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11,12) 천국을 침노해 요한보다 커졌는가?
구원 완성 담화 (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1,12)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신구약 성경 66권이 말하는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가지 주제 중에 마지막 완성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그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뤄지는데 주님이 사역 초기에 하신 말씀인 본문부터 살펴보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지금껏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구원의 완성에 대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주님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앞의 10장에 기록된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따로 세우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그리고 전도 여행을 내보내면서 사역에서 지켜야 할 원리와 전도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마10:5-42) 그 후에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주님이 하신 일을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채고 사람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알렸습니다. 요단강에서 주님께 세례를 베풀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메시아 위임식을 주관했던 그가 예수님더러 과연 당신이 메시아인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는 것은 조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로선 그렇게 물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옥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듣고”(마11:2) 그랬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가 행할 바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옥중에서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주님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 대해 조직적인 항거는커녕 정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에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야단쳤습니다. 그리고 민족 반역자 세리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도 식사 교제를 하고, 불구자나 불치병 자를 이적으로 고쳐주었으며, 창녀 고아 과부들을 보살피면서, 율법을 새로 풀어서 가르치기만 했습니다. 나아가 제자들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내긴 했는데 로마에 대항할 독립군을 모집할 목적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일을 하라고 파송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유대인으로서 이민족이자 로마의 앞잡이인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을 저지르고 결혼한 죄를 당당하게 꾸짖은 탓에 지금 감옥에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은 뒷전이고 한가하게 백성들과 노닥거리고만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사역의 본질
그 질문에 대해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고 전하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이는 이사야서 35:5-6을 인용한 것인데 당신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아가 맞다고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사야는 소경과 귀머거리와 벙어리의 치유만 예언했으나 주님은 못 걷는 자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덧붙였고 특별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예를 든 치유는 신적인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죽은 자를 살리려면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요한이 주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확인한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다시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점을 의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크신 권능을 지금 엉뚱한 곳에만 사용하지 않느냐는 뜻인데 주님 또한 요한이 질문한 의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내내 불구자와 불치병자를 고쳐주고 때로는 죽은 자도 살려주었으나 그 일에 전념하지 않았고 모든 환자를 고치고 모든 죽은 자를 살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런 기적을 베푼 이유는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이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 앞에 확증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전했으며 마지막 만찬 때에도 제자들에게 강론했습니다. 마지막 승천하기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족속에게 당신께서 분부한 복음을 가르쳐서 지켜 행하게 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마28:20)
반면에 요한은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메카비가 헬라에서 독립을 쟁취했듯이 예수님이 앞장서서 로마를 물리쳐 주기를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왕으로 삼으려는 백성들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요한에게 메시아 사역의 본질이 한마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로마를 물리친다고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당신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전하라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행하는 사역의 의미를, 특별히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아무리 요한처럼 하나님을 믿고 세상 불의에 항거하며 의롭게 사는 자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논의할 주제는 아니지만 한국 교회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피 터지도록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안이 반드시 보수와 진보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기 조국을 위하는 충정은 이해해도 하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제한시키려는 시도로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 사상에 불과합니다. 