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저의 평생 직업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그림 그리는 일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기 전에는 온갖 형상의 그림들을 돈 버는 재미로 그려 냈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친 후의 그림을 그리는 자세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의 20장 3~5 절중에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를 가슴에 새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매사에 조심스러워 진 것입니다. 주문되어진 일이 그리스신화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많은 신 들을 그려내야 하는 어린이용 만화서적으로 1년 작업량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저의 생계를 유지키 위해 있지도 않는 허구의 신들을 형상화 하는 일을 해도 될 것인지, 아니면 단호히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고 일을 거절해야 할까요?
사실 이런 일들을 거부하면 일이 줄어들어 생계가 곤란한 지경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즉.. 귀신, 도깨비, 설화와 신화, 전설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 용납이 될지,, 저의 너무나 부족한 성경지식으로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결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제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일을 하지 못해 곤경에 처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 실족 하지 않게 목사님의 가르침을 주시기 원합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초상 을 그려도 되는지요?
분명히 예수님의 외모에 관한 말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연예인 같이 특출한 외모를 지니신 분이 아니요. 사람들 중에 발견되거나 눈에 띄지 않는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지나가는 행인처럼 외모를 지니신 분이라고 성경에서 읽은 것 같습니다.
또한 어느 저명한 분이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는 것도 우상이 될 수도 있다라는 글을 본적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목사님의 명쾌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제게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기에 감히 여쭙니다.
[답변]
개인적으로 미묘한 문제이자 쉽게 판단하기 힘든 문제를 질문해주셨습니다. 막상 생계가 걸려 있다고 하니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제 삼자가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참 애매한 것 같습니다.
아래에 드리는 답변에 대해 혹시라도 질문자님의 신앙적 지식 내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로는 절대 받아들이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제가 질문자님의 입장에 처했다 해도 똑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며 생계가 걸려 있을 때는 더더욱 약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이미 올라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라.
사실 신자라면 자신의 직업과 크리스챤 윤리를 어떻게 조화 적용시키느냐는 문제로 유사한 고민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직장인들이 저녁마다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회식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상납이나 사례용 돈 봉투가 오가는 관례를 따르느냐 거부하느냐, 또 가게나 사업을 하는 분들이 주일날 영업을 하느냐, 술 담배를 팔아도 되느냐 등등 연관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신자의 입장에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 윤리는 세상 윤리보다 더 고급한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선행을 베풀되 신자니까 최고로 큰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에선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도 용납하기에 미워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경대로 원수를 용서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사랑하는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선 평균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 점수로 따지자면 약 60점까지 선행을 해도 의인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당연히 그보다 더해야 한다고 믿지만 신자도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100점까지는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까 자꾸 61-99점 사이에 어느 정도가 적당한 수준인지 궁금해 합니다.
성경 윤리가 분명히 세상 윤리보다 점수로도 엄청 앞서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그 목적과 준거(準據)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윤리는 오직 “인간 공동체의 존속과 유익”(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해악만 안 끼치면”(준거) 개인이 어떤 짓을 해도 용납합니다. 쉬운 예로 동성애나 혼전 성관계 등이 아무 죄가 되지 않은지 오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서 하는 일이며 그 일로 제 삼자와 공동체에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경 윤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하나님 왕국이 확장되고 그 구성원인 성도가 거룩하게 변해야만 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되게 만들어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키우라는 창조 목적에 위반되며, 혼전 성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준 배필과 결혼할 때까지 자신의 성과 육신을 성결하게 보관해야 하는 것을 어겼기에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단순히 신자니까 더 큰 선행을 해야만 한다는 더 고급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당신의 피조물로 복수와 신원은 당신의 몫입니다. 