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침노해 빼앗으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조회 수 1830 추천 수 96 2008.12.23 21:04:32
천국을 침노해 빼앗으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성경을 읽다가 상기 구절에서 탁 막히면서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소망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생각한 것이 맞는가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생각하시는 대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우선 강단에서 간혹 이 말씀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오류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상기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구원관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믿어라?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별히 담임 목사에게 순종하며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천국은 침노해서 빼앗아야 하므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고 봉사하며 전도하여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입니다. 축복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빼앗아 올 수 있고 또 빼앗는 만큼 누릴 수 있다는 식입니다.

본문은 근본적으로 천국에 관한, 그것도 특별히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현실에서 누리는 축복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천국이란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이기에 현실에서 복을 받는 것도 그 통치의 일부이긴 합니다. 그렇다 해도 신자가 열심히 믿는 만큼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받을 복의 질과 양을 인간 스스로 정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할은 단순히 채점하여서 복을 나눠주는 일종의 관리인으로 그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으로 오직 당신이 세우신 계획과 목적대로 이 땅을 운행해 나갑니다. 그분은 결코 기계적인, 말하자면 동전을 집어넣으면 원하는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 같은, 분이 아닙니다. 잘 믿는 만큼 복을 받는 모습이 일부 결과적 외형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믿음의, 특별히 복을 받는, 원리로 가르쳐져선 안 됩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본질과 복의 의미에서부터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선 믿음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기에 신자가 그분과 평생을 동행하면서 유지해야 할 인격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하나님께 받아 누릴 복도 예수님이 팔복 강화에서 말씀하셨듯이 반드시 신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풍부하든 궁핍하든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신자가 누릴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Give-and-Take의 법칙이 없습니다. 믿음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공식이나 법칙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각 신자에게 특유의 계획과 뜻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양으로 범사에 간섭하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적극적으로 믿기만 하면 그만큼 복을 누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의지력이 강한 자만 득세하게 만든다는 논리로 귀착됩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되어버립니다.  
나아가 담임 목사나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닐 경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참 신자라면 당연히, 단 교회와 목사가 성경적일 때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한 재충전입니다.

물론 안식일을 주 안에서 보내고 무엇보다 주를 경배하기 위해 주일에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 외의 모든 모임과 행사는 신자답게 변화시키며 영적으로 성숙시켜서 세상에서 죄악과 싸워 이기는 십자가 군병으로 양성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교회에만 자주 모여서 신자끼리 교제하고 또 적극적 믿음으로 복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주님께 충성하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복을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그 복 가운데는 핍박과 순교의 복도 당연히, 아니 훨씬 더 자주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믿음과 복, 그 각각의 본질과 상호관계를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대로만 가르치고 실천해도 천국은 신자의 본인과 가정과 직장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온 땅에 누룩처럼 번져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고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고 있기에 자발적이고도 필연적인 열매의 모습으로만 드러나야 합니다. 아니 정말 온전한 믿음 위에 서있다면 성령님이 강권해서라도 그렇게 만드십니다. 요컨대 구태여 적극적으로 믿은 만큼 복을 빼앗아 가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문법적 표현  
  
본문을 해석함에 애로를 느끼는 것은 헬라어 원문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사실상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침노를 당하노니”라는 부분인데 헬라 동사 ‘비아제타이’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말로는 분명 수동태 형식으로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침노’라는 아주 공격적인 단어가 사용되다보니 천국이 어떻게 인간이 빼앗을 수 있는가라는 의아심부터 듭니다. 어쨌든 신자로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주 굳세고도 뜨겁게 믿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용어는 예수님이 직접 선택해서 사용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먼저 수동태 해석의 경우는 천국은 동작의 영향과 결과를 받는 입장이며 주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 강탈당하거나 그 힘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힘이 있는 자가 빼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중간태는 동작의 영향과 결과가 스스로에게 미치는 재귀적 용법으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지만 본문에선 문맥상의 뜻이나 동작의 주체가 명료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에 재귀적 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지금 아주 강력하게 도래되었고 아주 역동적 적극적으로 확장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삼의 힘이 개입되지 않고서 천국 자체의 큰 힘으로 말입니다. 이런 의미를 재귀적 표현이 없는 우리말로는 간단명료하게 번역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어 자체의 동사의 태와 상관없이 동작의 주체가 사단 같은 흑암의 세력이나 그에 미혹되어 있는 불신자들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이, 그것도 이제부터 예수님이 실현시킬 천국이 그들에게 침노당할 수 없으며 그들이 차지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작의 주체는 천국 스스로이거나(중간태) 혹은 신자들이(수동태)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되었든 그 해석은 한 마디로 천국은 이제 적극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니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믿어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 됩니다.

그럼 위에서 오류라고 언급한 해석이 옳다는 뜻이 됩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성경 본문의 문법적 분석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천체 문맥에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문맥에서의 해석

