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친구 아들이 갑작스레 완치 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평생을 핸디캪으로 지내야 합니다. 그 부부는 거듭난 신자입니다. 부모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해 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당하는 어려움보다 너무 어린 자녀의 평생의 일이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어떤 분이 부모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부모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신다고 했답니다. 그들로서는 특별히 징계 받을 만한 큰 죄 지은 것도 없으며 부모로서 혹 책임을 다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더 당혹해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죄로 인해 어린 자녀가 벌을 받는지요?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질문자님이 겪은 경우는 신자들이 자주 당혹감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선 아무 이유 없이 아이가 아프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아이를 양육하는 책임을 가진 부모로선 아이가 아무리 감기 같은 병에만 걸려도 자신들이 무엇인가 잘못했나 보다 하는 죄책감이 들게 마련인데 그런 중병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그 위에 부모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아서 그런 병이 걸렸다고 단정 짓는 말을 듣게 되면 신앙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간혹 신자들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한다는 측면만 생각해 모든 신앙행위를 도덕적 잣대로만 판단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다루시는 원리는 영원토록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이 인간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두 가지를 다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쉽게 한 마디로 말해 죄는 끝까지 미워하되 죄인인 인간은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이 원리로 비춰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신자에게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 것일 뿐이지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만의 신비하고도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시며 당신의 자녀를 향한 모든 간섭은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 쪽에서 잘못이 하나 없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신자의 뜻과 기대와는 어긋나게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신포도를 먹은 아비
성경은 아비의 죄로 인해 그 자녀를 벌 주는 법은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구절 하나를 살펴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2-4)
에스겔 선지자가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된 경위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선조들이 배교하며 우상 숭배했던 죄 값으로 후손인 자기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 고생하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포도를 먹지도 않은 아들의 이까지 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는 그 속담을 쓰지 못하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레26:38,39) 분명히 당사자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정 반대되는 경우로 가데스바네아에서 잘못을 저지른 세대(민13장)는 가나안 땅을 차지 못했지만 그 아비들의 죄와 상관 없이 새로 태어난 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유다 왕국이 망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에도 유대 땅에는 하나님을 멀리한 죄가 가득 찼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진정으로 경건한 자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을 더욱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하지 이런 불평을 할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불평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중에 선조들의 죄와 직접적인 연관 없이 새로 태어난 세대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그 세대 또한 그런 불평을 했다는 것은 그 아비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자식을 가르쳤거나 아니면 자식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만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잡혀간 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도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그 땅으로 되돌아 오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26:40-42)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도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을 낮추어 그 형벌을 순히 받아야만 했습니다.
생각까지 통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영혼이 다 하나님께 속했기에 범죄하는 영혼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과 신자 단 둘만의 문제이며 어떤 제 삼자라도 절대 개입할 수 없습니다. 또 구원 이후의 인도와 보호도 자기 백성과 일대일의 교제 관계에서만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신자에게 하나님을 ‘아바’(아빠라는 애칭)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친구 아버지나 어떤 존경 하는 스승을 두고 아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오직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피를 나눈 육친의 아버지만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139에서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139:1-5) 개인의 앉고 일어섬과 혀의 말뿐 아니라 생각까지 통촉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마치 세상에 그 사람 혼자 뿐인 것처럼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대하십니다. 태중에서부터 택하시고 평생을 향한 구원 계획과 소명을 미리 마련하셔서 오직 위에서 부어 주시는 당신의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당신의 자녀로 삼은 이후는 신자의 은밀한 기도와 진정한 경배 가운데 좌정하셔서 그 소명 가운데로 인도해 가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어떤 공동체 전체를 향한 특정한 목적과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에 따른 은혜와 징벌을 그 구성원 전부에게 베푸시기도 합니다. 제사장 나라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출애굽으로 구원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 죄악 가운데 회개치 않은 유다 왕국을 바벨론에게 멸망시키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원리는 항상 개인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 앞에 항상 일대일로 서야 합니다.