또 아담의 원죄 이후 하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 원수보다는 오히려 신자가 영적으로 피폐해져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더 늘리고 그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라는 관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선 모든 일을 세상 사람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 선악 간을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평신도가 어떤 구체적 사안을 두고 성경에서 말하는바 하나님의 기준에 정확하게 맞추어 보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기도한다고 해서 뚜렷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딱 부러진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판단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는데 과연 성경적인지 비성경적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에 인간인 나 대신에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럼 잠간만 묵상해도 의외로 금방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질문자의 입장에 있다면 문의하신대로 “귀신, 도깨비, 설화와 신화, 전설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을 그려내는” 일을 과연 하시겠습니까? 아니 용납이라도 하겠습니까? 단순히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마디로 “절대 안 돼!(Never)”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성도 자신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데에 아무런 유익이 안 되고 오히려 해악이 되기 때문 아닙니까?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감히 추측해보건대 질문자님도 이미 그 일을 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자체가 벌써 신앙 양심에 걸렸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이 와 있어서 구체적인 성경의 말씀과 연결은 못 시키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이미 그 영혼에 찔림이 있게 됩니다. 성령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계신 것이 신자의 영에도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업이 화가라 고객의 주문에 응해야 하고, 그림 그려서 책이 출판되면 세상 사람의 지식을 늘리는데 보탬이 되고, 또 이런 일을 종교적 이유로 거절하면 그동안에 쌓아 놓은 인간관계에 금이 갈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세상 윤리로는 아무 죄가 아니고 오히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습니다. 나아가 생계가 크게 걸린 문제라 하나님도 양해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판단하는 데에는 사실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신자라도 기본적 도덕적 양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해선 안 될 일은 쉽게 알지만 단지 그 구체적인 성경적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또 자꾸만 현실적 제약 요인들 때문에 이미 생긴 마음에 찔림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방해 받을 뿐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오히려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때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에 동원되어져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성령이 속에서 인도하시는 음성, 즉 신앙 양심에 걸렸던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단순히 인간적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이 어떤 현실적 제약 가운데도 당신의 크신 은혜와 권능을 체험케 해주십니다.
화가라고 해서 모든 고객의 요구를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아주 잘나가는 어떤 무당이 찾아와서 칠성신의 얼굴을 이렇게 저렇게 그려 달라 그것도 일 년치 작업량을 주고 대가는 일시불로 미리 다 지불하겠다고 하면 그려주겠습니까? 아무리 생계가 궁핍해져 있어도 당연히 거절할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이런 식의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일 년치의 작업 분량이라 상당한 금액에다 그 동안 다른 일을 잡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아주 좋은 일거리라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 요인들이 질문자님의 믿음이 작동하는 것을 방해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자꾸 생계가 먼저 걱정된 것은 부지불식간에 사단의 꾐에 넘어갔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에 동원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아이들에게 만화로 소개하는 것이 크게 나쁠 것도 없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지식을 증진시키는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신화를 믿게 하고 우상에 물들게 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이 일은 질문자님이 거절해도 어차피 불신자 화가가 할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성경윤리로 분명히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 용 만화니까 별것 아니겠거니 생각해선 안 됩니다. 아동용 만화라서 더욱 안 됩니다. 조금 크면 신화가 꾸며낸 이야기인줄 알지만 어린이는 스폰지처럼 있는 그대로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입니다. 또 그렇게 어려서 받아들인 이야기는 커서 픽션인줄 알아도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사실인양 착각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는 참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에 큰 방해가 됩니다.
