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만 축도(Benediction)할 수 있는가?

조회 수 10166 추천 수 381 2006.05.03 00:22:24
[질문]

아래는 정순태님이 평신도들이 목사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 세 가지를 묵상한 것 중에 마지막 “목회자의 축복권에 관한 이해”입니다. 앞선 두 주제와 동일하게 아주 세밀하게 성경을 예증하고 해석하여 제시해준 의견에 대해 운영자로선 100% 동감합니다. 또 본 주제에 대해선 현실적인 고려로 보충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축도에 대한 몇 가지 참고할 사항을 첨언하는 것으로 답변에 대하겠습니다.

[정순태님의 의견]

목회자의 축복권에 관한 이해

※ 본문 1 : 민6:24-26(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본문 2 : 고전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 들어가기

   ◉ 축복이라는 말은 성도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이며, 특히 목회자로부터 받는 축복은 더 없이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성경적으로 결코 잘못되지 않은 이러한 이해는 우려할 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부족한 일부 사람들(특히 목회자들)이 축복권은 목회자에게만 허락된 전유물인 듯 발언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이를 넘어 목회자의 영적 권위의 근거인양 왜곡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번 시간에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축복 내지 축복권은 어떠한지에 대하여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축복권의 근거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세상의 복을 포괄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복의 종류를 분복(分福:One's Lot)과 지복(至福:Beatitudes)의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묵상인 ‘복이란?(야베스의 기도를 중심으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축복권의 성경적 근거.

   ◉ 본문에 대해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민6:24-26은 소위 제사장의 축복기도(Priestly Benediction) 또는 아론의 축복기도(Aaronic Blessing)라고 칭하며, 역사적으로 유대인에게 전해오던 축복기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의 임무 중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회중을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신10:8, 21:5). 따라서 제사장의 축도에는, 복(blessing)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 길은 제사장이 열어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 고후13:13은 소위 ‘바울의 축도’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전통적인 제사장의 축도에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신학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대부분 바울의 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축도는 초대교회부터 행해진 것은 아니며 주로 4세기 말부터 모든 교회의식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 여기서 ‘축도’(祝禱:Benediction)란 ‘축복기도’의 준말이므로, 축도권, 축복기도권, 축복권은 동의어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 위의 본문에 대해 크게 2 가지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 먼저는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 및 신학자들이 선호하는 해석으로서, ‘현대의 성직자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권을 전승했다고 믿고 있으며 이 권으로 안수 받은 목사만이 축도를 하는 것이다’라는 견해입니다. 즉, 축도권은 오직 안수 받은 목회자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 한편, 일부 목회자/신학자와 평신도 그룹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목사만능주의와 교권주의를 반대합니다.
         -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에 비추어 볼 때, 성경해석과 설교권의 독점에서 나아가 예배의 배타적 혹은 주도적 집행 그리고 축도권 심지어 인사권과 재정집행권까지도 전횡적으로 행사하는 한국 목사들의 사제직에 대한 저항과 제재로 재적용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치 이러한 전지전능한 직책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고유의 권한이어서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전문직의 !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의 입장은 오류이며 착각이고 비성경적인 것이다. 기껏해야 목사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성령의 은사와 직분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세계교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능직의 한국의 목사들이 성경적인 목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현실과 우리가 회복시켜 주어야 할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매우 슬픈 일이다.
        - 즉, 축도권은 꼭 안수 받은 목회자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 두 번째 해석의 범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침례교파에 소속된 일부 교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담임목사가 축도를 하지 않고 담임목사나 성도 중 한 명이 폐회기도를 함으로써 예배를 끝내고 있기도 합니다.
        ①축도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인 ‘만인제사장직’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벧전2:9)이기 때문에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는 사고는 비성경적이다.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은 모든 성도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목사에게 구약의 제사장이 가졌던 축복권이나 저주권 같은 것은 없다.
        ②축도는 권위주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목사와 성도의 차이는 직분의 차이이지 신분의 차이가 아니다. 목사에게 축도권을 주어 그를 성도들보다 특별히 격상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니다. 목사를 존중하고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지만(살전5:12-13), 성경이 부여하고 있지 않는 권한을 목사에게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배타적 축도권’은 성경의 보증을 받는 해석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축복권은 모든 성도에게 허용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축도하는 것 자체는 결코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성경적이고 매우 좋은 것입니다. 다만, 평신도도 다른 이들에게(때로는 목회자에게도)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증거를 찾아 여행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 축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인가?

