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실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서 구원하시는가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 노아, 모세, 야곱, 요셉 같이 하나님을 인정한자들 즉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자들이라서 구원 또는 선택하신 것이 아닌가요?
[답변]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허물과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성정이 똑 같고 실수 투성이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특별한 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브라함의 경우 노년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믿은 자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로, 모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자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 이길 만큼 축복을 쟁취한 자로, 또 요셉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꿈을 성취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나 성경 공부할 때에도 그렇게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믿음을 가진 후에 드러난 모습이지 그런 점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장점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연습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은사와 재능으로 주어 놓으셨고 하나님이 훈련과 연단을 통해 더 갈고 닦아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이 생겨 구원을 받게 되기까지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작용했을 뿐 아니라 믿음이 생긴 후에도 그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과정에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로 간섭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인물들이 구원 받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기 보다 믿음이 생긴 후의 역할을 더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후대의 독자에게 믿음의 선진으로 증거하기(히11:2) 위한 까닭입니다. 또한 구원 받기까지 각자가 겪은 영적 갈등이나 구도한 흔적의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자체가 실제로도 그들에게 특별한 장점과 능력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든 인물들의 경우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살펴 보기로 합시다.
아브라함
질문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이 칭의(稱義-Salvation)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 나올 때부터 살펴 봅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 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우르에 있을 때에 아브라함과 그의 집안은 우상을 믿었고 또 전승에 의하면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색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한 집안의 신은 대대로 모든 식구가 믿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거의 틀림 없이 우상을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불러 낸 것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1:31,32, 12:1,2) 아브라함 일가가 우르를 떠났지만 아비 데라가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하고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머물다 죽습니다. 성경은 구체적 원인을 밝혀 놓고 있지 않지만 아비 데라가 우상 숭배하던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이 약속한 땅 대신 하란에서 지체했으며 아브라함 또한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지 못하고 함께 머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되 이제는 분명하게 본토, 아비, 친척 셋 다 떠나라고 확실한 소명과 구원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12:2에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 하심으로 취소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을 보증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아브라함이 구원 받을 만한 자격과 특성이라곤 단 한 군데도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후의 기록은 아시는 대로 그가 얼마나 약점과 허물 투성이의 보통 사람인가를 나타냅니다. 두 번씩이나 마누라를 동생이라고 속이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후손에 대한 약속도 처음부터 완전하게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무자(無子)하고 연로했던 나이 75세에 처음으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라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이 약속의 성취가 늦어지므로 그는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거니이다”(창15:3)라고 하면서 자기의 충직한 종을 양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 그 언약을 재확인 했습니다.
처음 약속을 받은 후 10년간을 기다리다 지친 아브라함과 사라는 후첩 하갈을 통해 후손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났으니 약속의 자녀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해 구체적으로 시기와 성별과 이름까지 지정해 주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면서 할례의 언약까지 하십니다. 두 부부의 이름도 열국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줍니다. (창 17장)
그는 그 동안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 못해 기다리지 않고 두 번씩이나 실수했습니다. 그로선 자신의 무력함과 경수가 끊긴 늙은 아내를 볼 때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 일부러 세상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환경 가운데 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25년간에 걸쳐 포괄적인 데서 점차 구체적으로 계시하면서 그의 믿음을 자라게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99세 때 구체적으로 이삭의 약속을 주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그에게 다시 권면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벌써 나중에 그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는 자리에까지 그의 믿음이 자라도록 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을 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불리워 나와 구원 받았고 믿음마저 하나님이 자라게 한 것입니다.
노아
노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성경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창6:9)라고 해서 구원을 받을 만큼 자격을 갖추었고 믿음이 있은 양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기록 앞 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방주를 만들어 물 심판에서 살아 남는 인류의 조상이 되는 소명을 받아 구원을 얻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노아가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을 얻은 이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 교제와 동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동행하자고 해서 하나님이 바로 동행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는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선택하여 은혜를 베풀어 그 죄를 사하고 의인으로 삼으신 후에야 비로소 동행이 가능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소명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성령의 교감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인간이 원하거나 노력해서 성령을 얻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노아가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은 것은 일방적 은혜라 치더라도 그가 무엇인가 남다른 소질, 인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의문은 계속해서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실 때 특별히 인격적, 지성적, 도덕적, 영적으로 뛰어나고 우수한 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맡기실 일에 가장 적합한 자를 택합니다. 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자도 선택하여 일을 맡긴 후에 능력을 부어주시기도 하고, 택한 후에 오랜 기간 훈련시켜 다 준비한 후에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만의 주권적 계획 속에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모습으로 이뤄집니다.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측컨대 그는 아마 가장 우직하고 고집이 세어 택함을 받았지 않나 싶습니다. 방주를 짓고 있는 기간 동안 당시의 완악하고 죄악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조롱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지구상에 오직 한 사람 만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기들은 정상이고 노아는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큰 방주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지겨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묵묵히 그 일을 해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일을 정하지 않고 일을 보고 사람을 택합니다.
