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방치하는 하나님에게 화가 납니다.
[질문]
요즘 너무 억울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여 신앙생활이 어려워지고 예배에도 나가기 싫어졌습니다. 잠시 찾아온 침체기라고하기엔 이런 상태가 자주 반복됩니다. 과거에 힘들었던 일이 자꾸 떠오르고 슬픔과 원망이 솟구쳐 눈물만 날뿐 말씀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이혼가정에서 자라 제가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잘 와 닿지 않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단순히 믿음의 결단과 의지로 극복되지 않고 이런 상황이 되풀이됩니다. 인생에 주어진 고난이나 문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라는데 그렇게 따지면 제 인생을 이렇게 인도하신 내지는 하나님이 방치하신 것 같아 화가 나고 원망스럽습니다. 제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걸까요?
[답변]
겉으로 말은 못해도 속으로는 상기 질문에 공감하는 신자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 맞습니다. 성경에서 고난과 연관해선 배울 내용이 너무 많아 책을 여러 권 지어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주제인 “고난 중에 있는 신자를 하나님이 그 고난으로 인도했거나 방치했는가?”에 한정해서 간단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불행과 고난 등을 아담의 타락으로 피조세계도 함께 하나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합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직접 형벌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전에는 이 땅에 고난이라곤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있게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타락 전에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노동을 했으나 하나님과 함께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즐겁게 행했습니다. 타락 후에는 동일한 노동을 하되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아주 고달프고 힘들게 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땅의 형질을 하나님이 아주 황량하고 메마르게 바꾸는 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땅은 이전과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데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들이 완악하게 바뀐 것입니다.
오직 자신만 최고로 높이려는 죄의 본성에 묶인 사람들이 서로 시기 질투 경쟁으로 지새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남보다 위에 두려니까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필연적으로 다툼과 전쟁이 생깁니다. 요컨대 이 땅의 모든 죄악 모순 고난 불행 등의 근본원인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서로 순전하게 사랑했던 아담과 이브부터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빠졌습니다. 서로를 항상 감싸주고 가장 사랑해야 할 부부사이부터 완전히 왜곡 파괴되었습니다. 또 가인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친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은 그야말로 최초로 억울한 재앙을 당했는데 하나님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인의 후예 라멕은 살인을 밥 먹듯이 일삼고 제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임의로 취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질문자께서 이혼가정에 태어나서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와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정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보십시오. 부모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서로 사랑했기에 질문자도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어떤 이유로든 이혼하게 된 것은 부모의 잘못이며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또 그래서 질문자님이 부모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상처를 받은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게 되면 아담과 이브의 타락도 하나님 탓이어야 합니다.
또 그럼 하나님이 그런 가정에 아예 태어나지 않게 했어야 한다는 불만인 셈인데 이 또한 아담과 이브를 아예 창조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는 하되 죄를 전혀 모르고 또 짓지 않게끔 했어야 하고 선악과금령은 제정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원망도 전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을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기계나 짐승으로 창조했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3,14) 인간의 죄악 때문에 인간 세상의 모든 고난이 생겼는데 죄악은 아담이 사탄의 시험에 져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죄로 넘어뜨려서 고난이 생기게 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결코 일으키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 죄를 짓고 그 결과 고난이 온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부모님이 이혼하게 된 것은 그들 각자의 또 다른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욥처럼 하나님이 신자에게 직접 주는 연단이 있습니다. 이는 욥이 고백한 대로 그 믿음을 정금같이 바꾸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신자가 겪는 환난이 바로 이런 연단의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신자들에 대한 뜻이 결코 현실적인 풍요와 안락을 주려는 것이 아니며 설령 연단을 허락해도 단순히 연단에서 건져내는 데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며(마7:14), 당신을 따르면 머리 둘 곳도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마8:20) 협착하다는 것은 사방으로 압박을 당해서 헤쳐 나가기 힘든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또 그래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면 반드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그럴수록 십자가에서 세상 죄악에 대해서 이미 완벽한 승리를 거두신 주님만 순전히 믿고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평안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초대교회 신자들은 많은 환난을,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겪는 동안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부활 승리를 바라보며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 편지에서도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2:9)라고 그런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통치하시므로 아주 넓은 차원에선 그런 고난 가운데 방치했다는 말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간끼리의 죄악으로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는 자들이 수없이 많고,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 모든 사람을 다 그런 고난에서 건져주어야 하고, 이는 또 아예 처음부터 그런 고난이 생기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또 다시 인간을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너무나 미개한 말도 안 되는 원망으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고 그로 인해서 세상에 온간 고난과 불행이 생길 줄을 즉, 땅이 엉겅퀴를 내고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물질, 기계, 짐승처럼 만들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당신을 따를 수 있고 또 끝까지 사탄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당신과 교제 동행하는 그래서 당신께서 심히 기뻐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인간이 타락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는 모험을 그분은 감히 본심은 아니지만 감당하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태초부터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고난을 형성하거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도록 허용만 하신 뜻은 아주 쉽습니다. 말 그대로 허용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고난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살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믿음으로 제대로 수용하고 이겨내고 나아가 고난으로 인해 믿음이 성숙되고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자라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당신께서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한 그 좁고 협착한 길을 제자들더러 따라오라고 명한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신자는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면 도리어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와 과정으로 주님이 인도하는 중이니까 말입니다.
흔히 불신자들은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난을 일으키거나 방치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반발합니다. 그럼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 복만 주어야만 믿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럴 리도 없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안 믿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을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방치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방치한다고 화를 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겠다는 뜻을 오히려 하나님에게 핑계대고 반발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심지어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기에 항상 복만 주는 분도 아님을 다 알고 있으면서 아주 영악하게 그런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간 세상의 고난의 거의 전부가 인간의 죄악과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방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자기 욕심에 따라 서로 다투느라 고난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고난 중에 방치한 것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구원을 보고 담대히 이기고 오히려 더욱 거룩해지는 기회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사실은 질문자님도 상기의 제 설명을 이미 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단순히 다시 상기시켜드린 것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그보다는 질문자께서 정서적 불안정으로 인해서 장기적 반복적인 영적 침체에 빠졌다고 보입니다. 심리 관련 전문가와 상담 치유 회복하는 절차도 꼭 병행하시길 바랍니다.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시고 개인적인 취미 생활도 활발하게 수행하십시오. 물론 그 모든 과정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12/11/2019
마침 이 주제와 연관되는 “세바시 강연”이 있어서 아래에 퍼왔습니다. 상기의 저의 신학적 성경적 설명보다 더 쉽게 체감 인정할 수 있는 답변이 될 것입니다. 꼭 시청해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1-YU8S9G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