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6) 9/21/2003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주기도문의 구조
주기도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을 들겠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혹시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질 것이 없으며 모두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 자체를 설명해 놓은 구절과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 구절로 나눠진다. 성경 66권 가운데 기독교를 가장 잘 설명한 책 한 권을 들라면 로마서를 꼽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문 가운데 한 구절을 꼽아 보라는 뜻은 기도의 본질, 내용, 근거, 이유 등 기독교인의 기도 성격을 한 마디로 가장 잘 표현해주는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의 구조는 알다시피 9절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해, 13절 말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하나님 경배하는 것으로 마친다. 신자들도 기도할 때에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찬양과 경배는 사실 기도자 본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 믿음의 크기, 은혜를 체험한 종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기도할 당시의 형편에 따라 감정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진심으로 항복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 때도 있지만 실망과 의심과 심지어 불신앙으로 나와 기도할 때가 더 많다.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이 응답이 잘 된다고 가식적으로 찬양한다면 더 문제다. 차라리 찬양하지 않더라도 의심과 불평을 지닌 체 있는 그대로의 심경으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대화라는 측면에서 찬양으로 시작하고 경배로 마치는 것은 인사말과 마침말에 해당된다. 신자 모두 필수적으로 항상 똑 같이 할 필요는 없다. 기도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이것, 저것들을 대신 해 달라고 자기 소원을 아뢰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신자의 기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정작 간구해야 할 내용은 10절에서 13절 중반 까지다.
그렇다면 이제 기도할 내용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 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은 어느 부분에 나오는가? 맨 처음이다. 중간이나 마지막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도에서 만은 해당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도할 때에 가장 급한 것, 가장 소원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을 제일 먼저 아뢴다. 당장 암에 걸려 죽게 되었고 그래서 하고 있는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잘 안되고 또 이웃 집 사람이 중병에 걸려 걱정된다 치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기도며 또 그것을 언제 아뢰겠는가?
나라의 구성 3 요소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 특별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만 했던 기도 원리의 핵심은 첫 구절 “나라이 임하옵시며”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천사처럼 이 자리에 날라와 암을 낫게 해 달라는 말인가?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가장 오래 전에 번역된 것이라 고어체, 한자체가 많아 요즘 사람들에게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간혹 있다.
이 구절은 영어로 보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단 두 마디다. “Kingdom come” -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소원합니다라는 뜻이다. 한글판에도 현대인의 성경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하소서”, 한글 킹제임스 판에는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라고 알기 쉽게 번역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신자가 암이 낫게 해달라고 울부짖듯이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가장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할 내용은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죽고 난 후에만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 세계 안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지고 삶 속에서 천국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럼 이 땅에 실현된 천국은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천국이라면 어떤 모습을 머리 속에 떠 올리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화가 고갱과 타히티 섬일 것이다. 시원한 야자수 그늘 아래서 툭 트인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 하는 일 없이 과일 주스를 마셔가며 가만히 쉬는 모습이다. 의식주 문제에 하등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이다.
그래서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되려면 먹고 마시는 것이 지금보다 더 풍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의식주 상태에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까 천국이 아직 안 된 것이다. 월 2-3천불 수입으로는 평생 가도 요 모양 요 꼴을 면할 재간이 없으니까 월 수입이 최하 7-8천불이 되면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솔직히 우리 모두의 기도에 뜨겁게 시작하는 첫 마디가 돈 달라는 것 아닌가? 또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과 구실만 다르지 전부 그 내용이다.
하나님 나라는 남 태평양 휴양지 섬에 여름 휴가 가는 모습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다. 그리고 한 나라가 성립되려면 국토, 주권, 백성3가지 구성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토는 그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리적인 범위를 말한다. 알라스카가 중간에 카나다로 미국 본토와 분리되어 있지만 미연방정부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여전히 미국의 영토다. 한국은 남북한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발동되는 부분은 한반도의 남쪽 반이다. 나라가 성립되는 가장 기본은 영토가 있어야 한다.
주권은 그 나라를 통치하는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며 누가 관리하는 가의 문제다. 왕이 최고 권력을 갖고 혼자서 통치하는 나라는 왕국이다. 대신에 민주 공화국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현실적으로는 입법, 행정, 사법부라는 정부 체제가 그 권력을 대신 집행하지만 분명히 나라의 통치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미국에 태어나지 않고 이민 와서도 이민법 규정의 자격에 합당하며 미국 헌법대로 따르겠다고 하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듯이 백성은 그 나라의 영토 안에서 그 나라가 규정하는 주권의 통치대로 기꺼이 따르기로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상의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나라가 성립되지 않는다. 정신 병원에 가보면 자칭 왕, 대통령 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영토나 주권이나 백성 중 하나도 없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려면 이 세가지 구성 요소에 비추어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하나님의 통치권이 발휘 되는 지리적 영역이 생기게 해 주시고 더 뻗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하나님께만 모든 주권이 있으며 그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해 주시옵소서. 사단과 죄악이 물러가게 하시옵소서. 셋째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백성이 생기게 하시고 방방곳곳에 땅 끝까지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이 불려지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사실은 첫째와 둘째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신자가 구태여 절실하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영토를 따져 볼 때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닿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나님 만이 전 우주의 주인이시며 전지전능한 권세는 어디라도 미친다.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도 계신다.
