이 땅은 물론 신자 개인도 예수로 인하여 창조되었고 예수에 의지해서 기동하며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기독교 교리를 수긍하여서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의 열매라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신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친 백성이 이미 되었고 그래서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완전히 붙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사탄마저도 절대로 가감 조종은 물론 흔들리게 할 수도 없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이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순간 바로 영생에 들어가 영원한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미리 앞당겨서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그분의 사랑을 완벽하게 누리기 위해서 범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그 사랑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연습 훈련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주님의 오심으로 성경에 약속된 복음이 실현되었습니다. 광야의 시험은 물론 십자가에서도 주님은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하신 구원이 완벽하게 시행된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도 사실은 어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안 이뤄질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면 그 구원은 완전히 보장된 것으로 변경 취소될 리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구원이야말로 너무나 기쁜 소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둘째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16절) 이 시리즈를 통해 하나님이 당신만의 주권과 섭리로 원시 복음을 어떻게 실현해나가는지 그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예컨대 다윗 언약에서 당신을 위한 성전을 다윗더러는 짓지 말라고 명하신 대신에 당신께서 백성들의 집을 지어주고 그들 사이에 걸어 다니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 모든 언약의 발전과 그 실천,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과 사탄의 두 번의 시험을 이긴 것, 다음에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친 것,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섬기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습들이 너무나 정미하고도 완벽한 계획과 일정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을 쟁취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며 추종하는 인간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네가 판단해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기는 교훈을 따르며 최선을 다해서 선행을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요 인간의 의는 쓰레기와 같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에서도 효도, 살인, 도적, 간음, 거짓 증언 등을 하지 않았어도 마지막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자유로울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고 행동의 죄는 이미 말했으니까 탐하는 것은 이웃의 것이 너무 부러워서 시기 질투하다가 그 사람까지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축하는 못 해줄망정 속이 아픈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그 열 번째 계명의 맥락대로 말로서 형제를 바보라 해도 살인이요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해보면 내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으니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처럼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끈질기며 자신도 영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남들 앞에 보이는 인간의 행동만으로는 끝까지 의로울 수 있으나 말과 생각까지 확대해서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일 뿐입니다. 누가 더 의롭고 누가 더 악하고 결코 따질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한 구절만 뽑으라고 하면 요한복음 3:16을 드는데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모두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으로선 당신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실제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아담과 이브 때부터 그랬어야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짐승에게 그 죄를 전가한 후에 죽여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듯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감당하셨고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당신께서 남겨두신 당신의 백성은 구원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죄인의 생명을 맞바꾸는 방식으로 당신께서 구원을 주십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내 죗값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무죄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죽으신 그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으며 완전한 구원이 됩니다.
그 어떤 의로운 인간이라도, 예컨대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간디 등등 어느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도 내 죄는 완전히 사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맹세나 계약을 할 때 자기보다 더 좋거나 높은 것을 걸어야만 효과가 있습니다. 거짓말하면 아버지를 갈겠다고 하지 내 아들의 성을 바꾸겠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브의 죄를 대신하려면 이브보다 못한 어떤 인간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타락 때의 이브는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며 자기를 높였지만 아직은 윤리적인 죄까지는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위에 온갖 사악한 윤리적 죄까지 지었습니다. 이브로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 없이는 죽어야만 죄가 사해지므로 그 후의 모든 인간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어떤 위인도 이브의 죗값을 도무지 갚을 수 없으며 사탄에게 완전히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갚아야만 그 속죄가 완전해집니다.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은 죄를 죽기까지 증오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죄인을 죽기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둘 다 완벽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그치면 죄의 용서만 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그 십자가 은혜를 믿는 죄인에게도 영생하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복음
흥미롭게도 바울은 이런 은혜가 넘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이치에 안 닿는 언급을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랬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지금 로마 교회를 향해 전하는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절)고 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구분 없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 몰랐던 이전에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처럼 예수님을 그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헬라인을, 어리석은 자는 야만인을 다시 설명한 것이라 같은 뜻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한다고 이중 부정으로 표현했으니까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무시 외면하는 현실도피적인 종말적 이단 집단이라고 여기고 앞장서서 핍박했습니다. 거기다 율법을 모르는 헬라인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야만인 취급하고 아예 식사 교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빚 진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초기의 유대인 신자들은 아직도 옛 사고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수치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고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에게 맡기고 이방인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기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알기를 좋아하는 이성적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아무런 선행을 하지 않아도 예수라는 인간 랍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울의 선교는 알다시피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로마인들도 헬라인의 사상을 답습하면서 현세적 세속적 복락을 추구하는 측면은 더 강했습니다. 그렇게 사후 구원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각 식민지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입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조가 로마에서부터 시작하였고 당대의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니까 그들로선 어리석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우선 나무에 달려 죽으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서 로마를 물리쳐줄 줄 믿었으나 아예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일언반구 항의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주었습니다. 그 전에 장로들의 유전은 무시하고 모세 율법 중에도 안식일 규정은 예사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할례 없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은 물론 창녀 세리와도 서슴없이 식사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 큰 능력 때문에 혹시나 로마를 물리쳐줄까 기대했다가 전혀 그러지 않으니 며칠 만에 돌변해서 로마반역죄라는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들에겐 예수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긴커녕 비난하며 대적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영적인 실체가 얼마나 비참한지 유대인들을 객관적으로 잘 살펴보면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숙원은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그 일은 아주 선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처럼 로마를 반역하는 자는 그들 사회에선 최고의 의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로마 반역죄를,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길 열렬히 소망해놓고, 바로 그 죄를 씌어서 죽였습니다. 거기다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십자가에 처형하게 하려고 빌라도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그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십자가에 처형해놓고선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니 하나님의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혹시라도 나중에 백성들이 예수님을 추종하지 못하도록 예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행태야말로 죄악 중에 가장 크고 교묘하고 음흉한 표본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의롭고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민족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관원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이며 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략은 내용적으로는 광야에서 예수님께 시험을 건 사탄의 것과 똑같았습니다. 자기들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충족시키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사탄에게 그 시험을 걸도록 유도해서 그 모략이 절대적 거짓임을 드러내었듯이, 사탄에 미혹된 유대 지도자들을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유도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다. 창조 때의 에덴동산에서부터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죄에 찌든 인간을, 바로 우리 같은 자들을 구원해주려는 한 가지 목적에 따라 구약 역사는 물론 예수 이후의 신약의 역사까지 주도하신 것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 즉, 세상 모든 사람이 지금도 갖고 있는 구원관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선 정말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헬라인은 각자가 자기 종교를 갖고서 그 종교대로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기에 이미 구원을 얻었고 현실에서 이스라엘만 높여주기 바라고 율법을 모르는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 밖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간주합니다.
