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을 아셨는가?”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그 경륜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질문을 많이 하는 제목이 아닌가 합니다.
또 예수님이 세상 창조 때 함께 계셨고, 발등상이 되기까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문제까지를 포함해서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첫 번 질문은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비교적 여러 번 언급이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문답 #75(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할 줄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와 #86(하나님은 죄악을 계획하셨는가?)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글로 답변에 대신하겠습니다. 그 글들을 읽고도 추가적인 의문 사항이 생기면 구체적으로 다시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이 창조 때에 함께 동참하셨는가?”-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과 또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 확실한가?”-예수님의 영원성(永遠性)에 관한 질문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창조 때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신자가 예수님이 서기 원년에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 33년간 완전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고 죽으셨다는 사실은 확신을 하지만 그 이전 특별히 창조 때와 또 현재 어디에 계시는지에 관해선 별로 실감을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질문은 결국은 동일한 질문으로 하나의 해답을 요구합니다. 만약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성육신 이전 뿐 아니라 창조 때부터 선재하셨고, 또 영원토록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예수는 하등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하나님 예수만 확신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예수님이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부터 따져 본 후에 성경에서 창조 때와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예수님이 가장 하나님다우신 점은 무엇입니까?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빌2:6)는 성경의 분명한 기록 때문입니까?
십자기 부활과 승천의 현장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신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성경 기록을 통해서입니다. 또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기록된 내용도 온전히 그대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만약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 기록에 드러난 예수님의 신성(神性-Divinity)을 중심으로 그 분의 정체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 예언의 성취
영국 신학자 캐논 릿돈 교수는 “그리스도 안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된 구별된 구약의 예언”을 332개나 발견했습니다. 장차 올 한 인물에 대해 짧게는 수백 년 전에서 길게는 에덴 동산 때까지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수백 개가 넘은 예언이 선포된 적은, 또 그 예언대로 성취된 적도 역사상 없습니다.
나아가 한 인물에 의해 그 수많은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될 수 있는 확률은 도저히 인간 세상에선 없습니다. 심지어 수학자들은 그 중 열두 개 정도만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도 우주에선 일어날 수 없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332개나 넘게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시고 또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성취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도 수백 개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거나 또 다른 메시야가 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어느 누가 메시야의 모습을 가장하거나 자칭해도 도저히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로 성취된 332개의 예언을 더 이상 달성할 재간이 도저히 없기 때문입니다.(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이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며 또 그래서 그들이야말로 성경대로 최후에 구원 받을 종족입니다.)
아직 성취 안 된 예언들도 당연히 예수 안에서 성취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은 완벽하게 성취되었고 성취 안 된 것들은 재림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분이 재림하시고 세상의 종말이 오면 남은 예언들 모두도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1.2. 전능하신 능력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해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6절)
당신이 누구인가는 상식을 갖춘 자라면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 선생인가, 선지자인가, 메시야인가, 나아가 단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가는 당신께서 하신 일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치유해준 병들이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2천 년이 지난 현대의 첨단 의학으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입니다. 이 질병들은 간혹 전자 기구를 사용해서 그 불편함을 줄이거나 병세를 조금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지으신 이가 아니고는 고칠 수 없습니다.
의학이 더 발달되더라도 사고나 병균으로 그런 질병에 걸린 자를 고쳐줄 수는 있을지라도 나면서부터 장애자를 완전하게 고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의술로 죽은 자는 살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생명 자체를 만들거나 남에게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껏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리신 이는 예수님뿐이며 그것도 모자라 본인 스스로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외에도 물 위를 걷거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일, 또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잠재운 일등 도저히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당신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1.3. 십자가의 복음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스승에게 돌아가서 자신이 행한 이적 뿐 아니라 보고할 것이 하나 더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것으로 보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힌트일 수 있습니다.
당시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모든 종교에서 내세우는 구원관은 의로운 자 구원받고 악한 자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적 판단에서 도출된 구원관입니다. 그러나 이만큼 잘못된 엉터리 구원관도 없습니다. 영혼이 부패되어 죄에 찌든 인간들의 사회에서 의인과 악인은 상대적인 기준에 따른 구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의의 기준에선 단 한 명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을 볼 때는 몽땅 죽이든지 아니면 몽땅 살려야 하는 두 가지 길 뿐입니다.
