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의적 평가로 예수를 받아들지 않나요?

조회 수 924 추천 수 21 2012.04.24 19:36:11
누구나 자의적 평가로 예수를 받아들지 않나요?


[질문]


저는 설교가 끝나면 제 아내와 함께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에 따라 동일한 본문을 두고도 전혀 다른 의미의 설교가 전달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또 설령 목사 본인은 자신의 사상 철학 자화상을 전혀 통하지 않고 성경대로 설교하였다고 하여도 신자들로선 자신의 생각과 자화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기다 자기감정이나 주변상황까지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물론 진정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최종목표이고 또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자의적인 평가·분석·판단으로 예수를 대하면서. 자신의 사상, 철학, 심지어 자화상이 투영된 자기가 만든 예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대부분 우리의 사상, 철학, 자화상을 통해서 이해하지 않느냐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예컨대 님의 벤허에 대한 글에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보고 도망가는 모습이 그분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장 평범한 얼굴을 가지신 분이라는 해석이나, 성경이 예수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이유로 든 2 가지가 과연 4대 복음서에 적합한 해석인지 의아합니다. 그런 판단과 해석 또한 님의 자의적 평가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과연 자의적 평가 분석 판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라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 대부분은 스스로 평가 분석 판단하면서 받아들일 것입니다. 반면에 님은 예수님을 심령으로 만나는 것 이외는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나는 과연 24시간 동안의 신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금해집니다. 말하자면 님이 제시한 내용의 반대편에 서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분석 평가 판단에 의해 사물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또 그러기에 진정한 예수를 찾아가는 것(이것이 오강남의 생각인지 모르지만)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답변]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지성적, 논리적인 남자신자들이 비슷한 의문을 많이 가질 것입니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확실히 해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토의할 때는 그 논의의 준거나 범위가 상호 명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쉬운 비유로 “Apple사 직원이 내부에서 본 회사의 경영성과와 향후전망”에 관한 토의를 한다면 Google의 직원은 설령 하버드 대학 경영학박사 출신이라도 아예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전제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님과 저의 성경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상반되기에 아무리 제가 성경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제 의견은 질문자님의 의견과 반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강남 박사의 성경접근법과 저의 것이 상반되기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결론도 서로 반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계시의 말씀으로 보느냐, 인간 선각자가 지어낸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으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또 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성육신한 하나님 본체로 보느냐,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위대한 인간으로 보느냐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두 인식을 두고 인간의 사상, 철학, 선입관 등이 다른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그런 진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전자의 입장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인식과 개념은 성령이 주신 지혜이지, 교육이나 체험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쌓아올린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안에 들어온 자가 갖는 성경과 예수에 대한 인식은, 예수 밖에 머물고 있는 그 인식과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비유대로 Apple 직원이 보는 회사에 대한 인식은 밖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외부인은 그 평가를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요컨대 앞으로 드리게 될 저의 답변도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기본 인식이 저와 다른 질문자님으로선 아마도 선뜻 납득, 동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특유성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에선 그 종교가 가르치는 사상을 배우고 계명대로 따름으로써 믿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한 위대한 인간 선각자가 자신의 깨우침을 전파하고 그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에 감동한 자들이 그분의 본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선각자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르친 사상이나 믿음을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유대인 랍비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지만 바로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면서 당신을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요14:6) 당신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신자의 생명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걸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과 심판을 주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2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나면서 소경인 자에게도 눈을 뜨게 해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9:35,37,39)

상식적 논리적으로 따지면 도무지 인간이 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미친 사람이거나 그가 말한 그대로 하나님임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의 앞뒤를 면밀하게 살펴봐도 그분이 미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로선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고 도리어 거침돌만 되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물론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는 젊은 랍비의 인기를 시샘하여서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설명을 잘못 이해했던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두 가지 맥락에서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슥9:9 외)와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수난 받는 종(사53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직 자기 민족을 열방 위에 최고로 세워주는 메시아만 바랐기에 나무에 매달리는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한, 실은 자기들이 그렇게 죽여 놓고선, 예수님의 정체성을 끝까지 몰라보고 배척했습니다.  

