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1:3-7) 끝날까지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는 구원
구원 완성 담화 (6)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1:3-7)
구원이 취소될까 두려운 신자들
의외로 많은 신자가 자신이 구원을 확실히 받았는지, 또 혹시 받았어도 죄를 지으면 취소되지는 않는지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를 열심히 믿고 있는데도 수시로 죄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잘못에도 저항 한 번 못하고 너무 쉽게 또 반복해서 무너집니다. 어떤 때는 죄인 줄 알고도 그것이 주는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스스로 찾아서 범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그러니 대체 내가 거듭난 신자가 맞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수시로 의심이 생깁니다.
둘째로 성경에는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여겨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 하나만 들자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a)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필 여유는 없기에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 하나만 지적하겠습니다. 맛보고 또는 참여하고라고 했듯이 전부 성령의 역사를 한두 번 체험한 경우를 말하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구원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민족도 체험은커녕 알지도 못하는 하늘의 은사를 맛보며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중에 모세, 여호수아, 갈렙 등을 제외하고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치유해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는 별도로 성령이 고난 중에 있는 인간에게 역사해 그 고통만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며 그 사실을 깨달은 자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3:16)
성경에 한 번 얻은 구원이 다시 취소될 것처럼 표현된 말씀은 앞뒤 문맥에서 의미를 잘 살펴야 하는데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우선 신자들더러 더욱 죄를 멀리하며 성화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구원받지 않는 자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고 선언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대신해 돌아가신 은혜를 순전히 믿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신자는 때로 넘어질 수 있으나 절대로 주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함께하시므로 그렇게 되도록 그분께서 버려두지 않습니다.
신자가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해 큰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과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셈인데 그래선 삶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저 교회 생활을 성실히 해서 혹시라도 그분의 심판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바울은 본문에서 신자들의 그런 의심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완전히 부인해버립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6절) “너희 안에서”라고 했으니까 너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착한 일을 시작하여서 끝내준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착한 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의 자택에 연금되어 있으면서 자기에게 물질로 후원해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받고 있는 자기를 섬기고 기도해준 일은 빌립보 교인이 행한 것이라 본문의 착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해진다고 했습니다.(3,4절) 그렇게 되는 이유를 바울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절) 그 첫날이 바울이 로마에 갇힌 날부터가 아닌데 그럼 그전에는 교회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바울로부터 강가에서 복음을 전해 들은 비단 장수 다비다와 바울이 갇혔던 감옥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로마인 간수가 주도하여 빌립보 교회를 세운 그날을 두고 첫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작과 첫날은 평행적인 표현이므로 착한 일은 당연히 빌립보 교인 각자가 십자가 복음으로 은혜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초림은 이미 지났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모든 이를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때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일관되게 행하실 한 가지 착한 일은 당연히 신자의 구원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다고 복수로 표현했으나 구원이 빌립보 교회에 전체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교회 앞으로 보낸 편지를 모두 회람해야 하므로 복수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출애굽 때의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구원은 오직 개인별로 이뤄지고 그렇게 구원받은 신자들이 힘을 합쳐 그분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처음부터 하나님이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이루신다고 합니다. ‘이루신다’는 원어의 뜻이 개발 성장 개선이 아니라 성취 완성 마감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한 죄인을 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전 여정에 항상 함께하여서 당신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책임지고 완성해 주는 구원이라면 중도에 취소될 리 만무합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선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을 부인하고 대신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가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구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 취소되면 하나님이 나중에 온전히 믿지 않을 것도 미리 아실 텐데도 구원을 주었으니 당신의 성품에 맞지 않으며 그런 주장도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예정으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그 완성도 예정이 된 것입니다. 완성이란 단어 자체부터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자가 때로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이미 받았고 또 그분이 완성할 구원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신자가 자주 넘어져야만 하나님이 성취하실 여지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말은 물론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아니 일상적으로 행동으로 짓는 죄들조차도 완벽하게 절제할 수 있는 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신(神)이 된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부터, 그 뜻을 그대로 반영한 구약 십계명의 첫 계명과 신약의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포하는 절대적인 진리가 바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의 기준에 스스로 합격할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만 구원 심사도 필요 없이 천국에 곧바로 입성시키면 됩니다.