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오랜 동안 의문으로 간직하고 있었으나 속 시원한 설명을 접해보지 못했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시간 나시는 대로 명쾌한 답변 좀 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샬롬.
○ 신명기 25장에는 유대의 독특한 관습 중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수혼법이 곧 그것이다. 수혼법(嫂婚法:levirate marriage)이란, 계대결혼(繼代結婚) 또는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이라고도 하는 유대인의 율법(고엘제도)으로서, 어떤 사람이 후사(후손) 없이 죽었을 때 그의 동생이나 가까운 친척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처음 낳는 아들을 죽은 사람의 아들로 삼는 제도이다.
○ 수혼법은 후손보존, 유업보호, 가난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계의 지속이라는 측면이 가장 강하다 하겠다.
○ 이러한 수혼법은 우리나라의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유사한 면(家系의 持續이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는데 반하여, 유대의 경우는 실제 결혼을 통해 목적을 이룬다는 차이점도 있다 하겠다.
○ 그런데 룻기 4장에 보면, 수혼법의 한 예로 볼 수 있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수혼법의 최대 목적인 가계의 지속과는 상이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혼란이 일고 있다. 즉, 기업 무를 자의 자격으로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아들 오벳을 낳았으나, 수혼법의 정신에 따라 오벳을 롯의 본 남편인 기룐의 후사로 삼지 않고 있다.
○ 일부 학자는 선대(先代)인 과부 나오미와 결혼한 것이 아니므로 수혼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해석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나오미도 과부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가 남편과 사별하기 전에 두 아들을 낳았었기 때문에, 수혼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가 끊어진 사람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니라 룻의 남편인 기룐이기 때문에, 나오미가 아닌 룻이 수혼법의 대상이 되는 것이 타당하다.
○ 아무튼, 룻기의 경우를 수혼법의 한 예라고 할 때, 예수님의 족보에 큰 차질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수혼법의 정신에 따른다면, 성경의 기록대로 "`살몬(라합)-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이 아니라, "엘리멜렉-기룐(룻)-오벳-이새-다윗"이 되어야 정확한 계보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 기록대로라면, 룻의 경우는 보아스와의 통상적인 재혼으로 보아야 하며, 수혼법을 적용한 사례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된다.
☞ 의문 :
① 룻4:18-22절의 사례는 수혼법의 정신(신25:5-6)과 예수님의 족보(마1:1-16) 사이에 묘한 상충을 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②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가 가까운 형제가 아니라 먼 친척이라서 가계를 잇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③ 또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의 일례로 볼 수 있는지 및 수혼법으로 볼 수 있다면 보아스(룻)의 경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답변]
항상 그러듯이 이번에도 일반인 심지어 전문가마저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3가지로 나눠서 질문을 주셨는데 각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사람들이 절대자를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 하는 일 모두가 완전하다고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일을 했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논리의 눈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1:17) 한다고 했듯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어그스틴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아진다는 뜻으로,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과 가장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신자가 성경을 보는 태도에도 연관 되어집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지정의적 이해와 동의를 먼저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음을 요구하지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령이 죄인의 영혼을 간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믿어지고 또 그렇게 믿어진 후라야 이해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그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신구약 기록 간에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뭔가 잘못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진리에 문제가 있는가 의심하기에 앞서 기록된 범위 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합니다.
