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믿는 자로서 믿지 않는 영혼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젊은 청년들이 술 담배 문제 때문에 교회 갈 수 없다고 하면 저희 남편은 술을 마셔도 교회에 갈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술을 대접해가면서 교회에 나오기를 권유합니다. 그 동안 전도했던 사람들로부터 “형 때문에 교회에 아직도 다니고 있다. 형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술 담배나 다른 행동에 자유해서 좋다.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이 싫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렇지만 웬지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잘못하는 것 같습니다. 술 먹으며 전도하는 것은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요?
[답변]
술을 사준 전도자
먼저 부끄러운 제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불신자 시절에 워낙 과묵(?)하여 말이 없었습니다. 저를 주님께 인도하려던 어떤 분이 저에게 술을 사 주면서 전도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만나면 일단 술부터 한 잔 하고 또 술을 먹어야 말을 하니까 그분으로선 순전히 저와 대화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술 집에 먼저 가면 그 분이 따라 왔을 뿐이지 적극적으로 술 집으로 가자고 권유하거나 일부러 술집으로 불러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단지 술잔을 받아 놓기만 했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도 이전에 술을 즐겨 마셨고 다른 세상적인 유흥과 쾌락을 꽤 즐겼던 분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제가 온갖 궤변 - 그 때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 으로 기독교와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끝까지 참아 넘겨 주었습니다. 맛있는 안주와 술이 바로 눈 앞에 있고 제가 자꾸 약을 올렸기 때문에 열이 받쳐서라도 한 잔 들이킬 만도 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제 속으로 참 예수쟁이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억지로 권하기도 하고 상대를 유혹하느라 일부러 맛있게 들이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제 혼자 취해서 횡설수설 했었고 그럴 때면 항상 뒤 끝이 씁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술 취한 후유증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의지력과 인품도 그렇지만 그 분 뒤에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어떤 거대한 힘에 제가 졌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도덕적 죄는 아니지만 저라는 존재는 술로 인해 그 사람보다 훨씬 흐트러졌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당시로선 뭔가 분명한 실체를 몰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 없는 그 무엇을 저 사람은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해야 했습니다. 도덕적인 경건함 혹은 종교적 의무감을 넘어선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런 영역에 들어 간 사람은 세상의 쾌락과 방탕함을 초월하여 자신의 인격과 삶의 자세를 얼마든지 고결하게 유지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
물론 믿기 전에 세상에서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졌던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렀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얻는 데는 아무 제약이 없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십자가 상의 강도가 죽기 직전에 회심했어도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이나 자기 동족의 세금을 수탈하는 세리 삭개오도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 날도 마약 중독자나 살인범 사형수도 복음이 들어가면 그 인생이 변화되고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그에 비하면 한창 혈기 왕성할 청년 때에 술담배를 비롯하여 세상 재미를 따라 산 것이 구원 받는 데에 결코 제약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한 사탄의 종이었더라도 관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행16:16-18) 성경에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귀신이 떠난 그 여종은 틀림 없이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젊은 시절 강 저편에 거할 때는 다른 신들을 섬긴 아버지 밑에서 함께 우상을 숭배했을 것입니다.(수24:2) 특별히 갈대아 우르에선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우상 제물로 바치는 일이 성행했습니다. 그의 인생 말기에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뜻 중에는 그의 영혼 속에 남아 있을 이전에 우상 숭배했던 죄악의 마지막 찌끼까지 씻어주기 위한 배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완전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만족할만한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 스스로 자기가 가진 의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세상에서 어떤 죄악을 지었던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자 또한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 믿는 것과 술 담배 하는 것과 관계 없다고 전도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술 담배가 믿음과 관계 없다고 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구원의 3 단계
기독교의 구원은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죄의 징벌(free from the penalty of sin)에서 면제 받는 구원인 ‘칭의’(Justification), 죄의 힘(free from the power of sin)에서 신자가 거룩해지는 구원인 ‘성화’ (Sanctification), 마지막으로 죄 자체와(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영원히 결별 되는 구원인 ‘영화’(Glorification)가 그것입니다. 칭의는 과거에 신자에게 일회적으로 일어나는 신분상의 변화이며, 성화는 신자가 현재 자기 책임 하에 계속해서 이루어나가야 하는 성품상의 변화이며, 영화는 미래에 신자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궁극적으로 완성될 전존재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이 삼 단계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신자에게 베푸신 구원의 의미와 내용을 시간적으로 구분한 것으로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가장 먼저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회심해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인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으로 거듭나 칭의를 획득하면 그 다음 단계는 필연적으로 이어지며 첫 단계의 구원이나 구원 전체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화와 영화의 단계에선 신자마다 제각기 도달된 품성적 수준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종교와 달리 인간이 천국 가기 전 이 땅에서부터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신자가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 이 땅에서 착했는지 악했는지 다시 평가 받는 작업을 거쳐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영혼 속에 보배로 갖고 있는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기에(요3:16) 육신적 죽음은 그 영생으로 넘어가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죽음은 심판이 아니라 죄와 더 이상 공존해야 할 필요가 없는 천국에서 주님과 같이 영화로운 존재로 완성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단 거듭나 구원을 받은 신자는 성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천국 입국이 거절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처럼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한 적이 없으면 구원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칭의가 없는 성화는 유효한 성화가 아니며 또 칭의는 예수를 영접할 때에 일회적으로 일어나지 계속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가 믿은 후 이 땅에서 믿음 생활 한다는 것은 그 전부가 구원의 둘째 단계인 성화의 단계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모든 삶의 가치관과 자기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믿음과 술 담배가 관계 없다”는 말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칭의의 믿음에선 문제가 되지 않지만, 품성적으로 거룩해지는 성화를 이루는 믿음에선 틀린 말입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몇 가지 의문 사항이 생깁니다. 우선 술 담배가 신자라면 반드시 금해야 할 만큼 죄인가?, 설령 죄가 된다 해도 한 번 얻은 구원이 취소 되지 않는다면 특별히 문제 삼을 것이 없지 않는가?, 또 질문하신대로 술 담배의 문제가 걸려 교회에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전도에 도움을 준다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등등입니다.
