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2:18-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구원 완성 담화 (12/완)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18-21)
어서 오셔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당신의 때에 홀연히 다시 오시면 이미 죽은 신자나 당시에 살아있는 신자 모두 홀연히 신령한 신체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악이라고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온전한 공동체를 세우게 됩니다. 한마디로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장차 그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할 소망을 날이 갈수록 더욱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현재 겪고 있는 너무 고달픈 삶을 빨리 탈출하고 싶다는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그럼 천국 입성을 빨리해야 하는데 자기가 빨리 죽거나 주님이 빨리 다시 오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살고 죽음의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기에 신자가 빨리 천국 가고 싶어도 자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아멘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은 계시록의 결론인 본문 20절에선 ‘어서’라는 단어 없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만 간구합니다. 물론 그 앞에서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기에 신자들이 주님이 빨리 오시길 바란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 비추어 두 가지 사항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얼마나 속히 오실지는 오직 주님이 결정하실 사항입니다. 그분에겐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이 되므로 수천 년 후일 수도 있습니다. 속히 오신다는 뜻도 언제가 될지 모르나 순간적으로 홀연히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헬라 원어 ‘타퀴’는 영어 성경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듯이, 시간적 간격이 적다는 ‘빨리’(soon)보다는 ‘갑자기’ 또는 ‘급하게’(quickly)라는 뜻입니다. 제가 계속 ‘홀연히’ 오신다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불시에 오시니까 그보다 더 속히 올 수는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아는 친구를 만나면 마치 순간 이동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서’라는 단어 하나가 있고 없고는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어서’가 있으면 최대한 빨리 오기를 바란다는 뜻이지만 ‘어서’가 없으면 어느 때에 오셔도 되고 다시 오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기 당대에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단순히 또 간절히 주님이 다시 오시기만 소망해야지 그 시기를 정하거나 빨리 오라고 독촉해선 안 됩니다.
말하자면 현재 겪고 있는 핍박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믿음으로 견디기만 하면 주님이 빨리 와서 구해주리라고 믿는 것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순진하다는 것입니다.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거나 불에 태워지는 로마의 핍박을 받았던 초대교회 신자만큼 간절한 기도도 없었을 텐데 주님은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종말의 시기를 자기 당대에 일어날 것처럼 믿는 것은 논리적 현실적으로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보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서 광야로 피신한 엘리야처럼 도저히 고통을 견디기 힘드니까 내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소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왕상19:4) 그럼 자살하지 않고도 천국에 빨리 입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서’라는 말이 없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것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되고 또 자기가 주님 오시기 전 언제든 순교를 당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순교를 담담히 감당할 수 있는 근거도 부활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이미 영생 가운데 들어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번역한 것으로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성만찬 예식에서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문구였습니다. 포도주와 떡을 나누며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찢긴 살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그 자리에 주님이 동일한 은혜로 임재해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단 한 번 강림하시는 것보다 예배 때마다 반복적으로 임재해 주기를 바라는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결론에서 같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앞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선언하고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어서’가 없이 말했습니다. 단순히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선 로마의 핍박이 극심하므로 당연히 예수님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이 이 땅에 실현되어서 로마 같은 세속적인 흑암의 세력을 속히 멸해 주기를 바라는 의미가 그것 이상으로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요한 당시의 신자들은 순교 당하지 않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나 당대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주님도 그들을 냉혹하게 외면한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으며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실질적이고 일차 독자인 아시아 지역의 일곱교회 교인들은 기꺼이 순교하거나 끝까지 숨어서 그 핍박을 견뎌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순간 천국 면류관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확신하므로 담담히 또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설명해 드린 대로 주님이 언제 오셔도 좋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에 터키의 갑바도기아에서 대규모의 암벽 동굴 도시가 발굴되었습니다. 로마의 핍박을 피해서 그 컴컴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동굴에서 최대 2만 명이 수 세기 동안 살았고 훌륭한 신학자들도 배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순교할 자에겐 믿음과 능력의 은사를 주어서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순교 현장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셔서 그 믿음을 지켜주시고 또 천국으로 영접해주십니다.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만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찬송하는 모습은 당시 로마 제국의 이방 족속들에겐 너무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현장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성령의 거룩한 권능이 임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며 기독교로 개종하게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와 교회를 그리스도의 견고한 반석 위에 ‘속히’ 세우려고, 그 전에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열방들이 너무 불쌍해서 신자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구원해주시려 한 것입니다. 순교자에겐 천국의 면류관을, 생존자들에겐 암벽 동굴 같이 핍박을 피할 길을 미리 마련해 놓고서 말입니다.