물론 이 일을 거절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정말 진지하게 질문자님의 믿음을 설명한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됩니다. 당장에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대신에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정말로 신자답게 정의롭게 행한다면 그들도 역시 신자는 다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일을 통해서 질문자님 스스로 믿음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외적 제약 요건은 인간으로 더욱 내적인 성숙을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신화의 우상들은 그리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해 놓은 마당에 신자 된 체면 때문에라도 더욱 언행에 조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도 사실은 참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참 신자를 만나면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집니다. 이 일로 인해 당장에 금가는 인간관계는 현실적 이해타산에 바탕을 둔 세상 관계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깨어지고 난 후에는 오히려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참된 인간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데메드리오 은장색 이야기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네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기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만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행19:24-27)
에베소에는 아데미라는 많은 유방을 가진 매우 기괴한 여신상이 있었는데 유방이 많아 생식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사회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웅장했고 많은 참배객들이 몰려와서 신전 주변에는 음식점, 숙소, 기념품점이 성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은으로 여신의 기념품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기독교가 융성하게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우상은 헛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돈 벌이가 시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데메드리오가 나서서 동업자를 선동하는 바람에 바울은 그들에게 잡혀 두 시간이나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바울이 직접 은장색을 상대로 그런 기념품을 만들지 말라고 지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가 전파되자 결과적으로 그런 우상을 형상화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뜻은 명백합니다. 신자는 우선 그런 사람들의 생업과 상관없이 복음의 진리부터 전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영혼의 구원이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오히려 복음에 방해가 되는 일로 돈을 벌거나 또 그런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면 본말(本末)이 완전히 전도된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에베소에선 마술사들이 섣불리 사도들의 흉내를 내다 귀신에게 크게 혼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악귀 들린 자들이 예수는 두려워해도 마술은 오히려 이겨내는 것을 보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19:18,19)
쉽게 말해 미신과 우상에 대한 책들을 다 불에 태웠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처음 믿게 되면 그전까지 갖고 있던 부적이나 우상에 관련되는 책과 물품 등을 꺼내어 다 태우지 않습니까? 우상은 헛것이고 물품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우상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더럽고 흉악한 세력이 그 물품에 붙어 있어서 계속해서 신자를 미혹시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를 지금에 와서 그대로 믿는 자가 많지 않아 거의 고전 문학 작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히 그 신들을 믿고 경배했을 뿐 아니라(행14:12) 지금도 축제 형태이긴 하지만 그런 신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인류 사상사적으로 봐서도 인본주의 사상의 근원은 헬레니즘이었고 신본주의 사상의 출발은 히브리즘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기독교에 비교해 무엇이 잘못인지 정확하게 아는 신자가 아니라면 자칫 인본주위 사상에 물들 수 있습니다.
파리 올림픽 때에 영국의 단거리 선수 에릭 리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 출전하면 금메달은 거의 따 논 당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열리는 날이 주일이라고 육상선수로서의 명예와 금메달을 포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그로서리 마켓(한국으로 치면 구멍가게)을 하다가 술 담배를 팔아야 하고 주일날 가게 문을 여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부부가 각자 수입이 훨씬 적지만 공장 직공으로 전업했습니다.
일 년 치 작업분이라면 아주 큰일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만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금액으로 따져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주지 않더라도 지출 분을 줄이고 또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쓸 데 없는 세상 향락비용을 스스로 줄이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자진해서라도 궁핍에 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꼬 하나님의 사람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대하25:8,9) 돈을 벌게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걷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나중에 반드시 그보다 더 큰 손해를 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의 입장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신자니까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신자가 믿음으로 살면 필요한 것 다 채워주신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자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신자를 궁핍에 처하게 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먼저 기꺼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궁핍에 처할 것도 각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초상화를 그려도 되는가?
오래 된 명화 ‘벤허’는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닌데도 그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가지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 것이 바로 된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겨우 세 번 정도 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정면 얼굴은 한 번도 비춰주지 않는 데도 더 은혜가 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2:6-8)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 벽촌의 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가장 평범한 유대인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자랑하는 것은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자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그분의 이 땅에서의 생애의 흔적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 말고는 없다는 것도 아주 큰 자랑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으며, 정확한 출생일도 모르며, 얼굴과 신체 모양도 알 수 없고, 유년기와 성장 시절의 기록이 없다는 것 모두가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하나님다우심에는 이 땅의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바울은 유대 최고 율법사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로 율법에 정통하였기에 율법과 비교하여 복음의 진리를 잘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도 유명한 랍비의 제자였다면 후세 사람들이 틀림없이 산상수훈의 가르침도 그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또 결혼하여 자식을 가졌다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십자가에 쉽게 죽기 힘드셨을 것이며 그 자손의 정체성 또한 반신반인의 이상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 즉 가장 평범한 유대인의 모습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정확한 얼굴이나 신체적 조건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분의 얼굴을 그리면 아무래도 그분과는 다른 얼굴이 될 뿐 아니라 화가의 평소 선입관, 편견, 가치관 등이 그 얼굴에 반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본연의 얼굴이 아니라 화가가 만들어낸 예수님이 되며 또 그 초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은연중에 화가의 메시지가 전해지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의 얼굴을 자기의 얼굴로 대입해서 그렸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또 현재 시중에 나도는 가장 평균적인 예수님 얼굴은 사실은 유대인 얼굴이 아니라 눈이 초록색인 서구인(Caucasian White) 얼굴입니다. 초록 눈은 서구인들이 가장 매력적인 색깔로 꼽는 것으로 평균적인 유대인의 눈 색깔과는 다릅니다.
