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위선자 같아 예배에 집중이 안 됩니다.
[질문]
속은 시커멓게 끓어오르고 분노는 가득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에 참석 할 수 있는 유치한 수준이 저의 한계입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만 찬송가를 부를 때의 제 모습은 정말 가증스럽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의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자신이 너무도 싫습니다. 심지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제 믿음의 수준이라면 “버리운 자”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도 저는 쉽게 모든 것에 대해 겸허해지지 못한 채 자신만 변호하기에 급급한 또 다른 위선에 빠집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제 현실적 궁핍함에 대해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답변]
질문자님의 표현이 조금 과격해서 그렇지 모든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예배에서 느끼는 감회일 것입니다. 저 또한 때로는, 아니 자주 그렇습니다. 질문자님만이 갖는 개인적 한계나 잘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연약함 속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죄의 본성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기에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 수시로 죄를 짓는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예수 믿기 전의 상태로 자꾸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참된 은혜와 권능을 제대로 받아 누리기는커녕 복음이 갖는 의미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의미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어야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다시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당신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까닭입니다.(요3:16) 인류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그 은혜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몇 가지 구체적 의미가 포함됩니다. 먼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러합니다. 한 결 같이 영적 점수로 따지면 완전히 빵점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열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감옥에 갇힌 어떤 흉악한 사형수라도 감옥 밖의 어떤 의인보다도 죄가 더 크거나 많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같이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위인이라고 칭송 받아도 그러합니다. 그들의 현실적 업적과 올바른 인간관계가 다른 이에 비해 월등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깊숙한 심령의 실체를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봤을 때에 온전하기는커녕 우리와 그 성정이 동일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문제는 아무 인간도 스스로는 자기 죄를 씻을 길이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행으로도 자기가 행한 모든 죄를 다 갚지 못합니다. 죽기까지 노력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원천이 사실은 자기 본인입니다. 어떤 외부적 요인이나 다른 사람의 탓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고 추하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적 실체는 전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더럽고 추하다고 해서 항상 흉악한 죄만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그분과 원수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원천인 그분에게서 어떤 좋은 것도 공급 받지 못하기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제외시키면 인간끼리의 경쟁으로 인해 모든 도덕적 죄들도 파생된다는 뜻입니다. 간혹 본성적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해도 그 양심 자체도 타락한 상태인지라 상대적, 일시적, 부족한 선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는 인간중심적인 교만마저 내포됩니다.
요컨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따져도 인간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상태는 전부 빵점입니다. 하나님이 죄 값을 물으려면 모두를 당장 죽어야 마땅하지만 긍휼에 풍성하시기에 차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죄를 씻을 방도도 없기에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야만 합니다. 아니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의 의로 천국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즉, 착한 자가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기에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결국 죄 값은 지불하되 죄인은 살리려면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 희생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죄인이라 죄를 짓는다면 그 죄인을 바꾸어야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령으로 간섭하여 그 영혼을 새롭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하기는커녕 사단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이 자신의 타락된 영혼을 스스로 바꿀 길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기독교의 구원 교리가 객관적으로 믿어지는 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자기 개인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주관적 체험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어 신자가 된 연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도덕적 의는 빵점이요, 스스로 죄를 씻을 방도는 전무했으며,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어서 죽음의 형벌만 기다리던 사형수요, 사단에 묶여 있던 흑암의 자녀요, 추하고 더럽고 썩어 없어질 존재였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단지 십자가에서 주님이 실현하신 의 앞에 믿음으로 겸비하게 엎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바라보시고 천국의 영광을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 이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구원 이후의 신자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추가 설명이 필요케 됩니다. 무엇보다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개인적, 체험적,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났다면 그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 인생이 이전과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었다면, 비록 아직은 온전히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런 방향으로 향하고만 있어도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크고 작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수시로 생길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만 하자가 없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버리운 존재가 아니며 버려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 까닭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거룩해져서 구원 받은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 절대 거룩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을 주셨는데, 또 다시 인간 스스로 거룩해지지 않는다고 그 구원을 취소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 스스로 일관성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구는 폭군이 되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항상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위치에서 그분과 화목하게 된 것뿐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려 하기는커녕 그분의 실존성마저 의심 혹은 불신하면서 오직 자기 영달과 안위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턴 그분의 뜻에 따르려고 삶의 방향만 바뀐 것입니다. 그 영혼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도 세상의 쾌락과 죄를 추구하게 만들었던 사단의 묶임에서 풀려나서 그 영이 하나님 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늘의 소망을 가지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이후의 모든 인간이 그 원죄 아래에 태어났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졌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생명의 길과 사단의 죽음의 길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고 그 영혼이 오직 세상으로만 향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습니다. 