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9-13)
한 택시 기사의 기도
제가 아는 분 중에 서울에서 택시회사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회사 내에 신우회를 조직해서 아침마다 사장이 주재하는 간단한 예배와 기도 모임을 한 후 일과를 시작했다. 하루는 그 중에 어떤 기사더러 대표 기도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오늘도 무사고로 지켜 주시고 회사가 발전하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기도를 잘 해 놓고는 끝날 때쯤 되었다 싶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 끝”하고 기도를 마쳤다고 한다.
그 사람이 교회 생활도 전혀 해보지도 않고 단지 사장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에 그 모임에 참여해 기독교 신자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마쳐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같다.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한 마디로 당황 되었지만 웃을 수도 없고 당장 그 잘못을 지적해주려니 그 자신이 무안할까 그럴 수 도 없어 난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쉽게 웃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신자들 가운데도 평소 기도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는 그 엄청난 의미와 권세와 은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아멘”의 뜻이라도 제대로 알고 기도하는 자는 얼마나 될까? 만약에 그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는 반드시 끝이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거나,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거니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상 끝”하고 마친 그 택시기사와 다를 바 하나 없지 않겠는가?
본문의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대예배를 포함하여 공식 비공식 모임을 끝낼 때에 인도자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모임을 마치겠다고 할 때 참석자가 그 구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줄줄 외우기만 한다면 기도문의 길이와 내용에 상관 없이 이것 또한 “이상 끝”하고 마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상 끝’ 식의 기도를 하지 않기 위해선 주기도문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주기도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아버지에게 하는 무리한 요구
흔히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적 패턴을 제시해 가르쳤기에 신자도 그렇게 따라야 한다고 단순하게 이해한다. 그 말도 맞다.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도 좀 따져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는가? 9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라고 했듯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으로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10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길 소원하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자기의 뜻을 아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 순종하겠다는 헌신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 다음에 11절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는 현실적 필요를 간구하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12절에선 이웃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라고 하셨다. 13절에선 시험과 악에서 건짐에 관해 말씀하셨다. 세상의 모든 위험과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인도해주시길 구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과 권세를 돌려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먼저 하나님께 경배한 후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기의 필요를 간구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의 영적인 성숙과 평강을 구한 후에 찬양으로 마 치되 그 전부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심지어 순서마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아가 어떤 기도 제목이 오래도록 응답이 잘 안 되면 내가 기도할 때에 회개를 빠트렸나, 이웃 사랑을 하지 않았나 싶어 일부러 있는 죄 없는 죄 찾아서 아주 작은 죄라도 과장해서 회개하고픈 마음이 간혹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고 무엇을 기도하며 어떻게 마쳐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또 과연 이런 것까지 기도해야 되는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고 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회개할 수 없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만 정신 없이 쏟아 놓고 갈 때도 있다. 그럼 그런 기도는 전부 잘못되었고 해선 안 되며 할 필요도 없는 기도인가? 그렇지 않다.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이자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 아뢰면 다 기도다. 또 그렇게 아뢰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9절에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라고 하셨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목소리를 깔아 거룩하게 하나님을 부르거나 이 구절을 그대로 따라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라면 아뢸 말 못 아뢸 말 없이 무엇이든 말 할 수 있듯이, 또 어떤 때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알아도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자식이듯이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것을 확신하고 지금 바로 아버지한테 아뢴다는 태도로 온전한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스파게티를 못 먹는 어린이
주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시게 된 배경은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의 잘못을 본 받지 말라는 뜻이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장소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동기의 순수성이었다. 이방인들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뜻은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나 숫자를 세지 않고 깊이나 무게를 재시기 때문이다. 기도자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애통하며 가난한 심정으로 갈급하게 기도하는 것을 보신다. 이방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에 대고 치성과 열심을 바치면 더 얻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만을 보신다.