요컨대 성경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그 창시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가려고 노력하다가 얻은 성찰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인간으로 내려온 신은 예수님만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되시는 바로 그 분이 인간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분을 믿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분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르친 대로 사는 것은 이차적 과제일, 정확히 말하면 믿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분의 믿음을 본받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령과 성경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봤듯이 오늘날의 자연인들 또한 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 가르침을 전해 들었고, 여러 이적을 목격했고, 십자가 부활사건의 현장에 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분의 실체를 육안으로 볼 수 없으며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과거형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분을 접할 수밖에 없으니 더더욱 그분을 믿기는 힘듭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을 자기중심적으로만 해석했기에 정작 메시아가 왔음에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현상을 두고 예수님이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듯이 하나님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고 표현합니다. 또 그렇게 되리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부터 예언을 했습니다.  

“이 지혜는 시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사64:4,65:17)’
함과 같으니라.”(고전2:8-9)

바울이 말하는 “이 지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유대인들이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사6:10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마13:14,16에서 말씀하심)

마치 하나님이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아닙니다. 그 전에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졌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의 형통과 안일만 보장해주는 메시아만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를 성령의 간섭으로 영적인 눈을 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내적 깨우침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2-14)

성령으로만 구원의 은혜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탐욕스런 죄만 짓는 자를 뜻하지 않고, 성령의 간섭 없이 오직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분석, 판단, 시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메시아 예언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이 그 대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신령한 일을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이미 당신의 정체성을 성령의 깨우침으로만 알 수 있었다면, 성경 말씀으로만 그분을 접하는 오늘날의 신자에겐 더더욱 그러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여기서 예언은 단순히 장래 일을 미리 예측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모든 말씀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고 할 때에 인간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 등을 투영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조명(照明)하심에 따라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접근의 대표적 예

산헤드린의 공회원 즉,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경건한 자였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로선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자신의 지혜와 지식의 차원을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3:5-7)고 덧붙였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을 얻으려면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영이 완전히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육(肉, flesh)은 육체(body)가 아니라 자기 지정의에 따라 인간중심적으로만 판단하는, 말하자면 영이 배제된 차원을 말합니다. 두뇌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자신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만으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정체성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육체로는 당대에 가장 신뢰할만한 자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으로 힐렐 학파에 속한 가장 촉망받는 젊은 공회원이었습니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당대 최고였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였다고 스스로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겼습니다. 시골 출신의 이름 없는 비주류 인물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예사로 어기는 것처럼 보였고(실은 전혀 어기지 않고 오히려 그 해석과 실천에서 완성시켰음), 죄인과 세리는 물론 이방인들과도 교제를 했으며, 자신이 생명이고 진리요 길이라면서 아무 선행을 하지 않고도 자기만 믿으면 구원을 당신이 준다고 하니까 이런 이단 중의 이단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그런 판단의 배경에는 그의 그 때까지의 사상과 철학이 작용한 것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해 구약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으로 만나고 나자 즉,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主, the Lord)라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시인하게 되자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빌3:7-9)