물론 실천적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확실한 측면이 양쪽 다에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영적 수준이 옥중에 있는 세례 요한과 동일한 셈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그런 논쟁에 몰두하는 한국 교회들에게도 틀림없이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말고 오직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할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요한처럼 왕궁에 있는 현실적 메시아를 찾아선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7-10절) 그 후에 본문을 말씀하셨기에 요한에게 가르치신 뜻대로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하는 구원의 도를 복음(福音)이라고 표현한 이유부터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복음의 헬라어 ‘유안겔리온’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라는 뜻인데 이미 당시에 널리 사용되고 있던 용어였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익숙해져 있는 복음은 사실은 좋은 소식이 아니고 당신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진짜 복음이라고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가 아구스도 황제가 호적할 때였습니다.(눅2:1) 아구스도는 당시 지중해 전 지역을 평정해 대제국을 세워서 더 이상 큰 전쟁이 없게 한 공로로 원로원으로부터 처음으로 가이사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고대의 곡물 창고인 애굽도 식민지로 삼아서 식량 부족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말하자면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좋은 소식이라고 기뻐하다가 로마 시민은 물론 식민지 백성들조차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과 경제적 형편까지 보장해주었다는 뜻으로 아구스도 개인을 유안겔리온이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자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여기서 좋은 소식의 원어도 유안겔리온으로 아구스도는 복음이 아니며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 영웅인 아구스도가 절대로 인간의 생명, 안전,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의 숫자보다 노예가 훨씬 많을 정도로 식민지가 많아서 로마 시민은 역사상 최고의 경제적 풍요와 사치와 향락을 누렸으나 그럴수록 음란 불법 죄악도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인간 자체가 죄로 철저히 타락했기에 현실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로 외부 여건을 안락하게 바꾼다고 해서 절대로 인간의 참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대부분 기아 질병 전쟁 같은 환난 중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어떤 인간도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참 복음이신 예수님 탄생을 두고 천군 천사들이 하늘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주님이 공사역 중에 유대교 지도자들과 가장 자주, 가장 크게 갈등한 계기는 세리와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인간이 만든 도덕적 종교적 규정으로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할 수 없고 모두가 당신의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그들과 서슴없이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이방인은 아구스도의 복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부자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어도 절대로 그것이 인간을 진짜로 충만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진리를 즉, 참 복음이 아구스도가 아니라 당신임을 그들과의 교제를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세리와 이방인들도 니고데모처럼 아무리 풍요로워도 내면의 갈급함을 지울 길이 없기에 천국 복음을 듣고 싶어서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또 유대인들이 로마와 유대 당국 양쪽에 시달려서 현실적으로 가장 궁핍할 때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구스도와 달리 현실적 축복을 전혀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현실적으로 너무 궁핍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당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을 수 있고, 그렇게 배척한 자들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인데도 그 상황과 관계없이 오직 천국 복음만 전파하셨습니다. 최고로 부요하든 최고로 궁핍하든 십자가 복음 없이는 그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쭉정이와 알곡을 골라내려 하신 것이며 더 정확하게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당신께서 사랑할 자를 택하여 구원을 주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완전히 임한 천국
주님은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에는 그런 현실 문제 해결이 아닌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12절) 첫째는 천국이 임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합니다. 직접적으로 천국이 임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요한의 때부터 침노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때 이미 임한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께 세례를 베풀자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해준 이후로 주님이 공사역을 시작했으므로 주님이 계신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의 자격은 복음을 전해 듣고 주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게 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가 구원의 완성을 재림 때에야 가능하고 또 천국은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고만 여깁니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지금 주님이 천국이 임했다는 말씀은 완전히 틀린 내용이 됩니다. 천국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로 전 우주와 영계까지 성삼위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든 영역입니다. 인간 창조 이후로 모든 세대의 모든 장소가 그분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통치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시공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보다는 좁은 의미의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반드시 왕과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지금 갈릴리 척박한 땅에서 가난한 소수의 제자들 앞에서 천국이 임했다고 합니다. 그 제자들이 그 천국의 첫째 백성인 셈입니다.