예수님이 저들의 기도하는 습관과 방식을 따르지 말라고 하시면서 또 다시 새로운 패턴을 제시해서 이대로만 해야 한다고 하실 리는 없다. 기도는 기도자의 믿음의 내용과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식으로 기도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기도만 하면 된다. 일단 하면 된다. 무조건 무릎부터 꿇고 봐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온갖 의심과 불만과 남을 저주하고 욕하는 마음으로 나와도 된다. 우리 속의 더럽고 추한 것을 포함해 모든 것들을 나와 똑 같은 죄인이라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는 털어 놓을 수 없기에 하나님 앞에 전부 토설(吐泄)해 내는 것이 기도다.
오래 전에 아주 가난한 목사님의 아이들을 우리 집에 데려다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한 번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스파게티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너무 가난해 스파게티를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고기 볶은 것은 제쳐 두고 면만 골라 먹었는데 애처롭게도 고기도 거의 먹은 적이 없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기도 고기를 먹어 본 자가 잘 먹는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기도를 해 본 사람이 잘 한다. 자꾸 하다 보니 떨리지 않고 크게 생각할 것도 없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은 주문(呪文)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응답을 받아 본 자는 그 은혜가 얼마나 세밀하고 빈틈이 없으시고 풍성한지 안다. 우리의 기대와 생각과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그 사랑과 능력이 너무나 귀해 자꾸 맛 보고 싶어진다.
역으로 고기를 먹어 보지 못한 자는 그 아이들처럼 어지간히 맛있는 고기를 줘도 못 먹는다. 하나님을 일대일로 체험하지 못한 자들은 기도를 통해 부어주시는 그 넘치는 사랑을 알지 못한다. 고기는 먹지 않고 겨우 면만 먹듯이 그저 생활에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쩌다 한 번 기도하는 수준에 그친다. 신앙 생활이 항상 무미 건조하고 메마르다. 더 큰 은혜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수준일까 상상도 못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또 찾는 것이 혹시라도 부족하거나 공복감이 생겨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약속하셨다. 자꾸 어려운 일이 생겨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요, 힘든 일이 생길 때만 주님 앞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그 기쁨을 느낄수록 날마다 새롭게 주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주 미세한 일에서부터 전 우주의 광대한 일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매일 매 순간 절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심연에 그저 푹 잠기길 원하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재미와 위로와 능력이 더 이상 기도하는 자에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도는 신자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준다.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가장 빠른 방법이다. 가장 편한 길이다. 가장 효과적이며 강력한 수단이다. 먼 장래까지 온전히 보장할 수 있는 대비다. 기도는 신자의 유일한 위로요 능력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그 만의 독특한 방법을 통해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에 중독 되어라.
그래서 좀 표현이 이상하고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신자는 기도에 중독이 되어야 한다. 술이나 마약에 중독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무슨 수를 써도 해야 한다. 다른 것을 다 희생하고서라도 한다. 마누라 결혼 반지를 팔거나 집 문서를 잡혀서라도 히로뽕을 맞아야 한다. 대신에 그것을 하지 못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상실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다른 열 일을 제껴두고라도 해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그 시간만은 어떤 다른 일로도 방해 받지 말아라는 것이다. 도저히 바빠서 그것 마저 할 시간이 없다면 일하면서라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재미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그 시간이 가장 귀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생활이 뒤틀려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인격과 영혼이 좀이 들고 녹이 쓸어 썩어져 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의 궁핍함과 갈급함이 끊이지 않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신자가 기도하지 않은 데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면 아직 스파게티도 먹어 보지 못했거나 스파게티를 먹으면서도 정작 먹어야 할 맛있는 양념과 고기를 버리고 매번 먹던 면만 먹는 것과 같다. 그저 주일 예배 참석하는 것만으로 신자가 찾아 먹을 것의 전부인양 한다면 얼마나 가난한 신앙인가? 스스로 맛 있어 찾아 먹는 것이 아니라 안 죽기 위해 삼시 세끼 그저 맨 밥으로 때우는 것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기도의 중독은 세상 쾌락의 중독과는 다르다. 도박이나 마약 중독의 경우 인간의 의지력의 한계를 넘어선다. 인간이 이겨내지 못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강제력을 동원하는 법은 그 어느 경우에도 없다. 신자가 수긍하고 마음 문을 열고 항복하며 헌신하지 않으면 기도에 중독되지 않는다. 정승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기도의 그 풍성한 은혜도 본인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그 맛을 조금치도 알 수 없다.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에 어떠한 패턴도 없다는 뜻이다. 회개 하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순서를 빠트렸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근거는 훨씬 다른 데에 있다.