   ◉ 성경해석의 원리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중요한 원리 중의 한가지는 ‘성경은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축복에 관한 매우 확정적인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히7:7절은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이 말씀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직분자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평강의 왕이요 의의 제사장으로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직분이 곧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으로 연계되고 있다는 것이 곧 7장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7절은 그렇게 선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이지요.
      ○ 그렇다면 이 말씀만 보면, 신약교회에서도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축복하는 것이 옳고 나아가 목회자에게만 축도권이 있다고 확대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목사는 ‘성령님의 부르심(소명:Calling)을 전제한 직분이며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룩한 직분일 뿐 아니라 분명한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목사도 은사로서 교회를 섬기는 여러 지체 중의 한 지체일 뿐 아니라, 교회의 유일한 지도자가 아닌 집단 지도체제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신약교회에 있어서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높은 자이냐는 문제가 걸림으로 남게 됩니다. 사실 목회자는 구약의 제사장/선지자 직분을 그대로 이어받은 직임이 아니며, 나아가 신약에서의 모든 성도의 지위는 우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때,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쉽게 위처럼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할 것입니다.
      ○ 나아가, 신약은 물론 구약에서조차 높은 자가 아닌 낮은 자가 오히려 높은 자를 축복한 사례가 상당히 많이 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해석은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 이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한 예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창12:3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며 주신 말씀입니다만,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오늘 묵상의 주제와 연계하여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 축복을 하는 자는 이방족속들이고 축복받는 자는 아브라함입니다. 높고 낮은 자로 표현하기가 여의치는 않겠으나, 여하튼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축복한 예는 아니라 할 것입니다(창27:29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 창47:7은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니 야곱이 높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세상적으로 보면 바로가 야곱보다 훨씬 높은 자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한 예로 받아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하가 왕을 축복한 예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 왕상1:47(신복이 다윗 왕을 축복), 왕상8:66(백성이 솔로몬 왕을 축복), 대상18:10(이방인이 다윗을 축복)
      ○ 잠30:11절은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자식이 부모를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잠27:14절은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안면방해를 주의하라는 의미이지만 여하튼 이웃을 축복(수평적 축복)하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도 반드시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해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예들은 거의 평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이웃을 축복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눅2:34절에는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저희’는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입니다. 인간 선지자가 하나님이신 예수님까지 축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 눅6:28절은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제자들)이 이웃(불신자 및 대적자)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 눅10:1-16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포함한 70인을 따로 세워 각 고을로 전도여행을 보내시며 사람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제자들)이 이웃(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축복을 행할 수 있는 자의 의미.