현실에선 로마가 최강 제국으로 버티고 있으나 주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임했다고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로마에 대적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낸 이유가 사실상 빨리 앞장서서 로마를 향해 진군하라는 독촉이었는데도 로마를 물리칠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로마를 무너뜨린들 인간끼리 누가 힘이 센지 다툰 결과일 뿐이므로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가 절대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락은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그분이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치하시는 일과는 별개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로 기존의 모든 나라들과는 다른 특별한 나라를 세상 속에 세우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복음은 현실 형통을 목표로 인간이 제정한 법률에 따라서 인간 지도자들이 주관 통치하는 나라에 필요합니다. 세상 속에 세워질 천국은 영광스러운 부활 생명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세상 앞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나라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이며 인간으로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로 거짓 복음에 속지 말게 만드는 것이 그 천국의 존재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이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면서 그런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즉, 죽음으로 이끄는 사탄의 세력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마16:13-20) 사탄에 미혹되어 죽음에 처한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을 행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모든 조직체 교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뜻은 아니며 순전한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 주님이 분부하신 천국 복음을 가르쳐 지켜서 행하는 모임이 천국입니다. 그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서부터 인종 국가 직업 신분 등으로 전혀 차별하지 않았듯이 지리적 국경이나 법률적 제약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 영접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 즉, 천국 백성이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완성된 천국과 미완성의 천국
본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성삼위 하나님의 합동 사역으로 이 땅에 도래시킨 천국은 그 자체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꾸고 세워진 천국이 완전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셨으며 더 이상 주실 것도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여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주님이 전하신 복음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성경도 소유토록 해주었습니다. 그럼 신자 개인에게도 그 천국은 완성된 것입니다. 추가로 더 건축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네 주제 중에 마지막 구원의 완성을 마지막 날의 새 하늘과 새 땅만 염두에 두지 말고 이미 완전한 천국 안에 들어온 완전한 천국 백성이라는 확신부터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을 때부터 성령에 의해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심겨진 영의 생명은 절대로 쇠퇴 소멸될 수 없고 반드시 성장하여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면 천국 백성이 된 것이며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을 아무 고통 슬픔 문제 죄악 없는 유토피아로만, 그것도 죽은 후에야 가는 곳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단 한시도 하나님이 나를 떠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 바로 믿음이지 않습니까?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게 선하신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서 항상 함께 해주신다면 모든 것이 당신의 완벽하게 선하신 계획에 따라 이뤄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공생애 내내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고 본문도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고 마치 완성은커녕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정확하게는 승천하시고 50일 후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깨달아야 그런 천국이 이 땅에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도 함께 임했지만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이 없이는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주님이 살아계실 동안에는 열두 제자들마저 요한처럼 현실 왕국의 영광만 추구했지 않습니까?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세워질 이 땅의 천국에는 더 완성될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완성에 부족한 것이 아니라 더 충만하게 될 소지가 남았다는 뜻입니다. 우선 그 천국이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죄로 타락한 세상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는 나라이며 그 나라의 규모가 더 큽니다. 그 왕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며 돈이라는 최고 강력한 도구로 통치합니다. 사실은 사탄인데도 너무 매력적이라 모두가 아주 열정적 적극적으로 돈에만 충성 숭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아담 때 하나님의 약속처럼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서 여자의 후손으로 사탄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어도 완전한 성자로 바꿔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도 육체를 입은 연약한 인간으로 물질계에서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하므로 현실 여건에 따라서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사탄의 매혹적인 유혹도 굶주린 사자처럼 신자를 집어삼키려 노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원죄의 흔적이 교만과 욕심의 모습으로 신자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임하여 이루신 천국은 완성이 되었으나 신자가 실제로 체험하고 실현할 천국은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했으나 아직은(yet)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침노는 폭력을 사용하여서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더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 앞에 맞서서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 예수님의 천국이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초대교회에 십자가 복음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염병 같은 위세로 로마 제국에 단시간에 퍼졌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실현시킨 새로운 왕국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함께 해주시고 천국의 열쇠를 가졌으니 그 앞에 맞설 수 있는 존재나 세력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나라 백성들도 그런 열정과 확신을 갖고서 천국을 자신에게 실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침노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침노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주 간단한데 세상 복음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물 권력 지식의 많고 적음과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만이 자신에게 참 복음이 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절감하기에 오직 그 은혜와 권능만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님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고 있으면 천국은 신자와 그 주변에 침노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임했다는 것은 요컨대 하나님 당신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의 문제들이 잠시 불편하긴 해도 내 삶과 인생을 절대로 좌우할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은 반드시 자라되 신자의 개인의 현실적 풍요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역사합니다.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 앞에 비춰내는 방향으로만 역사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닮아서 자라게 하고 예수를 따라 살게 하고 예수를 주위에 증거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흑암의 세상 앞에 높여주는 일만 하게 합니다. 사탄의 왕국에서 죄의 노예로 살고 있는 그 나라 백성들더러 그 나라에선 아무리 현실적으로 형통하고 안락해도 처참한 죽음만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빨리 탈출하여서 당신의 나라 백성이 되어라고 호소 초대 간섭하는 일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꿔 말해 기독교 일각에서 성령의 역사를 초자연적 기적에 한정시키거나 그것만 집중적으로 소망하게 하는 것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아닌 사도 요한은 그런 기적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르쳐서 믿게 해주는 증표라고 했습니다.(요20:31) 성령 은사 체험 위주의 신앙은 옥중에서 주님으로 인해 실족할 뻔한 또 다른 차원의 요한이 되는 셈입니다.
