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폭력을 사용해선 안 됩니까?
[질문]
성경은 폭력을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주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의미인줄로 압니다. 아울러 복수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니 우리가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력이 꼭 부정적으로만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정당방위의 의미의 싸움, 국가를 지키는 군사 활동 이것도 엄연히 말하면 무력이고 폭력인데 이런 것들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방어 행위는 선일까, 아니면 넓은 의미에서 보복일까 공격자를 적극적으로 해쳐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내가 나를 지키려 상대를 해치면 정당할까 아니면 이기적이고 반기독교적일까 이런 의문이 들어 한편으로는 고민됩니다.
무력으로 약한 사람을 지켜주는 사람은 기독교적으로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영웅상일까요. 제가 취미로 소설을 쓰던 중 혹시나 이런 캐릭터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문득 이 질문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라보는 물리적인 무력(영적 전투 말고요) 어떻게 보는 게 좋을까요. 특별히 신약시대는 어떤가요?
[답변]
너무나 난해한 주제
구약 율법에는 정당한 복수라면 무력사용을 허락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19:21) 실제로 폭력이 이스라엘은 물론 하나님에 의해서 실현된 예들은 아주 많습니다. 간단히 몇 개만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가나안 땅에 당신의 언약백성들로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명령까지 내렸고 여호수아가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다윗도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사방대적을 파한 후에 이스라엘을 굳건히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이방나라에게 침공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 폭력적 수단으로 징벌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당신의 진리를 온전하게 다 드러내지 않은 미완성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의 미숙했던 도덕적 종교적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그들로 이해 적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말씀하셨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절대적 진리가 명백히 드러낼 때까지의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로서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해주십니다.(히12:2) 모든 신앙상의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최종적인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폭력을 끝까지 반대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해주라고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절대적인 원리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공사역 중에 그 가르침을 직접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의인이자 하나님 본체 되심에도 역사상 가장 불공평한 판결에 한마디 항변도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대로 원수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수제자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스승을 보호하려고 대세자장의 하속의 귀를 칼로 베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대로 신자는 철저하게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야 함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정한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들의 탁자와 의자를 뒤엎고 내쫓았습니다.(마21:21) 나름의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거기다 이 주제에 관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22:36-38)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한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젠 돈도 소지하고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선 베드로에게 칼을 휘두른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언뜻 예수님의 폭력에 대한 가르침과 실천이 서로 모순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신자가 매일 부딪혀서 살아나가야 할 현실에선 사악한 개인이나 권력집단이 폭력을 휘두르며 무고한 인명과 재산을 앗아갑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강대국들은 전쟁과 폭력으로 땅을 더럽힌 엄청난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평화 시에도 경제 사회 정치 권력자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수탈과 착취를 자행했는데 그 피해는 전쟁으로 인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큽니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런 사악한 폭력 행사를 중지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려니 맞설 방법이 폭력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차대전 때에 나치 독일에 맞선 연합국들이 거의 크리스천 국가들이었습니다. 일본이 국민이 다 죽더라도 최후까지 덤비겠다고 옥쇄작전을 쓰니까 미국이 핵폭탄 두 발을 떨어트려 곧바로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따져도 자신이나 가족들의 하는 일과 소유와 생명에 큰 위협을 가하는 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지 곤혹스럽습니다. 정말로 성경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신자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폭력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신약시대 이래 신학자들 사이에 이 주제를 두고 복잡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고 지금도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는 딱 부러진 결론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폭력의 최종 형태인 전쟁을 두고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뉘고 역사적으로도 신자들은 그 셋에 따라 실천해왔습니다. 이 세 견해가 각기 특별한 시기에 발현되어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처음부터 항상 있어왔고 지금도 그러하나 그 시대를 주도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포괄적으로 축약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 크리스천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에는 신자들은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순교 당할지라도 폭력에 전혀 항거하지 않는 완전한 무폭력 - ‘평화주의(Pacifism)를 지향했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원수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행7:60) 같은 맥락에서 로마제국 시민으로써 임무였던 군대입대를 거부하는 운동도 벌어졌습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자 핍박은 그쳤습니다. 대신에 단일종교를 통해 종교적 통일까지 이뤄 제국을 더욱 확고하게 세울 정치적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방족속의 침입을 막는 차원을 넘어서 이방지역을 무력으로라도 기독교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을 예로 삼아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선 선제공격해도 된다는 거룩한 전쟁(聖戰, Holy war)의 명분을 앞세웠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견해로 인해 십자군전쟁은 물론 기독교를 앞세운 서구제국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이방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만드는 등 수많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방어 목적 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정당한 전쟁(Just War)은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나 칼빈도 더 큰 악을 막아서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는 전쟁은 물론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무력 사용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고 실현했습니다. 당시에 이에 반대하여 무력을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는 초대교회의 평화주의를 계승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났는데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퀘이커교도, 메노나이트, 재침례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세 견해 중에 평화주의는 완전히 성경적이고 거룩한 전쟁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 번째의 정당한 전쟁입니다. 세상에는 아주 폭력적인 권력과 집단과 개인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에 신자는 어떻게 행해야할지 난감해집니다.