그 큰 홍수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유일하게 건짐을 받았던 그도 개인적으로 흠이 많았고 죄를 지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 벌거벗은지라.”(창9:21) 벌거벗었다는 것은 열이 나서 더울 정도로 만취했다는 것입니다. 아비의 하체를 보고 조롱한 함의 잘못은 변명할 여지가 없이 크지만 아마 대낮에 일은 하지 않고 장막 속에서 취해 있었으므로 함이 우습게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밤중에 누워 자는데 아들이 아비의 장막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행동 거지가 너무 경박해 아들의 조롱을 받을 만 했던 것입니다. 노아는 우리와 똑 같이 흠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구약의 가장 중요한 책 5권을 기록한 모세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그 만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성경 전체에 드뭅니다. 개인적인 자질은 어쩌면 지도자로선 가장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알다시피 나이 80에 가서야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그 전까지 그의 개인적 영적 상태는 하나님을 알았을지 몰라도 아마 구원의 확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의 생애는 오직 실패 투성이였습니다. 전반기 40년은 생모를 비롯한 가족과 같이 살지도 못하고 자기 종족의 대적의 우두머리로 살았습니다. 후반기 40년은 이방 민족에서 어린아이나 할 일인 양치기 같은 비천한 일로 겨우 연명해야 했던 인생의 완전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살인자에 도망자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의 바로의 궁정에서 40년을 왕자로 자랐다는 뜻은 세상적 지도자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고대의 왕은 모든 부분에 최고로 뛰어나야 했습니다. 학문, 무술, 인격, 심지어 모세가 자기의 결정적 약점으로 여겼던 말이 어눌한 것 조차 교정 받아야 합니다. 왕들의 교육에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신하와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말을 잘해야 합니다. 40년간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말을 잘 못한다고 할 정도로 말더듬이에 성격이 불같이 급한 자였습니다. 성격이 급한 자가 말을 더듬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충동적으로 살인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쳤으며 금 송아지 앞에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분에 못 이겨 돌 판을 깨트릴 정도였습니다. 양치기 40년의 각고와 연단의 기간을 보냈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기 허물을 제대로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를 왜 하나님이 불러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흠이 많은 자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세를 택해 80년간 훈련시키고 준비시킨 것입니다. 바로와 맞대면하여 담판을 지으려면 바로의 궁정의 법도, 규칙 및 그들의 종교와 사고방식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후에 광야를 여행하려면 광야의 기후와 지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방 민족에 압제를 당한 비참한 노예 출신의 동족을 이끌려면 모세 또한 이방 민족 밑에서 비참한 생활을 겪어 보아야만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흠이 많고 죄도 지었지만 하나님은 예비해 놓으신 당신의 특정한 일을 위해 훈련 시킨 후에 때가 차면 들어 쓰셨습니다. 그 중에도 모세만큼 그 준비기간이 길고 비참했던 자는 드뭅니다. 그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가나안 땅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길(창15:16) 기다리셨던 까닭도 있지만 모세 개인적으로는 그 만큼 완악하고 고집이 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 하느냐?”(민12:8) 그는 하나님과 항상 직접 대면하며 구체적인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떨기나무 불꽃 사건 이후 모세는 수시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때마다 명백한 말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킬 일은 출애굽 뿐 아니라 율법을 받아 전수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고 모세는 그 대변인 역할을 한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나 오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구체적 계시인 율법을 전수해야 할 자로 말더듬이를 시켰습니다. 만약 달변가를 시키면 자기 말로 포장하고 첨가될 수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말을 더듬는 자는 남이 하는 말을 전하기도 힘듭니다. 모세 개인의 말이 첨가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형과 누이마저 그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들 정도의 모세였지만 그는 그 이름-물에서 건진 자라는 뜻 그대로 태어나자 아니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사람이었습니다.
야곱
야곱의 구원은 성경도 명백히 그의 자질과 상관 없이 택했다는 언급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에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느니라.”(창25:23) 큰 자 형이 작은 자 동생을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복중에서부터 택하셨으니 야곱의 자격과 능력을 본 것이 아닙니다. 또 야곱은 아시는 대로 아비 이삭과 형 에서를 비겁한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을 뺐았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세상에서도 버림 받아야 할 이런 사기꾼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 열매 맺는 것을 최초로 누리는 수혜자(受惠者)였습니다. 특별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약속이 그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생애는 오직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로 시작되고 끝납니다.