별칭이 성령 행전인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천국을 어떻게 침노했다고 증언합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고, 빌립은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광야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복음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자격조차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울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고 또 체포당할 줄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오직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만 염려 걱정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로마의 극심한 핍박에 맞서 믿음을 지키며 산채로 맹수에 먹히거나 불에 타죽어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모습에 크게 영적 찔림을 받은 로마 시민들이 흑암의 나라에서 탈출해 예수 생명의 나라 문을 두드렸습니다.
정말로 한번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신약의 성도 중에 자기 문제와 고난만 해결하려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 헌금하고 뜨겁게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아무도 그러지 않았는데 교회 출석한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왜 그렇게만 신앙 생활하시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신자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선지자 중에는 가장 큰 자입니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오신다고 예언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고 이 땅에 왔다고 선포했고 심지어 그 왕의 대관식마저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헤롯에 의해 참수당했기에 주님 말씀대로 천국을 침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이후의 모든 신자는 십자가를 알고 천국을 침노했기에 모두가 천국에선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 뜻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천국에서 실제로 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에서의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은 분명히 천국을 침노하라고 즉, 복음을 실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했고 제자들도 실제로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신약시대 이후의 모든 신자는 그래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들이 성경적 지식이나 기독교 교리에 능통했거나 기도를 더 간절히 많이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신하고서 그 부활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어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알았던 것이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땅에서부터 성령이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이후로는 주님의 은혜를 범사에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가 순교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당장 저부터도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이 어떤 의미이고 실제로 이 땅의 삶에서부터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찾아서 누리는 것은 우리의 임무나 책임이 아니라 특권이요 은혜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만큼 나 자신에게서부터 확장되어서 반드시 주변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천국 백성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침노를 방해하는 세력은 여전히 왕성하고 강력하며 교묘하고 끈질깁니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시험, 돈이 주는 매력적 유혹, 주변 사람들의 형통하고 안락하고 쾌락에 젖어서 사는 모습, 무엇보다도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교만과 욕심으로 인해 수시로 넘어지고 두고 온 본향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예수님이 성령의 형태로 와 계십니다. 그분이 천국열쇠를 맡겨주었습니다. 그 열쇠로 천국을 침노하지 않으면 이 땅은 완전히 멸망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야 신자입니다.
그 전에 천국을 침노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부터 다시 메마르고 갈급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과 손을 잡고 동행하고 있기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로, 그것도 주님과 나만 아는 너무나 오묘하고 비밀스러운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이미 맛보고 있는 천국도 너무 좋으나 그 마지막의 영광스러워질 완성을 너무 소망하기에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솔직히 자신의 구원과 믿음을 재점검해보십시오. 요한보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있습니까?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자 삶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과 소망이 되어 있습니까?
(11/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