우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씀을 먼저, 말하자면 강조할 목적으로, 하셨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요한의 때 이전과 이후가 확실하게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천국이 침노를 당하지 않았고 또 침노하는 자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천국에 관한 광의의 해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일단 배제 되어야 합니다. 만약 천국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해석하면 구약 시대에는 그 통치가 적극적으로 믿지 않는 자에게도 임했지만 이제 신약 시대부터는 적극적으로 믿는 자에게만 임한다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통치 원리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는 세상이 보존되고 또 당신의 법칙대로 운행되도록 해서 먹고 마시는 생존 환경을 제공하는 일반은총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을 오직 믿음으로 따르는 자는 구원으로 인도하여 영생을 주시며 또 그 인생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특별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시대와 장소가 달라졌다고 해서 수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에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에 머문 자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분으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았듯이 구원의 원리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합니다.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라는 뜻입니다. 구태여 요한을 따로 언급한 이유가 동시대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요한이 한 역할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광야에서 기쁨으로 외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언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즉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실제적 도래를 크게 외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구약에 예언된 것마저 요한으로 인해 정확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 전에(10절)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말3:1)에 대해 미리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선 반드시 예수님 오시기 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야만 합니다. 아니 문맥상의 의미도 실제로 그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에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면 과연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습니까? 그 답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서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이 땅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강화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인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답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으며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크다고(11절)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고매하거나 도덕적 선을 많이 행했거나 종교적 실력과 능력의 크고 작고를 따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예언만 했던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는 달리 요한은 이제 정말 오셨다고 선언했고 또 직접 육안으로 보았으니 그들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바로 이어지는 12절의 천국과 연결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후에 이 땅에 침노(도래)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구약 성도들도 이미 가 있는 요한 당시 기왕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 성도와 달리 메시아를 직접 보긴 봤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한 구속을 완성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권능 안에 완전히 들어온 신약 시대 이후 천국에 가는 성도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침노하여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은?

이제 본문에서 특별히 말하는 천국의 의미가 아주 좁혀졌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며, 구약성도들이 이미 가있는 상존하는 천국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실현할 천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치 병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 받은 자를 말씀으로 위로하셨던 그분의 사역이 천국이 아닙니다. 기존의 종교적 기득권층을 뒤엎고 소외 되고 핍박 받는 자들을 세웠던 개혁도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열두 명의 제자와 함께 가르침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드시고 삼년 간 가꿔나간 것도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고 했지 않습니까? 별다른 사역도 하지 않은 신약시대의 일반 성도가 마지막이자 제일 큰 선지자로서 순교까지 당한 요한보다 그런 측면에선 결코 더 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13-30절) 즉, 예수님의 부연설명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순수하게 믿었느냐 믿지 못했느냐에 따라 천국의 기준이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잔치에 아무리 초대해도 응하지 않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입은 고을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 모두가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도 알아채지도 못해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것과 침노하여 빼앗으라는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천국이 침노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적극적으로 구원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앞에서 언급한 중간태로 해석함) 예수님이 사역하시고 가르치심으로써 하나님 당신의 실체를 직접 보이셨습니다. 또 당신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노예가 되어 있던 인간을 구원할 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침노하여 천국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믿으려고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헌신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개인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외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구원 받을 길이 없었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또 율법을 잘 따랐다는 것으로는 구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 인정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로부터 지금까지 즉, 당신께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 땅은 천국 복음에 의해 적극적으로 침범 당하고 있으며 구원의 길이 가시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그 잔치의 초대에 응하여서 어린아이 같이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의 구세주 되심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범 당한다”는 아주 공격적이고 강력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과 죄인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확실하게 구원을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영혼을 찌르는 힘이 너무 강해 항거할 수 없으며 또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나게 함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와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십자가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으려면 즉,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이 무능, 무력, 무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죄에 빠져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 된 자리에 있음을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로선 도무지 구원의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 없는 이 땅이 아무 희망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정말 마음이 가난해지고 영혼이 갈급해져서 오직 천국 영생을 소망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구원 받은 자들도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는 똑 같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모세는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히11장에서 발췌) 성경은 분명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봤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수님이 구태여 천국이 침노하였고 또 신자더러도 침노하여 빼앗으라고 말한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구원여부는 죽어 봐야 압니다. 유대교는 선택된 민족이기에, 이슬람은 알라에 의해 숙명적으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예외는 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의 확신을 개인적으로 생전에 미리 갖는 경우는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뿐입니다. 그야말로 천국이 이 땅에 적극적으로 침노한 것입니다.  

생전에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신자더러도 예수님처럼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서 적극적으로 이 땅을 침노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부터 가까운 이웃을 거쳐 차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십자가 보혈의 권능에 힘입어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 뜨겁고도 적극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여 많은 복을 받으라는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오직 예수의 향기만 드러내는 사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고 죽으시고 부활하여 천국을 실현한 것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신자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여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먼저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그분이 누구인지 바로 깨닫고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12/23/2008

사라의 웃음

2013.01.28 22:30:03
*.109.85.156

천국을 침노해 빼앗는다는 의미를 정말로 오래도록 그리 배워왔습니다. 나의 믿음을 키워서 기도로 빼앗는 것, 그 천국은 믿음으로 받을 복을 이 땅에서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배워왔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에 아주 적극적이였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그런 저급한 물질의 복이 아닌 이웃을 위해 나눕고 베푸는 좀 고급한 복을 구하고 있기에 구한 것 보다 더더욱 무수히 쏟아 주시리라 믿으면서요. 결국 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는 의미도 내가 복을 더 많이 받고 싶다라는 속내가 있음에도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이웃을 위함이라고 스스로에게 조차 마치 최면을 걸은 듯...

예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그 몸 쪼개시어 천국문에 되어주신 사건 앞에서, 이런 추악한 죄인을 어찌하여~~ 이 죄는 놀라와 경악할 죄악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예수님이 쟁취하여 주신 천국이기에 너무도 감사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물고 싶었습니다.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감 보다는 예수님이 친히 이루어 주셨 듯이 또 이루어 주실 터이니 그저 조용히, 가만히, 묵묵히 따르고만 싶은 그런 안주하고 싶은 맘의 비롯을 또 겸손이라 착각하면서요.. 이런 잦은 우를 오늘 또 들여다 봅니다.

제 소견대로 제 편한대로 생각하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라 여길 때, 이렇게나 순종하기 어려운 자신임을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함의 모습을 볼 때.... 가르쳐 주시는 말씀 앞에 다시금 맘을 조아리며 도우심을 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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