고라가 모세에게 반역할 때에 하나님의 이 심판 원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회중을 순식간에 멸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모세는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민16:22)라고 하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범죄하지 않는 회중은 악인들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시고 고라와 그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물건을 땅이 갈라지며 삼켜 버리는 벌을 내리십니다.(민16:25-35)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까지 포함해 회중 전체를 벌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악인만 골라 심판하셨습니다.
또 가나안 정복 때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도적하고 사기한 죄로 아이성에서 패배하자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 기구 가운데 둔(수7:11) 제비 뽑기로 지파와 족속과 가문을 거쳐 범죄한 개인 아간을 결국은 찾아 내어 심판하셨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항상 심판하기 앞서 범죄한 자에게 회개의 기회 또한 주십니다.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더디 옴에 금송아지 우상에 절한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에도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다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고 회개로 초대하는 선언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간도 제비 뽑기 전에 혹은 시작하자마자 자복하고 회개했었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결국 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심판뿐 아니라 구원에서도 하나님의 원칙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죄악과 배교가 넘쳐 의인이 숨쉬기 조차 힘들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의인과는 개인적으로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갈멜 산상에서 수 많은 바알의 선지자와 단신으로 맞서 하나님의 권능을 천하에 보인 엘리야(왕상18장)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사악한 왕비 이세벨이 죽이려 들자 겁 먹고 광야로 도망간 그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해 주며 안전하게 피신시켜 주셨습니다. 또 영적으로 침체된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인도 남겨 두셨습니다.(왕상18:18)
삼사대까지 벌을 주리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그럼에도 가끔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묻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출애굽기 20:4-6 을 들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에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본문은 특별히 우상 숭배하는 자의 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한 집안에 대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숭배하면 자식과 그 손자도 자연히 바른 신앙교육을 받지 못해 삼사대까지 우상숭배로 흐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삼사대는 한 집안에서 불신자 아버지가 자손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범위를 말합니다. 자손들 3-4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상 숭배의 죄를 절대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천대와 삼사대를 비교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가계는 천대까지 복을 준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잘 믿었다고 천대 자손까지 자동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천대 안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를 범하는 자손이 한대라도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서 천대나 삼사대 둘 다 비교를 위해 강조한 표현이므로 문자적인 수치의 뜻으로만 해석해선 안 됩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귀중한 뜻 두 가지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며 지키는 자를 천대까지 복을 줄 만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죄를 범하는 집안일지라도 그 악을 하나님이 삼사대 안에 그치게 할 만큼 죄악을 철저하게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삼사대가 지나기 전에 하나님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면 비록 죄와 배교 아래 있더라도 반드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번째 영적 원리는 죄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도 가공할 정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역사하는 힘은 도저히 그것과 비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치적으로 따져 삼사 대와 천대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당신의 은혜의 품 속에 있다면 정말 그 사랑의 힘이 천대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전을 계속해서 확실하게 전하라는 계명인 것입니다.
죄악의 직접적인 열매
그럼에도 성경에는 아비의 죄로 자식이 벌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삼하12:15,16, 18) 다윗이 자기 심복 부하인 우리아의 처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불륜의 자식을 하나님이 죽게 했습니다. 그 아이로선 스스로 지은 죄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분명히 죽은 아이의 입장에선 억울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먼저 모든 인간은 원죄의 형벌 아래 태어나며 그 삯은 사망일 수 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으로 어느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그 아이는 단지 조금 일찍 죽은 것에 해당될 뿐입니다. 또 일찍 죽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사57:1)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아이를 일찍 죽게 한 것은 죄의 직접적인 열매였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범죄하고도 되돌이키지 않으면 그를 회개케 하고 또 성숙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죄의 열매를 통해 벌을 주십니다. 죄와 직접 연관된 분야에서 벌을 받기 때문에 신자 자신이 분명 어떤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지 알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나실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 서약을 어기고 포도주를 마시며 난잡한 여자 관계를 맺자 하나님은 바로 그 여자를 통해 벌을 주셨습니다.(삿16장)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멀리한 죄는 회개하지 않고 전쟁에 진 원인이 하나님의 언약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상징인 법괘를 단지 미신의 도구로 전락시키자 오히려 법괘를 가지고도 더 큰 패배를 겪게 하셨습니다.(삼상4장)
오늘 날의 경우에도 만약 부모가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면서 세상의 부귀영화만 쫓는다면 그 자식도 똑 같이 돈 만 밝히는 자로 자라게 됩니다. 또 언젠가는 반드시 돈 때문에 자식이 잘못될 뿐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바로 그 돈 때문에 부모가 큰 낭패를 겪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바로 세우고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기 원하셨습니다. 다윗을 통해 이루실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죄 지은 당사자인 다윗 보다 그의 자식을 희생시키는 형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인간의 살고 죽음, 구원과 심판, 죄에 대한 형벌과 순종에 대한 축복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먼저이며 형벌과 은혜는 그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어떤 환난을 겪고 징계를 받을 때에 그 사건 하나에 연연해 갈등하기 보다는 자기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적 계획에 비추어 뜻을 겸허하게 물어야 합니다.