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그 큰 고통을 감당하며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을 때까지 죄를 지으므로 그 죗값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로 대신 치르게 하고 그 은혜를 믿는 자를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로 불리는 신자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인데도, 심지어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음에도, 성령이 역사하여 이뤄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을 생각은커녕 극렬히 반대 핍박하고 있는데도 주님이 먼저 찾아와 구원해주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의 형벌을 그 심판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이 직접 제거해준 것입니다. 그럼 그 이전과 이후의 구체적인 죄의 문제도 당신께서 모두 책임져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이후부터 성령이 곧바로 신자에게 내주하여서 평생 함께해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또 마지막 날까지 그분이 이뤄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servant)이라고 부르면서도 빌립보 교인은 “성도(the saints)”라고 칭했습니다.(1절) 실제 원어의 뜻도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거룩한(holy) 자입니다.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만은 스스로 자존할 수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과는 구별되므로 거룩한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하나 그중에 바울처럼 당신의 제사장 백성으로 세울 사람을 따로 구별해주었다고 신자를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컨대 도덕적으로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의인으로 구별하여 용서해준 죄인이고, 불신자는 아직 그런 구별되는 은혜를 입지 못해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해 준다는 의미도 신자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삶과 인생으로 살게 해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신자 스스로 자기는 세상 사람과 구별된 존재라는 확고한 인식 아래 그들과 구별되게 살고 있지 않다면 구원에 대해 확신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끝까지 책임져준다고 해서 구원에서 떨어나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기어이 완성시켜 주시는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도록 삶의 모든 차원에서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가 실제로 신자의 삶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예수님에게 붙어만 있으면 되니까 굳이 열심히 노력해서 교회에서 최고 우등생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로 거듭났다면 성령님이 내주해서 떠나지 않으니까 평생토록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실상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어주어서 구원의 전 과정을 주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인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신자가 택할 별다른 신묘한 방안이 따로 없습니다. 대신에 자기 마음과 몸이 자꾸 세상으로 향하려는 것만, 특별히 자신을 치장하고 남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교만과 탐욕을 죽여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성화에 매번 실패하는 이유
그런데 신자들은 이 원리를 익히 배워서 알고 있으며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실은 가장 자주 또 쉽게 실패하는 일입니다. 그 이유가 신자의 의지력이나 영적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신자들이 자신이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를, 정확히 말해서 구원받게 된 죄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껏 교회들이 구원의 의미에 대해선 잘 가르치는데 그 이전의 타락의 실체를 조금 부족하게 가르친 것입니다. 구원은 타락 이전의 상태로의 회복인데 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간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타락의 실체가 무엇인지, 내가 원죄 하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상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자연히 구원의 의미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에서 탈북해 남한으로 이주한 자는 이전에 인권과 자유가 전혀 없었던 사회와 이제 그것이 최대한 보장된 사회가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압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죽으면 죽지 그럴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틸 것입니다. 새롭게 누리고 있는 인권과 자유의 의미를 옛날과 비교해서 체험적으로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그런 식의 정반대되는 극적인 전환을 실제적 구원 체험으로 갖고 있지 못하니까 자꾸 자기 구원이 흔들리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시리즈 내내 강조했지만 도덕적인 죄를 범한 것이 아니며 나아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다는 종교적인 죄를 범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그분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최초 인간 부부가 의도적 적극적 능동적으로 기꺼이 단절시킨 것이 타락입니다.
이 타락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실존하고 또 인생의 모든 면을 선하게 인도한다는 사실이 절대적 진리이자 전제가 되어야만 죄로 성립됩니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 경배하지 못한 종교적 죄가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실재(實在)가 완전히 오염되는 차원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없다면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 나눠 먹은 것은 정반대로 아주 선한 일이 되어서 인간사회에선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고 이 과일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금지했는데도 따먹었습니다. 그들은 그 맛이 너무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따먹었거나 혹은 절로 떨어진 과일을 우연히 주워 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는 매우 나쁜 의도로 금지했다고 믿고선 이제부터 그분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겠다는 각오하에 따먹은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그 과일 하나만 빼고 모든 선한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 활용 소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실제로 그런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놓고도 그랬습니다. 그 과일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이 땅과 자기들 인생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주권자가 따로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 절대 잊지 말라는 상징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그분을 죽인 것과 방불하며 잘 봐주어야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죄이므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실제로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 인간적 노력으로 아무리 감추고 없애려 해도 너무나도 부끄럽고 두려워진 상태가 하나도 개선되지 않고 더욱 심해졌습니다. 실질적인 죽음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끊어지니까 그 필연적인 결과로 부부가 서로 비난 정죄하는 도덕적 죄가 따랐습니다. 이처럼 최초 인간들을 타락으로 빠트린 죄는 도덕적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그 타락한 죄로 인해 도덕적 종교적 죄가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로 정관사와 대명사를 사용해 the Sin 혹은 잘 아시는 대로 원죄(原罪, the original sin)라고 칭합니다.