바꿔 말해 인간 스스로 자기가 자신의 구원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지혜로든, 종교적 열심히든, 도덕적 선행이든 자기는 남들보다 뛰어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물론 그가 보낸 아들도 당연히 배척 대적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 요구대로 다 이뤄주어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신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오늘날 불신자들도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 그분의 마음에 들어보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윤리적 죄를 지은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저에겐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끝까지 간절히 기도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부끄러운 상대가 바뀌어야 복음이다.
모든 인간이 사탄의 모략에 속아 넘어가고도 전혀 모르고 있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는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헬라인과 유대인들을 전혀 구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면 그의 직업 신분 국적 성별 자유자 노예 종교 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백부장, 세리장 삭개오, 창녀 막달라 마리아,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남편 다섯과 살다가 다시 새 남자와 동거하는 한 많은 여인, 군대 귀신 들린 자 등등 모두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며 당신만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섬긴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대조한 예수님의 비유에 바울이 말한 복음의 부끄럽지 않은 특성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습니다.(눅18:9-14)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도덕적 악을 범하지 않았고 종교적 경건을 많이 행했다고 자랑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했습니다.
인간사회에선 누가 뭐래도 바리새인이 자랑스럽고 세리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도 평소에 자신에 대해서 인식했던 자기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둘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그분 앞에 자랑스럽다고 여기는 자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민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진솔하게 고백한 세리는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경건의 자랑은 버리고 세리의 겸손한 죄인이라는 고백을 의롭다고 받아주었습니다. 헬라인의 합리적 다원주의 종교관은 인간의 얄팍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취급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경건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위선과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저주한 죄였습니다. 삭개오처럼 분명히 악한 짓을 많이 한 세리라도 스스로 죄인임을 겸허히 인정할 때에 의롭다고 칭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이 인간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비유 안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최고의 열성으로 섬겼지만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로 인간사회에서 최악의 죄인이므로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죽음과 방불한 사흘을 겪고서야 정작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선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의 앞에선 정말로 배설물밖에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바울이야말로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심판해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도 정반대로 그를 살려주었고 나아가 로마 같은 곳에 복음을 전할 사도로까지 세워준 것입니다. 그 후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살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일을 대신할 청지기 직이 싫어서 인간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 되려 한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데도 감히 시도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헬라인처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만큼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순전히 믿고 겸손히 따라야 할 종교마저 자기 멋대로 자기가 정하고 하나님까지도 자기가 정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나아가 유대인들처럼 이방인 세리 창녀는 하나님이 무조건 저주한다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차지하여 판단 정죄하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큰 죄도 없습니다.
둘 다 사실상 하나님은 없으니 내가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가 가지는 아주 쿨(cool)한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치 풍요를 누리면 됩니다. 물체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로서 죽으면 영혼까지도 완전히 멸절된다면 그 도박은 성공한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죽은 후에는 사탄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귀신은 무서워해도 하나님은 경배는커녕 끝까지 그 실존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인간이 고안한 종교를 인간이 선택할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사회에서만 통할 뿐입니다. 반면에 십자가 복음은 그런 어리석고 죄 많고 완악한 자를 하나님이 당신께서 창조하셨던 그 자리로 당신께서 되돌려 놓으시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갈급하고 허망했던 자를 다시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겠다는 그분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사후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죽음 이후에 모든 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구원하실 것 같습니까? 제멋대로 종교를 택한 자이겠습니까? 성전에서 예수 믿기 전의 바울처럼 기도한 바리새인이겠습니까? 아니면 가슴을 치며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한 세리이겠습니까?
전혀 의롭지 않고 오히려 죄 중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했기에 복음입니다. 그 복된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자는 자연히 바울처럼 주변에 자랑하면서 나누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바꿔 말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죗값을 치러주신 그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거부할 자유와 권리는 어떤 인간에게도 없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10/9/2022)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