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조회 수 4338 추천 수 252 2004.08.11 14:22:02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질문]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전도를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게 됩니다. 알고는 있지만 핵심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통쾌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답변]

전도의 미련한 것

꾝 예수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수도 없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문자께서도 인정하셨듯이 신자라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불신자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제대로 믿지 않고 예수님께 돌아 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선택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고는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는 믿을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고전2:11)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전도하다 보면 이렇게도 간단하고 엄연한 십자가의 진리를 왜 못 알아 먹는가 참으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심이 지나치다 보면 결국 논쟁으로 흐르고 심지어 나중에는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가려고 예정 되어 있는가’ 아니면 ‘지옥 가도 싸다’라는 심정까지 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도 이전에 전도 받았을 때에 그 보다 더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절대 이성이나 지성이 열등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이유는 짐작하시겠지만 질문자께서 기대하시는 통쾌한(?) 대답은 어느 누구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단번에 먹힐 만한 시원한 설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신자가 염두에 두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말의 지혜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고전1:17)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 딱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님과 사단입니다. 전도자는 단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비록 전도의 전 과정이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이뤄지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에 동원하길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질문자께서는 기독교 교리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복음의 설명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가 앞으로 설명 드리는 것에 공감을 하시고 그대로 불신자에게 전한다고 해서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반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은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오직 전도할 대상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눈물로 끌어 안고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소원하며 계속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 전하시고 전하면서 기도하고 전하고 돌아 온 후에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의 영웅 조지 뮐러의 경우 평생에 전도 대상자 중 친구 세 명이 끝내 복음을 거부했지만 뮐러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그들도 주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기에 앞서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종교가 주는 두 가지 유익  

사람들이 왜 꼭 예수여야 하는가라고 반발하는 이유는 전도자나 피전도자나 종교와 구원에 관한 개념이 정확하게 정리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유익은 크게 나눠 두 가지입니다. 현실에서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고 마음의 평강을 얻으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과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도 유익한 점이 많고 실제 삶에서도 열매가 열립니다. 기도의 응답도 나타나고 심지어 신령한 기적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힘이 사실은 사단에게서 온 것입니다만 본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이 그들의 영혼을 자기 노예로 삼아 진리에 대해 눈과 귀를 완전히 막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당신이 믿는 종교의 배후에 사단이 있고 당신은 사단의 종이라고 해 봐야 반발만 더 살 뿐입니다.

단지 착하게 살고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는 면에서 자기가 택한 종교를 통해 가시적 효과를 분명히 얻고 심지어 기독교 신자보다 더 마음이 고상해지고 선하게 사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자는 자기가 그 종교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충분히 이루었으니 기독교 진리에 대해 더 완강하게 외면하게 됩니다. 선하게 살고 마음의 평강을 얻는 결과적 모습은 같을지 몰라도 실제 그 내면으로는 사단의 종 된 사슬에서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꼭 전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죽음 이후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예수님과 상관 없이 죄 안 짓고 선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이땅에서의 자기 인생 전체가 사단의 종이 되어 있음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온 것에 대한 영원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확신은 전혀 없이 그 일생이 완전한 허비로 끝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저들은 이런 점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저들로선 유익한 열매를 이미 맺었고 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롬1:17)는 말씀대로 복음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는 이런 원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지정의 범위 내에선 역사하지 않고 오직 영혼이 새롭게 되어야만 복음이 복음으로서 진리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주는 두 번째 유익은 죽음 이후 심판대 앞에서 구원을 얻는 부분입니다. 구원이란 이 땅에서 지은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무엇인지 왜 인간이 죄를 짓는지 먼저 분석 되어야만 어떤 구원의 길이 올바른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꼭 예수여야 한다는 것에 수긍하지 못합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자도 죄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안 서 있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라 논쟁으로 흐르고 맙니다. 전도할 때에 기독교 교리부터 들이밀기보다는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의견을 먼저 나누어야 합니다.