   ◉ 제사장의 기도(민6:24-26)나 바울의 축도(고후13:13) 또는 히7:7절 말씀만 가지고, 축복 내지 축도는 목회자만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본래의 의미도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이렇게 받을 경우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현대의 목회자는 구약 제사장이나 신약 사도들의 직무를 그대로 승계한 직분이 아니며 다만 함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은사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 또 축복(축도)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한 예와 대등한 위치에서 축복한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 축도가 목회자에게만 허락된 권한이라는 인식은,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높다고 오해할 소지가 많아지게 되고, 목회자에게만 특별한 영적 권위가 주어진다는 선민의식으로 비화될 위험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현실 교회에서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기까지 합니다. ‘두려운 목회자, 거만한 목회자, 무소불위의 목회자’가 이의 반증인 것입니다.
   ◉ 사실상 성경의 축복을 이해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핵심은 이렇습니다. ; ①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아브라함이나 목회자가 아니다). ②축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 내부의 사람들(즉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선물)이다.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축복 받은 성도들을 통해 세상 사람으로 흘러가는 ‘확장된 축복’을 지향하신다(전도를 통한 구원 원리). ④부가하여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 간에는 서로 축복을 함으로써 이를 더욱 승화시켜야 한다(복의 누림 내지 증진).  
   ◉ 그렇다면 오직 목사에게만 축복권 내지 축도권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해석이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축복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목회자가 축복하면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축복권은 목회자의 배타적 전유물은 아닌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축복권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도 다른 지체를 위해 축복하는 임무를 소홀히 해서도 아니 됩니다. 이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모든 성도는 다른 이를 향해 축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기초로 한 견해입니다.
   ◉ 한 곳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찬송시 가운데 하나인 시149편은,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영화롭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 하반절은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이란, 5-9절의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 실행의 도구는 모든 성도(all his saints)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약교회에서도 특정한 목회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목회자든 평신도든 모든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정통신앙이라 알고 있는 목회자 교권주의(축도권도 이에 포함됩니다)는 성경의 전체적인 뜻과 다를 수 있다 하겠습니다.

▣ 나가기.

   ◉ 한국교회가 편집증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바울의 축도에는 어쩌면 커다란 오해가 가미되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즉, 신학에서는 바울의 축도를 ‘권위’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 같으나,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의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영적으로 높은 자라는 인식 하에서 축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수직적 축복 개념), 사랑의 마음으로 축도하고 있다’는 인식인 것입니다(수평적 축복 개념). 어쩌면 이 문제도 제자들이 그토록 헷갈렸던 ‘높은 자’의 망상에 의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높은 자에 대한 정신적 노이로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높을 수 있다(신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생각 - 참으로 떨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옳고 그름을 떠나 한번쯤 묵상해 볼 가치는 있다고 여겨집니다.
   ◉ 참고로,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축복권 논쟁에 관한 자료를 제법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는 바울의 축도는 사실 축도라기보다 서간문의 말미 인사(greeting)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 아무튼 이미 구원받은 성도로써, 지체를 향한 축복권의 행사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행위임을 상기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지체를 축복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 합니다. 샬롬. ♥  

[운영자의 첨언]

첨언 1:

일반적 의미에서 상대의 복(유익)을 빌며 기도해 주는 것은 성도라면 그 직분과 아무 상관없이 또 상대가 누구이든 해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나 타종교를 믿는 자에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단 그 때는 상대가 아직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즉 그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응답 안 해 주실 확률이 높고 또 불신자가 기독교에선 아무에게나 복을 빌며 기도해 주면 응답이 되는가보다 오해할 소지가 있기에 현실적인 복을 빌어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가장 먼저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들어오는 복을 달라고 하고 나아가 그 후 하나님을 알아 직접 기도하여 그런 문제들을 해결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첨언 2:

간혹 우리 말 축복(祝福)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므로 아무리 목사라도 “축복 합니다”라고 말하면 자칫 목사 자신이 복을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대신에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성도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대신에 반드시 “복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해야 옳다고 합니다. 한자로 ‘축’은 ‘빌다’는 의미인데 하나님이 또 다시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축’이라는 말 자체에 절대자에게 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준다는 뜻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경사에 목사나 성도들이 다른 이에게 “축복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습니다. 그 말은 같은 성도된 입장에서 축하합니다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일이 있어난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이 복을 더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두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의미는 당연히 하나님께 복을 빌어 그분이 복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지, 하나님더러 또 다른 어떤 존재에게 복을 빌어라는 의미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가 입에 굳었는데 구태여 구분하려다 오히려 기도가 막히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가능한 그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말하자면 ‘축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축하받을만한 좋은 복”이라는 의미로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구태여 구분하여 역으로 혼동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첨언 3:

예배에서 목사가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기도는 성도의 일반적인 유익을 위해 복을 비는 것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담임 목사가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거룩하게 기도해 주어서 더 크거나 목사만이 줄 수 있는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신자가 얻는 복을 비는 것인데, 이 복을 표현하는 영어 Blessing의 어원도 피를 흘린다는 Bleed에서 파생한 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직접 복을 빌어준 팔복도 모두가 천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방금 귀신이 쫓겨 가고 중풍 병이 나은 자들을 대상으로 가장 귀하고 더 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팔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신자가 얻는 영생이며, 그 존재가 바뀌어지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여 순교까지 가는 복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누릴 지복(至福-Benediction)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한 죄인이 구원 받아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할 수 있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성령의 간섭으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입는 새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그 구속의 비밀을 알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모든 세대에게 증거 하여 그 받은 신령한 복을 주위에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활동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이전의 인간의 비참한 상태, 복음의 능력과 은혜의 비밀, 구원을 얻은 자가 누리는 복과 권세,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변화 받고 수행해야 할 일들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 실제 훈련하고 실천하여 양육되어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복을 알아 누리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배도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 감사, 찬양하는 것이어야 하며 설교 또한 신구약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복음의 진리를 해석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도 결국 예수님 안에 있는 그런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축도문으로 인용되는 고후13;13은 분명히 당시 서간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마지막 인사말 형식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은 전부가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 관해 설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로 시작해 동일한 인사말로 마친 것입니다. 즉 고후13;13도 내용적으로는 십자가 은혜가 그 서신을 읽는 모든 자에게 임하기를 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축도나 그것을 그대로 인용한 한국교회의 축도문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예수님의 은혜가 항상 먼저 언급됩니다. 기독교의 축도는 단순히 절대자 하나님에게 현실적 유익을 성도들에게 베풀어 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누리고 행할 복(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의 팔복)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도를 할 때에 목사님들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독생자 예수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알게 해주신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라고 의식적으로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축도는 그런 예수님의 은혜를 설교한 설교자가 해야 하고 또 그 은혜를 바탕으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복을 빌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말은 설교는 예수님과 관계없는 성공 철학을 잔뜩 늘어놓고는 축도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병 낫고 사업 잘되는 복을 듬뿍 주고받는다는 기대나 의식이 있어선 아무리 담임 목사가 일부러 엄숙한 목소리로 축도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모임과 예배이든 평신도가 설교를 했다면 축도도 설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때는 물론 고후13:13을 잘 모르는 평신도로선 침례교식으로 일반적 기도로 하나님께 복을 빌면 됩니다. 반드시 고후 13:13의 형식대로 안수 받은 목사가 해야만 축도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던 반드시 설교도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고 축도도 주님 십자가 안에 누리는 은혜를 빌어야 함이 근본 원칙입니다.

따라서 평신도가 하는 단순한 기도, 일반적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갈구하는 기도로 주일 대예배도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신자들이 예배를 마칠 때에 목사가 거룩한 목소리로 거창하게(?) 복을 빌어 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 같고 무엇인가 많이 받고 돌아간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굳어져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목사나 회중이나 축도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제대로 가르쳐질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첨언 4:

앞에서 설명한대로 “축복합니다”와 “복을 빕니다”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목사님들 가운데는 축도도 그 기준으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즉 축도의 마지막 문구를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대신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로 마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칫 그런 복을 목사 자신이 주는 것 같은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축도도 설교의 연장선상으로 보아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역사가 성경에 약속된 대로 모든 성도들에게 이루어지라고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대언한 자의 위치에서 선언한다는 뜻으로 보면 됩니다.  

반면에 후자는 축도도 여전히 기도의 일종이므로 하나님에게 복을 빌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축도를 목사라는 직분이 주는 독점적 권세로 인식하지 않으며 예배를 집전하고 설교했으며 또 교회를 대표하여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대신 간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일 대예배를 포함한 모든 예배나 모임에서 안수 받지 않은 평신도도 설교뿐 아니라 축도도 할 수 있으며 하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단 설교나 축도 모두 예수님의 은혜만 증거되고 그 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복만 빌어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일반적인 현실적 경사에서 성도 상호 간에 복을 빌어 주는 경우도 그 근본 의미는 같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경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셔서 주신 것이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아침마다 비나이다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주일 예배에서 전용으로 축도하는 현재의 관행은 축도 독점권을 가져서가 아니라 설교한 자이니까 그 설교에 기준하여 복을 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5/2/2006

