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에 돈을 쓰며 교제해도 되는지요?
[질문]
교회생활관에 살고 있는 저에게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바로 주일에 돈을 쓰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교회에 소속된 집이라 남자청년들이 쉽게 모이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교제'함에 있어서 주일에 돈을 쓰고, 오락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살고 있는 큰 형제에게도 주일에 돈을 쓰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물어 보았지만 자신도 알고 있고, 남자청년들도 다들 알고 있지만, 너무 이분법적으로 접근하여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저도 생각을 해봤습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교제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야 주말 밖에 없는데 이렇게 주일에 모여서라도 저녁을 사먹고 오락을 즐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저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신본주의신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청년부의 주제도 '네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 보이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즉, '지체들의 영적인 수준과 지각'을 위해서 기도를 조금씩 해왔지만.. 매주매주 저는 시험에 드는 것 같습니다. 정말 힘듭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인내의 모습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교회를 조용히 옮겨야할까요..?
[답변]
어떤 모습으로 교제를 하기에 이런 상담까지 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만약 흥청망청 술 마시면서 세상 돈 권력 명예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도박 같은 세속적 오락을 한다면 마땅히 고민할 만합니다. 단순히 주일에 음식을 배달시켜 서로 나눠 먹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여자 친구에 관해 대화하고 컴퓨터 게임(폭력 음란물이 아니라면)을 하는 정도의 교제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교회를 옮겨야 할 계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제 뜻은 질문자께서 종교적 계명과 의식과 행위를 해석 판단 적용하는데 너무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지 않는지 솔직히 조금 염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먹고 보통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관심 갖는 대화와 건전한 유희를 하는 정도라고 가정해서 원론적 차원에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선 돈 자체는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돈을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으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안전, 만족, 행복 등을 돈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책임져 주기 때문입니다.
돈은 가치중립적입니다. 돈을 쓰는 목적과 방식에 따라 선하기도 악하기도 합니다. 자선, 구제, 일용할 양식은 물론, 성도들의 순전한 교제를 위한 목적으로 돈을 사용하면 아주 선한 것입니다. 부정, 뇌물, 투기, 독점, 쾌락, 폭력, 마약 등에 돈을 사용하면 당연히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생활관 청년들끼리 교제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중에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교제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단순히 불쌍하고 소외된 사람을 섬기려는 뜻만 아니었습니다. 삭개오 같은 부자 세리의 집에 가서 유하며 교제했고, 바리새인들 이방인들과도 식사했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마11:19)고 예수님을 비난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 그런 비난을 한 자들이 바로 종교 형식과 절차를 우선시하는 율법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다음으로 따질 문제는 주일에 돈을 사용하여 먹고 마시는 교제를 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제자들이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었습니다. 유대의 장로의 유전은 안식일에 밭에 떨어져 발에 밟힌 이삭은 먹어도 되지만 손으로 잘라 먹으면 안 된다고 금했습니다. 밟힌 이삭은 노동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했다고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었던 예를 들면서 당신께선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고 답변했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종교적 의식을 준행하기에 앞서 불쌍한 사람들 돕고 필요한 것을 나눠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안식일에 시장하면 취사를 해서라도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마12:1-8)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에 예수님은 끼니를 굶은 자들이 불쌍해서 밥을 먹여야겠기에 제자들에게 먼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돈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없다고 걱정합니다. 주님이 그런 큰 기적을 일으킬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평상시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돈을 주고 사서 먹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제자들을 시험할 목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요6:5) 이 말씀 또한 평소에 예수 일행은 돈을 주고 음식을 사서 먹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가룟 유다가 바로 그 일을 하는 즉, 돈 궤를 맡았던 자(요12:6)로 요즘으로 치면 교회 재정부장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라는 명시적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제자 일행이 이스라엘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파할 때에 안식일이 닥칠 때마다 기적으로 끼니를 때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베드로의 장모나 제자들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 돈궤를 맡은 자가 따로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정통 유대인 사회에선 안식일에 모든 식당이 문을 닫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기의 기록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이 이방지역에 들어갔는데 마침 안식일이 닥쳤다면 돈을 주고 음식을 사먹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 청년 교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주일에 음식을 사먹으며 교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선한 일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취사를 각자 혹은 교대로 하는지는 몰라도 주일만은 조금 쉬자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고 했습니다. 