죄의 성격과 구원

불신자들은 죄를 아주 단순하게 정의합니다. 도덕, 상식, 관습, 제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만 죄로 봅니다. 살인, 간음, 도적, 폭력, 거짓말 같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입니다. 물론 간혹 사려 깊은 사람은 말로 하는 죄, 나쁜 생각을 품는 것도 죄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5:22) 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하신 산상수훈의 말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죄에 대한 규정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는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인들도 말과 마음으로 하는 죄도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죄가 생기는 경로입니다. 기독교 밖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사람의 상태는 선하거나 최소한 그 죄를 통제하여 안 지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와 소원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이 스스로 수행하고 노력하여 죄를 짓는 행동 (생각으로 짓는 죄도 사실은 사고활동의 영역이므로 행동에 속합니다)을 가능한 절제하여야 합니다. 당연히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입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1,18) 기독교에선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된 행동을 한다고 봅니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의 상태가 완전히 악하며 죄를 안 짓도록 통제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안 짓고자 하는 소원은 사람마다 정도의 크기는 달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창조 된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인간 영혼 속에 양심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의 의지가 사단과 세상 쪽으로만 편향적으로 왜곡되어 그 영혼이 부패되었기 때문에 죄를 안 지으려는 소원만으로는 죄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요 사단의 종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이미 죄인 된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와 소원과는 관계 없이 죄를 짓는다면 구원은 어떻게 해야 이뤄질 수 있습니까? 당연히 죄인 된 인간의 전 존재, 전 인격, 전 영혼을 먼저 바꾸어야만 합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자신이 죄의 종이 된 줄 알지도 못하고 인정도 하지 않는 인간 스스로는 절대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 주어야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자 가장 신령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진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 번 태어난 자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해 구원을 얻는 데 실패 했습니다. 주님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7,8)고 했습니다.

또 최고 자선가요 율법을 어긴 적이 없는 한 부자 관원도 역시 그 영혼이 부패된 죄인인지라 세상 재물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시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세상 속의 착한 사람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 때도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죄인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결국 복음이 복음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전도를 받는 본인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자인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몇 가지 허물과 범죄(crime)를 저지른 일반적 의미에서의 죄인 혹은  십계명의 5계명이하 인간관계의 계명을 어긴 범인(Criminal)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존재가 선하고 거룩한 것과는 거리가 먼 죄인(Sinner)임을 고백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전자로만 인정하면 자신이 자신을 고쳐  나가는 자기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라야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절대 타자에 의한 구원의 필요성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복음의 광채가 그 영혼에 비추일 조그만 틈새라도 열린 것입니다.

죄의 본질

그럼 이제 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 되었으며 그 죄를 구원하는데 꼭 예수가 연결되어야 하는 문제를 살펴야 할 차례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고 해서 성격이 굉장히 포악해졌고 생각하는 것마다 악하고 더러운 것을 계획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참 인간으로 반드시 되어 있어야 할 인간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따로 계시기에 인간이 반드시 서 있어야 할 자리는 그 분의 피조물의 위치인데 이를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의 원어가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비껴 간 것을 뜻하듯이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이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해져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을 찾는 자를 비방하는 자로 변한 것(롬1장)이 죄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영혼 속에서 제거하면 그 결과는 오직 인간만이 이땅의 최고 주인이 되며  모든 일을 스스로 마음먹은 대로 하려고 합니다. 절대선(絶對善)인 하나님이라는 기준이 인간 사회에서 사라지면 자연히 인간끼리의 경쟁이 발생합니다. 십계명의 5계명부터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죄들인 불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남의 것을 탐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죄는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상실되니까 서로 자기 혼자 편하게 살려는 욕심에서 생기는 범죄(crime)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이 상실된 상태가 죄(sin)의 본질이며 윤리적 죄는 그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내용(1-4계명)이 윤리적 죄를 멀리하라는 명령에 앞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어떤 인간이라도 일신상의 안위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이 앞서므로 윤리적으로도 절대 선하게 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리 잡지 않은 인간은 자기를 앞세우는 자랑이 가장 먼저 나오고 또 그런 자들이 서로 만나면 자연히 경쟁과 분쟁이 생기기 때문에 세상도 같이 타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또 그렇게 사는 삶의 태도가 전적 부패의 실상입니다. 인간 영혼 안에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이 다시 우리 영혼을 주관하지 않고는 이 부패상을 고칠 수 없습니다.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지금껏 복음을 설명할 때 신자들이 어떻게 해 왔습니까? “인간의 죄책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며 선행과 공적으로는 완전한 의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그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 은혜에 의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우리로선 복음의 진리를 최대한 압축 시켜 다 설명했습니다만 받아 들이는 쪽에선 인간이 자기 죄를 뜯어 고칠 수 있는데도 인간 쪽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구원을 준다고 하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나아가 “종교는 다 비슷한데 꼭 서양 종교를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다 짊어졌다고 하고 예수 외는 구원이 없다고 우기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더 죄를 많이 짓고도 자기들 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고 반발합니다. 아무 공적 없이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만 너무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 저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종교적으로만 인식하고 이해 시키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인간이 십자가 원리를 종교적으로 판단하여 그 합리성을 인정하고 기독교를 선택하여 믿는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여전히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생각대로 행한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의 구원 진리만큼은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 인간의 본질 전체가 바뀌어지는 대 변혁이자 인생에 대한 모든 가치관과 삶의 태도와 목적이 뒤 엎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고후5:17) 되는 일생일대의 단 한 번 있는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죄인 된 인간을 그 분이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흔히 생각하듯이 착한 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 허망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착한 자를 구원하는 것이 공평한 하나님이지 예수 믿었다고 무조건 구원해 주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만큼 엉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착한 자를 구원하려면 반드시 착한 것과 악한 것을 나누는 카트라인이 있어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평생에 거짓말 서너 번 한 사람이 천국 가고 수십만 번 한 사람이 지옥 간다면 별달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트라인이 가령 평생 거짓말 1000번 한 것으로 정해져 그 보다 많이 한 자는 지옥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1001번 한 사람이 과연 그 결정을 공평하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이야 말로 가장 불공평한 판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단지 시험 점수를 채점만 하는 자로 전락시킨 결과가 됩니다.