또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이는 하늘 아래 땅 위에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다. 세상 만사의 주권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하나님 나라를 이룰 영토와 주권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면 무엇이 부족하고 문제인가? 나머지 세 번째 국가 구성 요소인 국민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되지 못했던 이유이자,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울 땅과 주권은 확보되어졌다. 특별히 예수님 이후에는 십자가 보혈의 권세로 세상 나라의 임금 사단을 물리쳐 내었고, 천국의 헌법인 성경이 완비 되었으며, 그 나라를 다스릴 힘으로 성령님까지 와 계신데도 왜 천국이 요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백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기꺼이 소원하는 백성들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더러 바로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기도하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핑계를 대는가?
신자의 생각에 자기의 가정, 직장과 현 사회가 아직 천국에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의 삶과 인생과 존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고 믿는 원인을 어디에 두는가? 먹고 마시는 부분이 부족한데 하나님이 충분히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천국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를 하나님 쪽에 둔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없어서 천국이 실현 안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 쪽에선 국토와 주권 모든 것을 준비 해 놓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고 마실 것을 이미 넘치도록 주었다. 태초부터 영원토록 전혀 부족하지 않게 주셨다.
미국에서 버리는 음식으로 전 아프리카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 버리는 음식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을 넘어선 지가 이미 오래다. 인류 사회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인구의 10배 정도가 살면 적합한 크기의 땅이라고 한다. 우리가 복잡한 LA에서 살아서 실감을 잘 하지 못하지만 미국은 아직 9배나 여유가 더 있다.
하나님이 100% 다 주신 정도가 아니라 1000%를 주셨다. 하나님이 부족하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서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차지하려니 갈등과 분쟁이 끊일 새가 없을 뿐이다. 사람들이 자기들 끼리 치고 받고 하느라 천국을 실현하지 못하면서 기도는 하나님이 안 해 주셔서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 쪽에서 이미 천국을 다 만들어 놓았는데도 그 나라에 들어 와 살 백성이 없다. 대신에 빵 한 조각을 두고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아귀다툼 하듯이 싸운다. 하나님이 1,000%를 주신 것은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도 남아 돌 정도로 준 것이다. 사람 열명에 빵 100개를 준 데도 싸운다면 바로 그곳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더러 왜 천국을 실현시켜 주지 않느냐, 천국은 어디 있는가 불평이다.
주일에 어느 목사님이 천국의 영광에 대해 설교했다. 한 교인이 감동을 받아 목사님을 찾아가 “어제 천국의 영광에 관한 좋은 설교를 해주셔서 저도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어디 있는지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다. 목사님이 “마침 정말 좋은 천국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저 산 꼭대기에 가면 허술한 판자 집이 한 채 있는데 아주 가난한 우리 교인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부인이 병을 앓고 있어요. 거기 가서 필요한 것을 주고 이렇게 말해보세요. .자매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그리고 난 뒤 성경을 펴서 시편 23편을 읽어드린 후 그 자매님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해 드리세요. 그렇게 해서도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제가 대신 보상해드리지요.” 다음날 그는 목사님에게 와서 말했다. “목사님. 천국을 보았어요. 제가 시편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 그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는 15분 동안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 분의 영광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녀 왔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1장으로 가보자. “여호와께서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하나님이 무엇을 한탄하고 계신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백성이 없다고 한다. 그 주인을 알아 보는 나귀나 소보다 못하다고 하셨다. 그것도 누구더러 그런 한탄을 하시는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백성보고 한탄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크나 큰 기적으로 차지하게 해서 영토를 주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명시 해 놓은 헌법인 율법을 베푸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하셨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라고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그런데도 그들마저 딴 짓 하느라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소명을 주시기로 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그 땅에 다시 나의 왕국을 건설해야겠는데 도대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백성이 없으니 누가 내 대신 가서 나를 알게 하고 가르치겠는가? 누가 그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나에게 울부짖을 것인가? 그 애끓는 하나님의 탄식어린 부르심을 들은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 천국이 실현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천국은 이미 도래해 있는 데 그 나라 국민이 없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풍성해져 내 삶을 천국처럼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 되는 데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 나라 주민 번호 1호로 등록 하겠습니다”는 소원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것도 암이 낫게 해 달라고 생명 걸고 울부짖듯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먼저 뜨겁게 말이다. 다른 모든 종교와 달리 기독교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겠다고 자원하는 것이다.
정신 병원에서 왕 노릇 하는 신자들
그런데 지금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있는가 없는가? 흘러 넘친다. 한국만 해도 전 인구의 1/4이 기독교 신자다. 가는 곳곳마다 붉은 십자가가 달렸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하나님의 왕국처럼 되어졌는가? 구태여 한국 전체를 볼 것도 없이 신자의 가정과 직장이 천국처럼 보이는가? 아니 신자의 개인적인 삶과 그 인생이 천국에서 사는 것 같은가? 전혀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신자들이 몸은 교회 출석해 있어도 마음은 정신 병원에서 혼자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자처럼 혼자 머리 속에 자기 나라의 국토 경계를 정하고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스리려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은 많지만 대부분이 “이 번에 꼭 이것, 저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주시되 반드시 이 때까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표현만 존대어를 사용했다 뿐이지 내용은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은 종이다. 자기 머리 속에 영토와 주권의 경계를 다 정해 놓았다. 자기 나라에서 스스로 왕 노릇 하고 있다. 신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 나라의 백성이 된 꼴이다.