물론 질문자님께서 이런 원리를 모를 리는 만무하며 또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해선 마태복음의 족보나, 신명기의 계대 결혼에 관한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하고 하등 하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족보는 족보대로, 수혼법은 수혼법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문제를 구태여 연결 시켜서 의혹을 야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계대결혼의 진정한 의미
신명기 25:5-10에 규정되어 있는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은 잘 아시는 대로 결혼한 형제가 후사가 없이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과부된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1)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대를 이어줄 후사를 낳아 줌으로써 그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가문과 지파에서 보존해 주며, 2)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며, 3)홀로 남아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대결혼을 이해하는 신자들의 관점이 너무 제한적입니다. 옛날 한국에서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의 족보에 다른 형제의 아들을 입적시켜 대를 잇게 하는 관습과 연관지어 단순히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는 제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계대 결혼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더 중요한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민수기 36:1-12에 의하면 슬로보핫은 아들 하나 없이 딸만 두고 죽었는데 모세는 그 딸들더러 그 조상 지파에게만 시집가도록 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혼 제도에 만약 집안의 혈통 보존이나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는 목적을 더 우선시 했다면 일본처럼 데릴 사위 제도를 만들어 장가 온 남편의 성을 여자 집안의 성으로 바꾸게 하는 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딸이 자기가 속한 “조상 지파의 가족 되는 사람에게” 시집가면 된다고 합니다. 딸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가 그들의 기업(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게 되는 사태를 막자는 뜻입니다. 즉 아들이 없는 형제의 미망인의 계대결혼이나, 아들 형제가 없는 딸의 결혼 문제에 관한 규정에서 근본취지는 동일합니다. 후사(後嗣)를 이어가되 그 중에서도 혈통과 가계 보존보다 땅의 보존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민36:9)
이스라엘 각 지파가 제비 뽑기로 취득한 땅은 하나님과 그들 각 지파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축복의 보증으로 취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 첫 소유자인 지파가 자기들의 땅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땅에 대한 안식년이나 희년 제도에서 보듯이 땅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각 지파는 하나님을 대신한 청지기로서 소유보다 관리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땅은 모든 생업의 기반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땅에서 먹고 사는 모든 것들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속제도는 아들 위주였고 그에 따라 아들이 없는 가정의 경우에는 그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게 되는 불합리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 모순을 없애고 여자에게도 상속을 허용하는 획기적이고도 공평한 제도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11:44),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것입니다. 특별히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레25:23)이기에 영영히 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 뽑기에 의한 땅의 분배, 땅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 계대 결혼 제도, 딸의 상속 문제 등등 모두가 당신의 그런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땅을 두고 분쟁하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도 거룩한 당신의 백성들로만 이뤄진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질문 1. 룻기의 계대 결혼과 마태 복음의 족보가 상충되지 않는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하면 우선 마태 복음의 기록과 룻기의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그 기록 자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을 혈통과 가문 보존으로만 해석하여 각 기록간의 모순이 있어 보이는 것에 너무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둔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혈통과 남자를 중시하는 유대인의 관습과 제도에 맞추어 사실 그대로 해석해서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왕 중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 왕들의 이름이 주로 등장합니다. 또 비록 네 명의 여인들(이방인, 과부, 창기, 불륜의 관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반드시 남편 되는 남자의 이름, 즉 생물학적 생부(生父)의 이름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혈통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뜻입니다.
반면에 누가의 족보(눅3:23-38)에는 왕보다는 평범한 인물의 이름뿐입니다. 이방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메시야의 구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족보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 된 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가 났다는 것입니다.
만약 계대 결혼과 마태 족보 간의 상호 모순되는 점을 따지려 들면 오히려 마태와 누가의 족보의 상이점이 더 문제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원칙이 각각의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한 기록이며 그 안에 이처럼 고유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기에 구태여 두 기록 상의 차이점을 문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 족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위를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왕의 선조를 강조하기 위해 족보상에 많은 인물과 대수를 생략했기에 누가의 기록에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누락되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에 룻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는 룻기에 기록된 룻과 보아스 간의 계대 결혼이 신명기의 규정대로 잘 이뤄졌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질문자님께서 의아해 하는 대로 기록이 바꿔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방인 과부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믿음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방인, 불륜의 태생, 과부, 창기이든 차별하지 않고 이땅의 모든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실제 생부와 왕의 선조 중심으로 기록해 나가다 보니 특이하게도 당시로선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혼인 관계에 의해 대가 이어진 사실 네 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비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네 여인의 이름을 족보에 등장시켰던 것입니다. 아마도 기록할 당시 본인은 그 기록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만, 후대의 독자로선 그 네 명 여인들의 배경을 살펴 보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더욱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간섭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질문 2. 보아스가 먼 친척이라 기업을 무르지 않아도 되는지?