예수님의 정체성을 판단하는데 자신의 사상과 철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자기 지식과 지혜에는 의존치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도무지 해(害)만 되기에 아예 배설물로 취급해서 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에 흠이 없다고 큰소리치던 입장에서 자신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진 의일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하고 사랑해주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존재가치조차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사상과 철학으로 예수님께 반응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실은 제자들 아닙니까? 삼년 간 동고동락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이적을 보고 실제로 그 이적의 참여자 내지 수혜자가 되었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순절 성령이 오시어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스승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립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스승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예언하셨던 그대로였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은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8,12,13)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은 구원과 심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런 진리는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알 수 있다고 확언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성경을 통해 가장 먼저 깨우치고 또 믿어야만 할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사상과 철학과 선입관과 자화상을 통해서 그분을 평가, 분석, 이해하여 그분의 정체성을 각자가 특유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그러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이 두 질문의 대답은 결단코 “No.”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루에도 생각과 감정이 수시로 변하여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또 인간의 사상과 철학이 절대적 진리에 입각한 것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이의 그것은 상대적, 일시적, 불완전할 뿐이며 심지어 죄에 찌들어 악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분 절대적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여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만나져야만 할 대상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인지라 영과 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택한 자에게는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고전2:11)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 이런 진술을 했습니까? 그야말로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갑자기 눈이 멀고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실체를 육안으로 뵌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영으로 간섭하였기에 그에게만 그분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흘 후 시력을 회복하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행9:20)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증오하다가, 순식간에 구원을 주시는 메시아아라고 증거했습니다. 기독교를 극렬히 핍박하다가 열렬한 옹호자로 바뀌었습니다. 그 때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도덕적 종교적 사상과 철학 체계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삼일 만에 그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 자기 자화상을 투영해서 판단할 여유는 도무지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깨우쳐준 지혜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단의 수괴가 아니라 자신이 그랬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대교의 가장 실력 있는 랍비에서 비로소 예수 믿는 초신자가 된 것입니다. 흔히 하는 고백처럼 아무 이유 없이 밉기만 하던 예수와 예수쟁이들이 성령이 간섭하고 나니까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단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르심만 받았는데도 즉, 오순절 성령이 오시기 훨씬 전임에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로소이다”라고 말했지 않습니까?(눅5:8) 또 유대 대중은 그 때까지 유대 랍비와는 전혀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을 예수님에게서 들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영혼에 깊은 찔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이라고 칭송 받는 자라도 하나님의 거룩하고 엄위한 실체를 직접 대면하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수 없습니다. 심령의 깊숙한 생각까지도 꿰뚫어보시는 그분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스스로 의롭다고 큰소리칠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처럼 수시로 형제를 바보라 욕하거나 예쁜 여인을 보면 마음으로 간음하는 주제인지라 쥐구멍 찾기 바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면 죽는다고 말한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죄와도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 앞에 추하고 더러운 인간은 순간적으로 타서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자는 그저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엄청난 영광과 권능 앞에서 두렵고 경외감이 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내면이 완전히 하나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와 출발점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비추면 작금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신자가 된다는 의미를 많은 교회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만 납득동의하여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것도 목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 영생이 보장된 것으로 인정해버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주시며 대신 죄 값을 치렀기에 구원에는 개인의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철두철미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완전히 정반대가 되는 회심(回心)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말씀(마4:17)의 헬라 원어가 회심을 뜻하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자백하고 앞으로는 온전히 예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단순히 이신칭의의 객관적 교리가 복음이 되고, 그 교리에 대한 동의가 구원으로 변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깊이 알게 되기 이전에 사실은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비로소 정확히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비춰봤을 때 너무나 추하고 썩어 없어져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 그런 자신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고는 도무지 깨끗케 할 방도가 없음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참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은 “진정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최종목표이고 또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우리 모두가 자의적인 평가·분석·판단으로 예수를 대하면서. 자신의 사상, 철학, 심지어 자화상이 투영된 자기가 만든 예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상반된 것입니다. 우선 진정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정체성을 실제적 체험을 통해 아는 것, 말하자면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자기 전부를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열두 사도, 바울, 누가, 빌립, 디모데, 삭개오, 고넬료,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을 비롯한 모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들로선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이미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주되심을 생생한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그분을 만나 그분의 신적 권능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며 항복했던 것입니다. 또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이 각기 자신의 사상, 철학, 자화상이 투영된 자신만의 예수 상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아무 소망 없던 자신에게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부활임을 확신했고 또 그래서 기꺼이 산채로 맹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목표는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그 전에 이 땅에서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자신이 속한 어떤 공동체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예수를 각기 갖고 있으면 신자 수자만큼 많은 예수님, 아니 하나님이 존재하게 됩니다. 또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그분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이 감히 평가합니까? 인간으로선 하나님이 당신을 당신께서 보여주어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예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정확한 정체성을 자기 입술로 진실로 고백할 때 비로소 신자가 됩니다. 이것 외의 그분에 대한 어떤 이해도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다.

예수 십자가 사건 이후 세대는 성경을 통해서만 그분을 만날 수 있지만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연구 분석하며 읽어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성경을 읽어야만 그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고,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예수님을 자신의 사상과 철학의 필터를 거쳐서 판단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천하의 탕자였습니다. 십대에 이미 창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둘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죄책감은 갖고 있었고 절대적 진리를 찾으려는 방황은 계속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자기 집 담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성경을 펼쳐 읽으라는 노래 소리가 계속 들리기에 무심결에 펼쳐서 처음으로 눈길이 간 구절이 바로 롬13:13,14 였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情欲)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지금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즉, 성령의 미세한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지난 모든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또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붙드는 것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영적 방황을 끝내고 영혼의 참 안식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종교개혁의 뿌리가 되는 정통신학을 정립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영적 실체를 정확히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 됨을 철두철미하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만 용서 받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는 그분의 십자가 공의 앞에 자기 존재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죄인은 끝까지 용서하고 품어주는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자신을 완전히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대가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접근할 수 있기에 결국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가장 먼저 깨달을 것은 예수님에 대한 초상보다 오히려 바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인 셈입니다.  