네로 황제의 첫 핍박 때에 순교한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또 베드로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라고 선언했습니다. 자기들이 순교 당할 것을 미리 각오하고서 순교의 의미와 그 영광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들이라서 믿음이 특별히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름 없었던 수많은 일반 신자들도 이런 믿음 없이 어떻게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초대 교인들은 신약 성경이 완비되기 전이라 십자가 구원과 부활 영광의 교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목격했으니까 자신들도 그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확고한 한 가지 믿음은 가졌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그 짧은 기간 동안 십자가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염병처럼 번져 나가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사실상 신구약 66권의 성경 마지막이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로 끝난다는 것은 부활 소망이야말로 기독교 믿음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부활 소망을 아름답게 가꿔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본문이 권면 아니 강력히 명령합니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를 시작할 때 요한더러 당신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계1:11)고 명했으니까 요한계시록을 뜻합니다. 만약에 계시록에 더하면 계시록에 기록된 그대로 재앙이 임하고 제하면 부활에서 제한다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가뜩이나 상징과 묵시로 가득 찬 종말에 관한 예언인지라 목회자들도 계시록만은 자칫 잘못 가르칠까 두려워서 선뜻 설교하지 않으려 합니다. 종교개혁가들도 당시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판타지처럼 여겨져 계시록을 정경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고대 원어의 용법과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관한 연구가 크게 진척되면서 올바른 성경해석법이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계시록의 상징과 묵시를 구약성경 예언들과 대조하면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봤더니 로마 황제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던 실재한 일곱 교회를 십자가 복음으로 위로 격려하는 내용이라고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재림, 적그리스도, 천년 왕국 등에 관해선 아직도 세부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요한의 저작 동기와 전체 주제에 대해선 이견이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계시록은 여전히 해석하기 너무 어려워서 사실상 더 보태거나 제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계시록을 넘어서 신구약 66권 전체에 적용해왔습니다. 말하자면 정경으로 확정된 현재의 성경 체제에서 하나라도 빼거나 더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경에 속하지 않는 외경이나 위경의 가르침을 참조만 하지 않고 더 중요시하거나, 인간 이단 교주가 지은 책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면 당연히 본문의 경고대로 정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계시록이든 신구약 성경 66권이든, 성경책에다 단순히 적용하는 것은 문자적 표피적인 접근에 그칩니다. 그보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따져야 하는데 앞의 7절과 14절을 다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7절대로 하면 이 두루마리 즉, 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되 하나도 빼거나 더하지 말고 완전하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둘째 14절은 개정개역본과 표준새번역본에 각기 “자기 두루마기”와 “자기 겉옷”이라고 번역되었듯이 원어로는 유대인들이 입는 기다란 겉옷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겉옷을 빤다는 것은 유대 구약 전통으로 부정한 물건을 접촉했거나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이 말씀이 적용되는 신약 성도에겐 우리 죄를 대신 지러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히9:14, 벧전1:18,19) 요한은 그래서 그런 자들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말씀의 의미를 종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의 구원을 받은 신자는 주님 말씀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록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럼 반드시 지켜야 할 계시록의 예언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서두에 계시 된 일곱교회에 주신 편지에서 가르치는 권면들입니다.
계시록에서 그 편지들 외에 나머지 내용들은 주로 사탄과 흑암의 세력에 대한 심판에 관해 말합니다. 유일하게 13장에서만 간혹 신자들이 사탄에게 져서 고난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따라서 장래 어떤 재앙이 일어나든 또 마지막 적 그리스도에게 어떤 핍박을 당하던 어차피 신자는 세상의 사악한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핍박은 어쨌든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떤 핍박에도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도 신자가 순종해야 할 계명이지만 그보다는 핍박이 없는 일상 삶에서 평생토록 순종해야 할 말씀이, 그것도 부활의 소망을 키우면서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계시록에선 일곱 편지의 권면 외에 신자들이 순종해야 할 말씀들이 딱히 없고 계시록의 시작과 끝이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 주시는 권면입니다. 따라서 서두의 일곱 편지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순종해야 할 예언의 말씀
그런데 일곱교회 편지의 권면도 사실상 끝까지 이기라는 것 하나인지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가 더 관건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떤 신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기준을 제시하셨는데 그 기준대로만 행하면 신자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의 시기와 징조와 당신의 재림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가르친 후에 생각지도 않은 때에 당신께서 다시 오니까 깨어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명했습니다.(마24장) 그 후에 깨어서 예비하는 모습에 대해서 2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쳤습니다.