이스라엘의 계대결혼은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인척부터 시작해서 차츰 먼 친척까지 확대해서 그 후보로 선정합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의 후보로 오르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의무 규정에 속합니다만 그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본인의 선택과 자유에 맡깁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일차 후보가 결혼할 의사가 없으면 그 다음 가까운 친척 순서로 이차, 삼차 후보에게 결혼할 의사를 차례로 묻게 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을 거절한 친척은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고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의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칭하게 됩니다.(신25:8-10) 형제의 집을 세워줄 의무를 외면한 비겁한 자라는 불명예를 평생 아니 후손들에게까지 지우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 절차를 거쳤습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룻3:12-14)
보아스는 분명히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친척이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따로 있었습니다. 보아스로선 계대 결혼의 순서상 제 2 후보였고 그 이외에는 기업 무를 친척이 없었습니다.(룻4:4) 제 1 후보였던 이름 모를 친척은 처음에는 룻 즉 기룐의 재산이 탐나 선뜻 결혼할 의사를 내 비췄다가 그 기업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는 곧장 취소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려 든 것입니다.
기업을 무르고 안 무르고는 촌수가 가깝느냐 머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앞선 후보가 불명예를 감수하고도 거절하면 그 다음 후보에게 차례가 돌아가고 해당 후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만 하면 됩니다. 룻의 경우에는 후보자가 마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보아스마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를 괜스레 걱정할 염려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아스는 불쌍한 이방인 과부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룻은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신부인 신실한 신자의 예표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이 사건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진행시키고 또 성경 기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습니다. 보아스는 보아스의 모습으로, 룻은 룻의 모습으로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했고 또 계대 결혼도 그런 모양으로 이뤄져야 했습니다. 계대 결혼을 거절한 친척도 조연으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거짓 삯꾼 목자의 표상입니다. 룻기는 룻기대로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별개의 완전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상호 모순되고 충돌 되어 보이는 의문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성경과 성경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 즉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도 예수요, 그 해석을 검증하는 기준도 오직 예수입니다. 룻기의 계대결혼이나 마태의 족보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는데 하등 오류가 없고 또 두 기록에서 이해되어진 예수님의 예수님 다우심에 모순이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록인 것입니다.
질문 3.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에 해당하는지? 보아스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한 마디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아직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구체적인 율법을 받기 전이라 그런 규정에 직접적으로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익숙해 있는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 채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뤄나갈 수 있는 길을 기존의 관습법과 도덕법을 바탕으로 하여 당신의 선하신 뜻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 율법입니다.
창세기 38장의 기록으로 보아 계대 결혼은 이미 시행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관습을 율법에서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는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했는데 그 일을 두고 성경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다”(창38:9,10)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계대 결혼은 모세 율법 이전에도 하나님의 제도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너는 네 자부(子婦)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레18:15)라는 율법의 규정도 유다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선 도덕적 관습법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나아가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장래를 결정지을 위치이므로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주선해 줄 책임을 지고 있는 자이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그 결혼의 후보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보아스의 경우와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의 첫 남편이자 자기 장자인 엘이 죽자 차남 오난에게 계대 결혼을 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 둘째 아들마저 죽자 셋째 아들 셀라가 있음에도 친정으로 돌아가 수절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말로는 마치 셀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계대 결혼을 시켜 줄 것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창38:1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 마음은 다말이 시쳇말로 남편을 죽이는 재수 없는 불길한 여자로 여겨져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고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해”(창38:14) 다말이 그 유명하고도 추한 시아비와의 통간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계대 결혼 제도로 인해 생긴 비극이긴 하지만 유다와의 사이에 후손이 생긴 것 자체는 계대 결혼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극도로 가증한 범죄의 결실입니다.