또 모든 예수님의 그림에는 얼굴이나 몸매가 굉장히 온유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목수(Carpenter)라고 번역된 단어는 석공(石工)의 뜻도 있으며 실제로 나사렛 지역은 고래로 석회암이 아주 풍부해 돌 공예가 발달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키는 몰라도 우리 생각보다 근육이 단단하며 건장한 체격을 가졌을 것입니다.
성전을 청소한 사건(마21:12)이나, 회당에 있는 자들이 예수를 잡아 낭떠러지로 밀쳐 내리려 했지만 그 가운데로 지나 간 사건(눅4:28-30)을 보면 실제로 아주 힘이 세었을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건하신 분이 처형 전날 밤에 얼마나 곤욕을 치렀으면 십자가에 못 박자 발을 꺾기도 전에 운명하셨겠습니까?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한 죽음이었으며 그래서 대속의 은혜 또한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너무 유약한 이미지로 그리면 실제 예수님 모습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반드시 어떤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해서 어떤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습니다. 모델을 두고 그리거나 이미 그려진 그림을 참조해서 그릴 수밖에 없는데 결국 어떤 특정인의 이미지로 예수님의 형상이 제한되어 버립니다. 특이하게도 신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꿈을 자주 꾸지만 공통적인 이야기는 예수님인줄은 분명히 알겠는데 그 얼굴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이 어떤 특정인의 인물에 비교되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원래 인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찰에 있는 부처 조각이나 그림은 전부 엉터리입니다. 한국인들이 관상학적으로 가장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그것도 한국인의 얼굴로 바꾼 것입니다. 실제 석가와 상관없이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어낸 부처가 됩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면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 자체가 어떤 형상을 본떠 만든 우상이 된다는 의미보다는 구세주 하나님이신 그분을 어떤 특정 인간의 이미지로 제한하는 잘못이 더 큽니다.
물론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같이 성경의 특정 사건을 성화로 제작할 때는 예수님을 당연히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는 지금껏 그려진 서양인 예수님 얼굴이 모든 사람의 눈에 익어 누가 봐도 예수님으로 쉽게 알 수 있기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좋겠지요. 반면에 위에 든 이유들로 해서 예수님 혼자서 그것도 얼굴이 크게 정면으로 나오는 그림은 가능한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질문자님께서 처한 형편에 따라 복음을 소개하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오직 한 가지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시면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리스 신화를 아동용 만화로 그려선 안 되지만 예수님 이야기는 아동용 만화로 얼마든지 그려도 되고 또 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10/21/2006
"만약 하나님이 질문자의 입장에 있다면 문의하신대로 “귀신, 도깨비, 설화와 신화, 전설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을 그려내는” 일을 과연 하시겠습니까? 아니 용납이라도 하겠습니까? 단순히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마디로 “절대 안 돼!(Never)” 아니겠습니까? == "절대 안되는것 입니다"=="아무 형상도 만들지말며"...!!
호흡이 끊기는 날까지 절대 명심하고 살아야 할 아버지 여호와의 명령 이신것을 명확히 알게 해 주셔서 잔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예수님의 초상!" 보일듯 보이지 않는 모습, 예수님의 초상은 많은 신자들이 한점 얻고싶어 하는 그림중 베스트 1위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자신있게 왜!? 주님 초상을 그려서는 안되는지 또 집안에 걸지말아야 하는지 설명 드릴수있게 되었습니다 , 이제는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 하시던 광야와 들판과 군중들과 풍경을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주력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시는 목사님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백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