타락 전의 아담은 죄 자체를 몰랐지만, 원죄 이후에 구원 받은 신자는 그 죄에 찌든 본성마저 고쳐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대신에 영원토록 성령을 내주케 하여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의 죄인으로선 스스로 죄를 씻을 길조차 없기에 성령의 거듭남으로 당신과 화목케 함으로써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제 구원 후에도 죄의 본성은 살아 있기에 성령의 인도에 따르게 함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구원을 받을 때나 구원 이후에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그분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나는 너무나 미약하고 불완전하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지만 주님이 나의 그런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그분께서 나를 거룩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 혼자는 죄에 지지만,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그분 안에 있기에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나 된 위치, 신분, 축복, 은혜, 능력, 특권 등을 끊어내기는커녕 훼방조차 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아니 실제로 주님의 그런 은혜와 권능이 신자를 붙들고 있고 신자 또한 의식하든 못하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신자가 땅 끝까지 가든, 세상 끝날 까지 살든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본성, 특별히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그리스도 십자가에 드러난 의와 권능만 붙드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현재의 나는 연약하고 죄에 찌들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분노마저 생기지만 그래도 내 쪽에서 예수님을 붙든 손만은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분과 온전한 교제를 다시 이루고 싶다는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위선적 믿음은?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며, 또 그것은 나의 나 된 것은 구원 전이나 후나 오직 그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짓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이 됩니까? 도덕적으로 하자를 범하고 종교적으로 게을러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그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도덕적 종교적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두에 신자에게 죄의 본성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는 것이 자주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예수 믿기 전의 상태로 자꾸 되돌아간다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참된 은혜와 권능을 제대로 받아 누리기는커녕 복음이 갖는 의미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님이 예배 때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위선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부분의 신자가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선 위선에 대해서도 믿기 전과는 다른 해석과 적용을 하셔야 합니다. 위선의 정의(定意)는 속은 악한데 겉으로 선한 척하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 같지만 만약 속이 시커멓다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백하면 위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구원 이후에도 죄의 본성이 살아 있기에 항상 자신의 죄를 그분 앞에 나아가 자백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죄를 하나님 앞에 통회 자백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은 것과는 천양지차이입니다. 질문자님은 질문 중에 이미 자신의 죄 된 모습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다시 질문하신 내용을 잘 살펴보시면 자신의 실체를 시인한 거기까진 분명히 위선이 아닙니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선 오히려 의로운 모습입니다.
“속은 시커멓게 끓어오르고 분노는 가득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에 참석 할 수 있는 유치한 수준이 저의 한계입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만 찬송가를 부를 때의 제 모습은 정말 가증스럽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의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자신이 너무도 싫습니다. 심지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제 믿음의 수준이라면 “버리운 자”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도 저는 쉽게 모든 것에 대해 겸허해지지 못한 채 자신만 변호하기에 급급한 또 다른 위선에 빠집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제 현실적 궁핍함에 대해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배나 찬양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나 찬양도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야만 합니다. 예수 믿은 신자가 되어서 교회의 주일 예배에 출석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와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들으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널리 선포되고 높여지는 것이 예배이자 찬양입니다.
썩어 없어져 마땅했던 나를 오직 십자가의 의로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추하고 더러운 죄를 수시로 짓고 있지만 여전히 동일한 십자가 의로 나를 다시 세워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이자 찬양인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무한하신 주님의 은혜와, 또 그 모습 그대로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금 성령의 인도에 따르도록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권능 앞에 온전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만이 높여지는 것이 설교이자, 찬양이자, 예배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의 논리대로라면 온전히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져야만 예배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면 구태여 예배드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도무지 그럴 수 없기에 다시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만드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 그 은혜와 권능이 너무 귀하고 소중하다고 곡조 붙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내 마음이 충만하고 기쁘고 거룩해져야만 찬양을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 자칫 내 자신을 높이는 찬양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이 완전해져야만 찬양과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십자가는 실종되어 버립니다.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또 그럴 수 있다는 믿음 내지 생각인지라, 너무나 큰 교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과는 다른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위선입니다. 믿음이란 “나 혼자로는 너무나 추하며 온전해질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며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노력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결코 위선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고백 위에 자신의 선, 의, 공로, 자격, 능력, 거룩 등을 아무리 미세한 모습이라도 보태면 위선인 것입니다.
신자 가운데 아주 세밀한(?) 죄책감에 너무나 자주 빠지고 그것에 오래 동안 머무는 자들을 봅니다. 또 그러는 것이 아주 좋고 겸손한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주하기에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는 것은 참된 신자라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좋은 현상입니다. 이전과 달라진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르는 것은, 아니 너무 자주 자책감에 빠지는 것 자체로만 영적으로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껏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권능을 모르거나, 잊고 있거나, 의지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참 겸손이지 스스로의 죄책감을 갖는 것 자체가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질문자님이 자책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감춘 채 찬양 드리는 모습이 가증스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실상이 아직도 그 정도 밖에 안 되기에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더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또 이미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질문자는 결코 “버리운 자”가 아닙니다. 거기다 “하나님 앞에서 제 현실적 궁핍함에 대해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으므로 질문자 스스로 절대 하나님의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감정이 어떠하든, 아니 하나님에 대한 온갖 의심과 불평과 불신과 원망이 들더라도 질문자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다시금 되살려내어서 자신의 존재하는 모든 근거로 삼으십시오. 참 생명과 모든 선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기인합니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붙들고 이끌고 가는 것은 성령님의 거룩한 간섭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질문자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치하십니다. 질문자님이 마땅히 할 바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죄책감에 머물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는 뜻입니다.
4/20/2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여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하여 주시어 그 구원으로 초대하여 주셨음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로 자라가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