정순태

2006.05.03 01:52:48
*.95.73.2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목사 직분을 지닌 분들을 향한 불평이 다소 내재된 삐딱한(?)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솔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유없는 불평불만만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현실교회 오류의 상당 부분이 지도자인 목사님들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었기에 이를 숨김없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번 답변을 통해서도 크게 안목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축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목사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수용하겠습니다!
아울러 신앙의 선각자들이 깨우쳐 주신 한 마디의 경구 속에 감추어진 깊은 진리의 궁극을 다시 생각케 됩니다.
"엔 크리스토" -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진리!!!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아주 궁금했던 몇 가지 신앙문제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잘 모르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이겠습니까?
따라서 앞으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계속 목사님께 여쭘으로써 조금 귀찮게 해 드리고자 합니다.ㅎㅎㅎ
괜찮겠지요?

귀한 답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샬롬! ^^




김문수

2006.05.03 03:59:26
*.75.8.77

한국에는 장군이 많은것같아요.
뒷일은 생각말고 나를따르시오.
제가 은혜로 진리에대해 조금씩눈을뜬이후 감당하기 힘들었던부분은
악인은 공의를깨닫지못하나 여호와를 찾는자는 모든것을깨닫느니라.
찾으면 찾을수록 두려워지고 제자신은 점점더 보잘것없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신뢰할수밖에 없는 애매한위치에
서있다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공의를깨달은 신자들은
한국교회 시스템에서 버텨내기가 너무힘들다는것이었습니다.
신본주의로 포장된 인본주의는 대접받고,신본주의는 왕따를 당하고있으며,
교회를 전하고 목사를 전하는것이 전도로 인식되고 진리에 핵심 예수그리스도를
바로전하면 교인들마저도 정상으로 안보는 시대가 이시대이니.
이 시점에서 처음과 나중을 다아시고 미리말씀하신 하나님말씀이
자연적으로 일치됨을 느낍니다.
"인자가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보겠느냐 하시니라"

운영자

2006.05.03 05:57:52
*.108.173.250

김유상 집사님이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때늦게 정순태 집사님이 저를 신학 박사 공부를 시킨다고요.
솔직히 그간의 정순태 집사님의 질문에서 많은 도전과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 세개만 하겠다고 해서 오늘 아침 글을 올린 후에 휴~~!하고 한숨을 돌렸습니다. '
그런데 계속 질문을 더 올리신다고요? 그럼 지금보다 더 난해한 질문일텐데 박사 위에 더 높은 학위는 없나요? ^0^

성경을 알아가는데 무슨 학위가 따로 구별 되며 소용 있겠습니까?
직분, 학위에 상관 없이 모든 신자는 다만 성령이 각자에게 주신 깨우침을 서로 나누며 함께 자라는 일에
더욱 충실하기만 하면 되겠지요. 정순태 집사님의 질문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깊이 있는 묵상 나눔이 기대될 뿐입니다.

저로선 이 성경 문답 사이트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엡4:13)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2.11.04 22:41:49
*.109.85.156

교회내에서 직분을 수직관계로 주장하는 목사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없어도 수직관계로 이해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깨뜨려지지 않은 생각들이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허기에 직분 가진자를 적대시 하면서도 자신은 또 직분을 갖길 은근히 바라는 모순된 모습도 보이기도 하면서요.

사도바울의 축도처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알게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또 예수님 안에서 조금씩 자라가게 하시고, 십자가 은혜를 조금씩 더 깨달아지게 하시고, 그래서 오직 보혈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록 새록 고맙고, 지극히 큰, 너무나도 커다란 은혜임이 고백되어지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임재 안에 있는 복을 얻도록 그 몸 깨뜨려 주시고 피 흘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지는 일이 제일로 중요한 일임을 귀한 답글로 인해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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