흔히들 착한 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심판해야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만큼 불공평한 하나님이 없습니다. 착한 자를 구원하자면 반드시 어떤 합격점 즉 구원과 심판이 나눠지는 Cut Line이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평생에 거짓말 천 번이라는 Cut-line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거짓말 열 번 이내 한 사람이 천국 가거나 수만 번 한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아주 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거짓말 천한 번 했다고 지옥 보내고 천 번 했다고 천국 보내면 그만큼 불공평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남보다 의롭다고 자부하는 극도로 교만한 자들이 생각해낸 구원관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공평해지자고 덤비면서 기실 최고로 불공평한 하나님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인 궁핍이 아니라 영적으로 궁핍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 때까지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천국 갈 것 같지 않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되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자는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된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입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몽땅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죄에 찌든 인간들 몽땅 살릴 수도 없습니다. 죄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독생자의 핏 값으로 갚으시고 그 죄인은 그런 은혜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는 자에 한해 살려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원입니다. 인간이 상식적으로 맞다고 생각하거나 만들어 낸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시험을 체휼하신 후에 그 모든 허물과 죄들을 십자가에 안고 올라가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로마의 한 사형수가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분이셨던 것입니다.
1.4. 예수님의 자증(自證, Self-declaration)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만이 보일 수 있는 능력과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서 판단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 능력과 그런 구원이라면 누구라도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근거이자 증거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끝맺었습니다. 여기서 실족한다는 것은 시험이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죄를 짓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라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오실 그 이로 알아야 하느냐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느냐라는 의심이 들 때에 메시야로 알고 따르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예수님을 인간 스승으로 아는 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는 로마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는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현실의 형통과 유익을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고난만 받다가 스스로 십자가에 죽은 메시야가 어떻게 하나님이 될까 자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당시의 제자들이나 후대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실족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람들에게 설명한 말씀들입니다. 한 인간의 신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한 것입니다. 당연히 곁에서 보고 있던 서기관들로부터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라는 반발을 샀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인데다 당시는 하나님에게 죄로 인해 받는 천벌이라는 인식마저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의 그런 반발을 아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아예 직설적으로 당신에게 죄도 사하고 병도 고치는 권세 둘 다 있다고, 즉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만 고쳐 주고 죄 사함을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라든지,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 받는 기도를 함께 해 줄 테니 병을 고치는 문제는 의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그 자리에서 중풍을 고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죄마저 당신께서 바로 사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바로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지 진리를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보편적으로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관용구인 "나는 ~이다.(Ego eimi)"라는 표현을 19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친 부활과 생명의 도를 따라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사람들에게 특별히 창조주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3)고 반박했고 결국은 십자가 처형의 실제적인 죄목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변증가 C. S. Lewis 의 말대로 예수님은 미친 사람 아니면 당신의 말대로 하나님 둘 중 하나였고, 인간으로선 아예 그를 무시하든지 그대로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 실족하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1.5. 모든 세대의 증인들
후대의 신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아는 것은 자칫 교리적인 측면에 제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지식만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그분을 직접 만났고 배웠고 또 성령의 인 치심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요한사도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증언한 그대로였습니다.
오늘 날의 신자가 예수를 만나는 것은 개인별로 그 경험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인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압니다. 또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공통적인 근거는 자신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말씀으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에 간절히 기도하여 마음 문을 열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말씀 속에서 살아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교리적 체계를 넘어서 죄에 찌든 신자의 영을 예수님의 영으로 깨끗케 하는 분명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떤 모습이 되었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반드시 그 인생이 통째로 뒤집어집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인생은 360도로 달라집니다. 지금껏 살아 왔던 인생 여정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됩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났기에 그 삶과 인생마저 전혀 새롭게 진행되어 갑니다.
이런 한 인간 전체가 바뀌는 역사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도덕적으로 성결하고 사회적으로 선행을 많이 한 의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단지 자기들이 살았던 삶을, 그것도 특정분야의 것만을 모범으로 삼아 그대로 닮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인생 전체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가르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인간 존재 전체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단지 예수를 자신의 주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번복만 해도 아니 속으로는 믿되 겉으로만 부인해도 살아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산 채로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단지 그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온 인류가 그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기를 강렬히 원했는데 모든 세대에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1-3) 십자가에 돌아가기 직전에 제자들 앞에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당신이 죽고 난 이후로도 영생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이후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 받은 신자들의 변화된 삶과 인생만큼 그분이 하나님임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관해 의심이 든다는 것은 아직도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 변화된 삶과 인생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입니다.