술 담배가 죄인가?
술 담배가 죄가 되느냐는 윤리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술 먹고 폭행하든지, 바람을 피우든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식의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술 담배를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관계를 더 재미있게 해주므로 사회 생활을 영위하려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좋은 점도 많은 데 유독 기독교에서만 문제를 삼는 것을 오히려 앞뒤 꽉 막힌 종교로 봅니다. 교회 나가면 무조건 술 담배를 죄악시하여 끊어라 하고 또 술 담배하지 않는 것으로 경건의 척도로 삼으니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히 마시고 난 후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잘 절제한다면 술에는 나름대로 유익한 면도 있습니다. 물이 안 좋은 유대 지역에선 포도주를 일상 음료로 식사 때마다 마셨고 또 약으로 사용했다는 성경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록에 있다고 오늘 날의 신자가 술 마셔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은 물이나 의약품 사정이 좋아졌기에 성경상의 포도주가 맡은 역할은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윤리적 죄가 아니라 해도 실제로는 술을 잘 절제해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굉장히 힘듭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곧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술로 인해 절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면 마셔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에선 술로 인해 다른 잘못을 범할 때에만 죄로 취급되지만 하나님 앞에선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술 담배를 아무리 절제하더라도 조금만 마시거나 피워도;
- 하나님이 건강하고 깨끗하게 보존하라고 주신 육신과 정신을 올바르게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연구는 건강에 좋다는 포도주라도 한 방울만 마셔도 뇌 세포는 파괴된다고 합니다.
- 술과 담배에 들어가는 여러 부대적인 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금전과 자원의 낭비도 있지만 술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낭비가 문제입니다. 술 마시고 나누는 대화나 교제로는 참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거의 맺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방탕하지 말라고 했을 때의 원래 의미는 쾌락에 빠져 온갖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한 번 뿐인 인생을 올바르고 거룩한 일에 쓰지 않고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술 담배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골치 아픈 세상살이의 염려를 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런 문제들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의지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대신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던지 심지어 아무리 선한 효용과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우상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술 담배를 하는 동안에는 절대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성화의 단계에서 매일 훈련하고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면 마실 때 뿐만 아니라 마시기 전후의 오랜 시간 동안 주님과의 교제가 현저하게 줄거나 불가능해져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새 술인 성령님을 매일 매순간 마셔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술 담배를 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지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오락을 즐기더라도 도덕적인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정신력과 절제력을 갖춘 사람은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술 담배 하면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은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켜 하나님과의 교제 활동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과 성화
술 담배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한다면 당연히 성화를 제대로 이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까닭은 성화를 단순히 인격적으로 고상해지고 도덕적으로 죄를 안 짓는 것에 국한시켜 버리기 때문인데 그러면 자칫 신앙이 외식적 율법주의나 형식적 경건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불신자들로부터 신자가 기껏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으로 경건한 척하니 싫다고 지적 받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성화의 근본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측면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볼 때는 주님은 어떤 도덕적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의 문화와 관습과 율법상으로는 몇 가지 치명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고 죄인이나 이방인과 교제했습니다. 당시의 세상적 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아주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죄를 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는 죄인이 아닌 자 하나 없지만 당신의 사랑 앞에 무릎 꿇는다면 의인으로 변화되지 않는 자도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인간끼리 잘 먹고 잘 사는 데 방해 되는 것만 죄로 치지만 하나님에겐 당신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를 모르고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지 않았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닙니다. 거룩하고 온전하신 주님의 절대적 잣대로는 모든 자가 죄인인데도 그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을 거부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해 계속해서 죄인의 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기준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고 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당신이 거부된 채로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세상적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 주어야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불교나 천주교에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술 담배를 인정해주니 관용적이고 통이 큰 종교로 칭송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금하는 기독교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세상적 윤리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교제하여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면 세상 기준이 얼마나 잘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윤리와 도덕은 사람이 정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항상 가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윤리 도덕이라도 ‘반드시’ 혹은 ‘영원히’ 절대적 선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 선과 윤리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당신이며 모든 선한 것도 그 분께로만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 일생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분의 일을 하는 데 전 인생을 바쳤습니다. 