착한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치 인간이 하나님을 공평한 분으로 세워드린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완악한 인간의 교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만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전 평생을 찍은 비데오 테이프를 죽은 후 심판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본다고 가정하면 끝까지 볼 수 있는 자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는 말만큼 천벌 받을 말이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에서 인간끼리 상대적 평가를 한 것뿐입니다. 그것도 이미 부패된 영혼으로 찌든 불완전한 죄인이 순전히 자기 중심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 볼 때에 단 한명도 의인이 없으므로 그 모든 죄인을 처리할 수 있는 길은 몽땅 심판하든지 몽땅 사면하든지 두 가지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둘 다 하나님으로선 도저히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아닙니다. 몽땅 심판하면 인간을 창조한 의미가 없어지며 몽땅 사면하면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방임한 결과가 됩니다. 그렇다면 죄는 벌하되 죄인은 용서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밤중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말씀을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라고 소개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공평성으로만 판단하면 단 한 명도 살아 남을 자 없지만 그래도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제시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한 종교의 창시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 하는 일 없이 구원을 준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의에 의지해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는 법정 선언을 하셨다는 교리로만 따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 중에 가장 아끼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 앞에 항복할 것인가 아닌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당신께서 “내가 이만큼이나 너희를 사랑하기에, 그것도 너희가 죄인 되었고 나와 원수 되어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는 줄 알지만 그래도 내가 너희를 지었기에, 너희는 나의 백성이자 나의 자녀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기에, 내가 대신 너희 모든 죄과를 담당해 주겠다. 그러니 제발 다시 나의 자녀 된 자리로 되돌아 오라” 고 당신의 모든 피를 흘리고 모든 살이 찢기시며 까지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먼저 찾아 오셔서 그 분만의 열심과 간절함과 애통함으로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시기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니 선악과라는 멍에를 지게 한 것이라는 사단의 꾐에 넘어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 사랑에서 벗어났으니까 하나님으로선 자신이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완전하게 보여 주어야만 그 오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은 참 인간다워야 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관점에 서지 않으면 절대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입장에 서면 십자가가 아니고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역으로 말해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꼭 예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윌퍼드 피터슨이란 사람이 어떤 회교 사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한 종교지도자가 “알라 외에는 하나님이 없고 그의 예언자가 마호메트”라고 말했습니다. 피터슨은 사람들은 힌두교가 ‘브라마’로, 유대교는 ‘여호와’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로 부르듯이 동일한 한 하나님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 모든 신들을 결합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없을까 생각하여 그 종교 지도자에게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얼굴이 환해지며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후 피터슨은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의 진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황금 줄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흔히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셔서 무조건 용서해주셨다고 합니다. 무조건적인 무한정의 관용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죄가 따르는 사랑이라야 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자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자기 힘으로 도저히 씻을 수 없음을 먼저 고백하면 누구라도 조건 없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마치 구원의 전제 조건처럼 들리지만 이 고백은 조건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삶의 근본 태도이자 자기의 뿌리를 찾는 작업입니다.

인간은 가장 먼저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나는 그의 소중한 자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분이 공급하시는 힘과 위로와 의에 의지하지 않고는 죄악으로 부패된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 수 없으며 항상 갈급하고 공허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그 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뜻을 이 땅에 실현할 때만이 자기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이 땅에서 편안함만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찾게 되며 그렇게 해선 절대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자는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해 보이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아도 그 깊숙한 내면의 영혼 속에는 충만함이 없으며 항상 갈급하게 마련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죄를 안 짓고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절대 예수가 구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내 지난 모든 인생이 헛되고 헛되며 실패뿐이었다는 자각이 들어야 비로소 십자가가 참 빛을 발휘합니다.