장자권을 차지한 것은 가문을 이어가고 상속을 두 배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기로 그것을 차지해 형 에서의 미움을 사 두려움에 싸여 정처 없는 피난 길에 오른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창28:13,15)
외삼촌 라반의 땅에서 21년간을 수고한 후에 12명의 아들을 얻어 그 땅으로 되돌아 왔지만 여전히 그 땅은 형 에서의 것이었습니다. 명목상의 장자권을 가졌지만 기업으로 얻을 땅은 한 치도 없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또 다른 생명의 위험을 눈 앞에 둔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으로선 이제 그 땅을 차지하느냐 마느냐는 절대절명의 위기였지만 하나님으로선 떠날 때에 한 약속을 그가 기억하고 있는가 시험하고 다시 그 약속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기회였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있었던 야곱과의 씨름을 여호와의 사자는 얼마든지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마지못해 환도뼈를 탈골시켜 끝을 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야곱의 고백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자기 꾀로 장자권을 차지할 때는 오직 세상적으로 돌아 오는 몫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장자권과 약속의 땅은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 오기까지 그 동안의 모든 경과가 오직 하나님이 지키시고 인도하신 결과였음을 확신했던 까닭입니다. 가나안을 떠날 때 꿈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에게 내기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28:20) 야곱은 자기의 서원에 대해 하나님은 단 하나도 실망시키지 않았음을 실제 삶 속에서 완전히 체험했던 것입니다.
환도뼈를 부러뜨린 것은 힘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실제로 남자 구실도 못하게 하여 병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과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볼 때만 약속의 땅의 주인으로 장자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땅의 첫 주인행세 하는데 가장 적합한 자를 하나님이 선택해 세웠습니다. 끈질기게 믿음을 지키는 소신의 사람이기에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세상적인 지혜에만 의지했던 자를 택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자로 바꾸셨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가장 극심한 반대자 사울(큰 자)을 가장 열렬한 옹호자 바울(작은 자)로 바꾸셨듯이 말입니다.
요셉
요셉을 흔히 꿈을 가진 자로 칭합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나가 그 꿈을 달성한 자로만 이해합니다. 완벽한 믿음으로 자기 인생을 비참한 노예의 자리에서 영광스런 일국의 총리의 자리에 이르게 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결과만을 두고 볼 때는 그런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정말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엄밀하게 따져 보면 요셉도 결점이 많았던 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총애만 믿고 천하 높은 줄 모르고 철 모르고 설친 막내둥이였습니다. 그가 꾼 두 가지 꿈은 하나님이 심어 주신 예언과 소명의 꿈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격을 제대로 갖춘 자였다면 그런 꿈을 꾸면 오히려 마음에 담아 두든지 최소한 아버지에게만 살짝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 절하더이다” (창37:6,7)라고 형들에게 자랑하듯이 말했습니다. 아비 야곱조차 그를 꾸짖을 정도였습니다. (창37:10)
요셉이 버릇 없이 굴게 된 것은 야곱이 노년에 난 아들이라 처음부터 다른 아들보다 그를 더욱 사랑하여 채색 옷(장자가 입을 옷)을 입히고 편애한 때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형제들이 다 함께 죽일 모의를 할 정도였겠습니까? 빈 구덩이를 파서 던져 버려 가만 두면 굶어 죽거나 짐승에게 잡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요셉으로선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생전 처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교만했던 자였는지 그 잘못을 처절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을 것입니다. 구덩이 속의 그에게는 아무리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은 형 유다가 마침 그 때 지나가는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기로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그의 일생은 180도로 바뀝니다. 최고로 교만했던 자리에서 제일 낮아진 믿음의 새 생활이 시작됩니다. 실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신자는 믿음의 내용과 실천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노예로 있으나, 감옥에 있으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심할래야 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더 이상 현실의 사소한 일은 무엇이 문제되겠습니까?
그런 그에게도 도저히 해답을 얻지 못하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두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주신 후 애굽 노예로 팔리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나아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교만했던 행동을 회개했을지라도 동생을 죽이려 들었던 형님들에 대한 섭섭함만은 완전히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애굽과 가나안 땅을 휩쓴 칠년 기근이 들어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에 비로소 그 해답을 얻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7) 하나님의 온갖 연단을 거쳐 마지막 남은 두 가지 의문마저 해소하여 드디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이상 믿음의 위인 5명을 개략적으로만 살펴 보았습니다. 단 한 사람도 허물과 죄가 없었던 자 없습니다. 또 그들의 특수한 자질, 능력, 공로로 구원 받은 것도 아니며 심지어 저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일을 자원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세밀하신 준비를 거쳐 구원한 후 하나님의 일을 맡겼고 또 주의 종이 된 후에도 온갖 시련을 거치지 않은 자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백한 이 말이 신자 모두의 진실된 고백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45:8) 신자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롬3:24)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우리의 자격, 조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이 됩니다.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