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조회 수 6223 추천 수 83 2006.05.24 04:27:43
[질문]

공대를 졸업하고 신대원 진학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입니다.

카톨릭을 비롯해서 개신교의 수많은 교단에서도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삼위일체설에 대해서 막연히 옳겠구나 하고 인정하고만 있지,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막연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아주 논리적이고도 정확하게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증명하는 부분이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면 이단이 될 정도로 기본적인 기독교의 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이해란 머리로 그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성경적 뒷받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KJV 같은 곳에는 삼위일체론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구절이 있는데 제가 알기로 이 구절들은 다른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삼위일체론을 위해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이트를 자주 애용하는 학생으로서 목사님께서 한번 정리해주시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 주제넘지만 정중히 요청합니다.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는 어떻게 되며,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즉,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 베드로 등 초대 교회의 사도들 또한 삼위일체론을 (이론으로는 물론 아니겠지만) 알고 있었고 진리로 믿고 있었을까요? 구원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셋이 하나이고 또한 셋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답변]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조직 신학 박사가 나서서 아무리 심오하고도 상세하게 설명해도 선뜻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신대원 입학을 준비하는 정도라면 믿음도 상당하고 이미 인터넷을 통해 조사도 많이 하고 관련된 책들도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동의는 할 수 있는데 잘 이해할 수 없다고 이미 고백하셨듯이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흔히들 유추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물이 액체와 얼음과 수증기의 세 가지가 될 수 있지만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과 방불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유추로는 완전히 만족스런 설명이 되지 못하며 때로는 유추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매이다 보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때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신적 신비(Divine Mystery)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리적인 설명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는 어그스틴에게조차 이런 일화가 전해내려 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개껍질을 갖고 노는 소년이 모래 구멍에 바닷물을 부어 넣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얘야! 지금 무엇을 하니?”라고 물으니까 “이 구멍에 바다를 쏟아 부어 넣으려고 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내가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이것과 같구나. 바다와 같은 무한한 것을 나의 유한한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삼위일체는 단순 명료한 입장이 되어야만 이해도 되고 믿음이 더 견고해집니다. 비록 하나님의 삼위 일체성이 인간의 지성에는 혼동을 주나 그런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면 분명히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단순명료한 입장은 바로 성경의 기록으로 돌아가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강력한 성경적 근거가 뒷받침 된 이해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1.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근거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신에 성경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位格)과 하나의 실체(實體)로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는 것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성경 66권마다 특정한 주제가 있지만 그중 한 권이라도 삼위일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설명을 해주면 이해가 좀 더 쉽겠건만 그렇지 못하고, 성경 곳곳에 산발적으로 그것도 다른 사건이나 교리를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는 그 사상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신약 시대에 오셨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물론 구약에도 신약 같이 직접적인 언급은 적지만 분명한 증거들을 아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1.1. 구약의 증거

구약의 대표적인 구절로는 창1;1, 1:26, 신6:4를 들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여기서 하나님(Elohim)은 복수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전부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신약에선 “그(예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골1:15,16)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창조 전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증거하고 있기에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합동 사역임에 틀림없었고 또 그래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라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나(‘에하드’)는 “통일된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로 일치된 복수”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오직’은 상대적인 단일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수도 없이 ‘하나님의 신’(성령)과 ‘여호와의 사자’(많은 경우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절대적 유일신 체계 같았던 구약 시대에도 사실은 위격이 다른 세 하나님이 하나인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1.2. 신약의 증거