그럼에도 신자가 기도하면서 항상 갖는 불만과 의심은 왜 이 기도에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시지 않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다. 기도하면서도 응답에 자신이 없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근거를 확실히 몰라서 그렇다. 무엇인가 응답이 잘 될 수 있는 보장이 없는가 찾는다. 회개하고 경배하는 순서를 빠트리지 않으려 애를 쓴다. 기도 잘 하는 법,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는 기도의 비결 같은 책을 읽고 따라 한다. 심지어 차라리 절을 한 만 번 정도 하면 보상으로 복을 주시면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의 기도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찾으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근거다. 무엇이 다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알라신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금강보살님이나 모하멧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기독교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어서 그런 것인가?
로마서 8:31,32절로 가보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저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 분의 사랑만이 우리 기도 응답의 근거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아니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는데도 우리가 그 분의 사랑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에서 칭찬을 받는 의인이든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욕을 들어먹는 악한이든, 이방인들처럼 치성과 열심을 동원해 중언부언 기도하든 혹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내 기도가 쑥스러워 간단하게 하고 말든, 회개를 했든 감사를 생략 했든, 주기도문을 단순히 줄줄 외우든 말든, 어떤 기도의 패턴을 찾아 따라 하든 말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가 얼마나 갈급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해 하는가, 진심으로 힘을 다해 기도하는가, 신앙적 실력이 얼마나 높은가, 인격이 고상하고 생각이 깊든, 봉사와 헌금과 전도를 열심히 하든, 나아가 우리의 성숙한 믿음 조차도 기도 응답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는 유일한 이유는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너를 알고 너를 택하여 내 아들의 피로 씻었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너를 지켜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 말고는 기도 응답의 근거는 없다.
우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했으므로, 예수를 믿어 보기로 결심했으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그 한량 없는 사랑에 항복했기에 그 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물론 초신자가 교회 나와 아무 것도 잘 모를 때에 “이상 끝”하고 기도했더라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의 마음이 터져나갈 듯 기쁘고 천국에선 잔치가 벌어진다. 또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를 하고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내용이 들어가는 기도는 정말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포함하여 어떠한 기도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유일한 기본 원리는 바로 이것 뿐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다”
솔직히 우리의 우리 된 존재, 삶, 인격, 내면의 실제 모습을 되돌아 볼 때에 하나님에게 무엇이라도 요구할만한 근거가 있는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잘 아니까 완전히 속을 까뒤집어 본다면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고 감히 하나님께 요구할 만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아무도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 없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철이 없는 사람이거나 가장 뻔뻔한 위선자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는 고백이 없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 아니고는 내가 신자가 될 수 없었다는 진정한 항복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할 근거도 이유도 전혀 없다. 나아가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도 못했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던 자였을 것이다. 기도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는 아직도 자꾸만 기도 응답의 근거를 내 쪽에서 찾으려 하니까 응답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기껏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쥐꼬리 만한 헌금 조금 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서 말이다. 우리 기도의 응답은 오직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 뿐이다.
주님을 아는가? 사랑하는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91:14)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쪽에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실 근거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되는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가 허사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고 아는 정도가 아니다. 불신자도 다 그렇게 믿고 심지어 중언부언일지라도 기도한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목사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자리에 직접 임재하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직접 일대일로 대면해 질문 한다고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라도 진심으로 한 번 대답해 보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확신이 있는가? 그 분이 당신을 모태에 잉태하기 전부터 택하시고 지으시고 지켜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믿는가? 그 분이 단 한 번도 당신을 떠난 적이 없으며 죄악 중에 있을 때도 지켜 보고 계셨고 계속해서 무한하신 인내로 참으셨다가 십자가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아는가? 그래서 그 분의 영으로 당신의 영혼이 씻기고 옛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음을 믿는가? 그래서 이제는 그 분의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로 당신을 낮의 해와 밤의 달에서 지켜 주실 것을 믿는가? 또 세상과는 전혀 다른 그 분만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당신 평생의 출입에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을 믿는가?