2. 예수님의 선재성과 영원성
죠쉬 맥다웰이라는 기독교 변증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은 예수인가라는 질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에 있어서 하나님은 지상 생애 동안에 지상에 제한되고 있다. 반면에 전자에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육신 가운데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He walked among us." 1988)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예수님 당신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었다면 당연히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랬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재성과 영원성에 대해 구태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예수인가라고 하면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의 생애 동안에 그 사람을 통해 당신을 혹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이런 전제(前提)를 되풀이 말씀 드리는 까닭은 신자들이 예수를 생각할 때에 자꾸 인간 예수의 이미지부터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뜩이나 삼위일체 교리도 이해하기 힘든데다(성경문답 사이트 #77 참조), 창조 때에 예수님도 함께 계셨다고 하니까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신의 몸을 입은 상태의 인간은 절대로 영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이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육신도 입을 수 있으며 육신의 세계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창조 때에 함께 못하실 이유가 없고, 또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몸으로 역사 속에 들어올 수 있으며, 나아가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토록 중보의 사역을 감당 못하실 것도 없습니다. 이를 성경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찾아보겠습니다.
2.1.창조시의 예수님(先在性)
“태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라는 복수 단어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1:27)에서는 하나님은 “자기”라는 단수 명사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숫자적으로 여러 개를 나타내는 복수가 아니라 한 연합체 안에 여러 개체가 들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와 ‘자기’는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의 복수성을 분명히 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합동으로 사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예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만약에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 때에 그것이 강조되어 있지 않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일 수 없으며 또 그렇다면 십자가의 구원도 허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자존(自存)해야 하며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죄 없으신 하나님이 스스로 중보의 제물로 바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본인도 당신의 선재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4-56)
유대인들이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따져든 것에 대해 대답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의 요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데 당신께 영광을 돌렸으므로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1-46)
예수님이 전개한 논리적인 추론은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지만 정작 다윗 본인은 그를 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미 존재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다윗 훨씬 이전에 선재해 있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선재하신 메시야가 다윗의 근 천년 이후에 육신으로 오셨다면 그는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이 그런 시편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의 지혜로 지어낸 것이 도저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의 선재성, 영원성을 함께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 가문에는 태어나되 실제 육신적으로는 다윗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구약 예언의 성취 뿐 아니라 바로 이 문답의 진정성까지 같이 보장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면에서도 예수님은 더욱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2.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永遠性)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상기에서 살펴본 대로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시를 지었습니다. “발등상이 되게 한다”는 것은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이 사단을 완전히 멸절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패전국의 왕을 발로 밟았던 관습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내 우편’은 신인동형주의적(神人同形主義的, anthropomorphic) 표현으로, 단순히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 분의 통치에 직접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본래 영광에 들어가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교회와 우주의 통치권을 받으신 것입니다.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던”(빌2:6,7) 분이 이제는 거꾸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채워서 근본 하나님 본체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에는 성부 하나님이 보좌에서 성자 하나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간 지상에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실제 그 통치를 이뤄나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9,10,17) 요한 사도가 본 천국의 모습이자 계시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진 천사를 내려 보내어 사단을 무저갱에 가둘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사단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과 더불어 이 땅을 천년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그 후 잠시 옥에서 놓인 사단이 땅의 사방에서 하나님 백성을 괴롭힐 때에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고 사단을 불과 유황 못에 던져 영원토록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진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모시킬 것입니다.(계20장)
“모든 눈물을 그 분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21:4-7)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요한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에 당신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22:13,16)
예수님은 시작과 끝, 즉 창조 때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 당신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선조가 될 뿐 아니라 자손도 된다고 합니다. 다윗과 아브라함 이전에 선재하셨던 하나님이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 메시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언조차 바로 당신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증거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재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창조를 하셨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메시야였으며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장차 사단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부활한 성도들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때까지 말입니다.
9/15/2006
일전 마리아를 극진히 사랑하는 모 자매님과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을 때, 후속 글을 써 놨다가 목사님의 만류로 공개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저도 목사님과 동일한 시각의 말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선제성 문제입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위상을 하나님의 어머니, 인간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미니 등 3가지로 설명하려 했습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선제성을 망각한 전부 틀린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 글에서는 목사님이 지적하신 다윗의 고백도 다루었었습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교리는 전혀 성경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마리아를 통해 육신으로 오셨던 것일 뿐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 진리는 마음을 비우고 성경을 읽는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진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 또한 같다고 봅니다.
성경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금방 "그렇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더욱 정확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