꼭 예수여야 하는 이유는 인간더러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를 아버지로 인정하라는 데 조건을 부과하겠습니까? 단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 알아 달라고 할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자기를 지으신 분이 여전히 지금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뿌리를 되찾게 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인하여 사단의 영에 지배 받고 있던 인간의 영혼을 죄가 지배하기 이전의 영혼으로 되살리려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성령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 와야 하나님의 속 사정을 알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요16:5-15) 그리고 그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꼭 예수여야만 하는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단의 종이 되어 흑암 속에서 나면서부터 봉사가 된 인간의 영은 빛이 세상에 와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복음의 진리를 설명해 주어도 인정도 하지 않고 혹시 인정은 해도 선뜻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은 자들이 믿기 전에는 이상하게 예수는 주는 것 없이 싫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바로 사단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착한 자만이 천국가야 하고 스스로 착할 수 있다고 고집하며 자기의 의를 자랑합니다. 자기들이 선해지려는 소망과 실제로 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혼동한 것입니다. 착해지는 방법을 아는 데는 하나님은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국민학교 일학년 도덕 교과서만이라도 제대로 완전하게 지키면 세상에서 천사 소리를 듣고 아니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올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착하게 살아라고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셔서 인간의 죄 값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지금도 인간을 그 근본부터 되살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어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동물 같은 삶에서 정말 인간다운 참 인간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삶과 죽음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정말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은 채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고 심각하게 갈등해 본 자만이 꼭 예수여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여야만 자신을 되 찾을 수 있다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꼭 예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의 구원과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은 그 방향이 다릅니다. 물론 목적지는 궁극적으로 신의 용서를 받아 천국에 입성하는 것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출발지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면 어떻게 됩니까? 정작 도착하는 곳이 달라집니다.

출발지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따지면 스스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과 스스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만큼 다릅니다. 출발점에서 목적지로 향해 서 있는 방향이 서로 정반대입니다. 구원을 향해 가는 과정도 성령에 의지해 구원을 선물로 받느냐 인간의 수행과 노력으로 성취하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도 정반대 방향입니다. 우열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중 하나가 진리일 수 밖에 없으며 하나가 맞으면 당연히 다른 하나는 틀리게 마련입니다.

우열의 문제는 서로 타협하고 조종할 여지가 있지만 방향이 전혀 다를 때는 협력 이전에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확실히 정해야 합니다. 종교간에 관용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느 길이 진정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더러 단지 창조주 하나님께로 진정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그 분께만 경배와 찬양을 돌릴 수 있는 위치로 되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가는 길은 수만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종교의 길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관용하고 화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면 오직 한 길 뿐입니다. 인간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은혜로 얻는다는 것이 인간의 종교적 결단과 선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그대로 받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냥 구세주임을 믿어지게 된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진리는 절대 주장하되 진리 밖에 있는 자는 절대 포용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구원의 길은 끝까지 인정해 줄 수 없지만 다른 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끝까지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한 분 뿐인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의 대상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이 그 분을 만나 그 분의 사랑 앞에 항복하는 길 뿐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완전하게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종교, 사상, 철학, 문화, 인종, 세대 모든 것을 떠나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꼭 예수여야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참 자아를 되찾고 인간답게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동은

2004.09.28 00:02:08
*.3.40.248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앙이 흔들릴때마다 이말씀을 생각하면 누가 감히 이런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실이다
구세주이기에 이런 말을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2.09.27 23:02:53
*.109.85.156

"꼬~~~옥 예수여만 합니다"
근데... 자주, 너무도 자주, 사람의 의가 쏘옥 머리를 들고 올라옵니다.
얼만큼한 죄인인지를 알아야 예수님 품 속에 숨어들어가 예수님을 의지하는데,
자꾸만 망각하고, 저의 죄는 한 눈 슬쩍 감고 잊고 싶고, 아니, 그냥 죄가 아니라 생각하고 싶고, 아니, 어쩌면 의로운 행위라고 여기게 될 때도 너무 많습니다. ㅠㅠ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에 "꼭 예수님이셔야만 합니다" 이 고백이 매일 매 순간 떠나지 않기를, 얼만큼한 죄인인지를 늘 깨닫고 그 십자가의 은혜앞에 매일
머리 조아리며 감사하는 자리에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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