다윗의 경우 이 사건 이후에도 죄의 직접적인 열매를 통한 징계를 계속 받습니다. 여러 아내를 둔 죄악 때문에 자식들 간의 분쟁이 생깁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장자 압살롬에게 반란을 당했고 도저히 한 인간으로, 왕으로, 아버지로 감내할 수 없는 수모를 바로 그 자식으로부터 받습니다.(삼하16:20-23) 하나님은 다윗을 자신의 계획 때문에 밧세바와 간음사건 때에 살려 두었지만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아 쓰임 받는 자이기에 더 가혹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간음의 관계에서 난 자식이 바로 벌을 받아 죽는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 앞에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당신을 경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오직 진심으로 순종하기를 바라기에 대개의 경우 그런 직접적인 벌을 범죄 직후에 바로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죄의 직접적인 열매를 통한 벌은 반드시 내립니다.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만 부모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는데 제대로 그 서원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벌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때도 서원한 자에게 벌을 주시지 아무 연관이 없는 자식을 벌 주실 만큼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불공평하며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또 당신의 일을 하겠다고 선한 의도로 서약한 자를 그 약속을 빨리 시행하지 않는다고 당장 벌주실 만큼 옹졸하신 분도 아닙니다.
대신에 무엇보다 서원한 본인이 깨닫고 그 서원을 지켜내도록 먼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그것과 연관된 부분을 통해 간섭하십니다. 예를 들어 분명한 소명을 받아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과 권력을 쥐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를 맛 보게 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서원한 자를 거룩하게 보존 시키며 빨리 그 소명을 달성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지 징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원인 모를 고통
어쨌든 현실에서 당하는 인간의 입장에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욥의 경우처럼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이 실제로 많습니다. 영적으로 신령하고 능력 있는 목사가 원인 모를 병으로 일찍 죽기도 합니다. 고통이란 벌써 그 원인을 알면 견뎌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해결책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고통 중 상당 부분이 아담의 원죄로 피조세계가 부패하고 타락하였기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 없는 고난이란 사실은 죄에 찌들고 불완전하며 어리석은 인간끼리 만들어낸 총체적인 모순과 왜곡의 결과로 인한 부차적인 희생입니다.
욥기의 경우 필립 얀시가 지적한 대로 욥의 믿음을 걸고 사탄과 하나님이 하늘에서 두 번의 내기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 다 사탄의 일방적인 케이오 패로 끝납니다.(1-2장) 그럼 성경도 거기서 끝이 나야 하는데 욥기의 주 내용은 사실 3장부터 시작해 42장까지 고통에 관한 주제로 지루할 정도로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욥의 입장에선 자기 자식들을 아무 이유 없이 하루 아침에 다 잃어 버립니다. 욥이 죄를 지어 자식이 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번째 시험에서 사단은 욥의 믿음이 좋은 이유가 하나님께 축복으로 받은 소유물이 풍부해서 그렇지 만약 가진 것을 다 잃으면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내기를 걸었습니다. 욥의 자식도 하나님께 받은 축복으로 간주되어 그의 소유물을 다 없애는 바람에 함께 죽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자신의 소유물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 자신의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악창이 나도 그 고통 자체에 대해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무 죄가 없는 자기가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선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부터 시작해 위로하러 온 세 친구와 함께 그 고통의 원인에 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결론이 그 원인을 알고 끝납니까 모른 채 끝이 납니까?