주님이 자신은 돌보지 않고 인간을 오직 당신만의 사랑으로 섬긴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 것의 열매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다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신자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고 그 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일에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성화의 본질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선해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신자가 자신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다 동원해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11장까지 영생을 얻는 구원 즉 칭의의 원리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후 12장부터 성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권면 했습니다. 그 첫 마디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온전한 선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실제 삶에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화의 가장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닌 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멋져 보이더라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은 후에 술 담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몇 번 이야기 한 대로 술 담배 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계명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따라 사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 앞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술 담배가 소극적으로는 도덕적 죄가 아니고 또 하나님이 그것을 문제 삼아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적극적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분명히 죄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 앞에서 신자가 술 담배를 해도 되는가?
그러나 문제는 신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이런 부분까지 불신자로선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문제로 인하여 불신자와 담을 쌓고 교제하지 말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도 교제했듯이 신자도 술 담배 하는 불신자와 함께 교제하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증거 되어야 합니다.
엄격하게 따져 세상의 불신자들 중에 절대적인 무신론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 모두도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정말 꼼짝 할 수 없이 붙잡힐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싶어 합니다. 고통과 염려가 끊이지 않는 세상이라 무엇인가 확실하게 의지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도 세상에는 자신의 실력 지성 능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신 어떤 절대자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인정합니다. 단지 아직도 하나님과의 개인적 체험이 없고 또 주위에 그렇게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참다운 감화를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전도 당할 때에 겉으로는 안 듣는 것처럼 관심 없는 척 해도 사실은 신자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수긍하여 믿기 보다 이미 먼저 믿은 신자의 삶의 태도와 행동을 먼저 봅니다. 그래서 믿을 만하다고 느껴져야 비로소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접하려고 합니다. 서두에 제 경험을 먼저 말씀 드린 뜻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전도자가 술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불신자와 함께 술 마시는 것과 복음은 전하되 전혀 한 잔도 마시지 않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세상의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한분 하나님 만으로 족하다는 참 믿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불신자에게 기독교 신앙의 깊은 내용을 말로 전할 수 없고 또 전했다 해도 불신자가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므로 가능한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술 담배 문제가 걸려 교회 출석을 꺼리는 자에게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식으로 교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구원의 은혜가 작동하는 통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간혹 그런 가운데 칭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자가 불신자 앞에서 술 담배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통이 큰 교인이다라는 세상적 평가 밖에 못 받습니다. 전도자 개인에 대한 인간적 칭찬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내용은 그 속에 사실 없습니다. 교회 속으로 들어와 언젠가 있을 성령의 간섭으로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술 담배를 통한 전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전도하는 자나 전도 당하는 자 모두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도덕적 죄를 짓지 않는 정도로만 인정했다는 뜻이 됩니다. 사실상 이것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의 멤버로 이끈 것 뿐입니다. 나아가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해 아직 성숙한 믿음의 경지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증거이거나 신자 스스로 술 담배를 계속하고싶은 욕심을 핑계 된 것 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또 신자가 술 담배에 자유하는 모습을 보고 불신자들이 겉으로는 통이 큰 자라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그 속내로는 사실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도 별 수 없구나, 하나님을 믿는 자도 술과 담배에 의지해 염려 불안을 잊으려 하는구나. 하나님이 실제 삶에서는 별다른 의지가 되지 않구나. 신자도 술 먹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구나. 세상 사람과 똑 같은 방식으로 즐기고 시간을 때우는구나. 저들도 죄짓고 방탕하게 놀고 싶은 정욕은 있는데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만 하고 있구나. 술 먹고 돈도 흥청망청 낭비하는구나. 도덕적으로 죄 안 짓는 신앙이라면 꼭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구나.” 단 하나도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제대로 알게 하는 효과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죄로 죽었던 인간의 생명을 되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길인지에 대해선 낌새도 차리리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오늘 날의 술 담배와 연관되는 원리를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우상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앞에 바쳐진 고기라 해서 실제적으로는 우상 앞에 바쳐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죄가 될 성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상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 아직 믿음이 연약한 형제 앞에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믿음이 좋아져 자유롭게 된 형제가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다면 아직 우상이 있다고 믿는 자로선 하나님도 여러 신 중의 하나인데 단순히 가장 센 신인가 보다라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 드린 여러 이유를 따져 보면 술 담배도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하셔야 합니다. 술 담배를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예수님이 모든 인류에게 유일한 구세주가 아니라 도덕만 강조하는 역사적 성인들 중의 하나로 밖에 증거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후8:7) 했습니다. 우상의 고기 먹는 것과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윤리적 죄와는 아무 상관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이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를 자유롭게 하는 모습으로는 기독교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어 달리는 종교로 밖에 인식시켜 주지 못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네 식물이 네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9-13)고 까지 선언했습니다.