제가 여러분의 믿음 수준을 무시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이 지적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 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복을 받으려 제물만 바치는 자는 성전 마당만 밟았다고 한다. 자기가 이해하고 정해 놓은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이 그곳 까지 밖에 미치지 않은 것이다. 아직 하나님 나라는 입구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는 기도의 순서를 바꾸라는 말이다. 신자들이 통상적으로 내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기도를 제일 먼저 했고 그 다음에 내가 다니는 회사도 번창하게 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간혹 생각이 나면 힘들어 하는 이웃집도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이 순서였다. 이것을 완전히 반대로 하라는 말이다.
신자는 산 위의 판자 집의 아파 누운 자매를 위한 기도를 가장 먼저 해야 한다. 천국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뜨겁게 정말 자기 암을 낫게 해달라는 그런 열심과 정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자기 회사를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웃을 위하는 기도가 자기를 위한 기도를 싫컷 해 놓고 끝 부분에 마지 못해 갖다 부치는 장식품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기도를 정말 진정으로 뜨겁게 기도했다면 사실 세 번째 자신을 위한 기도는 안 해도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알아서 다 채워 주신다.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고 섬기기만 해도 먹고 마시는 것은 남아 돌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신자더러 “나라이 임하옵시며” 바로 앞에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다. 이어 나오는 구절에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는가? 나 보다 우리를 위한 기도를, 또 내 뜻 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를 가장 먼저 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기도할 내용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진지한 질문을 해 보자.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당장 기도한다면 어떤 제목을 가장 먼저, 가장 시급하게, 가장 뜨겁게 기도할 것인가? 일부러 고상한 기도 제목을 찾거나 가장할 필요 없다. 정말 혼자 속으로 솔직하게 생각해 보라.
돈을 더 달라는 기도인가? 하셔야 한다. 나쁜 것이 아니다. 집을 사게 해달라는 소원이 있는가? 뜨겁게 간구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집을 주시기 원하신다. 몇 가지 떠오르는 기도 제목들이 전부 먹고 마시는 것에 국한된 것 뿐인가? 그것대로 좋다. 사람은 너무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무능한 존재다. 또 당장에 그런 급한 일이 없이는 어떻게 기도할 엄두라도 내겠는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데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다시 점검해 보라. 도저히 돈이 없어 정말로 너무 힘들어 죽을 지경인가? 눈물과 한숨마저 완전히 말라 붙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는커녕 하나님의 살아 계심 조차 의심하게 되는가? 그 의심이 절대 불신앙도 죄도 아니다. 대신에 그런 마음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다 털어 놓되 천국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소원을 갖고 아뢰어 보라. 말하자면 돈 달라고만 떼를 쓰지 말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보기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천국의 맛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울부짖어 보라.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능력과 열심으로 이뤄지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영향력을 발휘하면 바로 그 곳이 천국이다. 내게 돈을 더 달라는 소원과 기도 안에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와 목적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가? 돈을 버는 방법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작동되는가?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운 수단으로만 벌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그래서 그 번 돈 전부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감사가 있는가? 이제 그 하나님의 돈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평하고 정의롭게 선한 곳에 사용할 것인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증명 되며 주위에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사가 있는가? 그렇다면 밀리언, 빌리언 달라도 좋다. 얼마든지 부르짖어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소원한다면 무엇이든 구해도 된다. 하나님이 우리 곳간에 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늘에서 부어주신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속에 내 욕심과 계획 뿐이면 그곳은 나의 왕국이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신자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병원에 있는 것이다.
기도해서 이전 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재미를 두고 천국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신자의 개인적 욕심의 기도를 하나님이 알면서도 처음 몇 번은 속는 척 해 주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인간 만사의 주권이 하나님 당신에게만 있음을 알게 해 주시기 원해서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는 뜻이다. 모든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은혜와 능력과 위로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확실히 알게 하고 그 맛을 체험케 해 주셔서 오직 하나님의 참 사랑만을 소원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것을 천국이라고 착각한다면 바로 그 만한 지옥이 따로 없다. 하나님의 뜻이 발휘 되는 영역 밖에서라면 아무리 기도하고 있더라도 바로 그곳이 지옥이다. 불바다에 귀신이 설치는 곳만 지옥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삶과 인생은 괴로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사랑을 진정으로 맛을 보았다면, 이 땅에서 천국의 체험을 했다면 그 은혜를 주위에 나눠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기도의 순서가 바뀌게 된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 알고 스스로 찾아 간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의무감만으로 그저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핑계 되지는 않는다. 암을 낫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그런 열정으로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평생을 두고 빌게 된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기도이자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참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