자신의 정체성 확인은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예컨대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인 만남을 통해, 어거스틴은 성경 말씀 한 구절을 통해, 베드로는 삼 년간 따라 다녔지만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세 번 용서 받는 일을 통해,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 몸의 못과 창 자국에 손을 넣어봄으로써, 자신의 아무 소망 없는 영적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그때까지 세상 앞에 자랑하던 인간적 자아는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바꿔 말해 그 때까지 갖고 있던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껏 답변 드린 모든 내용도 제 개인의 사상과 철학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말씀들을 인용해서 설명한 것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저는 33살에야 완전한 무신론자 집안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저의 개인적 사상과 철학으로는 철저하게 안티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예수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알아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먼저 믿은 아내더러 교회출석은 물론 집안에서 성경이 제 눈에 뛰게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시켰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제게 큰 시련이 닥침으로써 제 자신의 교만이 여지없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이며 또 그럼으로써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를 많이 지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밉던 예수가 너무나 좋아져서 저의 온전한 구주로 영접했고 성경을 읽고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거듭남에 여러 간증거리가 많지만 여기서 논할 계제는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수를 믿고 나니까 비로소 성경이 수면제가 아니라 꿀 송이 같이 달고 오묘한 말씀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난 후에는 예수님에 대해 오직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자의로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로만 이해, 해석, 적용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 다른 말로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그분의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만 일어납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도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분만이 자신의 유일하고도 완전하며 절대적 구주이자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또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라 그 구체적인 경과는 믿게 되는 본인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면서 그 과정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오는 과정은 몰라도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미 불었다는 사실은 압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완전히 믿게 되는 과정은 몰라도 믿고 난 후에 자신이 이미 예전의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차원에서 자신이 거듭났기에 예수가 온전히 믿어졌다고 자신의 지정의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이전의 죄 많고 헛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계명에 따라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며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자신의 전부를 던지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벤허 이야기

마지막으로 질문하신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간단히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벤허에 대한 글에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보고 도망가는 모습이 그분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에는 예수님이 신적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설명이 자주 나오기에 그에 따른 해석입니다.

제자로 부를 때에 베드로가 자기는 죄인이라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말씀 한 마디로 제자들이 당장에 따라 나서는 것이나, 율법에 능통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 처음 듣는 권세 있는 가르침이라고 인정한 것이나, 관원들이 여러 번 잡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주님이 유유히 헤쳐 나온 것이나, 바리새인등과 토론하면서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그럴 수 없는데도 그들을 심하게 꾸짖은 것이니, 또 그래도 그들이 아무 대꾸도 못한  것 등등 복음서에서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신적 권위만으로 로마 군병이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온유함과 긍휼함도 주님께 넘쳤던 것입니다. 당시 매국노로 불리는 세리는 물론  장로들의 유전으로 금지되어서 아무도 상대 않는 창녀와 죄인과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를 했고, 그랬음에도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신적 권위를 넘어서 신적인 사랑도 넘치니까 감히 폭력적인 악으로 다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벤허 소설의 원작자인 루 윌리스나, 영화감독 윌리엄 와일러나, 저가 행군에 지친 벤허에게 물을 먹이는 주님의 모습에 신적 권능과 신적 사랑이 넘쳤다고 묘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들이나 저는 예수님의 실제 얼굴을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판단하니까 의견의 일치를 본 것입니다. 각자의 사상과 철학에 의해서라면 소설, 영화, 저의 해석이 모두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평범한 얼굴을 가지신 분이라는 저의 해석도 성경에 의거한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수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그분은 흠모할만한 모양이나 풍채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은 없으시니라.”(히4:15) 그분은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모든 이를 대표하는 모습 즉, 평균적인 외모와 신체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는 데는 두 가지 이유뿐이다. 외모나 체격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거나, 그런 것들이 예수의 복음을 설명하는 데 아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저의 이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고운 모양이 없다고 성경이 예언했고 또 모든 이를 구원하려면 평균적인 모습이 가장 합당하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또 그분이 오셔서 사랑을 베푸신 이들 모두도 사실은 가장 평균적인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런 보통사람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이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구원한 자들이 평범하려면 구원하는 이도 평범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부터 그런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상기 본문의 또 다른 이미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모는 일체 보지 않고 그 중심을 보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외모 또한 성경이 기록해야 할 필요나 이유가 없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이유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신지라. 외모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외모가 중시되면 그분의 신성에 대한 인식이 줄어들 것입니다. 외모란 상대의 진정한 실체보다는 사실상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걸러서 자의적 판단을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이 판단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바로 그런 의미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외모로만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대교 사상과 철학에 비춰보니 나사렛 이단의 괴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대면한 후에는 그리스도임을 완전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백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 또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즉, 그분을 온전히 믿고 나면 그분은 물론 다른 이들마저 외모로 보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결코 외모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인간 선각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태초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마련한 비밀의 경륜을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계시했다는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진리를 설명한 책입니다. 또 그래서 그분의 외모를 기록하지 않아야 할 성경적 이유가 또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달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1-3)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창세기14:17-20에 나오는 멜기세덱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축복해주었던 그와도 비교 안 되는 영원한 대제사장, 한마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아비나 어미도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달이나 생명의 끝이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한 성경저자들이 그분의 하나님임을 온전히 믿게 되자 그분의 평균적 외모는 그 믿음을 갖고 또 전파하는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지식이 아니라 성령으로만 믿게 되니까 말입니다.