시종일관 욥은 자기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도저히 없다고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그 경이로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지 욥더러 그 이치를 하나라도 설명해보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 욥이 단 한마디도 답변을 못하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준엄하게 물었습니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2,8,9,14)
추상 같은 하나님의 추궁에 욥으로선 “주께서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자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을 감히 하나님께 돌리며 불평하고 그 원인을 기어이 알아야겠다고 덤볐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후가 지적한 그대로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욥32:2)고 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믿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에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구원과 심판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토기에 불과한 인간으로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천한 그릇으로 쓰실지 귀한 그릇으로 쓰실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천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았다고 왜 나는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절대 변박할 수 없습니다. 이 출발이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해도 고통이 오면 특별히 그 원인을 모를 때는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평으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고통을 당해 기도 열심히 하여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데 믿음이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고통 중에 어떻게 믿는 자답게 반응할 것인가를 제대로 알고 또 실제로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신자가 믿음으로 취할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묻든지 도저히 그 뜻을 모르겠다면 그런 가운데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계획이 분명히 있음을 완전히 인정하고 소망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욥은 고통의 원인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통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두고 제자들이 자기와 부모 중의 어느 죄로 인한 것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9:1,2) 이 말씀의 일차적인 뜻은 주님이 그 자리에서 소경의 시력을 되찾게 해 주심으로 당신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원인 모를 고통 가운데 있을 때라도 정말 온전한 믿음에 바탕을 둔 소망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도 당신의 고유한 계획과 뜻이 그 일을 통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온전한 믿음이란 욥이 온갖 영적인 번민과 갈등을 겪은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리며 했던 고백과 같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 하신 일의 이치를 전혀 알 수도 없으면서 감히 그 일에 대해 불만과 의심을 가져선 안 됩니다.
그러나 욥의 고백이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4-6) 욥으로선 사실 그 동안에는 교리적인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단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가 이제 처음으로 직접 일대일로 대면했다는 고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은총을 실제 삶 속에서 완전히 체험하고 그 분과 교제하며 동행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앉고 일어섬과 혀의 말과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6)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 분이 하신 일의 숨겨진 뜻과 계획은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윗 만큼 믿음이 바로 서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만큼 파란만장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밧세바와 간음했던 사건을 빼고는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할 만큼 직접적인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가장 많이 가졌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고뇌와 갈등의 끝에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지식에 내가 감히 미치지 못하지만 그 분은 결국 내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고 지나고 나니 반드시 선으로 이끌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하신 뜻이 숨겨져 있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갑자기 그것도 원인 모를 큰 고통을 겪게 된 친구 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당황 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을 잘 숙지하셔서 아래와 같은 취지의 말씀을 정말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진정으로 서로 위로하고 권면 하는 심정으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절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물리지 않습니다. 아비가 자기 죄 때문에 자식을 잘못 키울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부모가 신앙 안에 바로 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몇 살 안 된 어린 자녀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원죄 외에 하나님에게 그렇게 큰 징벌을 받을 죄를 지었을 리도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나 아이 앞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는 데 지키지 않았다든지, 혹은 정말 숨겨진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이의 병과는 상관 없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회개하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회개해선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신자이므로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아이에게 항상 잘할 수는 없고 가끔 잘못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신자로서 세상의 시험과 유혹에 빠질 때도 있고 하나님의 관계를 완전하게 갖는데 게을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 때문에 아이에게 무조건 잘해 주려 하거나 이일에 너무 모든 신경을 몰두하여 실망, 의심, 불평, 자책, 자기비하, 갈등, 번민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이전보다 더욱 분별력 있게 아이를 대하고 또 부모가 먼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가져야겠다는 영적 부흥의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일부러 나쁜 일을 겪게 해 고통을 안겨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세상은 이미 온갖 죄악으로 부패되어 있습니다. 까닭 모를 질병이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린 아이가 일찍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그 아이가 부모의 죄악의 직접적인 열매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데려 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죄악의 희생이 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가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그가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였습니다. 그는 그래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감사했습니다.