또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 심지어 예수 믿은 후의 베드로(갈2:11-14)와는 달리 헬라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교제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9:22)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문하신 경우는 이미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이 주일에 행하는 교제이기에 기도와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최선이긴 합니다. 또 “믿음의 진보를 보이기” 위해서 경건하게 성경공부를 하거나 이웃을 섬기면서 주일을 보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해선 알 될 사항은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경건을 훈련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신자는 실제 삶에서 주일이든 아니든, 불신자든 신자든 자기 주변 사람들과 아름답고 풍성한 교제와 섬김을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신자라면 우상에 바친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나 혹시 믿음이 약한 성도가 함께 있다가 시험에 들 가능성이 보이면 평생토록 고기를 안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시중에 나온 고기는 거의 우상에 바쳐진 고기였습니다. 그가 정말로 고기를 전혀 안 먹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기를 먹을 때 혹시 너무 율법적 종교적으로만 따지는 교인이 함께 있다가 그가 우상을 인정하거나 하나님 계명을 어긴다고 오해를 살 수 있고, 그럴 경우는 그들이 시험 들지 않게끔 먹지 않겠다는 뜻입니다.(고전8장, 10:23-32)
지금 형제님의 경우는 바울이 말한 원리에 비추면 이렇습니다. 형제님처럼 신자의 교제는 반드시 경건해야만 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청년들이 있습니다. 서로가 믿음을 적용하는 방식만 다를 뿐입니다. 그럼 형제님이 바울처럼 다른 이의 수준에 맞추어서 함께 교제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반대로 선배 형들이 형제님이 이분법적 율법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면 지금 그 형들이 형제님에게 바울 같은 폭넓은 사고와 대인관계원칙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바울의 권면의 결론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쉽게 말해 자기가 믿는바 복음의 진리는 절대 포기 변경 타협하지 않되, 그것을 적용하는 방식에선 많은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가고 복음이 더 확장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으며 우리더러도 그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형제님 교회생활관에서 청년들의 교제에 적극 참여하십시오. 주일에 음식 배달해서 먹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해도 적극적으로 어울리십시오. 바로 그것이 성도간의 교제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믿음의 도전과 격려와 위로가 풍성히 넘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아 성숙됩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하나님과의 일대일 교제 시간을 빼고는 정말 술과 음식을 탐한다는 비평을 들을 만큼 열심히 사람들과 교제했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영성은 절대 혼자 고립되어서 기도와 말씀만 파고드는 수도원 같은 영성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그 가운데는 심지어 상처를 주고받거나 함께 시험에 빠져 넘어지는 부정적인 경우도 포함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현실의 삶에서 성숙된 영성을 가진 성도라야만 정말로 불신자는 물론 아직도 죄의 본성에 젖어 있는 성도들을 참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중요한 사항을 하나 첨가하자면, 신본주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모습을 갖춘다고 즉, 계명대로 실천한다고 다 신본주의가 아닙니다. 또 그 반대의 모습이라고 다 인본주의도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자신의 안전, 만족, 행복, 미래를 완전히 주관한다는 확신 아래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리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을 얻는 길을 물으러 온 부자청년 관원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잘 지켰습니다. 정말 유대 사회에서 칭찬 받는 모범적인 도덕가이자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니까 재물이 많은지라 염려하면서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가 평소에 구제를 전혀 하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유대 관원은 구제에도 열심이었습니다.(마19:16-22)
예수님의 뜻은 네가 재산 전부를 포기하더라도, 지금 당장 거지가 되더라도 정말로 하나님이 너의 온전한 주인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관원은 바로 그 질문에 도무지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재물이 그의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기도, 말씀, 구제, 십일조, 헌금, 봉사를 최고로 성실히 행하는 신본주의자 같았으나 사실은 인본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어느 누구와 어떤 장소에서도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야말로 철두철미 신본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소유했기에 진리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형제님도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성도 청년들끼리 주일 저녁에 도가 넘치지 않는 교제를 하는데 참여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신자라면 어두운 곳을 일부러 더 찾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통해 비춰 나오는 주님의 빛으로 그어둠을 물리치고 깨끗하게 만들 소명을 받았고 또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6/5/2015
창원공학도 형제님
마침 지난 주와 이번 주의 창세기 강해설교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시간 나면 꼭 둘 다 듣거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