그 원죄의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아담과 이브에겐 하나님이 실질적인 아버지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버지를 버린 것입니다. 타락은 그래서 하나님 밖에 거하는 것이고 구원은 다시 하나님 안으로 그분이 옮겨준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도 가출한 당신의 자식을 아버지인 하나님 쪽에서 다시 당신의 자식으로 받아주었기에 그분과의 관계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던 돌처럼 딱딱했던 마음 밭이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부드럽게 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처절한 실패를 체험했으므로 그분께 돌아온 후로는 그분을 정말로 사랑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뜻대로 따르며 살고 싶다는 소망과 열정도 함께 생긴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도 도덕적으로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하게 사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정말로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며 그분을 친 아버님처럼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때로는 불효하고 그 반대로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을 수 있으나 그 부자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자식인 신자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주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이 꼭 나쁜 짓을 하지 않아야만 또는 성적이 좋아야만 사랑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오히려 자격이 없으며 자식과 부모 사이임에도 공로와 보상을 서로 주고받는 비즈니스 관계만 남습니다. 진정한 부모는 오히려 속을 많이 썩이는 자식이 더 애처로워 관심과 사랑을 더 쏟는 법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모시고 있지 않으면 의붓아버지 아래이거나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자는 혹시 잘못하여 내쫓기지 않기 위해서 계부와 고아원 원장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춰주기 바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여 누리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종교처럼 착한 일이나 치성을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행위 구원의 믿음에 머무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불신자입니다.
그래도 교회 출석한 지 오래이며 성경도 잘 알고 있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세속적인 기복종교와 비교하다니 너무 심한 말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인 중요원인 중 하나가 주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제자들더러도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예수 일행이 인간으로서 감히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불경한 말을 하는 데다 할례 없어서 하나님의 저주받은 이방인과 아무 거리낌 없이 교제하고 있으니 그들 또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고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로 타락한 아담과 이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을 상징하는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당신 쪽에서 그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손들의 영혼에는 이미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만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깊이 각인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소원과 열정까지는 생겼으나 도덕적으로 제대로 의로워지려면 아직 요원합니다.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경험하듯이 우리 속에 남아있는 자기만 치장하려는 그 끈질긴 죄의 힘에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듭나게 한 후에 곧바로 내주해주셔서 죄를 지으면 스스로 큰 죄책감이 들게끔 이끌어주십니다. 신자가 그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멀리해서 미처 죄를 깨닫지 못해도 신자의 영이 눌리게 만들고 성령께서 대신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해주십니다. 요컨대 신자가 갈수록 죄책감이 늘어나는 것은 거룩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중할수록 자기가 깨닫는 죄의 종류가 많아지고 같은 죄라도 레벨이 다 다르며 죄를 지을 때마다 느끼는 죄책감도 각기 다르게 다가옵니다.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점점 영적 분별력과 지혜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며, 성자라고 칭함만 받은 데서 실제로 성자에 가까이 다가가는 중입니다.
구원받은 믿음
따라서 구원받은 믿음의 최소치는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수록 더욱 예수님의 긍휼의 은혜를 더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게 되어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범사를 이해 판단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리 큰 현실적 문제와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바로 내 아버지니까 때로 자기가 큰 죄를 범해도 구원에 대해 흔들리지 않게 되고 그 배후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부터 먼저 묻게 됩니다.