그 세 비유를 자세히 알아볼 여유는 없기에 간단히 핵심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랑을 맞이할 열 처녀 비유(마25:1-13)는 등불의 기름의 양이 부족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당시에는 신부의 집에서 먼저 혼인 잔치를 마친 후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밤중이라도 신랑집으로 와서 다시 잔치를 벌입니다. 언제 신랑이 도착할지 모르고 다음 날 새벽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저녁 내내 버틸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반드시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처녀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평소에도 절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비유입니다. 불시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언제 어디서나 신자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름은 특별히 성령을 상징하므로 신자 자신의 의로는 그렇게 하기 힘드니까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달란트 비유(마25:14-30)는 하나님이 신자 각자에게 양적 질적 차이가 아니라 각기 서로 다른 재능과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자기가 처한 여건과 수행하는 생업을 통해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재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종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게을렀던 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아가 자신이 왜 그분의 종으로 부름받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첫째 비유가 일상의 삶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쳤다면, 둘째 비유는 반드시 소명 의식을 갖고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여서 실제로 그분의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천국으로 입장시키기 위해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그랬듯이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열방으로 흘러나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예수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재능과 생업을 통해 평생토록 증거해야 합니다.
셋째 비유(마25:31-46)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시작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1-33절)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절)고 결론짓습니다. 바로 계시록 20:11-15의 백보좌 심판을 제자들에게 미리 가르친 것입니다.
그럼 이 비유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이 백보좌 심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또 그 기준이 말씀드린 대로 신자들이 부활 소망을 키우며 계시록의 계명을 현실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인 셈입니다.
백보좌 심판의 기준
보좌에 앉으신 왕 즉, 재림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을 섬겼던 방식에 따라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눴습니다. 먼저 직접 왕을 섬기지 않은 대신에 지극히 작은 자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본 자들을 양으로 분류하여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왕은 당신을 잘 섬겼기에 구원해준다는 선고부터 먼저 내립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소외되고 괄시받는 자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왕인 당신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 열심히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고 또 그대로 순종했으니 마땅히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류는 이와 정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최고의 정성과 열정을 다해 직접 왕을 섬겼으나 작은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염소로 분류해 심판했습니다. 그런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대뜸 왕인 자기를 섬기지 않았다고 정죄부터 했습니다. 왕을 열심히 섬겼음에도 심판받은 이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자 작은 자를 섬기도록 맡겼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으니까 당신을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선행을 따지는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선 신자가 직접 섬길 대상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보다 현실 삶에서 만나는 불쌍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염소로 분류된 자들도 때로 불쌍한 이웃을 구제했을 것이나 그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 따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했느냐, 단순히 도덕과 종교라는 인간적인 의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섬겼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이를 사랑하되 죄에 찌든 인간들이 만든 기준으로 인간 사회에서 멸시 천대받는 자들을 더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신자더러 그들을 찾아가서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그래서 그들로 하나님에게 소외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잠시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라고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회의 약자만 편애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이 부족하고 죄가 많다고 절감하는 병자와 죄인을 구원해주시려는 뜻입니다. 스스로 부유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구원을 진심으로 간구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풍부를 더 풍부하게 또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의롭게 하기에 급급합니다. 종교적 경건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자기들과 같은 신분 재력 권세를 가진 자만 이웃으로 삼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예수님이 왕은 열심히 섬겼으나 작은 자는 섬기지 않았다고 심판한 것입니다.