이 질문으로 끝이 아니다. 당신이 그 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분이 당신을 더 정확히 알고 계시고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의 이름을 그 분의 손 바닥에 새긴 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까지 졸지 않으시고 머리카락의 수효도 세신 바 되신 것을 믿는가? 당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과 뜻 가운데 있어서 반드시 당신을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가? 지금은 비록 후패하고 여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그분의 빛과 생명과 거룩과 의로 덧입혀져 신령한 존재로 변화 되어질 것을 믿는가? 당신의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 당신의 일을 이루고 그 분의 왕국을 건설하는 초석으로 쓰여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분명하게 속으로 아멘하는가? 아멘이 무슨 뜻인가? 진실로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는 뜻이지 않는가? 단 한 개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알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질문이 많다고 생각하는가? 가능한 줄일 만큼 줄여서 핵심되는 것만 질문한 것인데도 그 전부에 아멘이 힘차게 나오지 않는다면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말라. 신자가 아니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신자이며 구원이 취소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인해 당신을 싫어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겨우 이 정도인데 우리 쪽에서 무슨 기도 응답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도 없다.
눈물로 기도를 마쳐라.
주기도문은 절대 단순하게 기도의 모범 답안으로 그쳐선 안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모범 답안의 기도는 따로 없다. 주 예수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문은 따로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우리의 마음은 따로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항복하는 마음이다. 주기도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무릎 꿇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심령에 오직 그 마음이 있는가만 보신다.
그리고 그 마음만 있다면 기도할 때의 우리의 형편과 사정이 어떤 모습이라도 관념하지 않으신다. 설사 시험에 빠져 있고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이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마치는 이유다.
우리가 설사 기도할 때에 회개를 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 경배하는 순서를 빠트렸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 신자의 모든 기도를 하나 흘리지 않고 다 받으신다. 의심과 불만이 들어가 있어도 받으신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 하는 기도라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우리의 기도를 마치는 그 순간, 심지어 교회를 십년을 다녀도 오늘도 하나님의 뜻은 묻지도 않고 그저 내 급한 사정만 쉴 새 없이 울부짖고 나오는 그 부끄러운 모습을 또 재현했다 할지라도 그것 마저도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신다.
그래서 진정으로 기도한 신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는 그 마침만으로도 영혼 깊숙한 곳에서 눈물이 흐르게 된다. 그 눈물을 한 번이라도 흘려 본 자는 자꾸 기도를 하게 된다. 저절로 기도 중독자가 되어 간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이 기독교인들의 예배나 모임을 거룩하고도 엄숙하게 마치게 해주는 장식품으로 전락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내용 한절 한절을 욀 때 마다 가슴 속에서 감격의 생수가 터져 나와야 한다. 세상에선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넘쳐야 한다.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자가 기도를 하는 바로 그 순간 천지를 지으신 그 분이 나를 아시고 내 기도를 듣고 있으며 더 좋고 유익한 것으로 주실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데 누가 나를 대적하겠는가?
신자의 기도의 참 된 마침표는 눈물이다. 아직 슬프거나 힘든 일이 끝이 안 나 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간섭하심이 너무나 세밀하고 인자하며 넘치도록 풍성하여 감사의 눈물을 뿌리는 것이다. 아직 문제는 해결이 안 되었을 수 있고 염려거리는 여전히 앞으로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외울 줄 아는 신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6:10)이기 때문에 오직 기도를 마칠 때에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눈물을 바칠 뿐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아멘!
마태 복음 강해 (69) 7/13/2003
무었보다 주님주신기도문 강해를 수없이 듣고 공부를했지만 이렇게 내 마음에 부딛치기는 처음인것같아
열심을 다해 배우고 실천하겠습니다, 강사님 깊은영성이 부럽습니다, 건강하시구요 복음의 씨 뿌리는 농군되어 하나님 기뻐 거두시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