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자꾸 죄의 유혹에 넘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죄를 이길 힘을 달라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는데도 벌써 죄에 넘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정말 낙망이 되며 과연 이렇게 살아도 바른 신앙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죄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답변]
현재 님께서 느끼는 반복되는 죄책감, 실망감, 그래서 절망으로 치닫는 생각들은 저를 비롯한 모든 신자가 똑 같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은 그 차이도 아주 미세합니다. 다른 말로 현재 님이 느끼는 마음 상태는 아주 정상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그렇게 되는 것이 신자의 잘못이 아니라 악의 가공할 권세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 길게 설명한 것이 바로 그도 님과 똑 같은 체험을 했다는 생생한 토로입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가 캘빈도 “우리 안에는 연기 나는 뜬 숯 같은 악이 남아 있고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욕구가 튀어나와 죄를 짓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충동질 한다”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시간을 고해성사를 하자 그 고백을 받던 수사가 지치다 못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네에게 화난 것이 아닐세. 자네가 하나님에게 화난 것이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죄에 시달리는 신자를 십자가 긍휼 안에서 여전히 사랑하시는데도 신자는 죄책감을 스스로 해결하려들다 보니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신자 혼자 괴로워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사단은 넘어진 신자를 보고 웃고 있고 하나님은 안타까이 여기는데 반해 신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끙끙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결국 이런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천연두를 진단하기 위해 모든 고름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고 고름을 하나씩 치유할 수도 없다.” 죄 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 짓고 난 후의 죄책감에 사로 잡혀 예수님 십자가의 한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불신앙이자 오히려 죄인 것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신 사역을 부인하고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인 것입니다.
요컨대 죄책감이 드는 데 까지는, 비록 남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자신이 해결하려들면 오히려 불신앙과 죄에 빠지고 심지어 사단의 농간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반드시 십자가 보혈의 권능과 은총에 의지하여 무조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 씻음의 은혜를 덧 입혀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낙심되어 기도할 여력조차 없어도 예수님의 이름만이라도 수도 없이 불러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속으로라도 그 뜻을 찬찬히 묵상하며 암송해야 합니다.
신자가 죄책감을 자기와 씨름해서 없애지 못합니다. 또 자기 힘만 의지하여 죄에서 자유로울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캘빈도, 루터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바울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는 처절한 고백 아닙니까?
그런 그가 결국 어떤 해결책을 찾았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5-8:2)
자기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합니다. 지난 죄에 대한 죄책감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았고 또 다시 죄를 지으려는 유혹과 시험은 성령에만 의지하여 이겨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다 이기신 주님께서 신자 각자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을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으로 충만히 채우지 않으면 우리 속은 육체의 소욕에게 쉽게 점령당하고 그러면 사단과 죄에 또 다시 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의 유혹을 도덕적 책임감과 종교적 계명을 준수하려는 의무감에 입각하여 자신의 의지로만 이겨내려 해선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주님과 함께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초자연적이고도 신비한 체험을 간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완전히 승리한 그 권세가 이미 신자 자신에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이 일어날 때에는 그 권세를 믿고 당당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후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죄는 오히려 이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기 심령 깊숙한 곳에서 자꾸만 꿈틀대는 죄악의 달콤한 향기에 무력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너무나 교묘해서 신자의 가장 연약한 부분, 자주 넘어지는 부분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옵니다. 신자는 그런 점을 잘 깨달아 자기의 약한 부분을 붙들고 성령의 감화로 그 부분이 거룩하게 변하고 더 강건해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죄에 대한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이미 잘못을 범한 개별적 행위를 죄라고 보지 말고 우리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부패된 심령의 흔적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개별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는 그런 죄의 권세가 우리를 넘어트려 실패하게 만든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정작 신자는 각각의 범죄한 행위를 뜯어 고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악(죄의 권세, 사단의 조종, 타락된 본성의 잔재 등)의 힘과 대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의지가 아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임재로 근본적으로 거룩하고 강건하게 변한 우리 심령이, 실제로는 자신의 심령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면서 그 악한 권세를 이겨내어야 합니다.