일곱 편지 중에 예수님이 서머나교회를 칭찬하신 말씀과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이 바로 양과 염소를 나누는 비유와 맥을 같이 합니다. 먼저 서머나 교회에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a)라고 칭찬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환난과 궁핍에 처했으나 하나님의 뜻 안에선 오히려 부요한 자라고 합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신자와 그 신자에게 섬김을 받아서 믿음을 갖게 된 자 둘 다를 뜻합니다. 요컨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요 죄인이라고 진심으로 겸손히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그와 정반대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건강하고 의인이라고 자부하기에 의사와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없으니까 주님이 맡기신 소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끼리 교회 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쭉정이 신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여겨져 칭찬받을지라도, 예수님이 보시기엔 영적으로 가장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를 든 서머나교회와 또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자칭 유대인들을 사탄의 회”라고 정죄한 것입니다.(계2:9, 3:9)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됨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규범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이방인과는 상종도 하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작은 자들을 전혀 섬기지 않고 멸시 배척했기에 사탄의 교회 교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의 비유처럼 백보좌 심판 때에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기에 억울하다고 따져도 둘째 사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더하거나 제하지 말아야 할 것
이제 계시록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해졌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깨어서 예비하며 또 마지막 영광스러운 부활을 어떻게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 분명해졌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성경 공부 많이 하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나 그것으로 그쳐선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대로 주변의 소외되고 불쌍한 불신자 이웃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행한 것을 왼손이 행하는 줄 모르도록 평소의 생활 방식 자체가 그래야만 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구하며 자기 재능과 은사를 동원해 주님이 맡기신 소명을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사나 죽으나 자신을 통해 예수 십자가 복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확정하고서 그 목적 달성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 땅의 형통과 출세만 추구하는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인 의를 과시하려 들지 말고 영적 절망에 빠져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소개하여서 되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홀연히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유독 최근에 신자들이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숨겨진 동기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대가 흘러가는 상황이 너무 피폐하고 고통스러워서 주님 빨리 오셨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빨리 오시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장님들은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작은 자들을 돌보지 않고 왕이신 주님만 열심히 섬기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죄로 타락한 세상 꼴 보기 싫으니 어서 빨리 천국 가고 싶다는 것도 엄격히 말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셈입니다. 사실상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유대인들과 닮은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사탄의 회라고 정죄했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함께 모여 예수님 어서 빨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집단은 전부 이단적 종말주의자로 정죄 받았거나 그 당대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서 스스로 소멸되었습니다.
신자더러 무조건 이타적 희생적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부터 바로 그런 영적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죽어가는 중에 오직 예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자주 드는 비유지만 모두 똑같이 거지였는데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창고를 먼저 발견한 자가 신자입니다. 가만 놓아두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동료 거지에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단번에 달려가서 그 창고로 데리고 가려 하지 창고를 혼자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불신 이웃들에게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에게도 그랬듯이 유일한 생명줄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서 빨리 주님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음식 창고를 혼자 차지하려는 심보입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한 계기는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가지 거대 담화를 통해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핵심만 살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를 본문은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고 결론 내립니다. 예수님으로 모든 인간에게 충족하고 완전하니까 예수님 외에 더 보태거나 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사실은 자기들 의를 자랑하려고, 십자가 복음 외에 도덕적 종교적 규범을 덧붙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니 사탄이 기뻐할 일을 행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극렬 만류하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일은 제쳐두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야단쳤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을 받아서 참 생명을 얻게 된 신자는 지금도 내주하는 성령님과 함께 세상과 사탄 앞에서 얼마든지 왕노릇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상황과 징조가 어떠할지, 적 그리스도의 핍박이 얼마나 심할지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정확히 깨달아서 실제 삶에서 누리고 또 이웃에 나눠주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예언의 말씀을 순종하는 문제도 의외로 간단한데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모습 그대로 따라 살면 됩니다.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모르는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굳이 따로 배울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천국 복음부터 가르쳤고 그 복음이 잘 받아들여지도록 그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셨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하고 때로 사악한 관습과 규정에 따라 소외되어서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참사랑으로 섬기며 희락의 기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즉, 부활 소망을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지 당신의 삶으로 다 보여주었습니다. 요컨대 신자더러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든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것처럼 살라는 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입니다.
(2/19/2023)
안그래도 저도 며칠 전 계시록을 필사하며 궁금한 것들이 많았었는데 감사하게도 칼럼이 연재되어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