또 외면적으로만 보면 마치 계대 결혼의 모순 혹은 잘못으로 인해 생긴 비극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유다의 장자 엘과 차남 오난은 다말이 재수 없는 여자라 저주 받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엘도 그렇고, 오난이 땅에 설정하여 기업 무를 형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여호아 목전에 악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것이지 다말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가 잘못된 판단과 선입관에 사로 잡혔고,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보다 재수나 운명을 믿는 큰 죄를 범합니다. 그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을 때에 본인의 의사를 물어 만약 그가 결혼을 거절하면 셀라의 가장 가까운 사촌들에게 순차적으로 그 결혼을 권유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을 다말과 결혼 시키기 싫어 한데다 만약 관습(혹은 율법)대로 계대 결혼의 절차를 거쳐서 그 결혼을 못하게 하면 자기 아들 셀라와 자기 가문이 영원토록 비겁한 자로 찍히기에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쌍한 과부 며느리 다말의 앞 날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중 삼중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계대 결혼의 선한 뜻, 아니 신적 간섭과 주권으로 이뤄져야 할 결혼의 신성함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다말로선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시아버지의 뜻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좋다.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여인인가 시험해 보자. 거기다 당신이 하나님의 신성한 뜻인 계대결혼을 거부하는데 만약 당신이 바로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 죽나 안 죽나 보자”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유다도 그 아들도 죽지 않는 것으로 그 결말이 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장남과 차남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아비인 유다가 그들을 잘못 양육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셋째 아들 셀라에게도 계대 결혼을 제대로 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형제의 기업을 살리도록 가르쳤어야 함에도 오히려 오직 그의 생명만을 염려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다말 사건의 원천적인 책임과 잘못이 아비인 유다에게 전적으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다가 그렇게 된 데는 마찬가지로 그의 아비 야곱의 책임도 있습니다. 거짓과 사기와 잔혹함과 패륜성 등 온갖 타락이 야곱의 집안에 만연했습니다. 그 집안에 또 다시 치명적이며 부도덕한 시부와 며느리의 상간이라는 패륜이 추가되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아들과 자신이 비겁한 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기 싫어 그 아비 야곱을 닮아 인간적 계략을 동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일을 통해 그를 며느리와 통간한 패륜아라는 더 더럽고 추한 비방을 영원토록 듣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말과 유다의 사건을 인간적 상식으로만 이해하면 이보다 더 추한 사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말과 유다와 그 아들들의 온갖 인간적 계략과 욕심이 뒤얽혀져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 사건만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엄정한 진리와 그에 대비해 한 없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상이 대조되는 사건도 드뭅니다.
유다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회개하게 됩니다. 이 일 뒤에 성경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야곱 가문이 애굽으로 요셉에게 양식을 얻으러 가는 사건을 바로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진심을 떠 보고 또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친 동생 베냐민을 담보로 애굽에 남겨두고 돌아가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유다는 간절하게 요셉에게 그 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가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44:33,34)
동생 요셉을 팔아 넘긴 죄와 며느리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시키지 않은 죄와 그 전에 아들 둘을 잃어본 아비의 심정 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나온 유다의 솔직하고도 애끓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자식만 챙기지 않고 이제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형제와 아비를 살리려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되어진 일들의 배후에 간섭하고 그를 변화시킨 결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유다의 그 엄청난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또 타락한 야곱의 집안을 택해 한 국가 이스라엘로 자라게 하시며 선민으로서 모든 은총과 권능을 한 없이 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런 혈통을 통해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다말이 일으켰지만 가깝게는 다말의 원한을 신원해주고, 유다의 잘못에 벌을 주어 회개시키며, 멀리는 유다와 다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이 연출한 인류 구속사 중의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였습니다.
이처럼 다말의 사건이나, 룻의 계대 결혼이나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용서와 사랑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거듭 말하건대 각각이 완전한 의미를 지니는 별개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통일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에 어떤 모순과 충돌도 없습니다.
12/21/2005
*** 추신 : 저는 자료 정리의 가치를 매우 높게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답변도 따로 정리하는 것은 물론, 제가 재묵상할 때 크게 참작하게 될 것입니다. ^0^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