신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구절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삼위를 한 절 안에서 분명하게 순서대로 직접 언급한 구절(trinitarian formula)들입니다.(마28:19, 고후13:13, 벧전1: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더러 새롭게 회심한 자들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했습니다. 한 죄인의 구원이 삼위 하나님의 합동 사역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저자 마태는 ‘이름’을 단수 명사로 기록했습니다. 당초에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탓도 있지만 제자들이 삼위의 일체성에 대해 확신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13;13) 바울 사도는 파당이 생겨 분열된 교회에 성삼위의 이름으로 화합을 명하면서 서신을 끝맺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먼저 강조했습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선 성자의 사역이 핵심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또 용서 받은 죄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를 이루어 성숙해 가기 위해서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에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1:2) 각지에 흩어져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더러 삼위 하나님이 이루신 사역을 기억하며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라고 합니다. 성부는 거룩한 예지에 따라 구원 받을 자를 선택 했고, 성자는 십자가에 그 택하심을 입은 죄인을 대신하여 피 흘려 구원을 이루었고, 성령은 이제 용서 받은 죄인이 오직 주께 순종하도록 하여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두 번째 유형은 이어지는 몇 절에 걸쳐 삼위 하나님을 평행하여 한 묶음으로 표현한(triadic form) 구절들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4:4-6)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3-6) 두 구절 다 삼위 하나님이 일체이듯이 교회 안에서도 모든 성도들이 하나를 이루라고 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분명한 평행은 이루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삼위를 다 언급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는 장면(마3:3-17, 막1:9-11, 눅3:21-22)입니다. 셋 다 성자가 침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선 성부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6)고 했습니다. 죄인을 속량하여(성자의 사역),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기 위하여(성령의 사역)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이런 유형의 표현들로는 살후2;13-15, 딛3:4-6, 유20,21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유형으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 강화를 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일체되심을 명확하게 언급하신 것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은 거의 전부가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과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해 직접 설명한 내용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성자가 성부에게 구해서 자신의 죽음과 승천 이후에 성령이 강림하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의 원어는 ‘서로 다른’(different each other)의 의미가 아니라 ‘또 하나의’(same but another)의 의미입니다. 성자와 완전히 동일하지만 위격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영원토록’ 신자들과 함께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성령은 성자와 함께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라 하였노라.”(요16:13-15) 삼위 하나님이 일체일 뿐 아니라 사역에서도 반드시 서로 협동하여 합의한 일만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들과 성령이 하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과 아들이 하지 않는 일을 성령이, 성령과 하나님이 하지 않는 일은 아들이 하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 구분되는 위격들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KJV 성경만 특별히 삼위일체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공히 삼위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시고 합동해서 사역을 하시되 모든 본질과 권능과 속성에서 하나도 차이가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2.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신자들이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자꾸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정의의 한도 내에서 밖에 추리를 전개할 줄 모릅니다. 가장 먼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숫자에 집착합니다.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은 분명 그 실체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는데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을 수 있는가? 또 성자 하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 있다고 배웠는데 그럼 분명히 다른 실체인데 어떻게 같다고 하는가? 나아가 지금도 신자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분명 성령이실 텐데 천국 보좌에 앉으신 분들과는 다른 것 아닌가? 의문이 쉴 새 없이 꼬리를 뭅니다.      

삼위일체를 개념화(conceptualization) 하려 들어서는 어느 누구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자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대로 바다를 조개껍질 안에 다 담으려는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신학자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중의 한 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일부 자연 현상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 전까지 자기 고통의 원인에 대해 쟁론해보자고 덤비던 욥의 입이 완전히 봉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중 일위가 아니라 자연 현상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바닷가의 모래 알 하나 밖에 안 됩니다. 또 그런 지구의 자연 현상조차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모래알 하나에  붙은 먼지도 아직 분석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의 인간이 광대한 우주 전체를 만드신 하나님과 그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 감히 완전히 이해하려고 덤비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님이 예수님이 보내신 또 다른 보혜사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이해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조직 신학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을 무조건 믿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아가 평신도의 경우 그런 논리적인 설명은 몰라도 되지만 성경이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일단 믿고 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저자들이 구체적 부연 설명 없이 너무나 평범한 문체로 삼위 하나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저자들 모두는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이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었고 또 그런 하나님의 유일성과는 어떤 충돌과 모순 하나 없이도 예수님과 성령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구약 성경이 메시야가 와서 인간을 구원할 것(사9:6,7 외 다수)이며 또 여호와의 신이 강림할 것(욜2:28-32)이라는 예언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온갖 이적을 베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자 당연히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이미 주님이 살아 계실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고 또 변화산 상에서 하늘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다 가장 수제자인양 했던 자기가 주님의 예언대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어 그 잘못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가페 사랑으로 깨끗하게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에 주님이 명하신 대로 한 군데 모여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아침 아홉시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성령이 각 사람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자들 모두가 방언을 말했고 그중 베드로가 대표로 성전에 나가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온 천하 각국의 유대인들 앞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날로 삼천 명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에 약속하신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됨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또 자기들 선조 아브라함이 믿던 하나님의 유일성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성령님을 통해 새롭고도 역동적인 방법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삼년 간 곁에서 지켜보았고 또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이 강림 한 후에 자신들에게 생긴 놀라운 변화에 놀랐으며 또 자기들과 언제 어디에나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자기들 같이 자격이 없는 자를 통해서도 성령이 불같이 역사하여 죄로 죽었던 심령들이 살아나서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바로 살아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너무나 생생한 체험이었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믿어졌고 또 그래서 그 믿음을 구태여 별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믿고 따르면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의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설령 삼위일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 하나 못해도 아니 그 용어 자체조차 몰라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믿음은 신약 성경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나 바울 같은 입장이었다면 삼위일체에 대해 한 치라도 의심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리로서 개념적으로 이해하려 들어선 안 되고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해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삼위 하나님의 상호 관계성을 유추해야 하는  오늘날의 신자로선 그 체험이 초대교회보다 훨씬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시대에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주로 활동하셨고, 예수님 당대에는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죄인의 구원을 이루셨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동일한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그 세 분의 사역의 본질과 의미와 권능과 은혜에서 하나라도 차이가 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이것 말고 삼위일체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이 구태여 필요하겠습니까?