정당한 전쟁은 더 큰 죄악을 막기 위한 것은 물론 평화주의를 지키느라 신자만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희생하며 목숨까지 내어주어는 피해를 막자는 뜻도 있습니다. 무장 강도가 침입해 가족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나 나치 독일과의 전쟁 같이 분명한 악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당당히 맞서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이 상대적이라 한쪽만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평화주의를 지키고 어디서부터 정당한 전쟁을 시작해도 되는지 판단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나아가 분명한 죄악에 대해 정당한 목적으로 전쟁을 해도 제 삼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고 그 수행과정 중에 또 다른 악을 산출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도까지 어떻게 무력을 사용해야할지도 결정하기 힘듭니다. 정당한 전쟁론을 활발히 펼쳤던 중세에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에 대한 일곱 가지 기준을 정했는데 아래에 인용했습니다.
“1.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이 정당해야 하며 / 2. 권력자의 정당한 의도가 존재해야 즉, 정당한 적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 3.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어야 즉, 모든 평화를 향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만 / 4. 전시에 상대방을 무찌르기 위해 취해진 평화적 수단 역시 정당해야 하고 / 5. 전쟁 자체에 의해 촉발되는 악보다 전쟁을 통해 인류가 얻으리라 예상되는 혜택이 더 큰 경우 / 6. 승리가 확실한 경우 / 7. 전쟁 종료 시 평화조건이 정의롭고 새로운 전쟁을 유발하지 않게 할 경우.”
이 일곱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상기에서 ‘전쟁’이라는 단어 대신에 무력, 폭력, 권력, 등 모든 종류의 강제적 수단을 대입해서 적용해도 될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 자끄 엘륄 지음, 이창헌 옮김, 2011년 서울, 도서출판 대장간 발행, page 26 – 자끄 엘릴의 책이 다 그렇듯이 조금 어렵지만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해 깊은 성찰과 새로운 시각과 도전을 던져주기에 여유가 되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명령이 아닌 축복
그러나 상기의 기준을 개별 사건에 일일이 정확하게 적용하기 여전히 너무 어렵고 현실적으로 그럴 시간적 여유도 거의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혀 분노를 폭발하기 바쁩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항상 평화주의를 지키려 노력하되 분명하게 악한 경우에는 상기 기준처럼 정당하게 악을 제거하거나 확산을 방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도 제대로 못 지키는 것이 저를 비롯한 신자들의 실정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며 끝까지 평화주의를 지키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평화주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원수에게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듯이 원수를 사랑하는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일에도 같은 정도의 세기와 열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여전히 미성숙한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전쟁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폭력이 끊임없이 양산될 것이라는 사실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폭력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이 불신세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도 때로는 자신의 이전 본성에 지고 세상과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져 부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 앞으로 되돌아와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십자가 복음 앞에 온전히 항복하기 전까지는 신자들만으로는 온전한 평화주의가 실현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신자가 평화주의를 실현하지 않으면 세상에 더 이상 소망이 없기에 정말로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는 일생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는 여정 중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사악한 폭력을 향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최선의 방안을 찾아서 그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주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있는지 신자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럼 설령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해서 당신의 궁극적인 뜻에 맞게 선하게 바꿔주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독일 나치나 공산정권의 폭압정치나 최근에 빈발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테러는 그대로 방관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최고 차원의 이상적인 도덕률로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참 사랑의 본질이며 실제로 그렇게 사랑해보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이 다 그렇지만 원수사랑은 종교적 명령을 넘어서 최대한 많이 실현하여서 최대한 많이 누려야할 신자만이 갖는 축복이자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
서두에서 예수님의 폭력에 대한 가르침이 서로 상충되어 보인다고 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주님만의 분명한 기준을 하나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이 검 둘이 있다고 하니까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최소 열두 명은 모였을 텐데 두 자루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각 개인의 호신용으로 쳐도 열 자루나 모자랍니다. 그럼 ‘족하다’는 말씀 안에 방어 목적의 전쟁도 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된 셈이지만 조금 더 깊이 따져볼 필요는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아셨듯이 그가 대제사장의 하속의 귀를 벨 것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칼 두 자루를 제거하지 않았기에 베드로의 그 행위를 묵인해준 것입니다. 피해자의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미리 아셨고 더 나아가 그럼으로써 드러내야 할 당신만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자 주님이 야단 친 후에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26:53,54)
우선 유대 관원들이 당신을 체포하려는 드는 것은 분명히 큰 잘못으로 하늘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전제했습니다. 베드로의 의로운 분노를 모르는 바가 아니며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와 로마 당국과 무력으로 맞서 이기면 성경에 예언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사야서 53장이 예언한 대로 수난의 종으로 오신 주님이 대속죽음의 제물로 바쳐져 인류구원을 이루는 일을 말합니다.