완전한 핸디캡으로 태어나서 아무 불평 없이 오히려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에 평생 쓰임 받는 일군들을 주위에 많이 보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 아이와 부모님에게 하나님의 영광된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부모보다는 아이에게 더 크고 신비한 계획이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크게 쓰는 일군을 더 고통스런 연단의 과정을 통과시킵니다. 그 병의 직접적인 고통의 당사자는 아이이지 부모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어떤 계획과 영광으로 인도하실지는 지금으로선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간직하고 키우십시오. 또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아지도록 나아가 기적적인 간섭으로 완치되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것과 전혀 다릅니다. 모든 가능성을 그 분께로만 향해 완전히 열어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 들지 마십시오. 우리로선 알 수 없으니 무엇이든 구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차츰 하나님의 뜻이 희미한데서 조금씩 명료 해지고 결국에는 완전한 영광의 광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문 오셨던 교회 분이 쉽게 던지고 간 말씀도 호의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병이 낫고 또 부모님들의 신앙이 더 성숙해지기 원해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단지 부모의 잘못이 아이의 병으로 바로 나타난다는 단정만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어떤 경우이건 분명하고도 단순한 진리는 이런 일을 떠나서라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그 바른 관계가 윤리적 죄의 문제를 떠난 것이어야 합니다. 윤리적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먼저 창조주이자 절대자 되시는 그 분 앞에 피조물이자 죄인으로서 겸손하게 서라는 것입니다. 항상 연약하고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전존재와 삶과 일생을 그 분께 완전히 내어 드리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욥이나 다윗처럼 그 분의 때와 방법으로 너무나 큰 은혜와 권능을 반드시 체험하고 눈으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으로 질문자께서 권면하실 때에 분명히 기억하실 것은 아무리 허물 없는 친구 사이라도 결국은 고통을 직접 겪지 않는 제 3자입니다. 위에서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권면을 나누라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상대가 먼저 마음을 열고 의논을 해오기 전에 나서서 이런저런 신앙적인 얘기를 그것도 흑백간에 단정짓듯이 전해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주시고 또 쉬지 말고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함께 곁에 있어 주시고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대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고통을 감당하실 수 있었듯이 동일한 아픔을 겪지 않은 자가 말로써 하는 위로는 자칫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대로 암이 걸려 고통스런 항암 치료를 직접 받아 본 자만이 암 환자를 진정으로 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동일한 체험을 한 자는 사실은 따로 말을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손을 잡고만 있어도 이심전심으로 눈물이 흐르며 이미 모든 위로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로하려고 같은 고난을 자청해서 겪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삼자는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당사자를 직접 위로하시도록 기도를 가장 먼저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함은 늘상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뒤돌아 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사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시고 계시건만, 그 속깊으신 맘은 전혀 헤아리지도 않고선 징계 앞에서 왜? 무슨 이유가? 하면서 따지 듯 항의함을 기도라 생각하는 많은 사건들이 떠올려 집니다.
이웃의 권면들 또한 그리 대하였던 부분들, 정말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은 뒤늦게나 깨닫게되고, 그 깨달음 조차도 또 다시 일어나는 상황앞에선 다시 또 오해와 갈등으로 이어지는 참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되어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오해와 갈등, 번민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참으로 많이 오해하고 있음이 원인임을 배우며 다시금 이런 죄인조차도 어찌나 사랑하시는지, 온 세상에 단 한 사람, 그 사랑하는 한 사람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아름다웁고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려 애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며 눈물로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