실제적인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감히 부르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그분의 외모를 섣불리 묘사해서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까지의 제 설명도 제 사상과 철학이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온전히 예수를 믿지 못한 채 성경을 연구하여 그분의 정체성을 정립하려 들었다면 지금 같은 설명은 전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답변마저 질문자님이 제 사상과 철학이라고 말한다면 저로선 더 이상 말씀드릴 여지가 없어집니다. 또 그래서 맨 서두에 Apple과 Google 비유를 든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저작한 바울마저 고백한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만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에 대해 외모로 즉, 자기 사상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마다 다른 성경 해석

이 문제는 목사마다 가지는 신학적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체계를 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을 성경대로 풀려고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잘못 오역하는 경우도 생기며, 심지어 일부 목사는 성경을 성경으로 풀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핵심진리에 대한 해석은 동일한데 그 진리를 실제 삶에 적용함에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 정통하지 않은 신자로선 과연 어떤 목사 말씀이 옳은지 분별이 안 되어 곤혹스럽습니다. 또 어디까지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며, 어디부터 그 적용인지 분간이 안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님 지적대로 신자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목사들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 진리는 무엇이며 그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정립한 신학적 체계와 핵심 교리입니다. 그 내용을 물론 신자들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경륜을 아주 함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핵심적 성경진리가 따로 없기에 이대로 믿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목사들의 설교가 이에서 벗어나면 잘못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또 삶에서 믿음을 적용 실천하는 문제도 이 진리에 입각해 판단하셔야 합니다. 또 그러려면 이젠 신자들이 정말로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체계적으로 정통 신학을, 최소한 핵심 교리를 정확히 공부하여서 스스로 목사들의 설교를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정말로 성령의 조명으로 깊이 읽고 또 읽으면, 나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해서 판단하면 그 진리에 대한 해석은 물론 그 적용마저 동일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벤허의 원작 소설가와 영화감독과 그를 관람한 저의 해석이 동일하듯이 말입니다. 시대와 문화적 상황에 적합한 구체적인 실천방법마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적용방안을 도출할 수 있는 절대적 원리는 성경에 다 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예쁜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란한 생각이 들면 눈을 빼라는 말씀이 실제로 봉사가 되라는 뜻은 아니지만 도덕적 삶의 원리는 충분히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작금의 설교가 중구난방 같아도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일부 목사들 즉, 사람의 해석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그런 뜻에서 기독교 진리와 기독교 메카니즘을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제 책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은 인간의 사상과 철학으로는 절대 분별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 말씀을 면밀히 읽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만 판단이 가능합니다. 이 일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진짜 완전히 깨어져 예수님을 참 주인으로 모시고 자기 전부를 그분에게 드리면 가능해집니다. 그런 은혜가 질문자에게도 임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4/24/2012


운영자

2012.04.25 11:36:10
*.104.233.248

박광태님 답변 글이 조금 길긴하지만,
왼쪽 상단의 [프린트로 인쇄하기]를 클릭하시어 프린트아웃해서
천천히 잘 읽어보시길 감히 권합니다.
(실은 상기 내용이 제 책에서 이미 상당부분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만...)

본 성경문답 사이트에는 (추측컨대) 님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은 주제의
글이 많이 있습니다.
목록에서 제목들을 죽 훑어 보시다가 관심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런 글들도 함께 참조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의문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아무 부담 없이 질문해 주시면
성경에 입각해서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홈피를 통해 사역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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