신자가 술집에 앉아 불신자와 함께 술을 먹는 것을 만약 불신자가 보아 시험거리만 되어도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불신자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한 것이 없어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일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해 오해하게 만듭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는 자는 술 담배를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 가운데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안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훨씬 그 교제가 깊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심지어 신자가 술 담배를 한 후에는 속에서 눌림마저 있습니다. 술담배가 주는 부수적인 해독으로 인해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소망하고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기지 않으며 그것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아시고 대신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더 열심히 확장하는 일에 순종하겠다고 하면서 술 담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 만큼의 정체 내지 퇴보가 있습니다. 따라서 술 담배의 문제는 문화적, 관습적, 도덕적, 율법적, 종교적 자세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보셔야 합니다.
Free Smoking보다 Smoking Free가 되어라.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술 담배의 문제가 구원을 받는 데는 제약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또 그것으로 인해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한 윤리적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데는 분명히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선 죄입니다. 술 담배를 금하라는 계명이 명시적으로 있고 그것을 위반해서 죄가 아니라 술 담배로 인해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 앞에서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고 또 교회로 인도한 후에도 그렇게 교제해선 절대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전 존재와 영혼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의 수준에서 단지 도덕적 인격 수양과 인간 관계를 재미있게 이어가는 차원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도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술 담배의 문제를 말로 강요하거나 교리로 교육할 성질은 아닙니다. 둘 다 인간의 의지적 능력을 제압하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가 주는 윤리적 피해의 심각성보다 영적인 장애가 주는 영혼의 침체성이 훨씬 치명적이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해야만 합니다. 신자 본인이 오직 성령으로 깨우침을 받아 믿음이 성숙해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위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 세상적인 어떤 재미보다 훨씬 즐겁고 정말 전 인생을 걸만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셔야만 해결 될 문제입니다.
흔히들 세상 사람은 술 담배를 마음 놓고 하는 것(Free Smoking)을 자유롭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술 담배가 무슨 큰 문제라고 그것마저 못하게 하느냐고 따집니다. 마치 기독교가 인간이 누릴 자유를 속박하는 것처럼 몰아갑니다. 그러나 술 담배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술 담배에 자기가 꼼짝 없이 메여 있다는 말이지 자신이 자유로워진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술 담배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백이면 백 하루에도 스무 번씩 끊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불신자들은 그것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 놓습니다. 구태여 영적인 진리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도 폐해가 되므로 다 끊으려는 술 담배를 신자가 되어서도 왜 전도와 교제를 핑계 삼아 계속합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과 다른 모든 종교에선 Free Smoking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만은 Smoking Free(술 담배의 해독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교리적으로 따지지 않아도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신자만이 술 담배를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과 즐겁게 교제하며 세상의 불안 염려를 없앨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Free Smoking을 더 이상 고집하거나 미련을 가지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이 문제에 관해 당신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Smoking Free가 되어 주님 나라 확장하는 일에 귀한 일군으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기독교인은 불신자들도 주시하기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물론 도덕적, 이런건 문제가 없는데 (술담배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못한것도 모범이 되지 못한 사항에 속할까요
저의 이러한 정신병증 때문에 공부가 항상 뒤처지는게 사실입니다..(생각때문에 시험공부를 제대로 못한적이
많구요
이러한 모습이 불신자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는 마음을 감소시키며 저의 이러한 양태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