질문자님의 말씀하신 대로 “구원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음을 성령의 간섭으로 믿게 되었고 지금도 성령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확신 이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3. 삼위일체론의 중요성

사람들마다 성부 하나님과 특별히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각기 믿는 바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창조주 성부 하나님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나 타종교인이 인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에 관해선 어떤 사람은 성자는 하나님으로 인정하는데 성령은 인정하지 않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자에 대한 신성을 가장 문제 삼습니다. 결국 삼위일체론이란 예수의 신성을 확증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대와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와 또 그 인접한 세대에는 삼위일체에 대해 이론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요한 사도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표현한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그들에게 삼위일체는 너무나 생생한 체험이자 당연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시대가 흘러가자 그런 체험과 인식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교부들의 진술 가운데도 성령을 성자와 동일화 시키지 않거나, 성자를 성부와 동등한 것으로 보지 않는  이일신론(二一神論)적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을 성경의 기록으로만 대하다 보니까 오늘날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자됨을 변증할 필요를 느낀 이레나에우스와 터툴리아누스(최초로 trinitas라는 용어를 사용) 등 초대 교부들의 여러 논쟁을 거쳐 니케아 총회(AD 325)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homoousios)이 확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론적 주장이 거부되고 초대 교회의 삼일론(三一論)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에 관해 아리우스파와 아다나시우스파 간의 논쟁이 약 60년간이나 이어졌고 결국 동질성을 주장한 아다나시우스 파가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풀 총회(AD 381)에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교부들 간의 구체적 교리 및 논쟁의 주제를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동방교회를 대표하는 다메섹의 요한(책명 De fide orthodoxa)은 하나님을 한 실체인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성부를 하나님 존재의 근원으로 보았고 성령은 로고스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희랍적 사고에 바탕을 둔 종속설을 완전히 벗지는 못했습니다.

반면에 서방 교회의 어거스틴(책명 De Trinitate)은 하나님의 단일성에 강조점을 두어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실체, 본질, 능력, 의지에 있어서 한 분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성자와 성령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거나 또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 인격은 각각 전체의 삼위일체와 동등하여 전체의 삼위일체는 세 인격 중의 어느 하나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주된 관심은 인류 구속의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든 개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언어는 아주 불완전하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매우 힘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론 같이 이해하기 힘들고 심지어 혼동이 되는 교리를 구태여 주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문제 삼는 자들의 오류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그 잘못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몽땅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하나님이 구속하기 위해선 그 죄를 철저히 심판하고(공의) 죄인은 그 죄와 상관없이 끝까지 건져내어야(사랑) 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아무 죄 없는 어린양 성자가 우리 죄를 다 담당하여 제물로 대신 죽어서 우리를 그 죄에서 속량하는 길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자가 아니라면 인간의 구원은 율법에 따르는 길 밖에 없는데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구원의 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대로 그분은 엄연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인간이 이해하든 말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교리입니다. 성육신이 신자에게 여전히 신비이듯이 삼위일체도 신비입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분명히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듯이 삼위일체도 신자는 얼마든지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믿음 은 너무나 큰 은혜로 인도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받을 길은 도무지 없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기독교는 엄밀히 따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종교입니다. 창조주 유일신이 우주를 만드시고 전적 주권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믿는 바입니다. 또 비슷한 교리를 가진 유사 종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말 기독교다운 유일한 차이는 죄에서 구원 받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전적인 은혜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구원마저 아무 효력이 없어집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로서의 가장 큰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한두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절대로 개념과 논리를 따져 이해하려 들지 말고 신자 개인의 분명한 신앙적 체험을 통해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항복한 사실이 있다면 삼위일체가 신비일망정 더 이상 이해되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단순히 항상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간섭하심에 따라 성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기도할 수만 있어도 이미 삼위일체의 큰 은혜 가운데 속한 것입니다. 역으로 따져 만약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주문 같아 싫어서 생략하고, 성령의 존재를 부인하고, 기도한다면 응답이 될 것 같습니까? 절대로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을 맛보지 못할 것 아닙니까?

또 삼위일체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따져보게 되더라도 균형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일체성과 삼위성 둘 중에 한 쪽으로 조금이라도 경도되면 자칫 성경의 기록과 다른 길로 흐르게 됩니다. 일체성을 강조하면 성자와 성령의 사역이 약화되며, 삼위성을 강조하면 기독교적 다신론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과오를 막는 길은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을 몰라도 구원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 반대로 구원 받은 자는 누구라도 이미 삼위일체의 신비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됨을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으며 특별히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너무나 생생한 체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안 믿어지거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베드로나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들이 진실로 믿지 않고 그런 성경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성경대로 믿는 간단명료성만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십자가 안에서 벗길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5/23/2006  

모루두개

2024.02.08 01:55:05
*.97.127.172

'그러나 차츰 시대가 흘러가자 그런 체험과 인식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망각이란 게 참 오묘한 것 같이요,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납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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