이제 질문하신 주제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기준이 하나 도출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완성하고 또 그것을 전파하는 일을 할 때는 끝까지 평화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런 맥락에서 성전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강도 같은 장사치를 쫓아냈던 것입니다.
이 원리는 구약성경에도 희미하게나마 즉, 완성된 방식이 아닌 채 계시되어 있습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는 계명도 과도한 복수를 금지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피해와 또 다른 죄를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신명기 20장도 전쟁에 대한 원칙을 가르치는데 먼저 평화부터 선언하라고 명시해 놓았습니다.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명령도 그 땅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사악한 우상숭배의 죄에 절대로 오염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단순히 그 땅을 차지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자 그 땅에서 쫓아내어서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시켰던 자기 백성을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을 꾸짖으며 자신의 사역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바꾸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처럼 철저한 무폭력주의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이어지는 28-30절 말씀대로 연약한 형제와 교회를 섬기고 또 복음을 전하고 싶은 넘치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바울도 다메섹에서 왕의 방백의 추격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탈출했습니다.(32,33절) 주님이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내어 보낼 때에 뱀처럼 지혜롭게 행하라고 당부한 대로입니다.(마10:16) 예수님도 자신을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미리 피신했습니다.(요7:1) 제자들더러 앞으로 돈으로 칼을 사라고 가르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에 폭력을 포함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지혜롭게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가이사 숭배를 강요받았음에도 끝까지 거절하는 바람에 순교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성정이 동일할 텐데 감히 넘볼 수 없는 너무나 담대한 믿음 같습니다. 물론 그들의 믿음은 아주 원색적이었고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특별했던 사정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 때 신자들 모두 변절해버렸으면 기독교는 바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야 할 하나님 쪽의 긴급한 필요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여서 그들로 담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행1:8) 순교당할 때에도 스데반처럼 큰 고통 없이 하늘의 기쁨 가운데 담담히 감당할 수 있게끔 역사해주신 것입니다.(행7:55,56)
결론을 맺겠습니다. 아주 목적이 정당한 경우에, 특별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생명이 위급해질 경우는, 그에 따른 죄가 생기지 않게끔 잘 분별하여서 정당한 방식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폭력이 성경적으로 선하고 옳다는 뜻보다는 피치 못할 현실적 방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만 하는 경우는 평화주의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주제만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온전할 수 없으니까 심령의 중심에 예수님만을 온전히 모시고 쉬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럼 주님이 각자와 그 당시의 형편에 맞게끔 인도하시고 사악한 폭력에 당당하게 맞서서 이길 수 있는 지혜와 필요하다면 힘도 주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반드시 순교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어야만 한다면 스데반 같은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5/11/2020
감사합니다. 목사님.
특별히 복음을 전할때는 절대적 평화주의가 우선된다는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오지 섬으로 선교가셨던 선교사분들이 원주민들의 피습을 받았을때 정당방위로 싸울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영혼구원이 필요하고 자신들은 천국백성이니 일부러 희생해주었다는 영상을 본것 같습니다. 훗날 선교사의 가족들이 다시 그곳에 찾아가 원주민들을 회심시켰다고 하네요. 어쩌면 그런 원리가 거기서도 나타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로 제 소설의 선역들은 사람상대로는 무력을 쓰지 않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인조기계 비슷한것들과 싸우죠.)
피스님 이런저런 바쁜 일로 답변이 상당히 늦어져 죄송합니다. 거기다 님께서 저작하시는 소설에 반영하려는데 혹시라도 잘못될까 염려된다고 하셨기에, 솔직히 저도 이 글을 읽는 분이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조금 신경이 쓰였습니다. 추가로 의문이 나거나 또 다른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부담갖지 마시고 글을 올려주십시오. 샬롬!