따라서 죄가 다시 우리 심령을 주장하려 할 때는 범죄 행위로 넘어가기 전에, 즉 죄에 져서 쓰러지기 전에 그 죄의 권세를 직접 대적하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입술로든, 심령의 언어로든 예컨대 “이 더러운 죄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썩 물러가라. 예수의 보혈이 이미 너를 이겼다. 나는 그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다. 더 이상 더러운 권세가 나를 주장하거나 쓰러트리지 못할 것이다. 나도 지금부터는 사단에게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나아가 죄의 권세뿐만 아니라 그것에 자꾸 약해지는 자기 심령에 대고도 강건해지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대적의 위협으로 자꾸 불안과 염려에 빠지는 자기 심령에 대고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자신의 심령을 자기와 따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심령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를 넘어트리는 것은 악한 권세이기에 그것을 이겨내는 것도 신자 속에 좌정하신 성령의 힘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에 약해지려는 자기 심령에 대고 다윗처럼 선언하셔야 합니다. “내 심령아 네가 어찌하여 다시 연약해져 죄에 넘어가려 하느냐. 너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하나님을 바라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라. 예수님이 그 죄를 대신 싸워 승리를 주실 것이다. 조용히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라. 그래서 오히려 감사와 찬양을 예수님께 드려라.”
죄책감은 너무나 건강한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치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민하게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면 더 많은 부분을 세세하게 치유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에만 사로 잡혀 있으면 이미 죄의 권세에 또 다시 패배한 것이며 사단의 노림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아니하고는 죄의 권세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죄 된 행동과 습관 하나하나를 고치려 하기 전에 죄의 권세를 십자가 보혈의 승리에 의지하여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성령으로 우리 심령이 변화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신자는 죄와 맞서 싸울 때는 예수님께 기도를, 죄의 권세와 사단에게는 대적하는 선언을, 연약해지는 심령에는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총과 권능 아래 있지 않고는 언제든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며 또 그래서 항상 그 은혜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날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무시로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태고 싶은 말은 죄의 권세와 싸우는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도와 말씀이 집중해야 합니다. 나아가 사단과 그 악의 권세는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서 항상 누구에게나,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에게도 설쳐댈 것입니다. 신자 개인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쫓아다닙니다.
신자는 한 두 번의 승리로 절대 방심해선 안 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시되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앞으로도 여러 번 실망감 아니 절망의 나락까지 다시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역시 해결책은 기도와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로 이겨내지 못할 죄악과 사단의 시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시고 날마다 자기 심령에 대고 승리의 선언을 하십시오.
그리고 실패해서 죄책감에 빠졌던 기억은 지워버리고 자꾸만 승리했던 체험을 의도적으로라도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은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의 싸움은 훈련한 만큼만 승리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본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죄와 사단에 넘어가려는 자기 본성과 싸워서 그 쪽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꾸 종교적 의무감으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서 하나님만 온전히 보려해선 사실은 자신의 심령과 지정의가 따로 놀 수 있습니다. 지정의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데 심령은 여전히 사단과 죄에 묶여 있고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 볼 수 없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 아닙니까?
그래서 위에 말씀 드린 대로 자기 심령이 먼저 사단과 죄를 완전히 외면하고 그 쪽을 향해 등을 돌리면 자연히 지정의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싸움이 절대 일회 혹은 몇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평생동안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승리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1/24/2007
가장 성경적인 답변을 해 주신 것에 대하여
옆에서 덩달아 귀한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두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
허기야 누가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그래도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우상숭배든 음행이든 도적질이든 살인이든 그 무슨 죄악이라 할지라도
마지막에라도 십자가 밑에 가져온다면 아직 희망있다는 성경의 선언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배수진 믿음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배수진 믿음의 크기를 확신한 후부터는
정죄의 올무에서 벗어나, 조금은 평안한 마음가짐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집니다.
주홍이든 진홍이든, 주님께서 깨끗게 해 주시겠다 하셨으니(사1:18), 그냥 믿을 따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