본문을 쉽게 바꾸면 예수를 믿으면 믿기 전의 죄와 현재의 죄와 장래의 죄까지 다 미리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거역한 원죄는 물론 이전에 지은 도덕적 죄들도 다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된 관계는 절대 끊어지지 않으니까 구원 이후의 죄도 결과적으로 미리 용서받은 셈입니다. 신분상의 구원이 바뀌지 않으니까 현재와 미래에 지은 윤리적 죄들로는 심판받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지은 죄를 계속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의 징계는 따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7-10)
부모가 자녀 훈육을 위해 벌주듯이 하나님도 신자의 믿음을 더욱 단련시키고 그 성품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게끔 이끄는 벌은 주십니다. 참 자식이라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부모와 관계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제멋대로 악행을 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오히려 감사하며 순종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에 먹물을 칠하지 않으려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게 처신합니다. 혹시라도 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쳤을 때는 아주 가슴 아파하며 곧바로 진심으로 회개하며 고치려 노력합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는다는 것도 언제든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곧바로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계부나 고아원 원장이 아닌 참 부모는 자식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고백하는데 용서 안 해줄 리 없습니다.
신자들이 오랜 신앙생활을 해도 수시로 죄에 넘어지고 갈수록 더 죄를 많이 짓는 것 같으니까 자신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에 대해 아무 민감해진 탓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의로워졌습니다. 교회 안에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를 보면 절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여전히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이웃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 구원을 위해서 저절로 눈물 흘리며 기도해줍니다. 신자는 미처 의식 못해도 내주하신 성령님이 그 마음 밭을 주님처럼 아름답게 바꿔서 계속 거룩하게 가꿔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
성령은 신자로 죄를 지을만한 여건과 장소와 시간까지 통제해서 미리 막아주십니다. 영이신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므로 신자가 구체적으로 감지하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 의지로 다 행한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지나고 나면 큰 위험뿐 아니라 죄의 유혹에 넘어갈 뻔한 위기를 막아주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현실 고난과 위험에서 지켜준 큰 능력보다 사탄과 죄악에서 지켜준 거룩한 은혜가 더 귀하다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마지막 날까지 완성해주신다고 해서 신자가 가만히 있는데 다 알아서 해주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성령은 완전히 손을 놓고서 신자의 전적 책임과 노력에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어서도 수시로 죄의 본성에 져서, 틀림없이 자기를 높이려는 끈질긴 욕심과 유혹에 넘어져 자기야말로 아무 소망이 없는 곤고한 몸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절망에서 건져줄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라고 고백했습니다.(롬7:19-25) 구원 자체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지만 구원 이후의 성화는 신자가 성령의 보호와 인도 아래 함께 이뤄나가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신자의 회개와 개선할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그와 동시에 혹은 그에 앞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법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신자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고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착한 일을 끝까지 완성시켜 주신다고 해서 예수님의 수준까지 도달시켜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의 제자이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범사에서 영적 분별력, 지혜, 믿음, 용기, 담력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 헌신하며 세상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7절)고 빌립보 교인들도 자기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세상 고난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 앞에 맞서라고 하지 않고 자기처럼 이미 맞설 수 있는 자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화는 인간사회가 의롭다고 여기는 도덕적 종교적 노력과 상충하지는 않지만 그 차원이 다릅니다. 자신의 변화된 영원한 신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그 신분에 걸맞게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을 깊이 알아나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정확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구원받을 때부터 천하의 죄인으로 죽음 외에는 그 죄를 갚을 길이 전혀 없다는 것부터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왜 이 땅에 오셨고 무슨 일을 했고, 그 일의 결과가 지금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성령의 역사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자기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이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어져 이전과는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열정이 있는지 본인이 어떻게 모를 수 있습니까?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기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너무나 교묘하고도 끈질긴 교만과 탐욕에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줄도 잘 압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만 구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가 약할 때 그분의 권능이 온전히 더 크게 역사하심을 체험으로 알기에 고난으로 내가 무력해질 때 오히려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구원 안에 확실히 들어왔는지 점검할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한 번 따져보십시오. 아침에 기도하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분이 내 말을 들어주려고 내 곁에 앉아있는 아빠로 여겨집니까, 멀리 초월하신 전지전능하신 절대자로만 여겨집니까? 아빠라면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주실 것이고 그러면 자식 된 도리로 그대로 고쳐나갈 것입니다. 반면에 전지전능하신 초월자 하나님으로만 간주하면 그 큰 능력으로 왜 이 간단한 기도 하나 들어주지 않는지 의심 불만만 생길 것입니다. 그런 일이 쌓이면 내가 구원받지 못해 그런가보다 의심되고 그 동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 것조차 괜히 손해만 본 것 같은 원망까지 생길 것입니다.
(1/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